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⑩

 

10. 슬픈 히트상품, 노스탤지어…… (1) 

  제이크 : (영혼의 나무 앞에서 기도하며) 에이와님. 정말 계신다면 저희를 도와주세요. 인간들이 대지를 파괴해버렸고 이젠 우리를 파괴하려 해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네이티리 : (연민과 사랑이 교차하는 눈으로 제이크를 바라보며) 대지의 어머니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세계의 균형을 지키실 뿐이시지.  


  

   
  언젠가 정부 당국에서 소총과 권총을 나누어 주었지만 인디언들은 그것을 집 안에 걸어놓기만 했다. 대신에 그들은 사냥을 할 때 총기류라고는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전통적인 기술로 만들어진 활과 화살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당국의 노력에 의해 날치기식으로 덮어 가리워졌던 예전의 생활방식이 재차 주장되었다. 황폐한 부락에서는 지붕들이 차례로 먼지 속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만, 인디언들은 숲 속의 오솔길 사이로 줄을 지어 다녔다.
 우리들은 보름 동안이나 계속하여 말을 타고 숲 속을 헤쳐 나갔다. 그런데 숲이 너무 방대하고 길을 잘 알 수가 없어서 우리는 목적지에 도척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어둠 속에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놀랍게도 우리가 타고 간 말들은 높이가 30미터나 되는 나무들이 햇빛을 가로막는 어둠 속에서도 조금도 길을 잘못 찾는 법이 없었다.
 - 레비스트로스, 박옥줄 옮김, <슬픈 열대>, 삼성출판사, 1997년, 156쪽.
 
   
 




   <아바타>에는 최첨단의 미래와 태고의 과거가 치열하게 공존한다. 나비족은 원시부족을 향한 노스탤지어가 담뿍 담긴 반인반수의 이미지이지만, 그 이미지를 상상 속에서 복원한 힘은 첨단 과학의 테크놀로지다. <아바타>를 보며 나는 오래 전 과학의 이름으로, 문명의 이름으로 짓밟은 원시문명을 최첨단 과학의 테크놀로지로 복원하고자 하는 헐리웃 대자본의 아이러니를 느꼈다. 인류는 사력을 다해 인디언과 아마존의 문명을 파괴해놓고 이제 와서 잃어버린 원시문명의 잔해를 되살려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일까.

   이제 원시문명을 향한 노스탤지어는 하나의 거대한 전 지구적 산업이 되어가는 것 같다. 대중의 원시문명에 대한 향수는 ‘돈’이 된다. 그 집단적 향수에 기생하는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급증한다. 그런데 <아바타>의 대담성은 그 모든 상업적 계산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중의 뇌 구석구석을 스캐닝한 것처럼, 대중이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포착해낸다는 점이다. <아바타>는 과거를 향한 노스탤지어와 미래를 향한 노스탤지어, 그 사이에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한다. 우리는 단지 과거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또한 그리워한다. 지금 여기의 삶밖에 누릴 수 없는 인간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도 참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잃어버린 지도 모르면서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는 아련한 감정. 그 모호성이야말로 노스탤지어가 서식하기 딱 좋은 심리적 환경이 아닐까. 



   노스탤지어는 ‘단절’에 대한 공포감이기도 하다. 노스탤지어는 과거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 과거 혹은 미래와 ‘나’의 육체가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서글픈 확신 때문에 생겨난다. 그런데 <아바타>의 나비족들은 자신들의 노스탤지어를 매우 지혜로운 방식으로 해소한다. 그들은 영혼의 나무를 통해 과거의 조상들이 살았던 삶의 소리와 교신한다. 동물과 인간, 과거인과 현재인,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샤헤일루’(교감)를 시도한다.

   그들은 세상에 한 번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단지 죽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공존한다고 믿는다. 하늘과 땅, 자연과 인간뿐 아니라 현재인과 과거인까지도 서로 교감하고 있다. 아무것도 진정으로 ‘사라지지 않는’ 세계이므로 때늦은 사후약방문식 노스탤지어가 자리 잡을 틈이 없다. 네이티리는 제이크에게 영혼의 나무를 통해 조상의 소리를 들려주며 속삭인다. “우리 조상의 소리. 오래된 시간의 소리야.”




   네이티리의 재능이 샤헤일루(교감)라면, 제이크의 재능은 미메시스(모방)다. 동물과 식물은 물론 물과 바람과도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네이티리는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뜨거운 샤헤일루를 실천한다. 제이크는 방대한 과학적 지식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몸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비록 다리를 쓸 수 없지만 불구가 되어버린 그의 신체에는 아직 치열한 육체적 단련의 기억이 남아 있다. 아바타의 육체, 아니 나비족의 육체를 입자마자 희미하게 남아 있던 그 ‘육체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이 아니라 기계와만 교신하는 쿼리치 대령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다. 제이크의 몸은 뛰어난 학습능력을 지녔고 그 핵심은 바로 사물의 이미지와 정신을 모방하여 자기화하는 ‘미메시스’의 능력인 것이다. 그가 짧은 시간 안에 나비족의 일원이 되기 위한 혹독한 통과의례의 문턱을 뛰어넘는 비결도 바로 이 걸출한 미메시스 능력에 있다. 그는 네이티리의 샤헤일루 능력을 모방함으로써 나비족은 물론 판도라의 생태계와 교감할 수 있는 막강한 ‘몸의 지식’을 습득하게 된 것이다.   



   
 

   모를레 신부는 18세기에 이렇게 썼다. “자연은 어머니 품(또는 연인의 품) 안에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그 순간조차 아름다움은 지속되지 않는 법이다. 아름다움은 간혹 한 찰나에 불과하다.” 사진은 바로 이 기회를 잡았다. 사진은 그것을 보여준다. 순간성, 바로 그것이다. ‘눈속임 그림’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 아니 잘 못 보는 것, 또는 그저 스치듯 보는 것. 그래서 이제는 영원히 보게 될 것을 잡아내고 보여준다.
 - 레비스트로스, 고봉만 류재화 옮김, <보다 듣다 읽다>, 이매진,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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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 2010-02-05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샤헤일루와 미메시스. 어쩐지 둘이 잘 통하는 것 같네요... 발음도 엄청 이쁘고^^

맨손체조 2010-02-05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스탤지어는 단절에 대한 공포이다! 그렇죠. 귀환하지 못하는 자의 애도이기도 하구요.

니모 2010-02-07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막강한 몸의 지식, 미메시스~! 머리로만 살다보니 우린 그걸 잃어버렸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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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⑨

 

9. 두려워하지 마, 내가 너의 거울이 되어줄게 (3)


 네이티리 : 이크란은 평생 동안 교감이 이루어진 단 한 명의 전사와 날아가는 새야. 진정한 전사가 되려면 이크란과 전사가 서로를 선택해야 해.
 제이크 : 언제?
 네이티리 : 때가 되면……. 



 제이크 : (네이티리 앞에서 날렵하고 확신에 찬 동작으로 짐승을 사냥하며, 죽어가는 짐승을 향해 속삭인다.) 미안해……. 에이와 여신이 네 영혼을 거둘 거야. 네 몸은 여기 나와 이곳 사람들의 일부가 될 거야.
 네이티리 : (대견하는 눈빛으로 제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제 때가 되었구나. 




   제이크는 아름다운 네이티리의 노란 눈동자를 통해 이전에는 결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바라본다. 판도라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공격적인 호기심으로 자연을 바라보았던 제이크는 조금만 낯선 동물이라면 거침없이 총을 겨누곤 했다. 네이티리가 자주 하는 말 중에 ‘샤헤일루’(교감)라는 말이 있다. 제이크는 네이티리를 통해 언어가 아니어도 온몸으로 자연과 교신할 방법을 배운다. 네이티리는 나비족에게 가장 친밀한 동물인 ‘팔레이’를 ‘교통수단’이 아니라 ‘그녀’라고 표현하며, 인간의 머리카락을 통해 동물과 ‘샤헤일루’를 이루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녀의 심장 박동을 느껴봐. 그녀의 숨소리를 느껴봐. 그녀의 강인한 다리를 느껴봐.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야기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이제 ‘때’가 왔다. 제이크에게는 드디어 오직 그에게만 교감하는 멋진 이크란이 생겼고, 나비족은 제이크를 완전한 ‘형제’로서 인정한다. 제이크는 나비족의 삶이라는 거대한 거울을 통해 한 번도 비춰보지 못한 자신의 전신을 비춰본다. 인간에게 알려진 우주에서 가장 혹독한 행성이었던 판도라는 이제 사랑하는 네이티리와 함께 살아가고 싶은, 더없이 아름다운 삶의 터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제이크는 아바타 프로그램이 ‘과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과학자가 아니긴 하지만 아바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스스로 ‘나는 지금 과학을 하고 있다(I'm doing science)’라고 믿고 있었다. 그 과학의 일부가 바로 아바타를 ‘조종’하는 것이었다. 제이크는 이제 더 이상 ‘아바타 드라이버’에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의 임무는 아바타를 조종하며 느낀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점점 ‘기록’할 수도 ‘보고’할 수도 없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영혼의 파동을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이 죽인 동물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느낀 한없는 연민과 고마움을, 자신이 사랑하기 시작한 소녀의 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아바타 프로그램의 ‘과학적’ 보고서에 담을 수는 없었기에. 
 
 

  

   
  레비스트로스는 남북아메리카 양 대륙에서 기록된 수천 종류의 신화를 변형군으로서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하나의 신화가 마치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볼레로>처럼 아주 조금씩 스스로를 변형시켜 가다가 커다란 전체성을 가진 음악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아마존의 인디언의 신화가 조금씩 스스로를 변형시켜 가다가 마침내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로 모습을 드러내는 식입니다.
 -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2005, 동아시아, 55쪽.
 
   




 
   제이크는 네이티리와 아름다운 ‘첫날밤’을 보낸 후 숲 속에서 잠든다. 제이크가 아직 아바타와 ‘링크’도 시작하지 않은 새벽에, 쿼리치 일당은 예고도 없이 판도라 행성에 선제공격을 가한다. 아바타와 링크가 되지 않아 눈도 못 뜨고 몸도 마비 상태인 제이크. 영문을 모르는 네이티리는 필사적으로 제이크를 깨우려 하지만 제이크는 아직 그레이스 박사와 ‘인간의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다. 가까스로 링크가 되자마자, 거대한 포크레인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아름다운 ‘영혼의 나무’를 바라본 제이크는 분노에 치를 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포크레인 위로 올라가 카메라(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인간들의 ‘눈’의 역할을 하는)를 부숴버린다. 제이크가 더 이상 아바타 조종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아바타 그 자체, 아니 나비족의 일원이 되는 순간이다. 아바타 프로그램의 동료에게는 ‘배신자’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야영자들이여, 파라나(브라질 남부에 있는 주)에 캠프를 쳐보시오. 그곳이 아니라면 캠프를 치지 말도록 하시오. 당신들이 지녔던 기름기 많은 종이들이나 빈 맥주병, 그리고 내버린 깡통들을 유럽의 마지막 흔적으로서 남겨 두시오. 그곳은 당신들이 텐트 치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개척 지역을 벗어나거나 그곳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격류들이 자유스럽게 흰 거품을 일으키며 현무암으로 된 자줏빛의 산허리로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두시오. 만지기에는 너무 날카롭고 차가운 화산성 이끼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도록 하시오. 그리고 당신이 사람들이 살지 않는 초원을 처음 발견하였거나, 안개가 몹시 짙은 침엽수림의 숲속에 가까이 가게 되었을 때는 결코 더 이상 들어가지 마시오.
 - 레비스트로스, 박옥줄 역, <슬픈 열대>, 삼성출판사,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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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키펀펀 2010-02-03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이티리의 눈동자에 다이빙 하고 싶은 늦은 오후입니다~ 파란 피부에 노란 눈동자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신인류의 창조 테크놀로지에 혀를 내두를 뿐^^

니모 2010-02-0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린 요새 누구의 거울도 되기 싫어하는 것 같아요. 서로의 눈길을 마구마구 반사, 반사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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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⑧

 

8. 두려워하지 마, 내가 너의 거울이 되어줄게 (2)


 

  파커 : 도대체 나비족이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겠어. 학교도 지어주고 영어도 가르쳐 주었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고.
 그레이스 : 그들에게 총질을 해대니까 그렇죠!
 쿼리치 대령 : (……) 파란 원숭이놈들 마음을 움직일 당근을 알아봐!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채찍을 쓸 수밖에!


   
  인디언의 동물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특히 동물을 죽이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맞습니다. 이때 인간에게는 최고의 경의와 성실함을 갖춘 태도가 요구됩니다. 이때 인간에게는 최고의 경의와 성실함을 갖춘 태도가 요구됩니다. (……) 동물을 공격하기 전에 사냥꾼이 끊임없이 변명하는 광경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동물이 지금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는 공격을 납득해주어서 서로의 ‘양해’ 하에 죽는 것이 바람직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대등하게 대결해 납득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동물이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계속 설득하는 겁니다.
 -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2005, 116~117쪽. 
 
   




   아메리칸 인디언의 생존을 위협한 것은 단지 개척자들의 총칼만이 아니었다. 개척자들이 ‘선물’의 명목으로 주었던 모든 것들, 설탕과 커피를 비롯한 각종 문명의 기호품들, 특히 ‘위스키’야말로 인디언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위스키는 자연과 함께 살아오던 인디언의 삶을 지켜야 한다는 저항의 감각마저 마비시켰다. 알코올중독은 오랫동안 자연과 더불어 아무런 부족함 없이 살아왔던 인디언 부족의 삶을 황폐화시켰다. 식민주의자들이 ‘원조’의 명목으로, 혹은 ‘외교’의 명목으로 제공하는 모든 ‘선물’들은 치명적인 중독성이 있었다. 물질에 대한 필요로 인간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되돌리기 힘든 영혼의 중독성. 

 

   <아바타>의 나비족은 결코 ‘하늘의 사람들’(인간들)이 주는 미끼에 중독되지 않으려 했다. 인간들이 나비족에게 제공하려 한 미끼는 학교, 도로, 병원 같은 문명의 상징들이었다. 그런 ‘원조’는 나비족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나비족은 ‘원조’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그림자를 간파했다. 그들은 자연과 나비족, 그 둘만으로도 충분했던 판도라의 삶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아바타 프로그램의 책임자 파커와 쿼리치 대령은 ‘언옵타늄’을 얻을 수 있다면 나비족의 삶의 터전을 얼마든지 빼앗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정한 협상기한 3개월은 거의 끝나가고, 이제 정말 당근이 아닌 채찍을 휘두를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양쪽의 입장을 모두 잘 이해하게 된 제이크는 점점 더 나비족의 생존 쪽으로 기울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제이크는 나비족과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느낀다.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지금-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오랫동안 판도라의 생태계를 연구해왔던 그레이스 박사 또한 나비족의 입장을 이해한다. 그녀는 나비족에게 영어를 가르쳐준 교사이기도 했다. 그레이스는 ‘채찍’도 ‘당근’도 아닌 ‘마음’으로 나비족에게 다가가야 함을 알고 있다. 그레이스는 과학의 이름으로 판도라를 연구하기 시작했지만 나비족을 통해 과학의 이름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들이 숭배하는 ‘신성한 나무’에 깃든 힘을. 그것은 단지 미신이 아니라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거대한 과학임을. 판도라에서는 더 이상 차가운 과학과 뜨거운 신화가 분리되지 않았다.




 그레이스 : 그 나무들은 신성한 나무예요. 미신이 아니에요. 숲의 생태학을 말하는 거예요. 나무들의 뿌리가 전기화학적으로 소통하지. 한 그루의 나무가 1만 그루와 연결된 거예요. 판도라에는 1조 그루가 넘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들은 인간의 두뇌보다 더 촘촘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종의 네트워크죠. 나비족은 이 나무들의 데이터와 메모리를 이용할 줄 아는 거예요. 진짜 자원은 땅속에 있는 언옵타늄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언제나 존재하는 자연 속에 있다고요.
 파커 : (온 마음을 다해 말하는 그레이스의 눈빛을 조롱하며 차갑게 뇌까린다.) 그건 그냥 평범한 나무일 뿐이야. 



   파쿼와 쿼리치 대령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간은 ‘평범한 나무’로 보이는 신성한 나무의 힘을 인식하지 못한다. 자연을 에너지원으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고정된 에너지원’을 소유하고 개발하고 판매할 수 있다고 믿는다. 네이티리는 끊임없이 제이크를 가르친다. 그런 게 아니라고. 우주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우리는 잠시 그 에너지를 빌려서 쓰는 것일 뿐. 모든 에너지는 잠시 빌린 것이며 언젠가는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제이크는 네이티리의 가르침을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한다. 동물들을 단지 먹기 위해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의 육신을 빌려 잠시 우리는 이 땅에 스치듯 살아갈 것이고 그들이 돌아갈 곳이 에이와 여신의 품인 것처럼, 인간도 언젠가는 에이와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라고.  



   
 

근대에 들어선 이후에도 유독 곰에 대해서는 총의 사용을 금지하는 사냥꾼들이 많았습니다. 전통적인 활이나 화살의 사용을 권했으며, 때로는 쇠로 만든 화살촉마저 금지해 신석기시대처럼 돌로 된 화살촉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무기에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사냥꾼과의 사이에 매우 강력한 공감에 의한 유대관계가 형성됩니다. 무기가 생명이 있는 물체와 같다면 동물들도 그것을 납득하고 받아들여 줄 거라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여하튼 옛날에는 사냥이 위엄을 갖춘 일종의 결투였던 셈입니다. 왜냐하면 언어의 원초적인 형태가 시였으며 교환의 시작이 증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상태에서는 모든 싸움이 결투에 의해 정화되어가기 때문입니다.
  -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2005,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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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 2010-02-02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판도라에서는 더 이상 차가운 과학과 뜨거운 신화가 분리되지 않았다!

qlsend 2010-02-03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넌 강한 영혼을 가졌어..... 하면서 그윽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But you are stupid!'하고 소리를 버럭 지를 때 네이티리 정말 귀여웠어요 ㅋㅋ
 


 스포일러 주의!!


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⑦

 

7. 두려워하지 마, 내가 너의 거울이 되어줄게 (1)


 그레이스 : 난 과학자라는 걸 잊지 마. 동화 같은 이야기는 안 믿어.
 제이크 : 나비족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줄 거예요. 
 그레이스 : 그들이 왜 우리를 도와주겠어?
 (……) 그녀를 봤어. 에이와는 정말 존재해.

 제이크 : 그런데 왜 나를 구해준 거야?
 네이티리 : 넌 강한 영혼을 가졌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 하지만 넌 멍청해! 아이처럼 무지하지!  




   레비스트로스는 현대사회를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사회라고 진단했다. 문명과 문명 사이에 너무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서 서로의 문명을 끊임없이 모방하느라 점점 더 ‘차이’보다는 ‘획일성’이 지배하게 되는 사회가 되어간다고. A 문명이 B 문명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문명을 비교하고 정복하고 침탈하고 추격하느라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문명을 만들어내기 힘든 사회라고 말이다.
   낯선 문명을 만나러 떠난 여행에서도 현대인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똑같아지는 글로벌 시티를 발견한다. 현대인은 늘 새로운 문명을 꿈꾸면서도 한편으로는 완전히 낯선 문명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큰맘 먹고 해외여행을 떠난다 해도 ‘이미 아는 정보’를 ‘확인’하고 ‘기념’하는 데 급급하여 진정 새로운 체험을 맛보기 어렵다. 파리의 에펠탑과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텔레비전에서 수십 번도 더 본 후 ‘이미 잘 아는 바로 그 장소’에 가서 찰칵 기념사진을 찍고는 좋아라 한다. 현대인은 서로의 문명에 대한 경쟁심, 일류 문명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 선진국의 문명을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기만의 문명의 독창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비족은 굳이 근대 문명을 모방할 필요가 없이 자연 속에서 무한한 감사와 은총을 누리고 살아간다. 그들의 삶에 다른 참고문헌이 없기에 오로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최선의 것을 창조해낸다. 파괴되는 아마존이 점점 풍요로운 공동체적 감수성을 잃어가는 이유 또한,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치명적인 오류가 아닐까. 아마존의 부족들이 문명인의 영향을 받아 활이 아닌 총을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 공장에서 제조한 문명인의 티셔츠 한 장에 하루 종일 힘겹게 사냥한 짐승 한 마리를 바꾸기 시작한 순간, 잡아온 물고기를 모두 함께 나눠 먹지 못하고 ‘내 가족’ 먹이기에 급급해지는 순간, 아마존의 유토피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문명의 러브콜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아마존을, ‘우리 안의 판도라’를 시시각각 침식하고 있다. 
 




   제이크가 판도라의 생태계 속에서 나비족과 함께 하는 행복의 정체 또한 ‘과소 커뮤니케이션’ 사회의 힘에서 우러나온다. 굳이 다른 문명을 참고할 필요가 없기에, 외부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으로도 ‘우리가 뭔가 뒤떨어졌다’는 집단적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 역사의 진보라는 획일적인 환상은 끊임없이 문명을 ‘발전’시켜야 문명이 유지된다는 강박을 낳았다. 이런 사회에서는 역사의 진보를 위해, 집단의 진보를 위해, 개인은 언제든 쉽게 희생될 수 있다. 아바타 프로그램에 투입된 제이크의 운명 또한 그랬다. 그는 아바타 프로그램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형의 죽음으로 인해 ‘대타’로 투입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깡그리 부정당했다. 쌍둥이형과 유전자가 같으니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소모품으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아바타 한 명을 만들기 위해 투자한 엄청난 자본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다행히 쌍둥이’였던 제이크는 훌륭한 대체재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매 순간 분열되었다. 형은 대단한 과학자이지만 자신은 부상당해 다리도 쓸 수 없는 퇴역군인이라는 자괴감. 뛰어난 과학자가 필요하니 너 같은 ‘골 빈 해병’은 필요 없다는 그레이스 박사의 구박도 괴로웠고, 쿼리치 대령에게 나비족에 대한 각종 정보를 물어다 주는 스파이 생활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은 ‘나비족의 정체성’과 ‘인간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자신이다. 제이크가 온갖 힘겨운 통과의례를 거쳐 나비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는 순간 그의 고민은 절정에 다다른다. 더 이상 억지스러운 미션수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비족의 삶에 동화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네이티리와 아름다운 밤을 보내고 ‘가시버시’의 인연을 맺은 순간,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선택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 당장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과잉 커뮤니케이션(over-communication)이라고 하는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세계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자 하는 경향입니다. 하지만 문화가 진정으로 문화 그 자체가 되고 무엇을 생산하려고 한다면, 문화와 그 문화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독창성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게다가 어느 정도까진 다른 문화에 견주어 그들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과소 커뮤니케이션(under-communication) 아래에서만 문화는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독창성을 상실한 채, 세계의 어느 곳을 가든지 모든 문화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소비할 수 있는 유일한 소비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 레비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47~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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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 2010-02-01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표가 없어서 처음엔 2D로 봤다가 어제 간신히 표를 구해 3D로 봤네요. 그런데 4D도 있다니, 이거 무슨 관객들 토끼몰이를 하려는지 ^^

니모 2010-02-0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버 커뮤니케이션의 사회, 그러면서 조금 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고 자꾸만 외치는 사회. 우리 사회가 그런 것 같네요...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더 힘들어지는데.
 


 스포일러 주의!!


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⑥

 

 6. 나는 왜 ‘너’일 수 없는가 (2)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땅을 소유할 수 있을 거라 하지만 그건 땅을 죽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일 뿐. 하지만 난 생명이 있고 영혼이 있고 이름이 있는 바위와 나무와 동물을 알아요. (……) 달을 보고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았나요? 야생 고양이에게 왜 우느냐고 물어봤어요? 산의 목소리에 맞춰 합창할 수 있나요?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있나요? (……) 한 번만이라도 얼마짜리인가 생각지 말고 그냥 주위의 풍요로움을 즐겨보세요. (……)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있어야 해요. 아무리 땅을 가진다 해도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없으면, 그건 가진 게 아니에요.
- <포카혼타스> 주제가 ‘Colors of the wind’ 중에서

 
   

    

   원주민 여성에 대한 신비주의와 세련된 오리엔탈리즘, 미국인이 학살한 인디언에 대한 ‘불편하지 않은 정도의 죄책감’이 곁들여진 ‘가족용’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 인디언 학살에 대한 미국인의 집단적 죄책감은 인디언 소녀 포카혼타스가 멋진 백인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잠정적으로 봉인되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학살당한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살아남아 백인들의 집단 무의식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인디언들의 신화와 민담에 스며든 지혜는 다양한 형태의 출판물과 영상물로 만들어져 전 세계적으로 ‘수출’되고, 인디언의 가르침은 우울증에 빠진 현대인의 멘토가 되고 있다. 영화 <아바타>에서 묘사되는 나비족의 삶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생활상과 사유의 패턴과 매우 유사하다. 전 세계에 상영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는 <아바타>의 관객들은 나비족을 보며 저마다 ‘아직 끝나지 않는 원주민 학살’을 생각할 것이다. 



   쿼리치 대령은 제이크를 통한 나비족의 정보 수집이 거의 끝났다는 판단 아래 제이크를 철수시키려 한다. 쿼리치는 제이크가 더 이상 ‘아바타’가 되어 나비족의 삶에 침투할 필요가 없다는 통보를 한다. 이미 ‘원본’보다 ‘아바타’의 삶에 매혹을 느끼기 시작한 제이크는 아직 자신이 할 일이 더 남았다고 말한다. 이제 곧 나비족의 ‘성인식’에 참여할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자신은 나비족과 협상하는 데 훨씬 유리한 위치를 점령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는 나비족과 협상한다는 공적인 업무보다 ‘나비족의 삶’ 자체에 대한 사적인 매혹을 떨쳐내기 힘들다는 것을. 그는 마침내 평생 단 한 명의 사람만을 자신의 등에 태운다는 거대한 새 이크란을 길들이는 데 성공한다. 자신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이크란을 제압하고 오직 자신만의 이크란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는 순간, 제이크는 ‘나비족’의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성공적으로 치러낸다. 
 




   제이크의 주요 무기는 이제 ‘총’에서 ‘활’로 바뀌었다. 그는 최첨단 기술을 이용한 문명인의 전투보다 온몸의 근육과 오감을 작동시키는 나비족의 전투에 매혹을 느낀다. 그는 이제 해병대의 추억보다 나비족의 생활에 더욱 밀착된 존재가 되었다. 제이크는 이제 점점 ‘꿈’에서 깨어나기가 싫어진다. 현실로 돌아오면 움직일 수도 잘라낼 수도 없는 그의 초라한 다리가 기다리고 있다. 명령만을 일삼고 복종만을 강요하는 쿼리치 대령이 있다. 원주민의 생존권을 빼앗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들의 탐욕이 있다.
   그리고 아바타의 삶 속에서는 무엇보다도 증오와 분노로 얼어붙은 제이크의 마음을 녹여준 네이티리가 있다. 그가 대열에서 낙오되어 판도라의 정글에 혼자 남았을 때 그를 살려주었던 네이티리. ‘인간’과 ‘인간 이하’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던 제이크를 ‘인간’과 ‘나비족’ 사이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게 한 네이티리. 그는 네이티리의 노란 눈동자가 담은 아름다운 판도라의 삶에 이미 행복하게 감염된 상태다. 



   제이크는 지옥이 있을 거라 믿었던 곳에서 낙원을 발견했고, 자신의 적들이라 믿었던 곳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를 발견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적 사고의 힘은 ‘대립의 인식’으로부터 ‘대립의 중재’로 나아가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신화의 목적은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적 모델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도 말했다. 제이크는 이제 지구인과 나비족의 대립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 대립을 ‘중재’하는 것은 더 큰 에너지를 요구한다. 과연 아직 자신의 역할에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는 제이크가 이 엄청난 신화적 미션을 수행해낼 수 있을까.   




   
   에리봉 : 당신의 <신화론>이 막스 에른스트의 콜라주처럼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죠!
 레비스트로스 : 막스 에른스트가 그의 콜라주들 속에서 실행하기를 원했던 것과 같은, 거칠고 돌발적인 비교rapproachments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은 바로 이들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입니다. (……) 막스 에른스트는 타문화에서, 다시 말해 19세기 고문서의 문화에서 차용해온 이미지들을 사용해 개인적인 신화들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범상한 눈으로 보았을 때 이들 이미지들이 의미했던 것 이상의 의미를 이끌어냈죠. <신화론> 속에서, 나도 신화적인 재료를 오려내어 그 단편들을 재구성해 거기서 더 많은 의미가 솟아오르도록 했어요.
 - 디디에 에리봉 대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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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 2010-01-30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립의 인식으로부터 대립의 중재로! 밑줄 쫘악! 돼지꼬리 땡야~~^^

doingnow 2010-02-0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정여울님 책 샀어요!ㅎㅎ 블로그로 봐서 후다닥 지나갔던 이야기들을 책으로 만나서 완전 반가웠답니다! 그런데 언제나 머릿글이 제일 반가운 것은 님의 진짜 이야기가 들어있어 그런것 같아요!ㅎㅎ 암튼 언제나 화이팅이에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