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⑧

 

8. 동화 속의 세계는 너무 안전하다? (2)

   슈렉 : 당신은 제가 상상했던 공주하고는 좀 다르네요.
   피오나 :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판단을 내리면 안 되겠죠.
   - 영화 <슈렉> 중에서
 



    나는 가끔 ‘사람 미워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누군가를 싫어할 때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이유를 따지기도, 말하기도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를 말하려면 결국 우리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버린 존재, 그 한계를 똑바로 노려보기엔 우리의 자의식이 너무 견고한 것은 아닐까.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블랙리스트는 곧 나의 ‘한계’를 드러내는, 숨기고 싶은 마음의 카탈로그이기도 한 셈이다. 
  




    우리는 싫어하는 것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자신의 ‘아브젝시옹’을 숨기려고 한다. 내가 무엇을 증오하고 은폐하고 배제하는지 모두 다 말하고 산다면 하루도 멀쩡한 정신으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아브젝시옹의 목록은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목록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혹시 증오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없이 뜬소문이나 가벼운 인상만을 토대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증오하는 대상들은 정말로 내 증오를 받을 만큼 대단히 혐오스러운 것일까.
   




   슈렉은 언뜻 보면 인간혐오증에 걸린 괴물 같다. 하지만 슈렉이 진짜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싫어해서이다. 피오나 공주를 파쿼드 영주에게도 데려오는 길에서 슈렉은 그 오랜 ‘인간혐오증’의 비밀을 동키에게 털어놓는다.

 동키 : 슈렉, 우리 늪을 다시 돌려받으면 뭘 하지?
 슈렉 : 우리 늪?
 동키 : 우리가 공주를 구하고 이번 모험이 다 끝나면 말이야.
 슈렉 : 우리? 당나귀야! ‘우리’라는 건 없어. ‘나’밖에 없어. 거긴 우리 늪이 아니라 내 늪이야. 어쨌든 가장 먼저 할 일은 늪 주위에 높은 울타리를 짓는 거야.
 동키 : 나 상처받았어, 슈렉. 상처받았어. 내 생각을 말해줄까? 내 생각에 네가 울타리를 짓고 싶다는 건 딴 사람이 못 오게 하려는 거 같아.
 슈렉 : 그래?
 동키 : 뭘 숨기고 있냐?
 슈렉 : 아냐.
 동키 : 오호! 네가 말한 그 ‘양파’ 같은 거구나?
 슈렉 : 그만해. (……) 당나귀, 경고한다! 그만 해!
 동키 : 누굴 못 들어오게 하려는 거야? 그것만 말해줘.
 슈렉 : 모두! 이 세상 누구도 내 늪으로 오지 말라고! 이제 됐어?
 동키 : 와우, 이제 말문이 트였군. 문제가 뭐야? 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싫어하는 거지?
 슈렉 : 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냐. 딴 사람들이 날 싫어하는 게 문제야. 사람들은 날 보면 "악! 도와줘! 도망쳐! 멍청하고 못생긴 오우거다!"라고 한다고. 사람들은 날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고 판단부터 해. 그래서 혼자 사는 게 더 좋아.
 동키 : 있잖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난 네가 멍청하고 못생긴 오우거라고 생각 안 했어…….
 슈렉 : 알아…….




   슈렉은 ‘우리’라는 말이 너무 낯설다. 동키가 ‘우리’의 모험이 끝나면 ‘우리’ 함께 늪에서 살자고 말하자 내심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 번도 ‘우리’라는 틀 안에 자신을 넣어본 적이 없어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슈렉은 안다. 동키는 자신을 ‘괴물’이라고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했던 첫번째 친구임을. 동키가 ‘겉보기 등급’과는 달리 따스한 마음씨와 깊은 이해심을 지니고 있듯이, 슈렉 또한 사람들 사이에 퍼진 루머와는 달리 너무도 지적이고 용감하며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우리의 피오나 공주 또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가 가졌던 ‘편견’과는 다르다. 우아하고 세련되며 얌전한 ‘공주’일 것이라는 따분한 편견을 날려버리는 피오나의 거침없는 성격과 장쾌한 액션! 하지만 아직 피오나의 진짜 장점은 발휘되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동화의 환상적 내러티브’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피오나는 스스로 동화의 전형적 스토리에 몸이 꽁꽁 묶인 채, 눈앞의 슈렉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파쿼드 영주’를 동화 속 왕자로 착각하고 있다.   


    피오나는 환상 속 왕자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탈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 바깥에 나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밤마다 모습이 바뀌는 마법보다 끔찍한 것은 그녀를 아브젝트 수용소로 추방해 버리고도 마법의 왕자만 기다리게 방치해 둔 부모의 이기심이 아니었을까. 파티에 데려가 사교계로 진출시키기에는 사랑스런 딸의 외모가 너무 끔찍했으니까. 더 끔찍한 것은 스스로 탈출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것, 그러니까 피오나 스스로가 자신을 ‘아브젝시옹’의 대상으로 인정해버린 것이었다.

  

 

   
  아브젝시옹은 도덕을 알면서도 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훨씬 더 음흉하고 우회적이며 석연찮은 어떤 것이다. 즉 자신을 숨긴 테러 행위, 미소 짓는 증오, 껴안는 대신에 품는 육체에 대한 욕망, 당신을 팔아치우는 채무자, 비수로 나를 찌르는 친구. 이런 것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 크리스테바, 서민원 역, <공포의 권력>, 동문선, 200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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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1-1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소 짓는 증오>! 직장 생활에서 재일 빈전한 저 태도^^*

니모 2010-01-12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비수로 나를 찌르는 친구, 흐억 ㅠㅠ

someday 2010-01-13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라는 말이 너무 낯선 슈렉^^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⑦

 

7. 동화 속의 세계는 너무 안전하다? (1)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소모되어버린, 추방되어 사실상 굶고 있는 나를 보라.”
 -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중에서, 마녀 어슐라의 대사
 
   

   디즈니가 각색한 애니메이션에서는 막판에 주로 악당이 살해되거나 마녀가 추방된다. 소름끼치고 역겨운 것들을 반드시 배제해버려야만 세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듯, 디즈니형 애니메이션은 동화에서 선악의 경계, 미추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한다. 그러나 실제 세계도 그럴까. 디즈니의 ‘우월한 유전자’를 향한 지독한 선망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주체성을 희생시켜서라도 ‘안전한 세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질병 아닐까.  


 

    슈렉은 피오나를 구하지만 피오나는 자신의 ‘이상형’에 슈렉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으며 실망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우아한 백마에 태워 주기는커녕 계속 걷고 뛰게 만드는 슈렉을 보며 피오나는 토라져서 한마디 던진다. “무슨 기사가 이래요!” 슈렉은 자신이 좀 구식이고 특이종이라며 변명을 해보지만 피오나는 ‘공주답게’ 새침을 떤다. 
   그녀는 핑크 드래곤의 유혹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동키를 ‘백마’로 오인하고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인가보다 하는 기대감을 가져보지만, 어림없다. 게다가 성에 갇힌 자신을 구해준 기사님은 ‘얼굴’을 보여줄 생각을 안 한다. “전투에 승리했습니다, 기사님. 이제 헬멧을 벗으셔도 됩니다.” 슈렉은 헬멧 때문에 머리가 헝클어졌다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지만 피오나는 자신을 구해준 기사님이 헬멧을 벗는 순간 키스를 퍼부으며 곧바로 사랑에 빠질 태세다. 

 

 피오나 : 어서 헬멧을 벗어요. 저를 구해 주신 분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슈렉 : 아뇨,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피오나 : 하지만, 저하고 어떻게 키스하실 건가요?
 슈렉 : (당황하며) 뭐라고요? 이 일을 맡았을 때 그런 얘긴 없었는데?
 피오나 : 아니, 운명이에요. 동화 속 스토리를 모르세요? 탑에 갇힌 공주가, 용감한 기사로부터 구출된다. 그다음 진정한 사랑의 첫 키스를 나눈다!
 동키 : 슈렉하고요? 잠깐만요. 슈렉이 당신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피오나 : 네, 그럼요.
 동키 : 우헤헤헤! 슈렉이 진정한 사랑이래. 

 

 피오나 : (엎치락뒤치락 실랑이 끝에 드디어 슈렉이 헬멧을 벗자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다) 당신은, 오우거군요…….
 슈렉 : 오, 멋진 왕자를 기대하셨나 보군요.
 피오나 : 네, 실은……. 오, 안 돼! 모든 게 틀렸어! 당신이 오우거면 안 되는데!
 슈렉 : 공주님, 파쿼드 군주가 당신을 구하려 절 보냈습니다. 아셨죠? 당신하고 결혼하려는 사람은 그 분이에요.
 피오나 : 그럼 왜 저를 구출하러 직접 오지 않은 거죠?
 슈렉 : 좋은 질문이네요. 도착하면 직접 물어 보세요.
 피오나 : 저는 진정한 사랑에 의해 구출 받아야 해요. 오우거와 애완동물에게 구출 받는 게 아니라고요! (……) 파쿼드 군주에게 절 제대로 구출하고 싶다면 여기서 기다린다고 전해주세요. 



   문제는 이 세계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묘사하는 세계처럼 깔끔하게 재단될 수 없다는 것이다. 타자를 끝내 배제하는 세계에서는 타자가 촉발하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도 닫힌다. 불쾌하고 모호하고 이질적인 무엇, 아브젝트를 배제하는 것은 곧 세계를 왜곡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타자 없는 세계, 살균된 세계의 폭력성은 그것이 비폭력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고 기만적이다. 디즈니의 전형적인 세계관은 ‘비정상’을 삭제해야 ‘정상’이 행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전개되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지 않다. 다양성은 ‘정상적인 것 내부의 차이’가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경계 위의 수많은 이질성과 모호성 위에서 꽃피는 것 아닐까.  



 

   
 

  아브젝트가 되는 것은 부적절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 그것 자체가 지정된 한계나 장소나 규칙들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어중간하고 모호한 혼합물인 까닭이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서민원 역, <공포의 권력>, 동문선, 200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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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 2010-01-11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진정한 사랑에 의해 구출받아야 해요, 오우거와 애완동물에게 구출받는 게 아니라!^^ 그때 졸지에 '애완동물'로 전락한 동키의 표정ㅋㅋ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⑥

 

6. 코라(chora) : 내가 버린 나의 가능성들의 총집합 (2)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그러한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도 최소한 이 괴물은 신비스럽잖아요?
 - 영화 <미녀와 야수> 중에서, 야수를 죽이려는 주민들의 목소리 
 
   

   슈렉은 동키와 함께 피오나 공주를 구하러 떠난다. 이 모험의 첫번째 난관은 거대한 용암 위에 펼쳐진 흔들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고소공포증이 도진 듯 벌벌 떠는 동키를 보며 슈렉은 우리가 함께이니 괜찮다고 말해준다. “동키, 내가 바로 옆에 있잖아, 걱정 마. 천천히 건너가면 되는 거야. 밑을 보지 말구.” 아래를 쳐다보지 말라는 슈렉의 경고를 어긴 동키는 두려움에 질려 더 이상 못가겠다고 버티고, 슈렉은 특유의 재치를 발휘해 동키가 오히려 다리를 먼저 건널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동키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일이, 슈렉과 함께라면 가능해진다. 

   마침내 성에 도착한 슈렉과 동키는 흩어져서 용과 공주를 찾는다. 공주가 있는 계단을 찾던 동키는 오히려 거대한 용을 만나고, 흉측한 용이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동키는 뜻밖에 용이 ‘핑크빛’ 얼굴을 가진 여성임을 알게 된다. 용이 거대한 이빨을 선보이며 동키를 금방이라도 꿀꺽 삼킬 태세를 취하자 동키는 기지를 발휘해 살아남을 궁리를 한다.



동키 : 동키 : 오우, 이빨이 정말 크시네요. 이빨이 눈부시게 하얗고 반짝거리네요. 자주 들으시겠지만 이빨이 정말 하얗고, 미소도 정말 눈부시고요. 그리고 민트 냄새도 나는 것 같아요. 저…… 그리고…… 당신도 잘 알듯이…… 당신은 여자 용이시군요. 오우, 정말 여성다운 아름다움이 가득해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동키는 살아남기 위해 과장된 연기력을 발휘한 것이지만 우리의 핑크 드래곤에게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보는 ‘칭찬’이다. 핑크 드래곤은 동키를 잡아먹으려던 시늉을 그치고, 갑자기 기다란 속눈썹을 우아하게 깜빡이며 그녀의 ‘여성적’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다. 그녀가 여성으로서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칭찬은 그녀도 몰랐던 그녀 안의 여성성을 발굴해준 셈이다. 슈렉은 동키의 두려움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동키의 코라를 일깨우고, 동키는 핑크 드래곤의 여성성을 발굴함으로써 드래곤의 코라를 일깨운다. 이제 피오나가 슈렉의 코라를, 슈렉이 피오나의 코라를 일깨울 차례다.



슈렉 : (드디어 공주를 찾았다는 표정) 당신이 피오나 공주님인가요?
피오나 :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저를 구해줄 용감한 기사를 기다리고 있어요.
슈렉 : (무뚝뚝하게) 그렇군요, 갑시다!
피오나 : 잠깐만요, 기사님! 처음 만나는 건데 뭔가 아름답고 로맨틱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슈렉 : (피오나의 손을 잡아채어 얼른 데려가려 한다) 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피오나 : (자신과 함께 계단을 뛰어내려 가려는 슈렉에게 놀라) 잠깐만요? 뭐하시는 거예요? 저를 안아든 다음에 밧줄을 타고 내려가서 백마에 올라타야죠! 이 순간을 추억에 남겨야 해요! 시를 낭송해 주세요! 발라드! 소네트! 아무거나!
슈렉 : (귀찮다는 듯이) 싫어요!
피오나 : (실망을 감추지 못하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저를 구출해 준 기사의 이름이라도 알려주실 수 없어요?
슈렉 : 슈렉입니다.
피오나 : (아직 살아 날뛰고 있는 용을 바라보며) 아직도 용을 안 죽였어요?
슈렉 : 그럴 예정이에요, 갑시다!
피오나 : 이게 아니에요! 당신이 직접 뛰어들어서 용과 싸우는 거예요! 다른 기사들은 다 그랬어요!



   피오나의 머릿속에는 동화적 환상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자신을 구하러 오는 기사는 완벽한 외모와 용감한 심성을 지닌 왕자님이어야 하고, 왕자님은 자신을 구하기 전에 미리 용을 무찔러야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기사님은 투구를 벗어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고, 자신에게 아름다운 시를 낭송해주며 로맨틱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게다가 백마 탄 왕자님은커녕 우리의 귀하신 공주님을 몸소 두발로 뛰어다니게 만드는 얼굴 없는 기사님이라니. 왜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나의 멋진 라이프스토리가 펼쳐지지 않는 걸까, 피오나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슈렉>은 디즈니 월드가 추방한 아브젝트의 부분적 귀환이라 할 수 있다. 슈렉은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처럼 다시 ‘왕자’로 돌아갈 희망이 전혀 없다. 슈렉은 괴물인 채로, 흉측한 채로, 여전히 매력적이고 사랑스럽다. 슈렉은 백인이 아니며 귀족이 아니며 왕자도 아니고 꽃미남도 아닌, 그야말로 디즈니의 주인공스러운 구석이 조금도 없는 사상 초유의 캐릭터였던 것이다.

   
 

미키 마우스의 세계는 가끔 무섭기는 하지만 안전하며, 비폭력적이며, 비이데올로기적인 어린이의 세계이며 여기서 모든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어떤 디즈니 영화도 어린이에게 악몽을 꾸게 하거나 어른들이 심각하게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미키의 모든 존재는 모든 이를 위한 사랑과 안전에 그 준거를 두고 있다. 그의 모험에는 어떤 철학적인 함축이 담겨 있지 않고 영화에서 언급한 것 이상의 것은 없다. 미키의 매력은 모든 것이 잘 되며, 온유한 자가 상속받을 것이며 순진한 자가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안심시켜주는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 로널드 오트먼Ronald Oatman, <Journal of Popular Film and Television> 24권 2호, 1996,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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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 2010-01-06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핑크 드래곤, 너무 큐트해요~ ㅋㅋ

ehdrmf 2010-01-0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릴 때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을 지금 와서 보면 가끔 끔찍할 때가 있죠. 미녀와 야수, 미키마우스, 라이온 킹...특히 라이온 킹에서는 내심 '스카'가 멋졌음 ㅋㅋ

바밤바 2010-01-13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현실의 과도한 낙관주의로 현실을 이겨내려는 방향성의 기저에도 로널드 오트먼의 아포리즘이 작용한 듯 하네요. 잘 읽었습니당^^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⑤

 

5. 코라(chora) : 내가 버린 나의 가능성들의 총집합 (1)

   
 

 아브젝시옹은 ‘자기 자신’에게 ‘다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추방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주체성의 경계를 한정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 노엘 맥아피, 이부순 역,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 앨피, 2007, 111쪽.

 
   

  아브젝시옹이 ‘나답지 않다’고 판단되는 모든 것을 추방하는 과정이라면, 아무것도 몰아내지 않고 품어내려는 열정, 자기를 가득 채우는 것에서 힘을 얻는 것이 바로 ‘코라(chora)’다. 코라는 단지 생성하는 모든 것들의 저장소가 아니라 모든 생성의 유모 같은 존재다. 코라의 속성은 안정감이나 균형의 유지가 아니라 불안, 불균형, 불규칙, 동요 그 자체를 끌어안는 엄청난 에너지의 파동이다. 

   동화 속 주인공들이 서로 갈등하다가도 언젠가는 화해하고, 법률과 규칙 없이도 얼마든지 신명나게 살아갈 수 있었던, 환상과 현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던 곳. 아기가 ‘언어’를 배우기 이전, ‘내 똥이 더럽다’는 것을 배우기 이전, 이렇게 하면 부모님께 야단맞을 것이라는 판단을 배우기 이전의 세계. 파쿼드 영주가 동화 속 생물들을 추방하기 이전의 도시 듀록도 아마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모든 가능성으로 충만한 곳, 코라는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들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동키 : 그러니까 처음부터 네 늪이 아니었던 걸 되찾으려고 무서운 용과 싸우고 피오나 공주를 구한다는 거야? 그런 거야? 난 모르겠어, 슈렉! 왜 그냥 오우거답게 하지 않은 거야? 오우거들이 하는 거 있잖아?
슈렉 : 그래, 모든 시민의 목을 베어서 막대기에 꽂아놓았을 수도 있었겠지. 내장을 잘라내서 피를 마실 수도 있었겠지, 그렇게 하는 게 더 좋았을까?
동키 : 아, 아닌 거 같은데…….
슈렉 : (깊은 사색에 빠진 표정으로, 조금은 수줍게) 너는 모르겠지만, 오우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
동키 : 예를 들면?
슈렉 : 예를 들어서, 아, 그래, 오우거는 마치 양파 같은 존재야.
동키 : 양파처럼 냄새가 나?
슈렉 :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니.
동키 : 양파처럼 울게 만들어?
슈렉 : (짜증난 표정) 아냐!
동키 : 햇볕을 쬐게 밖에 놔두면 갈색이 되면서 줄기가 나는구나?
슈렉 : (답답해서 버럭 화를 내며) 아냐! 층 말이야! 양파엔 층이 있어. 오우거도 층이 있어. 양파도 층이 있고. 알겠어? 둘 다 층이 있어.

   슈렉은 전에 없이 차분하게 사색에 빠진 표정으로 양파의 ‘층’과 오우거의 ‘층’을 비교해서 설명한다. 관객도 시간이 갈수록 단순한 ‘홑겹’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슈렉의 다채로운 면모에 매혹된다. 여러 겹으로 포개어져 비밀에 싸인 양파껍질처럼 신비롭고 난해한 무엇. 슈렉은 자신의 존재가 그렇게 쉽게 파악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창조적 다중성이 ‘고립된 생활’에서는 발현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슈렉이 계속 늪지대에서 은둔형 외톨이로만 살아갔다면 아무도 슈렉이 그토록 엄청난 재능과 매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슈렉은 아주 쉬운 방법으로(단순하고도 폭력적인 방법으로) 늪을 되찾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어렵고 힘든 ‘모험’을 택한다. 이 결정은 미지의 모험 속에 깃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포착한 슈렉의 혜안이 아니었을까. 우리 안의 잃어버린 가능성들, 코라도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더 많은 경험과 더 많은 공간과 더 많은 사람들 속으로 우리의 존재를 던질 때, 미처 발현되지 못한 우리 안의 가능성은 꽃필 수 있을 것이다.

 

   
  코라는 아직 하나의 정돈된 우주로 통일되지 않은 것이지만, 양분을 공급하는 모성적인 그 무엇이다. (……) 코라는 항상 이미 모순적이고, 동화력이 있는 동시에 파괴적이며, 이러한 이중성으로 인해 코라는 항구적인 분열의 장을 만들어 간다. (……) 언어와 무관하고 수수께끼 같으며 여성적인, 쓰인 글의 심층에 자리 잡은 이 공간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김인환 역, <시적 언어의 혁명>, 동문선, 2000, 27~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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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ffnfkffk 2010-01-06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안의 잃어버린 가능성의 총집합, 코라~!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④

 

 4. ‘세균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버려지는 타자들 (2)

   
 

 내가 그녀이고, 그녀가 나인데, 어떻게 그녀를 증오할 수 있을까?
 - 줄리아 크리스테바

 
   

   내 안의 더럽고 역겹고 불쾌한 모든 것들, 그건 내 것이 아니야. 그것들만 사라지면, 난 완벽해질 수 있어. 각종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마초형 남성 파쿼드 영주는 그가 통치하는 ‘완벽한 세상’을 망치는 주범으로 동화나라의 주인공들을 지목한다. 파쿼드는 과자인형을 잔인하게 고문하며 동화나라 캐릭터들의 행방을 묻는다. “너와 이상한 요정 생물들이 내 완벽한 세상을 망치고 있다. 다들 어디 갔지?” 의리로 똘똘 뭉친 과자인형은 동화나라 생물들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는다. 한편, 백설공주의 계모가 애용하던 ‘말하는 거울’을 공수해온 파쿼드는 자신의 ‘미모’가 아니라 ‘왕국’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어 한다.

   “벽에 걸린 거울아, 나의 왕국은 가장 완벽한 왕국이 아닌가?” 거짓말에 서툰 말하는 거울은 대충 얼버무린다. “그게……정확히 따지면 당신은 왕이 아닙니다. (손거울을 깨 보이며 협박하는 영주의 행동에 놀라 다급하게) 제 말은 ‘아직’ 왕이 아니라는 겁니다. 영주님도 왕이 될 수 있죠! 공주와 결혼하면 됩니다!” 거울은 ‘공주의 옵션’을 제시하며 파쿼드에게 가장 적절한 신붓감을 골라보라고 권한다.

   거울 : 공주 1은 먼 나라 왕국에서 정신적 고뇌를 겪고 있죠. 그녀는 스시와 목욕을 좋아합니다. 취미는 사악한 언니들을 위해 요리와 청소를 하는 겁니다. 자, 신데렐라입니다! (신데렐라의 우아한 자태를 거울로 보여준다) 공주2는 망토를 입은 소녀입니다. 7명의 남자들과 함께 살지만 쉽게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죽은 듯이 차가운 입술에 키스해주면 됩니다. 보시죠! 백설 공주입니다! (백설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을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공주3은 용암으로 둘러싸인 성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피냐 콜라다와 비 맞는 걸 좋아합니다. 구출만 하면 되는, 피오나 공주입니다! (드디어 피오나 공주의 매혹적인 표정과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공개되는 순간이다.)   

   영주는 피오나 공주의 참신한 매력에 반해 그녀와 결혼하기로 한다. 피오나가 갇혀 있는 성으로 찾아가 용을 무찌르고 그녀를 구해내는 엄청난 노동은 타인에게 전가하기로 한 채. 마침 슈렉은 파쿼드 영주의 도시 ‘듀록’에 도착하여 파쿼드와 담판을 지을 참이다. 슈렉의 눈에 비친 도시 듀록은 엄청나게 깨끗하지만 왠지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동화나라의 생물들이 모두 추방당한 뒤라서 그럴까. 듀록은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처럼 음산하고 허전하기 그지없다. 슈렉과 동키를 맞이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다. “듀록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듀록은 완벽한 곳이랍니다. 마을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답니다. 줄을 꼭 지키세요. 듀록은 완벽한 곳이랍니다. 잔디를 밟지 마세요. 신발을 닦으세요. 얼굴을 씻으세요.” 환영한다고 외치면서 잔뜩 ‘금지사항’만을 읊어대는 자동인형의 기계적 합창에 슈렉은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이 도시에는 뭐가 이렇게 ‘안 되는 것’, ‘금지된 것’만 많은 것일까. 그런 도시는 과연 행복한 곳일까.

   파쿼드 : (원형 경기장에 모인 엄청난 군중을 향해) 용으로부터 아름다운 피오나 공주를 구출하는 영광을 가질 자는 누군가? 우승자가 실패를 하게 된다면 2등이 도전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3, 4등이 도전한다. 죽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희생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군중은 열광하지만 그 열광은 어딘지 가식적이다. 군중의 얼굴에서는 파쿼드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공포’가 서려 있다. 이때 거대한 원형경기장에 갑자기 ‘괴물’ 슈렉이 나타나자 군중은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공포에 질린 파쿼드는 괴물 ‘오우거’를 죽여버리라고 명령한다. 파쿼드는 급히 계획을 변경한다. 도전자들끼리 서로 싸워 토너먼트를 할 것이 아니라 오우거를 죽이는 자가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몰아치는 적들을 향한 슈렉의 폭풍 액션! 괴물 슈렉의 재치와 파워를 따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증명되자 파쿼드는 또 한 번 계획을 바꾼다. 슈렉을 챔피언으로 결정한 것이다. “듀록 시민들이여! 슈렉이 바로 우리들의 챔피언이다! 축하한다, 오우거! 너는 위대한 모험에 나설 영광을 얻었다. 오우거! 날 위해서 이 모험에 나서면 늪을 돌려주겠다.” 늪을 돌려주겠다는 반가운 소식에 슈렉은 이 위험천만한 모험에 나서기로 한다. 

  크리스테바는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했던 것들의 잃어버린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 잃어버린 가능성의 총체를 그녀는 ‘코라(cora)’라고 불렀고, 우리의 바람직한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역겹고 더럽고 위험한 것들을 버리는 과정을 그녀는 ‘아브젝시옹’이라 불렀다. 우리가 괴물이나 도깨비, 사악한 마녀나 끔찍한 요괴에게 공포와 매혹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 ‘아브젝시옹’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역겹고 더럽고 위험하다고 믿는 것들 또한 원래 우리 안에 존재하던 것들이었기에 우리도 모르게 그것들을 그리워한 것은 아닐까. 아브젝트는 원래 내 것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그립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 몰아낸 타자들이기에 그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원래 내 것이었기에 어딘가 매혹적이고 내가 추방한 것이기에 왠지 두려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아브젝트다.

   
     아브젝트는 금지된 욕망의 대상이 일어나는 (……) 비객관성, 결여의 장소, 매혹과 증오의 장소이다. (……) 아브젝트는 문화, 즉 ‘신성한’ 것이 정화시키고 분리시키고 추방하는 대상이므로 그 자체를 카타르시스라는 보편적인 논리 가운데 세울 수 있게 된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정신분석과 폴리스', <페미니즘과 문학>, 문예출판사, 1990,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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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qlsend 2010-01-04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사진이 커져서 좋네요. 영화를 보면서 강의 듣는 듯ㅋㅋ

둥이 2010-01-04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큰 tv가 좋아^^

viewfinder 2010-01-05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하하^^ 내 주변의 커다란 LCD 예찬론자들이 생각나는 군요 다른 건 몰라도 텔레비전만은 커야한다는ㅋㅋ

맨손체조 2010-01-0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균 없는 세계를 만드는 파쿼드'들', 이 똥꾸 빵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