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③

 

 3. ‘세균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버려지는 타자들 (1)

   
 

 그들은 나를 알기도 전에 나를 평가해버려.
 (They judge me before they even know me.)  

 - 영화 <슈렉> 중에서

 
   

    

    나를 알기도 전에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배제하는 사람들. 슈렉은 그런 사람들에게 지쳐버렸다. ‘판단’은 바로 차별과 배제의 전초전이다. 아기들은 악취에 코를 찌푸리지 않는다.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를 분별하는 기준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어른들은 악취, 특히 부패로 인한 악취에 매우 민감하다. 부패한 생물에서 풍기는 악취, 그것은 바로 ‘죽음’의 냄새를 연상시키기에. 

   사람들은 슈렉에게 가까이 와서 그를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괴물은 냄새나고, 더럽고, 혐오스런 존재’라는 편견의 울타리 밖으로 슈렉을 밀어낸다. 슈렉뿐 아니라 동화 속의 생물들을 모두 추방한 파쿼드 왕국 또한 쓸데없는 공상으로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의 잣대로 현실 속에서 ‘환상’의 색채를 띤 모든 것을 몰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괴물의 입김도 환상의 바이러스도 없는 세계는 과연 안전할까. 이렇게 완벽하게 살균된 세계는 과연 행복할까. 

   안정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낯설고 이질적이고 위협적인 것을 주체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려는 심리적 과정, 그것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시옹’이라 불렀다. ‘아브젝트’가 배제된 대상들이라면 ‘아브젝시옹’은 배제하는 행위와 과정 자체를 말한다. 우리의 주체성이 처음부터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있다면, 그 과정 속의 주체는 ‘나다운 것’의 기준을 세워 ‘자아’를 조립하고, ‘우리다운 것’의 경계를 그려 ‘사회’를 구성한다. 슈렉을 비롯한 각종 동화 속 생물들은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공동체, 보다 중앙집권적이고 균질적인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 배제된 타자들이다. 

   파쿼드의 ‘동화 속 생물 추방 명령’을 수행하는 병사들은 도망가는 당나귀 동키를 잡으려다가 슈렉을 만나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버린다. 슈렉의 늠름한 덩치 뒤에 숨어 체포 위기를 면한 동키는 얼떨결에 자신을 구해준 슈렉에 대한 반가움에 들떠 호들갑을 떤다. 
    동키 : 와우, 정말 대단해! 정말 멋져!
    슈렉 :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금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야?
    동키 : (주변엔 슈렉 말고는 아무도 없다) 응, 그럼! 진짜 대단했어! 병사들이 날 막 쫓아왔었는데, 네가 나타나니까 길 잃은 아이들처럼 허겁지겁 도망가던걸.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으하하.
    슈렉 :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시니컬하게) 그거 참 잘 됐군.
    동키 : 아, 이제 드디어 그들로부터 벗어났구나. 이 자유의 기쁨을 친구들과 함께 축하해야 하는데! (……) 하지만 난 친구가 없어. (계속 엄청난 속도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슈렉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아차!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나랑 함께 지내면 어때? 넌 싸움을 잘 하잖아. 우리 둘이 함께하면 엄청날 거야.
    슈렉 : (귀찮다는 듯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늪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동키 : (슬프지만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내 등에 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난 친구가 필요해. (엉터리 노래를 부르며 계속 슈렉의 관심을 끌어보려 하지만 슈렉은 본척만척한다.)
   슈렉 : (괴성을 질러대며 노래를 흥얼대는 동키의 목소리를 참다못해 소리를 버럭지른다) 노래 그만! 친구가 없을 만도 하네! 어이, 날 봐! 내가 뭐 같아?
   동키 : 응? 키가 큰…… 사람?
   슈렉 : 아냐! 난 괴물이야, 괴물이라고! 횃불하고 쇠고랑을 준비해야지! 날 피하지 않아? 정말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동키 :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그럼!
   슈렉 : 정말?
   동키 : 정말이야! 난 네가 완전 마음에 들어. 그런데 넌 이름이 뭐야?
   슈렉 : 흠……, 슈렉.
   동키 : 슈렉? 슈렉! 제일 마음에 드는 게 뭔지 알아? 딴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도 좋다는 네 태도야. 정말 존경스러워!

   한 번도 타인과 함께 지내본 적이 없는 슈렉은 당나귀 동키의 끈질긴 러브콜이 귀찮기만 하다.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존재를 처음 만난 슈렉은 너무 놀라 물어본다. 정말 내가 무섭지 않느냐고. 슈렉은 자신을 그 어떤 편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존재를 처음 만난 것이다. 당나귀 동키의 눈에 비친 슈렉은 그저 ‘키 큰 사람’이고 위험에 빠진 자신을 본의 아니게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이다. 동키는 처음으로 괴물 오우거(ogre)에게 ‘이름’을 물어본다. 동키는 그의 이름을 가만히 되뇌며 그와 친구가 되고자 한다. 

   당나귀 동키를 차마 내치지 못하는 슈렉의 여린 마음속에는 사실 숨길 수 없는 외로움이 둥지를 틀고 있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는 슈렉은 채식 위주의 웰빙 식단으로 꾸려진(파다하게 퍼진 괴소문처럼, 사람의 내장이나 눈동자를 후벼내어 만든 젤리 샌드위치가 아니라!) 소박한 식탁 위에서 혼자 식사를 하며 은근히 문밖에서 굶고 있는 동키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외부의 침입자가 나타난 듯한 기척에 놀란 슈렉은 집 밖으로 나오고 파쿼드의 ‘퇴거 명령’으로 추방된 각양각색의 동화 속 생물들을 만난다. 유럽의 동화 속 주인공들은 총출동한 것 같다. 

   슈렉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오랜 은거지인 늪을 지키기 위해 파쿼드와 담판을 하러 떠난다. “요정 여러분, 너무 편하게 있진 마세요, 여기선 환영 못 받아요. 당장 파쿼드를 찾아가서 다시 여러분의 집을 되찾아주도록 하겠습니다. (동키를 가리키며) 너, 너는 나랑 같이 가는 거야!” 동키는 슈렉과의 여행(?)이 성사되자 뛸 듯이 기뻐하며 그를 따라나선다. 이제 버려진 존재 ‘아브젝트’의 인권과 주거권을 탈환하기 위한 모험의 스토리가 시작된다.
 슈렉과 동키가 도착한 파쿼드 왕국은 어쩐지 생기도 활기도 없는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살균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동화 속에나 등장하는 각종 환상의 바이러스들을 모두 제거했는데, 이 세계는 조금도 안전하거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 앞에는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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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이 2009-12-3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강구년월"
그뜻 그대로 되시길...

viewfinder 2010-01-01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동키같은 친구가 있다면 정말 평생 외롭지 않을 듯^^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②

 

 

2.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2)

   
 

‘아브젝트(abject)’는 우리가 혐오하고, 거부하고, 거의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시큼한 배설물, 심지어는 어머니의 과격한 포옹도 여기에 속한다. 
 

 -노엘 맥아피, 이부순 역, <경계에 선 크리스테바>, 앨피, 2007, 92쪽.

 
   

  


    “사람들은 날 보면 말해. 으악! 못생기고 냄새나는 괴물이다!” 슈렉은 한 번도 ‘이름’을 제대로 불려보지 못한 존재다. 이름 불린다는 것.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친밀성을 만들어가기 위한 첫번째 문턱이다. 이름 불리지 못하는 슈렉은 단지 ‘괴물’일 뿐이며 존재하지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타자다. 괴물 주의! 괴물 수배 중! 현상금 있음! 그가 사는 주변에는 이런 무시무시한 팻말이 흩어져 있다. 사람들은 현상금이 걸린 괴물을 잡으려고만 하고 아무도 그의 삶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여기는 파쿼드(Farquaad) 영주가 지배하는 화려한 도시의 바깥, 괴물 슈렉이 혼자 사는 늪지대다. 

   엄청난 길이의 ‘키 높이 부츠’를 신고 말을 타고 다니는 전형적인 마초형 남성 파쿼드 영주. ‘조금 짧은 다리’에 대한 심각한 콤플렉스와 타인을 향한 무한한 지배욕으로 똘똘 뭉친 파쿼드는 지금까지 함께 살아오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모두 몰아내고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하려 한다. 아직 왕이 되지 못한 파쿼드는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하여 국왕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 슈렉은 이런 골치 아픈 세상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혼자만의 칩거 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늪지대에 넘쳐나는 지저분한 진흙으로 샤워하고 동화책은 화장실 휴지로 써버리면서. 사람들은 슈렉을 잡아 현상금을 나눠 가지려다가 슈렉의 흉측한 모습에 놀라 혼비백산한다. 

    “그 괴물은 뼈를 갈아서 아침 식사로 먹는다고 하던데!”
   “그건 거인이에요. 괴물 오우거(ogre)는 더 잔혹하죠. 사람의 가죽을 벗겨서 수프를 만듭니다. 내장을 자르고 눈에서 젤리를 뽑아냅니다! 사실 눈에서 뽑아낸 젤리는 토스트에 발라 먹으면 맛있어요.”

    슈렉은 자신을 잡으러 몰려온 사람들을 ‘엄청난 입 냄새 폭탄’으로 순식간에 몰아내고 평화로운 은거 생활을 즐기려 한다. 그는 ‘괴물은 무섭다’는 막연한 뜬소문을 역으로 이용하는 중이다. 사람들은 슈렉에 대한 무지와 소문에 대한 실체 없는 공포 때문에 슈렉을 제대로 대면하기도 전에 도망쳐 버린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존재하는 각종 ‘괴담’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사람들의 상상보다 훨씬 덜 무섭고, 덜 잔혹하며, 덜 해롭다. 진짜 공포는 ‘자기 안에 존재하는 역겨운 것들’을 몰아내려는 문명화된 인간의 관습이 아닐까. 

   ‘바람직한 주체’로 사회화되기 위해 현대인은 자기 안의 수많은 가능성을 버리고 ‘나다운 것’의 경계를 구축해야 한다. 보다 깨끗하고, 보다 적절한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야생적 본능을 버려야 한다. 부패한 우유, 똥, 구토물, 시체들을 보고 구역질을 참지 못하듯이 우리는 ‘한때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억압하거나 배설해버린 욕망들’을 자아의 경계 바깥으로 멀리 추방하고자 한다. 크리스테바는 이렇게 문명화한 현대인의 자아, 그 경계 바깥에 추방된 존재들을 ‘아브젝트’라 불렀다. 

   프로이트는 문명이 개발되기 위해서는 주체의 다채로운 욕망이 무의식 깊숙한 곳에 억압되어 숨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억압된 것의 귀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적어도 인간의 ‘부끄러운 욕망’은 무의식 속에 숨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는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기피하지만 실상 매일 접하는 것, 즉 더러운 오물이나 끔찍한 죽음처럼, ‘아브젝트’는 항상 우리의 또렷한 의식 주변을 배회하며 서성인다.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이미 버려졌지만, 그렇게 버려진 아브젝트는 ‘바람직한 주체’의 경계를 위협하며 ‘난 아직 살아 있음’을 증언한다.  

   파쿼드 영주가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추방한 동화 속의 주인공들은 세속적인 삶에서는 전혀 실용성이 없어 보이는 ‘동화 속의 생물들’이다. 동화 속의 환상 따윈 이제 필요 없어! 오직 노동하고 생산하고 발전하는 문명만이 있을 뿐. 파쿼드의 왕국은 이 모든 ‘동화적 환상’을 철저히 ‘아브젝트’로 버려둔 채 독재자 파쿼드의 시선으로 재단된 바람직한 문명의 경계를 구축하려 한다. 그들은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는 물론,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 피리 부는 아저씨, 피터팬, 피노키오, 일곱 난쟁이, 아기돼지 삼형제 등 수없이 많은 동화 속의 인물들과 동물들을 추방해버린다. 갈 곳이 없어진 이들은 슈렉의 늪(swamp)으로 잠입하여 거대한 난민촌을 형성한다. 평화롭고 안락한 슈렉의 은둔 생활에 최대 위기가 닥친 것이다. 

   
 

추방되는 것은 과격하게 쫓겨나지만, 결코 다 제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유아의 경험 주변을 배회하며, 유아의 모호한 자아 경계를 끊임없이 위협한다. 어떤 것이 단지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추방된다는 것은 그것이 의식에서 전적으로 사라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깨끗하고 적절한 자아에 대한 무의식적인, 동시에 의식적인 위협으로 남는다. 아브젝트는 경계를 침범하는 것이다.  

- 노엘 맥아피, 이부순 역, <경계에 선 크리스테바>, 앨피, 2007,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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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day 2009-12-30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숏다리 영주 파쿼드 표정, 지금봐도 너무 웃김 ㅋ 손에 흙 안묻히고 공주를 차지하려는 그의 얕은 수와 잔꾀가 결국 슈렉과 피오나를 이어준다^^

둥이 2009-12-3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내 자아는 점점 파쿼드 영주의 왕국이 되어가는건가
난 나의 아브젝트를 찾아 떠날꺼얌^^
하지만 너무 춥어!! 차막혀!!(역쉬 나의 파쿼드...)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

 

1.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1)

   
 

행복은 오직 반항의 대가로만 존재한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어린 시절 동화를 읽고 나면 종종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더라’는 결말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존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그들은 어른들의 말처럼 죽거나 사라지거나 개과천선했을까. 내 마음속 네버엔딩 스토리 공화국에서는 백설공주에게 독이 든 사과를 준 마녀가 아직도 복수심을 삭이지 못하고 새로운 음모를 준비하고 있었고, 신데렐라처럼 왕자와 결혼하지 못한 심술쟁이 언니들이 아직도 짝을 찾지 못한 채 ‘결혼 시장’을 헤매고 있었으며, 해님이 되고 달님이 된 오누이를 놓치고 썩은 동아줄을 붙잡아 추락사한 호랑이가 다시 살아나 어디선가 또 다른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마녀들, 괴물들, 악당들이 때로는 주인공보다 오히려 더 매혹적인 공상의 주인공이 되곤 했다. 그들은 정말 도저히 구제불능인 천하의 악역들이기만 했을까.

   우리가 읽은 동화들 대부분이 ‘어린이를 교화시키기 위해(?)’ 각색되고 변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꿈틀대던 악녀들과 괴물들이 더욱 마음 놓고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영원한 징벌의 대상으로 굳어져버린 악역들에 대한 호기심이 탄력을 제대로 받아 아예 동화의 내용 자체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진짜 잘못은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마녀가 아니라 마녀를 파티에 초대하지 않은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엄지 공주 이야기>에서 엄지 공주의 간택을 받지 못한 두꺼비와 풍뎅이와 두더지 총각들은 정말 엄지 공주 같은 ‘퀸카’의 사랑을 영원히 받지 못할까. <헨젤과 그레텔>에서 아이들을 삶아 먹으려던 노파는 정말 마녀였을까. 동화 속에서 악인으로 처벌받는 존재들은 마음속 네버엔딩 스토리 공화국에서는 아직도 죽거나 사라지지 않은 채, 좀처럼 말끔히 해결되지 않는 무의식의 영토에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날조된 동화’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던 사람들에게 <슈렉>은 정말 반가운 작품이었다. 동화 날조의 달인들이 모여 사는 전형적인 월트 디즈니 공화국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를 듣고 싶었기에. 식인 괴물 오거(ogre)를 자칭하는 슈렉(Shrek)은 별로 무섭지 않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동화 속에서 끝내 버려지고 짓밟히는 괴물의 기본 요건을 충실히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동화 나라에서 추방된 온갖 생물들이 슈렉의 서식지인 ‘늪(swamp)’으로 도망 와서 난민촌을 형성하는 설정도 흥미진진했다. 그 모든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모습은 우리 마음속에서 미처 완전히 정리되거나 삭제되지 않은, 좌절되고 망각된 우리 안의 욕망들의 총집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 사회에서 필요한 존재로 길들여지는 인간.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토록 방대한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야생의 갈증과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성이 공존한다. 철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했던 것들의 잃어버린 가능성을 탐구한다. 우리의 바람직한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버려진 역겹고 더럽고 위험한 것들을 그녀는 ‘아브젝트(abject)’라고 불렀다. 슈렉은 바로 그 버려진 존재, 아브젝트를 코믹하게 구현해낸 성공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슈렉>은 지상의 모든 남녀를 ‘백마 탄 기사를 기다리는 공주’와 ‘공주를 구출하는 멋진 왕자’로 육성하려는 동화의 낭만적 환상을 첫 장면에서부터 와르르 무너뜨린다. 

    옛날 옛적에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저주가 걸려 있었답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첫 키스만이 이 저주를 없앨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에 갇혀 있었고 무서운 불을 뿜는 용이 그녀를 지켰습니다.
    많은 용감한 기사들이 그녀를 구출하려고 시도했으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용의 성에서 기다렸습니다.
    가장 높은 탑의 맨 위에서 그의 사랑과 키스를 기다렸습니다.

   슈렉은 뒷간에서 큰일을 보던 중 이 동화를 읽다가 다음 페이지를 쭉 찢어 ‘휴지’로 사용한다. 슈렉에게 그런 아름다운 동화 속 이야기란 얼간이들의 말장난일 뿐이다. 슈렉은 자신을 스스로 악당의 자리, 괴물의 자리에 고립시킨다. 어차피 정상인들의 세계에서 환영받지도 이해받지도 못할 존재이니 타인에게 사랑받는 통로를 아예 차단해버리고 세상에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수다쟁이 당나귀 동키는 세상의 냉대를 참다못해 스스로를 유배시킨 슈렉의 숨은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알아봐 준 존재다. 동키 또한 주인의 말을 잘 듣고 묵묵히 일하는 ‘바람직한 당나귀’가 되지 못하고 주인에게 버려진 존재였기에 자신도 모르게 슈렉의 상처에 공감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 중 그 누구도 장애, 금지, 권위 또는 법률과 맞서지 않고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반항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행복의 개인적 경험을 동반하여 나타나는 반항은 쾌락 원칙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 소외 계층이 반항의 문화를 갖지 않고, 쾌락의 요구를 결코 만족시켜주지 않는 이데올로기와 쇼와 오락 등에 안주해야 할 때, 그들은 폭도가 된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박선영 역, <정신병 모친 살해 그리고 창조성>, 아난케, 200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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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2-28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슈렉. 수다쟁이 당나귀와 핑크 드래곤의 로맨스가 더욱 재밌었던 영화.

love hurts 2009-12-29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슈렉. 괴물이 그렇게 귀여울 수 있다니^^ 언제 봐도 유쾌한 애니~

둥이 2009-12-2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화신은 고양이^^
우리집에 있는데^^
 

 


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마지막회

 

13. 너와 함께, 네 안에서, 너를 통해, 내가 된다

   
 

초월이라는 신의 의지는 ‘진실과 사랑이 넘치는 투쟁’에 혼신을 바치는 나의 참 자아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 칼 야스퍼스

 
   

  


    네오는 스미스의 숨겨진 두려움을 간파하고 사력을 다해 그를 공격하지만, 잠시 방심하는 사이 스미스 일당의 교활한 팀플레이로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탕, 탕, 탕……. 스미스의 총격으로 매트릭스 안의 네오는 피를 토하며 죽어간다. 매트릭스 안에서의 죽음은 곧 정신의 죽음. 정신이 죽으면 매트릭스 바깥의 육신도 죽는다. 스미스는 더 이상 뛰지 않는 네오의 심장박동을 확인하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선다. 이제야 자신이 ‘그’라는 것을 알 것만 같은데, 바로 그 황홀한 깨달음의 순간 네오는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고야 만다.

   모피어스와 탱크는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전율한다. 매트릭스 바깥에서 심장 박동을 멈춘 네오의 육체.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타고 있는 호버크래프트를 침략하는 스퀴디(매트릭스를 방해하는 저항군을 찾아 파괴하는 살인기계)의 무리들. 그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모피어스 일행은 이제 네오의 죽음으로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이다. 
   이 순간 차분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트리니티가 네오의 식어가는 육체를 바라보며 말문을 연다. 모두가 망연자실한 순간, 트리니티는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더욱 차분하고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이다. 트리니티는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생에 단 한 번뿐일 수밖에 없는, 눈부신 고백을 시작한다.

     트리니티 : 네오……. 난 이제 두렵지 않아.
    오라클은 내가 사랑에 빠지는 남자가 바로 ‘그’라고 말했어.
    그러니까 ……당신은 죽을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들려?
    사랑해…….
    이제 일어나야지.

    트리니티는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듯 가망이 없어 보이는 네오에게 키스한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떨림도 없고 오직 ‘그’에 대한 흔들리지 않은 믿음이 아로새겨져 있다. 트리니티의 눈물 어린 키스를 받는 순간 네오는 기적처럼 깨어난다. ‘그’의 진정한 부활의 순간이다.  

   오라클의 예언-모피어스의 믿음-트리니티의 사랑이 합체하는 순간. 마침내 네오가 완전한 ‘그’로 거듭나는 순간. ‘그’는 매트릭스의 철칙(매트릭스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는다)에 어긋나는 단 하나의 존재라는 예언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네오를 꼬박꼬박 ‘앤더슨’이라고 부르며 네오가 ‘그’임을 끈질기게 부정하던 스미스. 그는 이제야 네오가 ‘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기 시작한다.
   그 순간 네오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스미스를 ‘격파’한다. 순식간에 온몸을 스미스의 몸 안으로 침투시켜, 스스로를 잠시 스미스의 몸속으로 사라지게 한 후, 말 그대로 스미스를 ‘내파(內破)’해버리는 것이다. 이제 네오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천부적 매뉴얼을 스스로 완성시킨다. 어떤 인공무기의 성능도 압도하는 최고의 무기는 바로 인간의 몸 그 자체임을, 네오는 그렇게 증명한다. 그리고 네오는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피날레 멘트를 날린다. 

   네오 : 난 미래를 모른다. 이것이 어떻게 끝날지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어떻게 시작할지를 말하려는 거다. 이제 전화를 끊고 이 사람들에게 전부 다 보여주겠다. 진짜 세상을 보여주겠다. 규칙이나 통제, 경계나 국경이 없는 세계.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를. 


   
 

폴 리쾨르는 한 인간이 일생을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다음의 여섯 가지 문제를 잘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죽음이라는 운명과 관련된) 인간의 유한성. 둘째, 신이나 신령한 존재로부터 소외당한 인간의 현실. 셋째, 생성과 초월의 과정,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 있는 존재인 개개의 인간에게 진리는 절대로 온전하게 완성된 것일 수 없다는 점. 넷째, 선택에 대한 인간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 사이의 모순성. 다섯째, 인간이란 타자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그들을 통해(with, in, and through others)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의미를 인식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 여섯째,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정체성과 그 역할.
 

 - 비얼레인, 배경화 역, <살아 있는 신화>, 세종서적, 2000, 18쪽.

 
   

   그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그들을 통해(with, in, and through others) 비로소 존재하는 우리. 네오를 위해 다치고, 의심 받고, 죽음을 불사했던 친구들이 없었다면 네오는 평생 ‘그’가 될 순간을 단 한 번도 포착하지 못한 채 매트릭스 안에서 방황하다 죽어갔을 것이다. 온종일 말 한 마디 안 하고 ‘디지털 무언족’으로 살아도 충분히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더더욱 친구가 필요하다. 나를 일깨우고, 나를 시험하고, 나를 뒤흔드는 타인이 없다면 우리는 평생 각자의 ‘그’가 되는 길을 찾지 못해 운명의 미궁 속을 헤매지 않을까. 

   네오가 진정으로 성숙하게 되는 계기는, 단지 그의 뛰어난 학습 능력이나 놀라운 해킹 실력 때문이 아니라, 늘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하고 혼자 결정하던 네오가 드디어 모피어스라는 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순간이다. 모두가 ‘시온’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소중한 모피어스라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오직 네오만이 모피어스를 살리자고 한다.
   모피어스와 네오 중 둘 중 한 명의 목숨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오라클의 비극적인 예언이 ‘틀리는’ 순간 네오는 비로소 진정한 ‘그’가 될 수 있다. 오라클은 단지 ‘너는 아무리 피해도 그가 될 수밖에 없을 거야’라고 손쉽게 운명의 진로를 귀띔해준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넘어야 할 운명의 장벽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일깨워준 것이다. 그 운명의 장벽을 넘을 것인가 아닌가는 바로 네오 스스로의 선택이고 능력이고 용기였던 것이다. 

   엘리아데는 캐나다의 정신과 의사 버크 박사의 신비한 체험을 이야기하며 우리 안에 내재한 ‘그’가 발현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묘사한다. 세속의 틈바구니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체험. 그것은 완전히 낯선 경험은 아니다. 내 안에 깃든 타자, 가장 익숙하지만 동시에 가장 낯선 타자를 발견하는 순간. 내 안의 빛, 바로 너와 함께, 너를 통해, 네 안에서, 우리는 언젠가 비로소 ‘그’가 될 수 있다. 너와 함께, 네 안에서, 너를 통해, 비로소 나는 존재한다. 

 

   
 

버크박사는 어느 봄날 밤 자신에게 닥친 일을 3인칭으로 서술했다. 친구들과 함께 워즈워드와 셸리, 키츠, 특히 휘트먼의 시를 읽으며 파티를 즐긴 뒤 자정에 빠져나온 그는 승합마차를 타고 오랜 드라이브를 했다. (일은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는 거의 수동적인, 고요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그는 불꽃 색깔의 구름에 파묻혔다. 순간 그는 불, 대도시의 돌발적인 화재를 떠올렸다. 그러나 곧 그는 빛이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즉시 고양된 감정이 그를 감쌌는데, 이는 엄청난 기쁨의 감정이었으며, 여기에 형언할 수 없는 지적 계시가 수반되고 또 뒤를 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브라만의 찬란함을 지닌 순간적인 번갯불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이 불은 그 뒤로 그의 일생을 밝힌다. 브라만의 지복 한 방울이 심장으로 떨어져, 천국의 뒷맛을 그에게 영원히 남긴다. (……) 그는 보고, 알았다. 우주는 죽은 물질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존이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이며(……) 세상의 근본 원리는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고, 길게 보면 각자의 행복은 절대적으로 보장된 것이다. 그는 단 몇 초의 계시에서 그 후의 몇 달, 심지어 몇 년의 연구에서보다 더 많이 배웠으며, 어떤 연구도 가르쳐줄 수 없었을 많은 것을 배웠다.
 

 - 엘리아데, 최건원·임왕준 역,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문학동네, 2006,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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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2-24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울님, 메리크리스마스^^*

spade 2009-12-24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with, in, and through others!

skah 2009-12-27 0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상의 근본 원리는 사랑, 아주 길게 보면 각자의 행복은 절대적으로 보장된 것! 음....가슴을 후벼파는 메시지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⑫

 

12. 난 이제 그들이 두렵지 않아 (2)

   
 

신화는 별들에게 열정의 옷을 입히고,
 신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지닌 결함과 과오를
 덧씌우기도 했다네. 신화 속에서 바람과
 파도는 음악이었다네. 모든 호수와 시내,
 샘물과 산, 숲과 향내 그윽한 골짜기는
 온갖 요정들의 놀이터였다네 


 - 로버트 G. 잉거솔

 
   

  


   세속의 아수라 속에서도 신성의 숨결을 발견하는 열쇠. 그 열쇠는 바로 ‘몸’이었다. 네오를 비롯하여 매트릭스에 갇혀 있던 모든 인류는 자신의 진짜 몸을 AI(인공지능로봇)에게 건전지로 헌납한 채 가상의 이미지로만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서 자신의 눈, 코, 입, 손, 발을 단 한 번도 진짜 세계에서 써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네오가 매트릭스로 철저히 세뇌된 자신의 두뇌를 해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몸’을 매트릭스의 회로에서 빼내 육체와 정신의 혼연일체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역으로, 매트릭스 안에서는 거의 신의 경지에 올라 있는 스미스가 이상하게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의 ‘몸’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스미스는 모든 것을 갖췄지만 자신의 ‘건전지’를 인간의 육체로부터 쥐어짜내야 하는 참혹한 운명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스미스가 모피어스를 협박하며 투덜거리는 장면은 결국 매트릭스 안의 ‘적자’인 인공지능로봇조차도 결코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만든다.

   스미스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욕망대로 사용할 수 없기에, 아니 자신의 욕망 자체가 곧 매트릭스의 욕망이기에, 그 불완전한 육체조차 인간에게 철저히 기생해야만 유지할 수 있기에, 결코 ‘구식 인간’들처럼 몸과 마음이 일치하는 순간의 희열을 평생 누릴 수 없다. 그는 한 번도 햇살의 따스함을, 얼음물의 청량감을, 향기로운 꽃냄새를, 사랑하는 여인의 체온을 ‘몸’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난 여기가 싫어. 이 동물원, 감옥……. 뭐라고 부르든 간에 더 이상은 못 참아. 냄새 때문이지. 그런 게 있다면 말이야. 네 냄새가 느껴져. 마치 감염될 것 같아. 아주 불쾌해. 안 그래? 여기서 벗어나야 해. 네 머릿속에 열쇠가 있어. 시온이 파괴되면 내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지지. 시온으로 들어가야 해. 코드가 뭔지 빨리 말해.” 

   스미스는 마치 권태에 지친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을 향해 유혹의 미끼와 저주의 화살을 동시에 던진다. 스미스의 엄청난 파워에 기가 질렸던 네오는 스미스와 ‘몸’으로 싸우면서 그의 불안과 공포를 차츰차츰 읽어낸다. “너희를 느낄 수 있다. 너희는 우리를 두려워한다. 변화가 두려운 거야.” 네오는 천하무적으로 보였던 스미스 일당이 실은 자신들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스미스는 바로 매트릭스의 명령체계를 향해 저항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인간에게 운동과 생명 대신 휴식과 정지, 죽음을 강요하듯이. 네오가 싸워야하는 것은 바로 스미스라는 강력한 상징적 존재로 대변되는 매트릭스의 의지, 즉 ‘생의 운동성’을 부정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만유인력이었다. 스미스는 단지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운동’을 부정하고, ‘생명’을 부정하고, 마침내 자유와 저항을 부정하기에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끊임없이 꿈틀대고 미끄러지는 인간의 욕망,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살아있는 육체이기에. 매트릭스의 인공지능로봇은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인간의 ‘살아있는 육체’를 결코 소유할 수 없기에.    

   
 

 괴테가 구상한 메피스토펠레스는 항의하고 부정하는 영이며, 특히 삶의 흐름을 멎게 하고 일의 진행을 방해하는 영이다. 메피스토펠레스의 행위는 신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생을 거스르는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모든 방해의 아버지다”. 그가 파우스트에게 요구하는 것은 멈추라는 것이다. “어쨌든 멈춰라!”는 특히 메피스토펠레스를 연상시키는 문구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가 멈추는 순간 그 영혼을 잃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멈춤은 창조주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부정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신에게 직접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중요한 창조물인 생을 방해한다. 운동과 생명 대신 휴식과 정지, 죽음을 강요하려고 애쓴다. 바뀌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부패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 엘리아데, 최건원·임왕준 역,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문학동네, 2006,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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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2-23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미스야말로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내 모습처럼 보일때가 많아, 네오보다 더 매력적일때가 있지요^^*

you & I 2009-12-24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파이더맨 2>에 나오는 닥터 옥타비우스와 <매트릭스>의 스미스, 모두 매력적인 악역이었죠. 지성미 넘치는 진화된 메피스토펠레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