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계 유일의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말을 바꾸어, 일본 관련 도서가 좀처럼 맥을 못추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 역시 맥을 못추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을 알기 위한 요량으로 서점을 방문한 사람이 만나게 되는 책은 무척 제한되어 있다.
일본은 없다느니 있다느니 하는 따위의 책, 일본 대중문화의 현실을 소개하는 책, 교과서 투 또는 '알기 쉬운' 류의 일본사 도서, 일본 천황가의 조상이 한반도인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 또는 그와 비슷한 내용의 책, 일제의 만행에 대한 책.... .
개인적인 독서 체험이지만, 서구인들이 뇌리 속에 일본 문화의 본질이 선(Zen)이라는 인식이 뿌리박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스즈키 다이세쓰의 저서의 경우, 국내에는 그가 집필한 일본 문화 관련 저작은 소개되어 있지 않다. 유명한 볼링겐 시리즈의 하나로 현재까지도 판을 거듭하며 출간되고 있는 Zen and Japanese Culture 같은 책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세계 일본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전문 연구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문학 분야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일본 고전 문학 작품을 만나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결국 변죽만 울리는 셈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당위와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현실 사이의 간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혹시 일본의 고전이나 수준 높은 일본 관련 도서를 출간하는데 부담을 느끼는 출판사 관계자 분이 계시다면, 일본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의 출판교류프로그램(http://www.jpf.go.jp/e/about/program/publi.html)을 자세히 검토해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자세한 조건은 직접 검토하면 알겠지만, 인쇄 및 제본비, 종이값 등 도서 제작 총 비용의 50%(학술 도서)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번역서의 경우에는 학술 도서 60%, 일반 도서 40% 이며, 교류기금 자체 추천 목록에 수록되어 있는 책을 번역할 경우에는 80%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목록은 일본 문화원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는 일본의 지원을 받는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어 지원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올해부터는 그렇지 않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라 하겠지만, 우리 나라의 일본학 연구 수준과 읽을만한 일본 관련 도서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 현실이 악순환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서울대학교가 '드디어' 학부 또는 대학원에 일본학 과정을 개설하기로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만시지탄이라는 말이 이처럼 어울리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민음사에서 1997년부터 '현대일본의 지성' 시리즈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필두로 출발하기도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뒤로 소식이 뜸하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판단이야 당연히 출판사의 소관 사항이니 무어라 할말은 없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심정이 드는 것인 어쩔 수 없다. 다행히 이산 출판사에서 수준 높은 일본 관련 도서 내지는 일본 필자의 도서가 꾸준히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 출판계에서 일본 관련 도서의 풍경은 아직까지도 삭막하기만 하다.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새로운 세기 우리 나라 출판계의 중요한 과제들 가운데 하나가 일본을 '제대로' 소개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특히 일본의 고전을 제대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 물론 언제나 어렵기만 한 출판계 자체 역량만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다. 국내의 관련 학계가 출판사의 일본 관련 기획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한일 문화교류가 온통 일본 대중오락상품 개방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대중오락상품의 교류도 중요하다. 현재의 일본 대중들이 느끼고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감수성의 세계에 대한 우리 나라 일반인들의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역사의 지층을 이루는 보다 깊고 다양하고 풍부한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현재의 정부가 정말로 지식정보화 사회의 실현을 화두로 삼고 있다면, 일본 관련 지식정보의 편식에 대한 정책적인 고려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출처-http://www.kungr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