지금도 쓸쓸하냐 - 2004년 1월 이 달의 책 선정 (간행물윤리위원회) 운문산답 1
이아무개 (이현주) 지음 / 샨티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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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묻고 산이 대답한다'라는 이 말은 이현주 목사님이 자신의 생활에서 느끼는 수행기를 자신 속의 또 다른 나와의 대화를 통해서 적은 글이다. 그것은 채널링이라고는 볼 수 없고 누구나가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나와의 만남이라고 볼 수 있다. 다석 류영모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몸나'와 '얼나'와의 대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사물을 접하거나 우리 외부의 현상을 대할 때 사실은 그것의 현상을 파악하는 나와 그 현상이면의 실상을 파악하는 나가 동시에 있음을 알게 된다. 내가 깊은 잠에 빠져 자고 일어나서 '난 정신없이 깊은 잠을 잤어'라고 얘기한다면 그 정신없이 깊은 잠을 자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자신이 또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전쟁을 접하면 외부의 현실에 비참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내 마음 속의 전쟁을 다시금 보게 된다. 나무를 볼 때도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의 어떤 특성들을 볼 때에도 사실은 외부의 현상만이 아니라 내 내면속에 자리한 그 대상을 보는 것이 된다.

따라서 늘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일들을 접할때 이렇게 몸나가 행하는 것과 그 몸나가 행함을 지켜보고 있는 참나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하다. 그럴때에 우리는 외부의 현상과 그에 반응하는 자신의 행동에 참된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결정짓는 무언가가 내면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고 모든 외부현상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교훈과 결과를 자신에게 귀결시킬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몸나가 가진 집착과 욕망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인생경험이 가진 삶의 교훈을 제대로 인식하게끔 해준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peacemaker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밝은 빛이 되면 저절로 방안이 환하게 되듯이 자신이 스스로 평화 그 자체가 되어야만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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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오브 오일
마이클 이코노미데스 & 로널드 올리그니 지음, 강대은 옮김 / 산해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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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의 자유'라는 명분이 붙은 이라크전이 석유전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젠 그 석유를 얻기 위해 그만큼의 피의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 세계는 보고 있다.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으로서의 석유...이 석유에는 많은 빛깔들이 내재되어 있다. 온갖 부귀와 명예, 권력의 다양한 이권을 흡수해버리는 검은 색과 달러를 상징하는 그린색, 석유쟁취를 위해 일으킨 전쟁에서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핏빛 색깔 등......

우리는 흔히 20세기를 에너지원의 입장에서 석유의 세기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부존 석유량은 얼마남지 않았으며, 대체에너지원의 개발이 인류문명의 지속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보아왔다. 그러나 저자들은 다른 견해를 내어 놓는다. 이미 탄화수소에너지원은 그 오염도가 적은 방향으로 변해왔으며-석탄에서 석유로, 석유에서 천연가스로-앞으로도 원자력에너지와 석탄, 석유의 사용은 점차 줄어들 것이며 천연가스와 대체에너지의 사용은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여전히 에너지원의 제왕의 자리는 21세기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본다. 부존량과 경제적 가용량은 기술의 발달에 의해 더욱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석유의 가치는 무수히 많다. 직접적 에너지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온갖 석유화학제품과 옷의 재료로 사용된다. 이런 석유가 가진 에너지원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히 으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석유에너지가 갖는 환경파괴효과에 대해서는 많은 과장이 있어왔으며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과소평가가 이루어진 점에 대해 균형있는 평가를 요구한다.

아마 그들의 말이 일리는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석유라는 에너지가 없다면 당장 나의 하루 일과도 무척 힘들어질테니까 말이다. 난방과 대중교통수단과 각종 생활용품의 사용이 중단된다면 그야말로 품위있는 생활은 고사하고 생존마저 위협받을지도 모를테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많은 환경운동가의 지적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석유에너지에 기반한 사회가 전세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에도 나름대로의 분명한 이유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인류역사의 발전방향에 대한 올바른 모색이 제한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적어도 두 저자가 제시하는 환경문제에 대한 환경운동가의 과장된 견해에 공감한다하더라도 그들의 견해가 순전히 기우만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국과 인도를 포함한 많은 개도국이 미국과 같은 에너지 소비수준을 유지한다면 그것이 우리 세계가 지향해야 하는 길이라는 점에선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환경이라는 것은 우리의 인간다운 생존에 직결되는 것이고 우리 미래세대의 생존에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이 폐허가 되어버린 지구에 아무런 대처수단도 없는 절망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일의 컬러에는 명암이 동시에 존재한다.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자원을 우리가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를 우리가 의도한대로 돌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석유가 가진 여러 가지 빛깔 중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어나가려고 하는 전 인류의 지혜와 실천이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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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뭐꼬 - 마음에 새겨듣는 성철 큰스님의 말씀
성철 스님 지음 / 김영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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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화두다 화두를 드는 것은 절박함에서 비롯된다. 우리 인생을 헛되이 소비하기엔 한 밤의 꿈처럼 너무 짧은 까닭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육체의 일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마음뿐이다. 그 마음 붙들어매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없는 마음의 모습 드러내는 방법이다. 헛된 상념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천둥과도 같은 소리다. 한 순간 마음 속에 만들어진 온갖 형체의 잡념들 깨어진다. 칼로 가른 물과 물사이 스며들듯 다시 스며드는 온갖 생각들..... 화두는 그런 생각들이 주변에서 흘러가게 해준다. 그런 생각들과 한 생각의 틈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고 쓰러져가는 과정을 바라보게 한다. 결국 화두는 마음의 본바탕 알게 한다. 나를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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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나무들
크리스토퍼 D. 스톤 지음, 허범 옮김 / 아르케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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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천성산은 도롱뇽이 원고가 되어 소송을 하고 있다. 물론 도룡뇽이 직접 법정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도룡뇽의 이름으로 소송대리인으로 지율스님이 나선 것이다. 천성산 고속철도 공사를 위한 환경영향평가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무시되었던 천성산에 서식하는 도룡뇽을 원고로 하여 소송대리인에 의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과연 사람이 아닌 것에 의한 소송이 당사자적격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취하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판례는 일본에서 1970년대 초에 토끼를 원고로 한 소송에서 토끼의 손을 들어 준 적이 있다.

그럼 과연 왜 인간이 아닌 동물이나 환경 자체에 의한 소송이 필요한 것일까? 저자는 이러한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주목한다. 원래 당사자적격이란 개념은 법적인 것이며 그것은 인간사회에서 자꾸만 확장되어 왔다는 것이며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처음엔 시민이라고 하는 협소한 개념에서 노동자, 농민, 빈민에게로, 여성에게로, 흑인에게로 확장되어 왔으며,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구생명체를 위해 환경 그 자체가 당사자젹격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 하면 환경자체의 이익이 사람들만의 이익으로 환원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숨겨진 비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간 지구는 인간의 복지라는 이름 하에 너무나도 많은 자연 파괴와 생태계의 파괴를 겪어 왔다. 단지 그것이 인간의 이익이라는 이름이었지만 사실 그 이익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특정한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그와 관련된 소송도 환경의 원상복귀가 아니라 소송을 제기한 사람의 직접적 재산을 손실분만을 원상회복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 땅은 불모지의 땅으로 변해가고 사막화과정은 더욱 광범위하게 진행되며 대기는 오염되어 오존층의 파괴가 심각할 정도로 넓어지고, 수질오염은 더 이상 이 땅에 이 강에 물고기들이 살지 못하게 만들었다. 더욱 인류가 가진 핵에너지는 그 일부의 사용만으로도 이 지구 전체를 박살낼만큼 위협적이며, 원자력 발전소 폐기물은 반감기만 해도 수백만년이 걸리어서 안전한 처리라는 말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러한 때에 이젠 사회적, 전지구적 필요에 의해 비인격에 대해서도 인격화의 필요성이 제기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 법정은 비인격인 법인에 대해서도 인격을 이미 부여하였다. 사단법인, 재단법인 등.... 만약 사람아닌 것에 대한 당사자적격이 정 어렵다면 우리들의 미래세대를 위한 후견인 설정이나 당사자적격 부여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법적 의미는 원래부터 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되고 조정되는 것이며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개미 한 마리가 우리 지구라는 별에서 우리 인간과 공존하는 생명공동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인간만을 위해서는 타생명체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식의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는 이미 지구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있으며 머지 않아 그 위협이 우리에게도 돌아올 것이다. 생명다양성이 존중되는 삶의 풍토가 우리에게는 절박하게 필요하다. 그것은 경쟁과 속도의 삶에서 벗어난 삶의 다양성을 전제로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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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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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환경운동가 치고 멘데스에게 바친다고 서문에서 밝힌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책은 그의 소설 '세상 끝의 세상'과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와 더불어 손꼽히는 그의 환경소설이다.

노인 볼리야르는 아마존강의 원주민 수하르 족으로부터 자연을 바라보고 생태계의 균형을 중시하는 삶의 방법들을 배우고 밀림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며 지내는 평범한 노인이다. 그가 책을 읽게 된 것은 더 이상 젊지 않는 자아에 대한 정체감을 갖기 위해서였다. 특히 그가 즐겨읽는 연애소설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그의 이데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평화는 금발머리의 밀렵꾼의 죽음으로부터 바뀌어버린다. 새끼삵괭이와 수컷을 죽인 그는 암삵괭이에게 살해당하고 이 복수심에 불타는 암삵괭이에 의해 주민들은 하나 둘씩 살해당한다. 결국 아마존의 밀림을 파헤치고 문명화시키려는 백인들의 무모한 탐욕이 조화롭고 평화로왔던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파괴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밀림의 생리를 잘 아는 노인 볼리야르가 삵괭이 사냥에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새끼와 가족을 잃은 암삵괭이의 처지는 아내를 잃고 가족 하나 없이 혼자서 살고있는 자신의 처지와 다를 바 없으며, 파괴되는 밀림에 의해 본의와는 무관하게 목숨을 건 싸움으로 내몰리게 될 운명조차 같다.

환경소설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그의 상상력(2미터도 넘고 지능을 가지고 인간에 맞서 지혜롭게 싸우는 삵괭이)과 자세하고 치밀한 이야기 전개는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은 결국 인간에 의한 자연파괴가 결국은 인간의 승리일 수 없고 물질적 승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부끄러움일 뿐이라는 노인의 참회는 인간 삶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물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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