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마지막 회

 

 13. ‘우울한 결핍’에서 ‘유쾌한 차이’로 (3) 

   
  여성적 윤리는 죽지 않는 것, 사랑이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우리는 ‘아브젝트’가 추방되고 사형되고 사라지는 수많은 영화들을 감상한 경험이 있다. <조스>에서 끔찍한 식인 상어들은 인간의 단결된 힘으로 처치되었으며, <프랑켄슈타인>에서 인간의 시체에서 나온 잔해들로 만든 ‘괴물’은 인간의 지혜로 살해되었으며, <괴물>에서는 힘없는 소시민 가족의 좌충우돌 모험기를 통해 ‘어쨌든’ 괴물을 소탕했다. 혐오와 공포의 대상인 괴물은 영화의 종반부에서는 반드시 퇴치되는, 주인공에게 가장 ‘적대적’인 조연급 배우였다. ‘괴물’이 주로 ‘인간’이 아닌 존재로 등장하거나 누구나 분노할 만한 엄청난 죄를 지은 존재로 묘사되는 것은 괴물의 제거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곤 했다.




   그런데 영화관을 나올 때마다 우리는 매번 뒤통수가 따갑거나 먹은 것이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듯한 석연치 않은 감정을 느끼곤 하지 않았던가. 괴물을 소탕하고 살해하고 처치하는 인간들의 현란한 스펙타클에 집중한 나머지 우리는 막상 ‘괴물의 입장’을 듣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그 괴물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숨죽이고 웅크린 숨은 욕망 어딘가를 닮은 구석이 있지 않았던가.

   영화 <슈렉>의 급진성은 바로 언제나 관객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조연급 배우 ‘괴물’을 관객들의 폭발적인 사랑의 대상인 ‘주인공’의 자리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괴물의 관점에서, 괴물의 마음으로, 괴물의 시공간을 체험하는 기회를 맛보게 된 것이다. 아브젝트의 시점에서, 아브젝트의 삶과 사랑과 꿈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크리스테바의 철학적 기획과 <슈렉>의 급진성이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만약 <슈렉>의 결말이 ‘못생긴 피오나 공주’가 슈렉의 키스를 받아 ‘어여쁜 피오나 공주’의 본모습을 찾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미녀와 야수>에서 남녀의 위치만을 바꾼 결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슈렉>은 상대방의 야수성과 야생성을 반드시 교정해야만 획득되는 문명인의 사랑이 아니라, 그가 야수인 채로, 그가 ‘늪의 괴물’인 채로 사랑하는 법을 발견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슈렉>의 또 다른 미덕은 버려진 존재들, 짓밟히고 배제된 ‘아브젝트’의 이야기를 굳이 오싹한 공포물이나 손발이 오그라드는 멜로물로 만들지 않고 유쾌하고 산뜻한 ‘애니메이션’의 그릇에 담아냈다는 것이다.  



   <슈렉>에서 슈렉과 피오나 못지않은 드라마틱한 로맨스의 주인공은 바로 동키와 핑크 드래곤이다. 처음에는 거대한 핑크 드래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그녀의 ‘여성성’을 이용했던 동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핑크 드래곤의 구애를 피하다가, 마침내 그녀의 도움을 받아 슈렉과 피오나를 구해내는 과정에서 그녀의 진정한 여성성을 발견해내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여자 생쥐와 남자 사자 사이의 슬픈 로맨스처럼,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에피소드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슈렉>은 우리가 ‘어쩔 수 없다’고 믿었던 생물학적 차이마저 유쾌하게 넘어버린다. <슈렉 3>에서 핑크 드래곤과 동키 사이에서 태어난 귀여운 ‘하이브리드’들은 우울한 결핍 혹은 넘어설 수 없는 차이를 핑계로 헤어지는 사람들에게 통쾌한 해답을 제공한다. 너와 나의 차이가 인종의 차이든, 계급의 차이든, 더 나아가 ‘생물학적 종(種)의 차이’일지라도, 우리의 사랑이 그 차이를 끌어안을 만큼 크고 따스한 것이라면, 그 사랑의 결과물은 저토록 귀여운 ‘하이브리드’ 후손들일 것이라고 말이다. 
 

     동화들은 흔히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난다. 하지만 <슈렉2>와 <슈렉 3>는 간신히 서로의 사랑으로 맺어진 슈렉과 피오나 커플이 정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장애물들이 남아 있음을 증언한다. 아무리 위대한 커플이라도 ‘결혼’만 했다 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여곡절과 산전수전을 ‘함께’ 했다는 수많은 추억의 퍼즐들이 모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행복’이라는 커다란 모자이크로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행복’은 단지 주어진 유리한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 그러므로 행복은 불행의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위험과 불안과 공포까지 마침내 끌어안을 수 있는 감성의 스케일이 아닐까.




   모든 장애물은 ‘잠시’ 활동을 멈추었고, 드디어 아름다운 두 연인의 키스 타임이 시작된다. 마법이 풀리는 방식은 단지 괴물이 미남미녀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모습이 되는 것 또한 마법이 풀리는 ‘또 하나의 길’이니까. 두 사람의 키스가 끝나고 피오나가 거대한 빛의 소용돌이 속에 공중부양까지 당한 이후에도 피오나는 ‘낮의 미모’를 회복하지 못한다. 뭔가 내 안의 응어리가 한바탕 시원하게 씻겨나간 것 같은 느낌은 분명한데, ‘못생긴 외모’는 그대로다. 이럴 수가. 슈렉의 간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끈질긴 마법이 풀리지 않은 것일까.




 슈렉 : 사랑해요, 피오나.
 피오나 : 슈렉, 나도 사랑해요. 그런데 이해가 안 되네요. 공주는 아름다워야 하는데, 난 왜 이렇죠?
 슈렉 : 당신은 이미 아름다워요. 

 


   우리가 버린 아브젝트를 우리 안의 창조적 혼돈으로 바꾸는 기술. 그것이야말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여성적 힘, 바로 ‘사랑’의 기술일 것이다. 영원히 너의 사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지금은 네가 나를 사랑하지만 내 얼굴이 주름살로 뒤덮이거나 나보다 더 매혹적인 대상이 나타나면 네가 나를 떠날 것이 분명하다는 불안감, 나의 선천적인 결핍이 너의 밝은 미래에 어둠을 드리울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런 것들은 사랑의 ‘아브젝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브젝트를 끌어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고수들이 지향하는 ‘커플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서로의 결핍을 통해 타자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앓게 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동키처럼, 슈렉처럼, 피오나처럼, 그 어떤 결핍이나 단점도 끝내 ‘사랑의 구실’로 변신시키는 연애의 기술을 배운다. 사랑이 원초적으로 품은 불안과 우울, 그 자체가 삶을 아름답게 요리하는 상상력의 에너지원이 되는 순간. 우리의 사랑은 나의 결핍이 도드라질수록, 너의 결점이 유난히 눈에 띌수록, 이상하게도 더욱 완전해지는 즐거운 신비다. 


 

   
 

 나는 여성을 회복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 보는 관점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원하는 미국의 어떤 여성주의자들은 그러한 관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의 동력인 이 영원한 주변성으로 시작하여 긍정적인 개념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성성이란, 달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태양의 반대라는 점에서 바로 이 달의 형태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 여성이 남성보다 주변성을 더 많이 소유할지는 몰라도, 남성 역시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화해시킬 수 없는 이 부분을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아마도 항상 헤겔이 말한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태양’의 반대편에 있는 ‘달’로서의 여성은〕 공동체가 폐쇄적이지 않도록 하고, 동질적이고 그래서 억압적이지 않도록 하는 불침번일 수 있다. 즉, 나는 여성의 역할을 일종의 불침번, 이질성, 그래서 항상 감시하고 경쟁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 <줄리아 크레스테바 인터뷰>(199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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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 2010-01-19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휴~크리스테바와 함께 하니 <슈렉>이 이렇게 슬픈 영화가 될 수도 있는 거였군요...

니모 2010-01-2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의 결핍과 너의 결점이 넘쳐날 수록 더욱 차오르는 사랑의 신비~!^^

맨손체조 2010-01-2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괴물'의 입장을 듣는 것. 우리가 타자화한 것, 배제한 것들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⑫

 

12. ‘우울한 결핍’에서 ‘유쾌한 차이’로 (2) 

   
  슬픔은, 그 사람이 좌절감을 느끼기 때문에 적대적으로 생각되는 타인에 대한 숨겨진 공격이 아니라, 상처 입고 불완전하며 텅 빈 원초적 자아의 증거이다. 그러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격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근본적인 결함, 선천적인 결여로 인해 고통받는다고 생각한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스스로를 향한 타인들>(1989) 중에서
 
   




  슈렉은 슬픔을 방패로 삼아 타인의 접근을 불허하고, 마침내 거대한 슬픔의 커튼 뒤에 숨어버린다. 오랫동안 슈렉은 슬픔의 벽돌로 지은 마음의 성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슈렉은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이웃도 없이 오랫동안 자기만의 늪에 갇혀 지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절망은 처음에는 슬픔의 ‘원인’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 선택한 고립과 후천적 대인기피증의 ‘핑계’로 작용한다. 그에게 슬픔은 자신의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선천적인 결핍, ‘괴물’로 태어난 저주받은 운명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 따윈 필요 없어’라고 결론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슬픔이었다.  





   그런 슈렉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아니 친구가 생겼기에 사랑하는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모두가 꺼리는 슈렉의 늪에 처음 찾아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는 동키가 있었기에 슈렉은 모험을 떠날 수 있었고 피오나를 만날 수 있었으며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온갖 갈등과 혼란, 서로 다른 존재들로 가득 찬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는 한 자폐적 우울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슈렉은 자신을 둘러싼 슬픔의 장막을 스스로 거두고 그녀에게 다가가기를 원한다. 파쿼드와의 결혼을 앞두고 조바심과 두려움에 떠는 피오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진정한 사랑’으로 ‘마법’이 풀리게 될 것이라는 동화적 스토리에 대한 불안한 확신뿐이었다.  





   피오나와 파쿼드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듀록의 모든 시민이 모였다. 파쿼드 군주의 명령에 따라 웃으라면 웃고 박수 치라면 박수 쳐야 하는 듀록의 사람들. 드디어 만인 앞에서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선언하는 순간. 슈렉과 동키는 피오나를 구출하고 슈렉의 진심을 알리기 위해 결혼식장으로 잠입한다. 이 결혼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앞으로 나오라는 의례적인 코멘트를 향하여 “불만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슈렉. 사람들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 게다가 모두가 두려워하는 괴물 오우거가 나타나자 술렁거리고, 피오나는 반가움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복잡한 표정으로 슈렉을 바라본다.



 
 슈렉 : 피오나 공주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혹시 제가 너무 늦지 않았나요? (……) 이 결혼은 안 됩니다.
 피오나 : (두려움 반 설렘 반이 뒤섞인 표정으로) 왜죠?
 슈렉 : 왜냐하면, 왜냐하면……. 파쿼드는 왕이 되기 위해서 당신과 결혼하려는 거예요. 그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피오나 : (새치름한 표정으로)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당신이 뭘 아나요?
 슈렉 : 저……. 저는요.
 파쿼드 : (슈렉이 더듬거리는 틈을 타 슈렉을 조롱하며) 이거 정말 재미있군! 오우거 주제에 공주님을 사랑하다니! (좌중의 ‘폭소’를 억지로 유도하며 슈렉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괴물과 공주의 사랑이라니! 으하하!
 피오나 : (파쿼드의 ‘폭로’를 통해 드디어 슈렉의 진심을 알게 된 후) 저 사람의 말이 정말인가요? (저물어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제 자신의 비밀을 밝힐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이윽고 해가 지고 석양과 함께 점점 변해가는 피오나의 ‘밤의 얼굴’이 드러난다) 저는 이렇게 낮에는 예쁘고 밤에는 못생긴 사람이에요. 이 비밀을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슈렉은 피오나의 ‘못생긴’ 얼굴에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표정이다. “이제야 모든 오해가 풀렸네요.” 공주가 슈렉을 밀어내는 것이 슈렉이 ‘오우거’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슈렉. 파쿼드는 피오나의 ‘밤의 얼굴’에 대경실색하지만 어쨌든 피오나를 아내로 맞아야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슈렉을 추방하고 공주를 다시 성 안에 가두려 한다. “저놈들을 끌어내라! 당장 끌어내라! 이 결혼식은 끝났다. 이제 나는 왕이다! 너를 죽여버리겠다! 슈렉! 내 와이프는 피오나! 그 탑에 다시 갇혀서 여생을 보내도록 하겠다!”

   파쿼드는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혀 슈렉을 처치하고 피오나를 감금하려 하지만, 피오나와 슈렉 사이에는 이미 진정한 사랑을 확인한 커플 사이에서만 오가는 은밀한 환희의 눈짓이 오간다. 그들은 드디어 서로의 ‘우울한 결핍’을 ‘유쾌한 차이’로 탈바꿈시킨 유쾌한 사랑의 기적을 실현한 것이다. 이제 피오나의 평생의 굴레였던 마법의 저주는 드디어 풀릴 것인가.  




 

   
 

크리스테바의 진술에 따르자면, 모든 문학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이고, 작가가 이질적이고 불결한 것을 배출하는 시도이다. 모든 정화 의식을 가진 성경이 일찍이 이것을 예증했다. 그러나 20세기 문학은 서사적 조직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파열의 위협을 받는 얇은 필름인지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든 서사물은 허구적 통일성, 즉 단일한 의미와 동일성을 창조하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통일성이 아브젝시옹의 효과인 한, 그것은 박약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것은 고통의 이야기가 된다.
 - 노엘 맥아피 지음, 이부순 역,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 앨피, 2007,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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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fn 2010-01-1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쵸잉...슬픔이 장기화되면 그 원인은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어버리죠. 슬픔 자체가 원인이 되어버리니...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⑪

 

11. ‘우울한 결핍’에서 ‘유쾌한 차이’로 (1)


 동키 : 슈렉, 난 너랑 같이 살고 싶어.
 슈렉 : 이봐, 내가 전에도 말했지! 나는 너랑 같이 살지 않아. 난 혼자 살아! 내 늪! 나! 딴 사람은 아냐! 알겠어? 다른 사람은 싫어! 특히 쓸모없고 짜증나는 말하는 당나귀는 필요 없어!  





   마침내 파쿼드 영주는 아름다운 피오나 공주의 ‘실물’을 보게 되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즉석에서 청혼한다. 전리품을 챙기듯 피오나 공주를 차지하려는 파쿼드의 부담스런 프러포즈. “아름다운 피오나 공주님, 완벽한 신랑의 완벽한 신부가 되어주시겠습니까?” 완벽한 신랑과 완벽한 신부의 조합. 파쿼드가 꿈꾸는 결혼은 신랑 신부의 계약을 통해 재산과 권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피오나 공주의 섹시함은 이 결혼으로 인해 쟁취할 경제적 ·정치적 가치의 ‘덤’인 셈이다.




   피오나 공주의 ‘밤의 얼굴’을 목격한 동키는 이미 서로 사랑에 빠지고서도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는 두 남녀의 ‘양파껍질’을 벗겨내고자 한다. 동키가 보기에 피오나와 슈렉은 더할 수 없는 찰떡궁합이다. 미녀가 야수를 구해내 야수를 기어이 왕자로 탈바꿈시킬 필요도 없고, 아름다운 미녀와 백마 탄 기사가 되기 위해 각종 재테크와 최첨단 성형수술에 목맬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동키의 눈에 비친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최상의 커플이다. 파쿼드가 피오나 공주를 납치하다시피 데려간 후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슈렉을 보며 동키는 드디어 진심을 털어놓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슈렉이 늪 주변에 쌓고 있는 거대한 마음의 울타리, 자폐증의 성벽부터 부숴버려야 한다. 파쿼드로부터 돌려받은 늪이 몽땅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슈렉을 향해 동키는 이 늪에서 함께 살면 되지 않느냐고, ‘내 것’과 ‘네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동키 : 흥, 그래, 내 늪! 나도 같이 공주를 구했으니까, 절반의 대가는 내 거야.
 슈렉 : (……) 여긴 내 늪이야!
 동키 : 우리 늪이야!
 슈렉 : 포기해!
 동키 : 네가 포기해!
 슈렉 : 흥, 그럴 순 없지!
 동키 : 너는 항상 나, 나, 나만 챙겨. 이제 내 차례야! 넌 항상 날 못살게 굴고, 내가 하는 일을 전혀 고마워 안 해! 항상 막 대하거나 밀쳐내!
 슈렉 : 그래? 그렇게 못살게 굴었는데 왜 다시 온 거야?
 동키 : 친구란 그런 거기 때문이지. 서로 이해해 주고 용서하는 거야! 넌 너무 껍질이 많아, 양파 놈아!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도 몰라! (……) 공주님은 널 좋아했었고 어쩌면 사랑했었을 뿐인데.
 슈렉 : 사랑한다고? 내가 못생겼다고 했어! 괴물이랬어! 둘이 말하는 걸 들었어.
 동키 : 네 얘기한 게 아니었어. 그 얘긴, 다른 사람에 대한 거였어.

 


   ‘끔찍한 괴물’의 오명을 견뎌온 슈렉과 피오나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지만 아직 슈렉은 피오나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동키는 자신이 말해줄 수도 있지만 슈렉이 그 비밀을 피오나에게서 직접 듣기를 바란다. 슈렉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동키의 우정을 깨닫고 비로소 ‘내 늪’과 ‘네 늪’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모두가 날 싫어해’라는 핑계를 대며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던 자신의 편협함을 깨닫는다.

   동키, 슈렉, 피오나는 서로의 결핍을 통해 배운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앓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아브젝트의 가냘픈 흔적을 더듬는다. ‘인간의 영지’와 ‘괴물의 늪’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우리 안의 ‘코라’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길은 없을까. 

 

   
  여성의 희열을 억압된 것으로 보는 라깡과 달리, 크리스테바는 희열과 모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어머니의 몸은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는 코라(chora)이며 희열의 장소, 즉 상징계에서 경험할 주체성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곳으로 강조된다. 이 모성적 육체는 상징계에서 경험할 자아와 타자의 분열, 언어적인 체험을 모두 내포하고 포괄하는 장이 된다. (……) 어머니의 몸은 주체와 분리된 후에도 주체의 무의식에 흔적으로 남아 상징계 질서의 ‘분리의 경계선’에 들어가 그 경계선을 와해하는 적극적인 힘이 된다.
 - 김진옥, <크리스테바와 델러웨이 부인>, 근대영미소설 제12집,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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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ny 2010-01-16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슈렉과 피오나는 굳이 아름다운 공주와 백마탄 왕자가 되기 위해 각종 재테크와 최첨단 성형수술에 목 맬 필요가 없다! ^.^정말 그렇군요ㅋㅎㅎ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⑩

 

10. 동화의 철책에 갇힌 주인공들 (2) 



동키 : 당신은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어요. 흠, 거짓말이었고요, 사실 못 생겼어요. 하지만 밤에만 그렇잖아요. 슈렉은 하루 종일, 24시간 못생겼어요.
피오나: 동키, 나는 공주야, 공주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괴물’, 동화 속에 나오는 각종 도깨비, 다양한 괴담 속에 존재하는 ‘귀신’들이 매혹과 공포의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야말로 크리스테바가 말한 ‘아브젝시옹’의 대표적 대상들이다. 그 더러움과 끔찍함이 ‘우리’의 정체성을 더럽힐까 봐 추방하고 배제했던 아브젝트들. 우리는 의식의 차원에서는 아브젝트를 밀어내지만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아브젝트에 대한 미련과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슈렉>에서 각종 동화 속 생물을 배제해버린 ‘살균된 세계’ 듀록은 예전처럼 활기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다. 그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치부’, 아브젝트를 버림으로써 점점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야만’으로 치부된 것들을 금지할수록 ‘문명’의 다양한 가능성이 사라져버리듯이, 우리 안의 아브젝트를 지나치게 배제할수록 우리 안의 ‘코라’는 질식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다운 것’을 찾기 위해 ‘나답지 않은 것’을 오려내다 보면 언젠가는 ‘나’조차 사라지지 않을까. 


   동키에게 먼저 ‘밤의 모습’을 들켜버린 피오나는 ‘공주답지 않게’ 못생겼지만, 금발의 바비인형이나 디즈니형 백설공주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아는 슈렉은 분명 그녀만의 매력을 발견해낼 것이며 반드시 그녀의 ‘마법’이 풀려 ‘진정한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동화 속 스토리의 압박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피오나는 아직 한 번도 누군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혼자서 용을 때려눕히고 얼마든지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랑을 찾을 수 있으면서도 그녀가 스스로를 거대한 성 안에 가둔 것은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동키 : (‘못생긴’ 피오나로 변해버린 공주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 당신은 누구세요? 우리 공주님을 도대체 어떻게 했어요?
 피오나 : 동키, 조용히 해! 내가 공주야.
 동키 : 맙소사! 당신이 우리 공주님을 먹어버렸군요!
 피오나 : 아니, 이게 바로 나야. (……) 그래, 난 못생겼어. (……) 해가 지고 나면 이렇게 변해. 낮에는 예쁘고 밤에는 못생겼어. 이렇게 지내왔어. 진정한 사랑의 첫 키스를 받을 때까지. 그러면 사랑으로 진정한 모습을 찾게 될 거야. (……) 밤마다 이렇게 변신해. 이 끔찍한 못생긴 괴물로 변신해! 탑에 갇혀서, 진정한 사랑이 구해 주는 날이 오길 기다리게 되었어.
 그래서 해가 지고 내 변신한 모습을 보기 전에 파쿼드 군주랑 결혼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만 해, 진정한 사랑의 첫 키스만이 주문을 풀 수 있어.


 그녀는 영원히 성 안에 갇히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를 동화 속 마법의 환상에 가둠으로서 오히려 스스로를 ‘아브젝트’로 전락시킨 것은 아닐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녀는 깨닫지 못한다. 그녀는 동화 속 스토리의 실현만을 믿으며 자기 안의 무한한 ‘코라’도 미처 개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위기상황이야말로 그녀가 ‘마법’이 아닌 ‘사랑’으로 스스로 변신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가 아닐까.
   사랑하는 것을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불안이야말로 우리 안의 무한한 가능성의 에너지, 즉 코라의 활동을 촉발하는 가장 위력적인 촉매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피오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슈렉의 불안이야말로 한 번도 타인을 자신의 늪으로 초대하지 않았던 그의 후천적 자폐증을 치유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 안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불완전한’ 대상을 ‘완벽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 자신의 사랑이 궁지에 몰렸을 때 대상을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으로 분열시키려는 욕망이 공존한다. 크리스테바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던 정신분석의 대가 멜라니 클라인은 애정의 대상을 상실할 것만 같은 불안과 공포야말로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정서의 핵심적 요소임을 간파했다. 사랑은 완벽한 대상에 대한 매혹이 아니라 불완전한 대상에 대한 불안과 슬픔과 혼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좋은 대상을 어떻게 추리고 나쁜 대상을 어떻게 없애는가. (......) 애정 대상을 구하고 그것을 보상하고 회복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 우울증 상태에서 절망과 연결되어 있는 시도들은, 자아가 이러한 회복을 성취하는 자신의 역량에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승화와 전체적 자아발달을 위한 결정 요소들이다. (......) 나는 애정대상이 파괴되어 형성된 조각들의 승화와 그리고 그 조각들을 하나로 합치려는 노력의 구체적인 중요성을 언급할 것이다. 그것은 조각나버린 ‘완벽한 대상’이다. 이와 같인 완벽한 대상이 약화되는 붕괴의 상태를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노력은 그 애정의 대상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들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게다가 완벽의 개념은 대상의 붕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강제적이다.
 증오하는 어머니로부터 외면당해왔던, 혹은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각종 메카니즘을 사용했던 환자들. 그들의 마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상(picture)이 존재함을 발견했다. 실제 대상은 아름답지 않은 것, 정말로 상처받고 치료할 수 없으며 따라서 두려운 사람으로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상은 실제 대상과 분리되어 왔지만 절대 포기되지는 않았으며 그 환자들의 구체적인 승화 방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완벽함에 대한 욕망은 붕괴의 우울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 결과 모든 승화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멜라니 클라인, <조울증의 심리적 기원>,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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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kffkthkffk 2010-01-15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피오나 공주, 보면 볼수록 '복스러운' 얼굴^^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⑨

 

9. 동화의 철책에 갇힌 주인공들 (1) 



 동키 : 두 사람 서로 좋아하잖아. 이봐. 슈렉, 감정을 무시하면 안 돼. 그녀에게 네 감정을 말해 줘.
 슈렉 : 안 돼. 그녀는 공주야. 나는, 나는……
 동키 : 괴물이라고?
 



   오랫동안 성 안에 갇혀 있던 공주답지 않게 우울증의 기미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명랑소녀 피오나. 특히 동화 속 캐릭터 중 하나인 로빈 후드가 나타나 그녀를 슈렉에게서 빼앗아 가려하는 대목에서 명랑소녀 피오나의 진면목이 발휘된다. “전 당신의 구원자입니다! 당신을 구출하러 왔습니다! 저 녹색 괴물로부터!” 잘난 척, 잘생긴 척, 멋진 척은 혼자 다 하는 로빈 후드에게 슈렉이 괴력을 보여주기도 전에, 피오나는 <미녀삼총사>의 유쾌한 패러디 액션으로 로빈 후드 일당을 일거에 퇴치해버린다. 슈렉의 엉덩이에 꽂힌 화살을 빼주며 두 사람 사이에는 로맨틱한 감정이 싹트는데.

 


   이렇게 유쾌 ·상쾌 · 통쾌한 성격을 지닌 피오나는 황혼녘만 되면 히스테리 증상을 보인다. 슈렉, 동키 일행과 함께 듀록으로 가던 중 피오나는 어둠이 밀려오자 겁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은신처를 찾는다. 그녀는 저녁마다 ‘괴물’로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어 황혼녘만 되면 숨을 곳부터 찾는 것이다. 로빈 후드뿐만 아니라 성을 지키고 있던 거대한 핑크 드래곤도 한방에 기절시킬 것 같은 괴력을 지닌 피오나는 왜 그동안 얌전히 누워 백마 탄 기사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피오나를 가두고 있었던 것은 핑크 드래곤이나 거대한 성벽이 아니라 왕자가 자신을 구해주면 마법이 풀릴 것이라는 동화 속 환상의 스토리가 아니었을까. 피아노 공주를 옭아매고 있었던 것은 동화의 교과서적 내러티브였다. 영화 <슈렉>은 동화의 낭만적 환상으로부터 ‘해방’되는 두 남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피오나는 “내 신랑이 될 파쿼드 군주는 어때요?”라고 물어보면서도 사실 자신을 구해준 ‘진짜’ 영웅 슈렉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피오나 : (슈렉이 구워주는 고기를 맛있게 뜯어 먹으며) 이게 뭐죠?
 슈렉 : 들쥐에요, 들쥐 바비큐.
 피오나 : 그래요? 맛있어요.
 슈렉 : 들쥐국을 해 먹어도 맛있어요.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만 제가 끓인 들쥐국은 정말 맛있어요.
 피오나 : (슈렉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내일 밤에는 조금 다르게 식사를 하고 있겠군요.
 슈렉 : 언제 절 보러 늪으로 놀러 오세요. 맛있는 요리해 드릴게요. 개구리 수프, 생선눈 타르트, 말만 하세요.(……) 저 석양을 보세요. 정말 아름답죠?
 피오나 : 석양? 이런, 이런! 늦었어요. 정말 늦었어요.
 슈렉 : 왜 그래요? 잠깐만요, 이제 알거 같아요. 어둠을 두려워하시는 거죠?
 피오나: 네, 맞아요! 정말 무서워요.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슈렉은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에게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라는 말을 한다. 사랑스런 피오나는 누구도 들이고 싶지 않은 슈렉의 늪으로 초대받은 첫번째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슈렉은 아직 두렵다. 파쿼드 군주와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피오나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를, 이 괴물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공포를 딛고, 아무도 우리를 축복해주지 않을 거라는 불안을 딛고, 슈렉과 피오나는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백마 탄 왕자에 대한 피오나의 상상이 틀렸듯이 우아하고 얌전하게 왕자님만을 기다리는 공주에 대한 상상도 틀렸다. 우리가 ‘그러리라’고 믿었던 공주와 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대의 지배적 담론에 맞게 변형된 공주와 왕자의 전형이 존재할 뿐.  






 

   
  우리가 씹어 먹은 아동 동화는 아직 우리 위장 속에 들어 있다. 아동 동화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다. 백설공주와 그녀를 구해준 영웅 왕자는 우리의 두 가지 거창한 픽션이다. 이 두 픽션 사이에서 우리에겐 정말이지 별다른 승산이 없었다. (……) 소년들은 백마에 올라타고 난쟁이를 찾아가서 백설공주를 사오는 꿈을 꾸고, 소녀들은 시간증(屍姦症) 환자의 욕망의 대상(순결한 희생양인 잠자는 공주, 최고로 어여쁜 살덩이, 잠자는 상품)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때로는 알지만,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배웠던 역할을 연기한다.
 -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 <여성혐오Women hating>, Plume,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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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1-13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디즈니>와 <꿈공장>의 차이를 대표하는 <슈렉>! 들쥐 바베큐가 정말 어떤 맛인지 궁금하게 만들었던 <슈렉>!

qlqk 2010-01-1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가 씹어먹은 동화는 아직 우리 위장 속에 들어 있다! 움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