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⑪

 

11. 난 이제 그들이 두렵지 않아 (1)


 

   
 

대자연은 오류에 대해 근심하지 않는다. 자연은 스스로 이를 수정하며,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는다.  


 - 괴테

 
   

   네오는 ‘과연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일까’ 내심 걱정하지만 모피어스를 구해야 한다는 지상과제 앞에서 모든 두려움을 잊는다. 그는 ‘과연 이런 방법이 통할까’를 고민할 틈도 없이 몰려드는 적들의 주먹과 총알을 피해 자신도 모르고 있던 스스로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잡생각을 할 틈조차 없이 ‘친구를 살리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기에 ‘생각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스미스와 트리니티가 매트릭스 바깥으로 무사히 탈출하고 나서도 네오는 끝까지 자신을 추격하는 스미스 일당을 제거하기 위해 천의무봉의 무술 실력을 뽐낸다. 어느새 두려움도, 불안도, 미련도 사라진 네오의 눈빛에는 비로소 자기 안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찾은 자의 무한한 여유가 서린다.


   스미스와 무시무시한 추격전을 펼치는 네오. 이제는 네오에게서 얼마 전까지 스미스 일당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회사원 ‘토마스 앤더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스미스는 네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마지막 두려움을 자극한다. 그를 ‘네오’가 아니라 ‘앤더슨’으로 부르며, 그의 ‘평범함’에 대한 두려움에 호소하는 스미스. 스미스는 자신에게 맞아 비틀거리는 네오를 계속 ‘앤더슨’으로 부르며 이죽거린다. “앤더슨, 너 이러다 죽겠다?” 스미스는 네오가 ‘그’임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네오의 잠재력을 부정한다.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네오의 몸을 내팽개치며 스미스는 싸늘하게 미소 짓는다. “저 소리가 들리나? 피할 수 없는 소리다. 네 죽음의 소리지. 잘 가라, 앤더슨.”

   그 순간 네오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일으켜 기차를 피하고 오히려 스미스를 기차 쪽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는 절규한다. “내 이름은, 내 이름은……네오다!” 모피어스도 탱크도 트리니티도 모두 네오가 ‘그’임을 인정했지만 아직 네오는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제 네오는 자신의 가장 커다란 적수 앞에서 드디어 자신이 바로 ‘그’임을 믿기 시작한다.
   네오는 자신이 ‘그’가 아님을 인정하고 떠난 길 위에서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바로 ‘그’임을 발견하는 역설적 루트를 밟아 되돌아온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고뇌의 통로를 지나자 지금까지 믿어왔던 세계의 ‘앞면’과 전혀 다른, 세계의 ‘이면’이 나타난 것이다.

   세상을 향해서는 죽고, 자신의 내면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용기. 토마스 앤더슨은 바로 그 용기를 조금씩 키워가는 과정에서 네오가 되고, 파란 약이 아니라 빨간 약을 삼키고, 의심의 터널과 죽음의 터널을 거쳐 마침내 ‘그’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순간. 매트릭스가 길들인 육체의 감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는 이제 단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총알이 달리는 시간’과 ‘총알이 머무는 공간’을 사로잡아 스스로를 중력의 법칙에서 해방시켜버린다. 그가 ‘정지시킨’ 총알을 하나하나 떼어내어 땅에 떨어뜨리는 장면. 그것은 네오가 ‘그’가 되기 위해 마침내 공간과 시간(=인간의 한계)을 쥐락펴락하는 마술적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스스로 자신의 책임을, 운명을, 신화를 완전히 긍정하는 희열의 순간에 도달한 것이다.

   
 

세계를 갱신한다는 것은 세계를 성스럽게 만든다거나 원형과 비슷한 형태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때로 이와 같이 다시 성스러운 존재로 만든다는 것은 세계를 ‘천국’ 상태로 회귀시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간이 풍요롭고 의미 있는 우주 안에서 존재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풍요롭다는 것은 음식물이 풍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우주는 일종의 기호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우주는 ‘말을 하고’, 자신의 구조와 양식과 리듬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간은 그 메시지를 듣고 또는 읽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주를 일관성 있는 의미체계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 마지막으로, 종교적 인간은 세계의 개혁에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엘리아데, 최건원 임왕준 역,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문학동네, 2006,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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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xmfqlxmf 2009-12-22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총알 멈춰서 땅에 떨구기 묘기, 압권이었죠 ㅋㅋ 코믹액션의 진수^^

심슨 2009-12-23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상을 향해서는 죽고, 자신의 내면 안에서는 다시 태어나는 용기라....
 

 


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⑩

 

10.  “미안해,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vs “아니, 그게 너의 비범함이야.” (2)

   
 

 우리는 모순으로 인해 비옥해진다.   
  

 - 괴테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     


 - 김수환 추기경

 
   

    
   내가 바로 ‘그’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네오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내가 반드시 ‘그’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내가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잊고, 오직 소중한 친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찬 네오. 오라클의 예언이나 네오의 엄청난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네오가 자신의 삶을 잊고 오직 모피어스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오는 진정한 ‘그’가 된다. 이제 네오는 세상에서 제일 멀다는 그 거리, ‘마음과 머리 사이’의 거리를 극복했다. 이제 마음과 육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남았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육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네오는 이제 매트릭스의 중력장에 갇힌 스미스 일당뿐 아니라 마지막 남은 인간의 땅 ‘시온’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매트릭스의 촘촘한 그물에 갇혀 사는 현대인에게는 ‘마음과 머리’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마음과 육체’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소파에 누워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봐도 충분히 ‘하루 분의 경험’을 다 해낸 것 같은 가상의 충족감. 몇 시간의 인터넷 웹서핑만으로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실을 다 알아버린 것 같은 환상적인 착시. 우리는 점점 육체의 생생한 촉각과 멀어지며 규격화된 문명의 언어와 이미지에 길들여진다. 네오는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 모피어스를 구해내는 과정에서 자신을 길들인 그 미디어 매트릭스의 익숙한 감각과 싸우는 것이 아닐까. 네오는 모피어스를 구하기 위해 매트릭스 최고 정예 요원들과 ‘몸으로’ 싸우면서, 그들의 ‘가상의 신체’와 싸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평생 동안 한 번도 마음대로 쓰지 못한 자신의 육체를 ‘제대로’ 쓰는 방법을 배운다.

   스미스 : 이곳에 있는 동안 깨달은 사실이 있어. 너희들의 종족을 분류하다가 영감을 얻었지. 너희는 포유류가 아니었어. 지구상의 포유류들은 본능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데 인간들은 안 그래. 한 지역에서 번식을 하고 모든 자연 자원을 소모해 버리지. 그리고 또 이동하는 거지. 지구상에는 똑같은 방식의 유기체가 있어. 그게 뭔지 아나? 바이러스야. 인간은 질병이야. 바로 암이지. 너희는 역병이고 우리가 치료제다. 
   모피어스 : (고문에 지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점점 정신을 잃어간다.)
 

   스미스는 인류 문명의 치명적인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지만 ‘너희는 역병이고 우리가 치료제다’라는 결론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스미스는 마치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인간의 욕망에 기생하면서 인간의 오류를 들춰내는 존재다. 모피어스와 네오는 스미스라는 강력한 적을 통해 배운다. 네오는 스미스 일당과 몸으로 싸우면서 자신도 모르게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트리니티는 매트릭스의 정예요원들처럼 신출귀몰한 속도로 움직이는 네오의 액션에 감탄한다. “어떻게 그랬지? 네가 그들처럼 움직였어. 그렇게 빠른 건 처음 봐!” 네오는 이제 여유롭게 웃으며 으쓱한다. “아직 멀었어.” 

   네오는 적과 싸우면서 진정으로 강해지는 법을 배운다. 자기가 강해지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자신이 아직 멀었다는 것도 동시에 깨닫는 네오의 눈부신 비약. 네오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적과 싸우면서 진짜 ‘그’가 되는 중이다. 혹시 내가 ‘그’가 아닐지라도 상관없이 그 길을 가는 것, 내가 선택받은 자가 아닐지라도 내가 아는 최선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향해 나아가는 용기. 그것이 네오를 ‘그’로 만든다. 드디어 트리니티와 네오는 천신만고 끝에 모피어스를 구해낸다.

  마지막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던 트리니티도, 네오의 능력에 반신반의하던 탱크도, 이제는 네오가 ‘그’임을 믿기 시작한다. “네오가 바로 ‘그’였어!” “이젠 믿겠나, 트리니티?” 아직도 자신이 ‘그’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네오는 모피어스에게 자신은 ‘그’가 아니라고 말하려 한다. 그러자 모피어스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오라클은 네게 필요한 말을 한 거야. 너도 나처럼 곧 알게 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 그것이 머리와 마음의 거리, 그리고 더 나아가 마음과 육체의 거리가 아니었을까. 네오의 뛰어난 학습능력이나 엄청난 해킹능력이 아니라, 내 목숨이 아니라 너의 목숨을 구하려는 네오의 진심이 그를 진정한 ‘그’로 만들어준 것이 아닐까. 엘리아데는 이 순간을 ‘존재론적 이행’이라 불렀다. 평범한 회사원 토마스 앤더슨이 모피어스의 전화를 받는 순간, 그가 ‘하얀 토끼’를 따라 트리니티를 만나는 순간, 파란 약의 유혹을 뿌리치고 빨간 약을 삼키는 순간,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지만 모피어스를 구하려고 결심하는 순간. 그 모든 순간이 네오의 ‘존재론적 이행’을 위한 ‘세속적인 세계의 파열’이었다. 이 존재론적 이행의 끝자락에는, 나보다 타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스스로가 자신도 모르게 위대해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네오가 스스로의 평범함을 인정하는 순간이었고, ‘나의 존재’에 가려 미처 보이지 않던 ‘너의 존재’를 끌어안는 순간이었다.  

   
 

   거룩한 것이 공간 속에 자신을 현현시키는 곳에서 실재가 모습을 드러내며 세계가 출현한다. (……) 거룩한 것의 출현은 단지 세속적인 공간의 형태 없는 유동성에 고정점을 투사하고, 카오스에 중심을 부여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지평의 돌파를 가져온다. 즉 우주적인 여러 차원 사이(지상과 천상 사이)의 교섭을 열어주고, 하나의 존재양식에서 다른 존재양식으로 가는 존재론적 이행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공간의 균질성에 이 같은 파탄이 일어남으로써 하나의 중심이 창조되는데, 그것을 통하여 초세계적인 것과의 교섭이 정립되며, 결과적으로 세계가 창건된다.  

 - 엘리아데, 이동하 역, <성과 속>, 학민사, 1996,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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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hurts 2009-12-2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그걸 깨닫는다면 인생의 좌충우돌이 절반 이상 확 줄어들겠지요? ^^

tnsehddl 2009-12-23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캬.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이 매트릭스에 어울릴 줄이야^^
 

 


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⑨

 

9. “미안해,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vs “아니, 그게 너의 비범함이야.” (1)

 

   
 

두려워하지 마라! 그대는 이미 피와 살로 된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떠한 소리나 빛이나 광선도 그대에게 해를 입힐 수 없나니. 그대는 죽을 수 없다.  


 - <티벳 사자의 서> 중에서

 
   

   살아남은 요원들은 그들의 마지막 희망 ‘시온’을 지키기 위해 모피어스를 포기하기로 한다. 시온은 모피어스나 트리니티나 ‘그’보다 중요하니까.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판단하며 탱크를 말리지 못하는 트리니티. 탱크는 모피어스를 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 코드를 뽑으려 한다. “당신은 리더 그 이상이었죠. 우리의 아버지였어요. 잊지 않을게요.” 자신의 목숨과 모피어스의 목숨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오라클의 예언. 그 때문에 미칠 듯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괴로워하던 네오는 버럭 고함을 지른다. ‘그’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소심하고 자신 없던 네오가 처음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순간이다. “잠깐!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네오는 자신이 매트릭스로 직접 들어가서 모피어스를 구해오겠다고 말한다. 놀란 트리니티는 네오를 설득한다. “모피어스는 널 위해서 잡힌 거야. 절대로 가면 안 돼.”
 

   네오는 모피어스가 자신을 ‘잘못’ 알고 그렇게 한 거라고 말한다. 나는 너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가 아니라고. 미안해,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모피어스를 구해야 해. 네오는 굳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자신이 아니라 모피어스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말을 조용히 삼킨다. 모피어스를 철통같이 지키는 스미스 일당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이건 자살 행위라며 네오를 만류하는 탱크. 그런데 네오의 눈빛에서 전에 없던 단단한 광채가 서리기 시작한다.
   “미친 짓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아. 그 이유는 설명할 수가 없어. 이제야 모피어스가 왜 목숨까지 바치면서 믿었는지 알겠어. 그래서 가야만 해.” 그는 모피어스가 왜 그토록 ‘그’를 찾고 싶어 했는지, 모피어스가 왜 일생을 걸고 매트릭스에 그토록 힘겹게 저항해왔는지를 비로소 깨달은 얼굴이다. 왜 가야만 하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그는 말한다. “나도 이제 믿으니까. 그를 살릴 수 있다는 걸.” 

   네오와 모피어스와 트리니티는 각기 조금씩 엇갈리는 믿음을 갖고 있다. 모피어스는 네오가 ‘그’일 거라 믿고 있고, 트리니티는 모피어스의 리더십과 오라클의 예언을 믿고 있으며, 네오는 자신이 ‘그’가 아니지만 모피어스를 꼭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 모든 믿음은 아직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그 세 사람의 영혼을 지탱하고 있는 ‘믿음’의 영역이다. 세 사람의 믿음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그들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무엇이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이 자석처럼 어디론가 이끌리는, 바로 그런 불가해한 믿음. 이것을 엘리아데는 아직 문명인에게 실낱처럼 남아 있는 ‘종교성’이라고 설명했다. 

   
 

무의식의 활동에 대한 매혹의 느낌이나 신화와 상징에 대한 관심, 이방과 원시, 고대를 향한 열광, 그것이 내포하는 모든 상반된 감정을 동반하는 ‘타자’와의 만남,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새로운 유형의 종교성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엘리아데, 최건원 · 임왕준 역,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문학동네, 2006, 10쪽.  

 
   

   엘리아데가 말하는 종교성은 ‘신앙’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무신론자라고 믿는 사람에게도 그가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종교성이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일 수도 있고, 지금 여기의 이 삶 너머에 뭔가 커다랗고 신비한 무언가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보내는 듯한 느낌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봤을 때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라 더 큰 무언가의 힘이 깃든 것이라고 느끼는 숭고함의 감정일 수도 있다. 그릴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지만 우리가 남모르게 그리워하는 그 무엇을 향한 마음의 화살표. 그것이 엘리아데가 말한 넓은 의미의 ‘종교성’이 아닐까.  


  자신의 논리와 네오의 믿음이 일치하지 않지만, 이제 트리니티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네오를 믿기 시작한다. “너와 같이 갈 거야. 정말 그를 살리고 싶다면 내 도움이 필요할 걸.” 이제 아무도 그들을 말릴 수 없다. 그들은 합리적 이성이 아니라 믿음의 불빛으로 움직이기에. 아무도 이토록 위험한 작전을 시도한 적이 없다며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네오는 말한다. 아무도 시도한 적이 없기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공할 거라고.

   이상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평범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도 비범해 보인다. 네오와 모피어스와 트리니티, 이 세 사람이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조금씩 어긋나며 삐걱거리던 믿음이 완전히 일체가 될 때, 그 순간 네오는 진정한 ‘그’로 거듭날 것이다. 

   
 

 정신분석처럼 특별히 근대적인 기술도 역시 입사식의 패턴을 보존하고 있다. 환자는 깊이 그 자신에게로 침잠하고, 자기의 과거의 삶을 되살리고, 자기의 외상적 경험을 또다시 직면하도록 요구 받는다. 형식면에서 보면 이 위험한 조작은 지옥에로, 마귀의 영역에로의 입사적 하강 및 괴물들과의 투쟁을 닮고 있다. 입사자가 그의 시련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시 올라오리라고-간단히 말해서 충분히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 정신적 가치들을 향하여 열려 있는 존재에 접근하기 위해 ‘죽고’ ‘다시 살아나리라고-기대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정신분석을 받는 환자는 정신적 건강과 통일성을, 그리고 따라서 문화적 가치의 세계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유령과 괴물들에게 쫓기는 자기 자신의 ‘무의식’과 대면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 엘리아데, 이동하 역, <성과 속>, 학민사, 1996, 184~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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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18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벌써 100회네요. 축하축하~
매트릭스, 사람들이 많이 본 영화인데 전 흥미를 많이 못 느꼈는데요. 여울님의 글을 읽으면 좀 흥미가 당길까나~~

맨손체조 2009-12-18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난 지 100일 이네요^^* 받으세요, 축하의 꽃(다발)?---(@

dovmfwntm 2009-12-1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안해, 난 그냥 평범해. 그렇게 말할 때 네오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둥이 2009-12-1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일 추카 드려여~~

잉크후 2009-12-1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본시리즈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는 정말 최고이다.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이 글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최고!!

love hurts 2009-12-19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이 글은 '본 아이덴티티'가 아니라 '매트릭스'에 대한 건데 ^^

잉크후 2009-12-24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매트릭스도 최고!!ㅋㅋ

투명인간 2010-03-3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축하드려욤^^*

행디 2010-04-05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철학은 어려운 학문이라는 고정관념때문에 다가가기 어려운데 작가님 글은 내용이 술술 읽혀서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⑧

 

8. 오라클의 시험 : 미안하지만, 너는 ‘그’가 아니야 (2)

   
 

어둠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빛이다.  


 - 엘리아데

 
   

  

   오라클은 미래를 함부로 예측하거나 단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네오에게 결국 네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네 자신이라고, 너의 신화를 만드는 것 또한 너의 힘이라고 암시한 것이 아닐까. 오라클이나 트리니티나 모피어스가 아니라, 그 누구도 아닌 네 스스로가 ‘그’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 아닐까. 네오 스스로가 ‘그’에게 마치 사랑에 빠지듯 완전히 몰입할 때, 그는 운명의 문턱을 넘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다/아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오라클의 모호한 화법에 네오는 엄청난 혼란을 느낀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과연 ‘그’인지 아닌지 헷갈려 미칠 지경인 네오에게 또 다른 엄청난 미션을 선물하기까지 한다. 너의 목숨과 모피어스의 목숨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모피어스와 네오 일행이 매트릭스에 잠입하여 활동을 개시하려는 동안, 사이퍼는 그들이 매트릭스로부터 현실로 빠져나오는 출구를 봉쇄해버린다. 드디어 사이퍼는 모피어스를 스미스일당에게 넘기려 하는 것이다. 그는 모피어스를 처치하기 위해 다른 요원들까지 살해하고 트리니티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를 협박한다. 이제 너도, 네오도, 모피어스도 끝이라고. 더 이상 나는 매트리스 바깥, 이 날것의 현실 속에서 공포와 불안을 견디며 살아가고 싶지 않다고. 나에게는 매트릭스라는 완벽한 가상이 훨씬 안전하고 매혹적인 현실 같다고. 이제 네오가 ‘그’라는 환상 따위는 집어 치우라고.


   사이퍼: 난 오래 전부터 널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네 꿈을 꾸곤 했지. (매트릭스 바깥에 분리되어 있는 트리니티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넌 아름다운 여자야. 이렇게 돼서 유감이야.
    트리니티: 동료들을 네가 죽였구나.
    사이퍼: 하하, 그래. 난 지쳤어. 전쟁도 싸우는 것도 지겨워. 여기도 지긋지긋하고 추운 것도 지겹고 맛없는 죽만 먹어대는 식사도 지겨워. 하지만 무엇보다도 모피어스 놈이 지겨워. (이번에는 모피어스의 몸 위로 올라타며 잠든 그의 멱살을 잡고) 놀랬지, 이놈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네 놈이 뒈지는 걸 봐야 하는데. 네 놈이 죽기 직전에 가서 내가 배신했다는 걸 보여 주는 건데.
    트리니티: 모피어스를 노린 거였군.
    사이퍼: 맞았어. 놈은 우릴 속였어. 속였다고! 네가 사실대로 말했으면 빨간 약은 안 먹었잖아! (……)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매트릭스를 선택하겠어.
    트리니티: 매트릭스는 가짜야.
    사이퍼: 그렇지 않아. 난 매트릭스가 이 세상보다 더 진짜 같다고 생각해. 여기서 플러그만 뽑으면 에이팍은 죽게 되지. (에이팍의 몸과 매트릭스가 연결된 코드를 뽑아버리고 에이팍은 트리니티와 네오의 눈앞에서 즉사한다. 사이퍼는 스위치의 코드도 뽑아버려 그녀 또한 즉사한다. 그는 이제 네오의 코드를 뽑아버리려 한다.) 모피어스의 말이 맞다면 난 플러그를 뽑을 수 없어. 만약 네오가 '그'라면 그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니까. 맞지? 죽으면 '그'가 아닌 거지. 넌 모피어스의 말을 정말 믿어? ‘네, 아니오’로만 대답해. 그의 눈을 쳐다봐. 커다랗고 아름다운 그 눈을 말이야. 그리고 대답해 봐.
    트리니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그러나 차분하게 대답한다.) 난 네오를 믿어.
    사이퍼: 난 안 믿어! 믿든 안 믿든 네오 너는 바베큐가 될 거다! 

   사이퍼가 잔인한 미소를 띠며 신이 나서 네오를 죽이려 하는 순간 죽은 줄 알았던 탱크가 일어나 사이퍼를 처치한다. 그렇게 네오와 트리니티, 모피어스와 탱크만이 살아남는다. 한편 매트릭스의 수문장 스미스는 모피어스를 납치하여 고문하는 중이다. 그는 모피어스로부터 시온의 메인 컴퓨터 접근 코드를 알아내려 한다. ‘시온’을 파괴하여 매트릭스에 저항하는 모든 반란세력들을 일시에 제거해버리려는 속셈이다. 스미스는 매트릭스가 구현해낸 안락한 미래를 예찬하며 이 아름다운 미래는 ‘너희 원시 종족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 ‘진화된 존재들(인공지능컴퓨터)’의 것이라고 말한다. 

   스미스: 수십억 인간들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지. 태평하게 말이야. 첫번째 매트릭스는 원래 완벽한 인간 세상이었지. 고통이 없는 세상이었어. 그런데 비극이 됐지. 인간들에게 매트릭스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인간들은 수없이 죽어나갔어. 어떤 이들은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 내 생각에는, 인간들은 고통을 통해서 현실을 인지하는 것 같아. 너희 원시적인 두뇌들은 자꾸 깨어나려고 했지. 그래서 매트릭스가 다시 태어나게 된 거야. 너희 문명의 절정이지. 사실 너희 문명은 아냐. 우리가 맡은 이후로는 우리의 문명이 됐으니까.  진화야, 모피어스! 진화라고! 공룡처럼 말이야. 창밖을 봐. 미래는 우리 세상이야 미래는 우리 거라고.

   스미스가 모피어스를 고문하며 시온의 접근 코드를 알아내려 하는 동안 매트릭스 바깥의 현실에서 네오와 트리니티는 탱크와 함께 모피어스의 안부를 걱정한다. 매트릭스 내부의 가상현실 속에서 모피어스는 자신의 두뇌를 스미스 일당들에게 해킹당하기 일보 직전이고, 매트릭스 외부의 진짜 현실 속에서 모피어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을 견디고 있다. 모피어스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간신히 고문을 버티고 있지만, 탱크와 트리니티는 이제 ‘시온’의 출구가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임을 알게 된다. 탱크는 이제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요원들이 컴퓨터에 들어가면 시온은 끝장이야. 그렇게 할 순 없지. 시온은 너나 나나 모피어스보다 중요해.” 절박해진 네오는 무슨 방법이 없냐고 묻는다. 탱크는 절망적인 얼굴로 체념하듯 말한다. “플러그를 뽑으면 돼. 선택의 여지가 없어.” 매트릭스와 모피어스를 연결하고 있는 플러그를 뽑으면 모피어스는 죽게 된다. 네오는 비로소 오라클의 예언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피어스와 나의 목숨,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오다니. 

   
 

인간은 누구나 고립되고 분리되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분리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완벽하게 의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아주 강한 그 ‘무엇’으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을 느낄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 속에 위치시킬 수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으며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그런 옛날의 어떤 ‘상태’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도 역사도 존재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상태를 말한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세계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느낀다. (……) 수많은 신앙은 실낙원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상반된 요소들이 대립 없이 공존하고, 다양성이 신비로운 통일성의 여러 가지 측면을 구성하고 있는 그런 천국의 모순적인 상태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것이다. 
 

- 엘리아데, 최건원 · 임왕준 역,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문학동네, 2006,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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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mffld 2009-12-1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둠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빛이다!
 

 


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⑦

 

7. 오라클의 시험 : 미안하지만, 너는 ‘그’가 아니야 (1)

   
 

 신과 인간은 무엇이 다른가?
 수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신들 앞에서는
 영원의 물결로 변하지만
 우리는 그 파도에 떠밀려 올라가고
 휩쓸려 다니다가
 결국 침몰하고 만다네  

 - 괴테

 
   

    엘리아데는 도시인들 대부분의 삶이 오직 경제적 타깃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꼬집어 말한다. 마치 ‘진화된 인류’는 비과학적인 신화 따위엔 관심을 끊어야 한다는 듯 이성 지상주의적인 교육이 판을 쳐왔다. 그러나 신화의 힘을 믿는 종족을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라고 비난하는 문명인의 교육이야말로 ‘우주적 시간’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를 둘러싼 매트릭스는 무엇인가. 우리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방해하는 힘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이 매트릭스의 회로가 아닐까. 우리가 스스로 창조해야 할 새로운 신화를 방해하는 모든 집착과 강요가 우리 안의 매트릭스를 오늘도 열심히 가동시키고 있는 중이다. 

   
 

세속적 존재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은 그 자신과 그의 사회에 대한 책임 이외에는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 (……) 근대인의 커다란 관심사는 지구의 경제적 자원을 어리석게 고갈시키는 짓을 피하는 데 쏠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적으로 원시인은 언제나 그 자신은 우주적 맥락 속에 던진다. 그의 개인적 경험은 진정성도, 깊이도 결여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근대인의 눈에는 거짓되고 유치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 엘리아데, 이동하 역, <성과 속>, 학민사, 1996, 83쪽. 

 
   



   사이퍼 : 자네 생각을 알아. 나도 같은 생각이니까. 난 항상 그 생각뿐이지. 빨간 약이 아니라 파란 약을 먹을걸. 너도 그렇지?
    네오 : (살짝 미소 짓지만 이제 더 이상 파란 약을 선택하지 않은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다.)
    사이퍼 : 얼마나 부담스러워? 세상을 구해야 한다니! 충고 한마디 하지. 매트릭스의 요원을 보면 나처럼 해. 죽어라고 도망치라고. 

   지금 여기 보이는 삶 너머로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사이퍼. 그는 세속적인 가치 이외에는 어떤 것도 믿지 않게 되어버렸기에, 지금까지 그들 모두를 지켜온 믿음직한 수장 모피어스를 스미스에게 팔아넘긴다. 저항운동의 본거지인 ‘시온’의 메인 프레임 접근 코드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모피어스를 스미스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사이퍼의 눈에는 네오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그 거대한 책임을 혼자 떠안아야 할 불쌍한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네오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낯설고 불확실하지만 이제 모피어스와 트리니티의 진심 어린 눈빛을 믿기로 한 눈치다. 아직 ‘내가 바로 그다’라는 확신은 없지만, 적어도 사이퍼의 유혹만큼은 달갑지 않다. ‘당신처럼은 되고 싶지 않아’라는 듯 안타깝게 빛나는 네오의 눈빛에는 이제 지금-여기 너머의 새로운 삶에 대한 꿈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사이퍼가 잔인한 배반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네오는 드디어 ‘준비’가 되었다. 내가 정말 ‘그’라는 것을 확인할 준비. ‘오라클의 계시’와 ‘네오의 존재’, 그 수수께끼의 퍼즐을 맞출 준비.
   모피어스와 트리니티는 네오를 오라클에게로 데려간다. 여신의 치렁치렁한 드레스자락을 휘날리며 머리 뒤로 광배를 드리우고 있을 것만 같은 ‘예언자 오라클’의 모습을 상상했던 관객들은 오라클의 너무나도 평범한 모습에 놀란다.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푸근한 아낙네 같은 오라클의 모습. 오라클의 카리스마는 그래서 더더욱 따스한 빛을 발한다.  


   오라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 네오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짓는다) 예상과는 많이 다르지? (오븐에서 익어가고 있는 쿠키를 바라보며) 거의 다됐어. 냄새가 참 좋지?
    네오: (얼떨떨한 표정으로) 네.
    오라클: (……) 넌 생각보다 귀엽구나. 그녀가 좋아할 만해.
    네오: 누가요?
    오라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다지 똑똑하진 않구나. 왜 나한테 왔는지는 알지?
 어떻게 생각해? 너 자신이 ‘그’라고 생각해?
    네오: 솔직히 모르겠어요.
    오라클: 한 가지 비밀을 알려 주지. ‘그’라는 존재는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아. 아무도 알 수 없고 자신만이 알아. 온몸으로 아는 거지. 그럼 어디 한번 볼까? 입을 벌려봐, 네오. 좋아. 
 ‘흥미롭군’이라고 말해야겠지만, 하지만…….
   네오: 하지만, 뭔가요?
    오라클: 자넨 이미 알고 있어.
    네오: (더없이 실망한 눈빛으로) 전 ‘그’가 아니군요.
    오라클: 미안하다. 넌 재능이 있지만 뭔가를 기다리고 있어.
 (……)
    네오: (쓸쓸히 웃으며) 모피어스한테 거의 설득됐었거든요.
    오라클: 불쌍한 모피어스. 그가 없으면 우린 안 돼.
    네오: ‘그가 없으면’이라뇨?
    오라클: 정말 알고 싶나? 모피어스는 네가 ‘그’라고 믿어. 너도 나도 아무도 그를 설득할 순 없어. 널 위해 목숨을 버릴 만큼 그는 눈이 멀었어. 넌 선택을 해야 돼. 모피어스의 목숨과 네 목숨 중에서 말이야. 둘 중 하나는 죽는다. 그건 네 손에 달렸어. 


   내가 ‘그’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피어스는 내가 ‘그’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그의 기대를 저버리면 어떻게 될까. 난 이제 매트릭스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내가 ‘그’가 아니라면 도대체 여기 머물러야 할 이유가 뭐지? 매트릭스의 편안한 세계에 대한 미련, 그리고 내가 정말 이 엄청난 미션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공포. 오라클은 네오가 아직 버리지 못한 이 미련과 공포를 진정으로 떨쳐내게 하기 위하여 그것과 정면으로 맞서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오라클은 그의 마음속에서 ‘그’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문턱을 만들어준 것이 아닐까.
   오라클은 ‘너는 그가 아니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물론 ‘네가 바로 그야’라고 확실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오라클은 단지 너를 만드는 것은 너 자신임을 일깨운다. 내가 ‘그’임을 믿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아찔한 것,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야 하는 엄청난 일임을 암시할 뿐이다. 답을 저 멀리 바깥에서 구하지 마. 언제나 그렇듯 답은 네 안에 있어. 다만 그 답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는가, 그게 관건이지. 네 마음을 찬찬히 만져보렴. 너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은밀한 해답의 질감이 느껴지는가. 

   
 

폴 리쾨르에 따르면 실존의 두 기둥이란, ‘쾌락’의 달성을 목표로 하는 ‘생명의 기둥’과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정신의 기둥’이다. 리쾨르에게 있어 의미 있는 인생이란 이 두 기둥이 하나로 합쳐서 서로 밑거름이 되어주는 그런 인생이다. 의미 있는 인생을 추구한다는 것은 대립되는 이 두 요소를 파악해 통합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리쾨르가 그러한 필연적인 통합이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믿은 인간의 기능은 바로 ‘느낄 수 있는 능력feeling’이었다. 신화는 이 느낌들의 기록이다. 신화는 자신들의 실존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몸부림쳤던 인간적 시도의 기록이며, 그 해결의 살아 있는 도구였다.  


- 비얼레인, 배경화 역, <살아 있는 신화>, 세종서적,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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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이 2009-12-16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네오는 처음부터 '그'가 아니라 '그'로 되어가는 건가여?
아님 오라클이 네오를 '그'에게로 이끌려는 마지막 시험?
왠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듯^^

오늘은 일빠^^

맨손체조 2009-12-1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 삶의 매트릭스가 더욱 또렷해지는 연말, 연말, 연말 파티! 나도 '우주적 시간'을 느끼며 '생명의 기둥'과 '정신의 기둥'이 비빔밥이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ㅠㅠ

니모 2009-12-16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느낄 수 있는 능력! 지금 네오에게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냄새가 그 느낌의 향기군요^^

qmffnqpfl 2009-12-17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이제 벌써 100회를 향해 달려가는 군요~!^^

gPdud 2009-12-18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벌써 100회네요. 축하합니다~ 늘 재미와 감동, 사색할 거리를 주는 씨네필입니다.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