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TRA를 통해 바라본 공기업 혁신의 네가지 성공비결

 

공기업 CIO들은 요즘 혁신에 대한 압력을 곳곳에서 받고 있다. 이 가운데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이하 KOTRA)가 이에 대한 모범답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KOTRA는 지난해 경영혁신 및 국가고객만족도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공기업 혁신의 전도사로 나섰다. KOTRA는 전체 업무 프로세스를 CRM 시스템에 녹여내고 이를 BSC와 연계해 철저하게 업무 실적을 개인의 보상과 연결시키고 있다.

김영미 ym_kim@ciokorea.com

"공기업은 현재의 고객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목표를 확실하게 둬야 한다.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반기업들에게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국내 공기업은 이를 특히 명심해야 한다. 고객이 없는 업무는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온 나라가 경제위기에 휘몰아쳤던 지난 98년, KOTRA에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수출은 점점 급락하고 추락한 국가신인도로 인해 수출과 투자유치 업무를 주로 하는 KOTRA는 점점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기업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KOTRA에게 더 많은 정보와 빠른 프로세스의 혁신을 바랬지만 KOTRA는 이러한 변화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객에 대한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99년, 2000년 공기업 부문 순위가 최하위로 집계되면서 KOTRA 무용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때를 맞춰 산자부 차관 출신의 오영교 사장이 취임하면서 KOTRA는  개혁의 소용돌이 안으로 빠져 들어 갔다.  

공기업도 망한다

98년 외환위기 이후 수출과 외국인 투자의 국민경제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이에 따라 KOTRA에 대한 고객들의 기대가 더욱 커졌다. 밖에서는 기업들마다 e비즈니스를 도입하고 생존을 향한 경영혁신에 매달리고 있었지만 KOTRA는 2000년까지만 해도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사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KOTRA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모든 고객들은 직접 본사를 방문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 결과 KOTRA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수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더욱 심각한 것은 KOTRA 직원들이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공기업이 설마 망하겠느냐’라며 성과없는 사업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대대적인 경영혁신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는 채훈 부사장(CIO 및 전략경영본부장)은 “결국 국민으로부터 외면받는 공사가 되었다. 무용론이 대두되고 KOTRA가 존재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기만이라는 안팎의 비난의 시달렸다. 내부구성원 사이에서도 위기의식이 급속하게 퍼졌다.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KOTRA는 우리나라 기업의 수출과 투자유치를 위해 존재하는 공기업이다. 그러나 이를 위한 직접적인 수단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수출품을 만드는 공장을 짓거나 해외의 개발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할 수도 없고 기업에 금융, 세제 등의 가시적인 혜택을 제공할만한 수단도 없다. 단지 정부와 기업의 중간에서 이 모든 일을 더욱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정보를 제공하는 중간자이다보니 수출이나 투자유치가 잘 될 경우 그 공은 기업체나 정책집행기관의 공으로 돌아가는 반면 잘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를 주된 업으로 하는 KOTRA의 지원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원망을 듣기 일쑤였다.

KOTRA는 먼저 고객의 필요사항과 실태를 파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국내 14만 개 기업을 대상으로 사업수요 조사를 실시하고 이에 따라 사업을 현장 중심으로 대폭 재편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주관해온 전통사업의 경우에도 수출창출과 투자유치라는 구체적인 실적이 없다면 과감히 정리해 버리거나 고객의 요구에 맞춰 개선했다.

 

그리고 사내 기획조정실 산하에 미래전략연구팀이라는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했다.

 

이들은 혁신의 방향을 설정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등 혁신전도사로써 바람몰이를 시작해 전사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역할을 했다. 이들의 목적은 3년 안에 KOTRA를 전세계 최고의 무역투자진흥기관으로 부각시킨다는 것이었다.

KOTRA는 이를 위해 뼈를 깎는 조직혁신과 함께 회사의 모든 프로세스에 CRM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와 함께 실적과 고객만족도, 예산회계 시스템, 직원 목표관리 시스템 등을 BSC 시스템과 연동했다. 더불어 연공서열을 타파하고 다면평가제 등을 도입하여 공정성을 기한 인사시스템은 변화와 혁신에 반감을 갖고 있던 직원들에게 동력을 제공했다.

KOTRA의 이와 같은 혁신 활동은 1년 만에 KOTRA를 경영혁신과 국가고객만족도 지수 상위의 공기업으로 성장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3년 만에 WTO(세계무역기구, World Trade Organization)와 ITO(국제무역기구, International Trade Organization)로부터 세계 최우수 무역투자진흥기관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공기업을 혁신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힘들다고 말한다. 공룡처럼 둔해진 조직, 퇴출없는 인사제도, 혁신을 두려워하는 문화 등 걸림돌이 많기
때문이다. KOTRA는 이러한 어려움을 모두 안고 지난 몇 년간 혁신작업을 꾸준히 수행해왔다. 다음은 KOTRA를 통해 바라본 공기업 혁신의 몇가지 키워드이다.

"무형의 공익서비스를 제공하는 KOTRA의 비즈니스 성과를 균형있게 계량화하여 평가하기 위해서는 BSC가 최적의 도구였다."

1. 고객이 없는 업무는 가치가 없다.

정부부처나 공공기관 혁신에 있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누가 ‘고객’인가 하는 것이다. 일견 너무나 쉬운 문제로 비춰지지만 개발독재, 경제발전이 최우선으로 여겨지던 시대를 살아온 공기업에게 스스로 고객을 ‘누구’로 규정해야 하는가는 한번쯤 되새겨봐야 할 문제이다.

 

KOTRA에게 고객은 ‘대한민국에서 해외로 제품을 수출하는 기업’과 ‘대한민국에 투자해 기업을 운영하는 해외 기업’이다. 채훈 부사장은 “KOTRA의 궁극적인 목적은 직접적으로는 수출과 투자가 실현되어 나타난 투자성약액이고 간접적으로는 KOTRA를 이용하는 고객이 늘어나고 그들의 만족도가 증가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KOTRA는 직원들에게 ‘고객이 없으면 KOTRA도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을 확산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혁신의 방향을 ‘고객’으로부터 찾았다.

모든 혁신의 패러다임을 고객과 성과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바꿨다.

이것은 고객이 원하는 사업을 수행하여 그 성과를 측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영방침아래 선택한 것이 CRM과 BSC였다.

KOTRA는 우선 모든 비즈니스를 고객의 수요와 관점에서 수행하기 위해 CRM 시스템을 구축했다.
즉,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프로젝트화 하여 사업을 기획, 수행하고 결과를 분석하여 다시 사업에 반영하는 데 CRM을 활용한 것이다. KOTRA는 CRM을 통해 사업을 수행하고 고객만족도를 높이는 활동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

KOTRA의 CRM은 일반기업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무형의 상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KOTRA는 모든 사업의 업무처리 프로세스를 정형화, 단순화시키고 CRM을 그 프로세스에 적용해 시스템화 했다. KOTRA의 모든 서비스를 온라인 상에서 신청하고 받을 수 있는 고객접점 기능, 고객의 다양한 요구사항과 사업실적을 정리해주는 고객분석 기능, 고객과의 모든 업무를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업무처리 기능이 그것이다.

 

 KOTRA의 CRM 시스템은 고객이 일일이 KOTRA를 방문하지 않아도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다. 즉, 조사대행, 지사화사업, 시장개척단, 수출상담회, 해외박람회, 해외세일즈 지원, 투자진흥 등 KOTRA의 모든 업무를 고객들이 인터넷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이다.

 

처음 서비스를 신청하는 단계부터 서비스 수수료 결제절차, 업무 진행, 그리고 서비스 결과를 고객에 통보하는 등의 모든 업무 프로세스가 온라인 CRM 시스템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박종식 KOTRA 정보시스템팀 팀장은 “고객이 KOTRA의 CRM 시스템을 이용하여 회원으로 가입하면 원하는 정보와 참여하고 싶은 사업을 지역별, 상품별로 선택할 수 있다. 생산한 정보를 자동 분류해서 고객이 원하는 맞춤 서비스를 한다.

 

또한 서비스를 신청한 고객에게 업무 처리 전과정을 공개함으로써 고객들은 어디에서 누가 이 서비스를 처리 중인지 확인할 수 있으며 서비스가 종료된 후에는 자동으로 고객만족도 측정을 위한 7개 문항의 설문지가 고객에게 발송된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사업이 종료된 후에도 고객은 서비스를 담당했던 해외무역관에게 사후관리를 신청할 수 있다. 이렇게 수행된 사업결과와 고객 정보는 CRM 시스템에 축적되어 다양한 형태로 분석된다. 사업별, 상품별, 지역별, 고객수요, 그리고 고객만족도가 분석되어 그 결과를 다시 각 사업별로 자원, 즉 인력과 예산을 배분하는 데 순환된다.

 

KOTRA의 모든 업무가 온라인 상에서 원스톱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공기업은 현재의 고객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목표를 확실하게 둬야 한다.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반기업들에게 생소할지 모르지만 국내 공기업은 이를 특히 명심해야 한다. 고객이 없는 업무는 가치가 없는 일이다.”라고 채훈 부사장은 못박아 말한다.

KOTRA는 향후 이 시스템의 고객정보 분석 기능을 강화하여 고객 수요 변화에 단순히 대응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새로운 고객 수요를 예측하여 주력사업을 개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시스템을 발전시킬 계획이다. 
 
KOTRA를 통해 바라본 공기업을 혁신하는 4가지 방법

1. 자사의 고객이 누구인지 명확히 설정한다.

2. 변화의 고통을 감내하는 만큼 금전적으로 보상한다.

3. 투명한 인사시스템을 적용해 직원들의 신뢰를 얻어내야 한다.

4. 단기목표를 설정하고 결과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2. 혁신은 반드시 보상과 연계되어야 한다.

몇년 전 국민의 정부 시절 ‘개혁피로감’이라는 단어가 회자된 적이 있었다. 즉,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개혁 활동들이 국민에게 피로감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인데, 이 말은 쏠쏠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당시 야당에게 정부를 공격하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공기업 혁신에 있어서도 ‘개혁피로감’은 고민거리이다.

 

이에 대해 채훈 부사장은 “혁신과 보상이 따로 돌아가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 힘든 변화를 감내할만한 개인적인 수익 즉, 금전적인 보상이 있어야 한다. 특히 공기업 혁신에 있어서 이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라고 조언한다.

KOTRA는 조직과 고객관리 프로세스를 중심으로 혁신을 진행하면서 이를 개인의 실적과 밀접하게 연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KOTRA는 경영 혁신 초기단계에서 다양한 평가제도를 연구한 끝에 BSC를 도입했다.

 

BSC는 CRM을 통해 수행된 서비스, 또는 사업의 성과를 측정하는 도구로 활용됐다.

박종식 정보시스템팀 팀장은 “무형의 공익서비스를 제공하는 KOTRA의 성과를 균형있게 계량화하여 평가하기 위해서는 BSC가 최적의 도구였다.”고 설명한다. KOTRA는 BSC를 통해 성과를 실시간으로 평가하여 본격적인 경쟁체제의 막을 올렸다. 이전에 성과를 평가하려면 6개월에서 1년이 걸리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KOTRA BSC의 가장 큰 특징은 보상이다. 직급이나 연차에 상관없이 적용한 능력별 인센티브제는 조직원 각자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들고 또 능력을 꾸준히 배양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자원이라고는 사람뿐인 KOTRA에게는 인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했기 때문이다.

업적평가 60%, 근무평가 40%로 구성된 BSC는 놀랍게도 KOTRA의 업무 분위기를 일거에 바꿔놨다. 채훈 부사장은 “조직 구성원을 직급별로 구분하고 업적평가 결과에 따라 5등분해 각 등급에서 단계별로 20%씩 인센티브를 차등해서 지급했다. 이에 따라 같은 직급이라도 인센티브에 따라 연봉이 1천만원 가까이 차이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능력별 BSC가 도입됨에 따라 직원들의 무역관 선호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KOTRA 직원들은 보통 3년을 주기로 국내와 해외를 오고 간다. 따라서 어느 무역관에서 근무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이전에는 생활환경이나 교육여건이 좋은 선진국 중심으로 신청하는 직원이 많았다.

 

그러나 성과 중심의 사업과 실적 중심의 평가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아무리 생활 여건이 좋더라도 사업 여건이 나쁜 무역관은 기피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실제로 지난 2003년 정기 발령시 방글라데시의 대카 무역관 근무를 희망하는 직원의 경쟁률이 8대 1에 달했다.

 

선진국이라 하더라도 실적을 창출할 수 없으면 연봉도 깍이고 인센티브도 없어 기피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를 확산하는 데에는 그간 밀실인사로 악명이 높았던 공기업 인사의 대대적인 혁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3. 공정한 인사시스템은 혁신의 가장 확실한 도구

‘공정하고 정확한 인사관리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건강한 조직을 만들고 혁신업무를 수행하는 원동력이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은 대한민국 공기업의 수장들이 귀기울여 들어야 할 부분이다.


KOTRA가 구성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놀라운 추진력으로 혁신의 열매를 맛볼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투명한 인사시스템을 통한 공정한 인사가 그 몫을 해냈다고 KOTRA 직원들은 믿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36개로 이루어져 있던 본사 조직을 핵심 기능별로 통합하여 그 절반 수준인 18개로 줄이고 조직 슬림화로 창출된 여유 인력 90여 명을 해외 현장에 전진배치하는 대대적인 조직 혁신 속에 이 인사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팀을 절반으로 줄였다는 것은 어제까지 팀장이었던 사람이 오늘 일개 팀원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당시 팀장에서 팀원이 된 현 박종식 정보시스템부 팀장(1급)은 “36명의 팀장이 하루아침에 18명으로 줄고 역시 팀원이 되었다. 정신을 쏙 빼놓는 인사였다.”라고 회상했다.

 

현재 그는 달라진 승진 체계로 전산직으로는 최초로 1급직(현재 사내에는 50여명의 1급직원이 존재한다. 이전에 전산직은 1급으로 승진할 수 없었다.)이 되었다. 이 결과 팀간 과당경쟁으로 인한 사업 남발이나 비효율적인 업무 중복, 그리고 조직 내부의 알력이 많이 없어지고 해외 발령에까지 미쳤던 인사 적체 현상도 다소나마 완화시킬 수 있었다.

 

KOTRA의 이러한 공기업 팀제 개편은 타 공기업의 인사에까지 영향을 미쳐 KBS가 지난 여름 이러한 팀제를 적용한 바 있다.


꼴찌에서 우등생으로 변신한 KOTRA

KOTRA는 지난 1일 몰타에서 열린 제5차 세계무역진흥기관회의에서 전세계 최우수(Best of the Best Award) 무역 및 투자진흥기관으로 선정됐다.

사상 최대인 전세계 68개국의 무역 및 투자 진흥기관 대표들이 참가한 이번 회의에서 KOTRA는 1차로 개도국의 최우수 무역 및 투자 진흥기관으로 선정된 데 이어 각 경제군별 우수기관 중 최우수기관(Best of the Best)을 선정하는 최종 결선에서 이 상을 받았다.

수출지원의 필요성이 떨어지면서 기관 존립에 의문이 제기됐던 KOTRA는 철저한 고객관리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연계해 성과평가를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KOTRA는 현장인력 보강에 주력하면서 99~2000년 전체 공기업 가운데 꼴찌를 기록했던 고객만족도를 1위로 끌어올렸다.

조직개편과 함께 적용한 다면평가제는 상사가 일방적으로 ‘인사고과’를 주는 것에서 탈피, 평소 실질적인 업무 관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 직원의 업무 자세와 능력을 평가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360도 평가로 일컬어지는 이 제도는 일시적인 성과 창출, 팀 목표를 벗어난 지나친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인사관리에 유용한 수단이다. “다면평가제는 인기에 영합할 수 있어 포퓰리즘이라는 지적을 받지만 제도적으로 보완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능력대로 가기 마련이다. 일정기간 점수가 높거나 낮은 평점을 받은 특이평점자는 중점관리대상이 되어 제도를 보완한다.”고 채훈 부사장은 설명한다.

4. 성과는 단기간 안에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공기업 혁신에 있어 CIO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혁신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인식이다. 특히 혁신의 초기단계에서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직원들의 인식들을 어떻게 깨고 혁신에 동참시키는가가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다.

KOTRA가 시스템 혁신을 진행할 초기 내부에서 혁신 주도세력에 들어가지 못한 직원들을 중심으로 무관심계층이 확산되고 있었다. KOTRA는 전 직원이 참가하는 경영혁신워크샵과 조직활성화교육을 연속해서 개최하고 경영진과 직원들간의 적극적인 릴레이션십 강화 노력을 병행했다.

 

즉, 온라인을 통한 일대일 혹은 일대다 커뮤니케이션과 오프라인 대화활동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경영진의 혁신의지에 대해 직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단계적으로 혁신활동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도 상당한 저항이 이어졌다. 본사조직 개편으로팀장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팀원으로 발령되자 보직을 받지 못한 간부들과 높은 업무강도 및 경쟁체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직원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반발이 나타나기도 했다. 채훈 부사장은 “어느 조직이건 경영혁신 추진단계는 비슷하다.

위기감 조성에서 시작해 변화추진조직 구성, 비전과 전략 도출, 실행, 후속변화 창출, 변화 정착 등이다.

이러한 단계별로 조직 구성원의 감정과 행동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를 면밀히 관리해야 혁신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KOTRA는 고객과 성과를 중심으로 조직 전반에 공정한 경쟁원리를 도입하고 사업실적 평가와 보상, 인사를 입체적으로 연결시켜 ‘열심히 일한 사람은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원칙을 실현하는 데 매진했다. 또한 혁신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공기업 경영평가와 고객만족도평가에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고 이에 따른 예산 확대, 사업 여건 개선 등 가시적인 단기성과들을 계속 창출하여 혁신활동이 결국모든 조직원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확인시켰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면서 단기적인 성과를 구성원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채훈 부사장은 혁신 첫 해에 이러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현재 혁신을 준비하고 있는 공기업의 수장들이 꼭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구성원들이 성과없는 ‘개혁피로감’을 느끼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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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만큼 적절한 이름을 선택한 브랜드도 없을 것이다. 창업자인 올커크 크리스챤센(Ole Kirk Christiansen)은 덴마크어로 "잘 논다"(Leg와 Godt)를 합쳐서 "lego"를 만들었다. 또한 라틴어로 레고는 "책을 읽고 있다"거나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올 커크 크리스챤센은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 덴마크에서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목수였던 그는 어린이의 상상력과 창의적인 소질을 자극할 수 있는 고급 장난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요요도 만들고, 바퀴달린 코끼리 형상도 만들었다. 또 장난감 유모차와 자동차, 오리모양의 장난감 등을 제작했고, 그의 목제 장난감도 관심을 끌게되자 일손이 달려 다른 일꾼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말쯤에는 레고에서 일하는 인력이 50명을 넘었고, 그 지역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회사로 자리잡았다.
1955년에는 수많은 시도와 실험을 거친 끝에 그 유명한 레고 벽돌이 덴마크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신제품은 이 회사가 앞서 만든 장난감과는 달리 완벽한 "놀이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1958년 올커크 크리스챤센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갓프레드가 경영권을 인수할 즈음 레고는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한 해 매출은 150만 달러를 넘어섰고, 1968년에는 최초의 레고 랜드를 개장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993년, 레고는 브랜드 확장을 시도해 어린이 의류 사업에도 진출했다. 레고와 덴마크의 의류 생산업체인 카부키 간의 라이센스 협정에 따라 레고 키즈믹스&매치웨어(Lego Kids' Mix&Match Wear)가 등장했는데, 스칸디나비아와 네덜란드 전역의 아울렛에서 판매되고 있다.



장난감 사업만큼 유행에 민감한 사업도 드물다. 레고는 끊임없는 이노베이션을 통해 생산·판매하는 제품의 참신함을 교묘하게 유지시켜 나갔다.
1970년대에 레고는 모터가 달린 동력 장난감 제조업체들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레고모터를 내놓았다. 최근에는 종래의 전형적인 레고를 보완하기 위해 "기사와 드래곤", "공룡", "잃어버린 세계"등 일련의 테마별 레고 세트를 내놓음으로서 낡은 인상을 떨쳐버렸다.



다른 장난감업체와 달리 레고 브랜드가 지속적으로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지속적인 이노베이션과 참신함을 잃지 않는데 있다. 현재까지 이 회사는 젊은 기운이 유지될 수 있도록 운영되었다. 이런 기운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레고브랜드는 어린이들의 상상력이 시들지 않는 한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내용출처 : [인터넷] 네임뱅크(http://namenet.co.kr/bank/sub.html?command=c_view&cat=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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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복은 1895년 최초로 스파이크 러닝화를 만든 영국의 젊은 스포츠인, J.W.포스터 (Foster)
에 의해 설립되어 세계 최고의 스포츠화 및 의류를 개발하는 데 지속적인 연구와 투자를
해 온 스포츠, 휘트니스 전문 회사입니다.
오늘날 리복 제품은 140개국 이상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특히 영국, 스페인, 덴마크를

포함한 유럽에서는 'No. 1' 브랜드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리복의 역사


*1895년



리복은 1895년 최초로 스파이크 러닝화를 만든 영국의 젊은 스포츠인 J.W.Foster에 의해
설립되어 세계 최고의 스포츠화 및 의류를 개발하는데 지속적인 연구와 투자를 해 온
스포츠, 휘트니스 전문회사입니다.
1895년 영국 볼튼(Bolton)의 한 육상선수었던 J.W.포스터(Foster)는 좀 더 나은 기록을
위해 못(스파이크)이 박힌 러닝화를 원했지만 그러한 신발이 제작될 여건이 안되었던
그 당시 한가지 해결방안은 포스터 자신이 직접 러닝화를 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1900년

1900년 포스터는 그의 스파이크 러닝화 제조기술을 점차 개선하여 다른 선수들에게도 제공해주는 등 사업을 대중적으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포스터의 발명품인 스파이크 러닝화는 최고의 러닝화로 인정되었고 엄청난 기록의 향상을 가져온 기술적 진보였습니다. 포스터 디럭스 스파이크(Foster Deluxe Spike)화는 최근 50년동안 최고의 러닝화로서 자리를 굳혀온 바 있습니다.



* 1904년


포스터의 스파이크화는 글래스고에서 열린 단종 경기에서 알프 슈럽 (Alf Shrubb)이
역사적인 기록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1908년 포스터의 러닝 펌프 (Running Pump)는 올림픽과 프로페셔널 경기에서 최고의 제품으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1년 후 포스터는 발을 측정하는 도표를 개발, 선수들에게 꼭 맞는 신발을 만들기 위해
처음으로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합니다.



*1933년


J.W.포스터가 타계하자 사업은 두 아들인 제임스(James)와 존(John)에게 남겨졌습니다.



*1938년


1938년 C.B. 홈즈(Homles)가 호주의 엠파이어 게임(Empire Games)에서 포스터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고 100야드, 200야드 두 종목에서 신기록을 세웠고, 그의 러닝 스타일은 '퍼포먼스 위드 스타일(Performance with Style)'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1958년

1958년 무렵 사업은 점차 다른 스포츠화에도 확대되었습니다. 창시자의 손자 조(Joe) 포스터는 아버지의 소망대로 회계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17세에 패밀리의 비즈니스에 동참하였으며, 포스터 가 사람들은 직접 신발을 재단하고 바느질하면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위한 제품의 창조를 계속했습니다. 군복무 후 세계를 여행하며 스포츠, 휘트니스계의 성장을 보고 돌아온 두 손자 조셉과 제프리는 새로운 사업에 착수합니다. 처음에는 '머큐리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후에 가장 빨리 달린다는 아프리카의 가젤류의 이름인 '리복(Reebok)'으로 바꾸었으며 보다 다양한 스포츠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포스터 가에 있어 항상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의 퍼포먼스와 품질이었고, 리복의 가치는 그간 리복을 신고 달린 엘리트 선수들의 승리의 기록과 메달로 입증되었습니다.



* 1979년


1979년경에 리복의 사업은 계속 확장되었지만, 미국에서는 사실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 국제 박람회에서 리복을 보게 된 미국의 아웃도어 장비업자 폴 파이어맨(Paul Fireman)이 리복의 미국 내 판매권을 취득합니다.



* 1982년

1982년 리복에서 선보인 최초의 여성용 에어로빅화 '프리스타일(Freestyle)'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합니다. 패션 칼라의 가먼트레더(6개월된 송아지의 가죽)로 만들어진 '프리스타일'이 엄청난 성공은 휘트니스 붐으로 이어지며, 곧 전 에어로빅과 휘트니스계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 1985년

1985년은 리복이 상장회사로 미국 뉴욕 증권가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신문에 매일 주가가 보도되기 시작한 해로, 리복은 스포츠, 휘트니스 산업에서 동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전세계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친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 1987년


1987년 리복은 세계 넘버 원 스포츠화 마케터 이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좋은 제품만 공급하는 것 이상의 파워를 갖게 된 리복은 성공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향을 모색하게 되고,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국제인권단체 엠네스티(Amnesty)를 후원하면서 인권상(Human Rights Award) 프로그램을 펼쳐 인권 침해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젊은이들의 노력을 인정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1989년


1989년, 독특한 공기주입 방식을 이용한 PUMP 농구화의 개발로 리복은 다시 한 번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됩니다. 리복의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제품의 질을 향상시켰고 이것은 INSTAPUMP 기술로의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 1996년

1996년에는 종래의 쿠셔닝 개념에 반하는 전혀 새로운 쿠셔닝 기준, DMX Technology가 개발됩니다. 열역학을 이용한 유연성과 공기흐름 구조의 연관작용으로 EVA Form에 비해 유연성 20%, 안정성 10~15%정도 상승 효과가 있는 DMX Technology를 개발하여 러닝화 브랜드로서 가장 앞선 기술력을 갖추게 됩니다.



* 2002년

2002년 리복은 제품 혁신에서 출발하여 놀랍게 발전된 스포츠 & 휘트니스 산업의 중심에서, 그리고 지난 100여 년의 역사에 그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계속적으로 발전된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용출처 : [인터넷] www.reeb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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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법조인, 변호사

생일 : 1957년 11월 12일

학력 : 경기고등학교 -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 서울대 법과대학원 석사 -

하버드와 예일대 법학석사, 컬럼비아대 법학박사

별명 : 법조계 팔방미인

좌우명 : 피할 수 없다면 맞서자

결혼여부 : 2004년 3월 7일 경향신문 문화팀 이무경 기자(37)와 결혼

특이사항 : 고시 3관왕 - 제20회 사법시험(최연소), 제13회 외무고등고시(차석),

제23회 행정고등고시(수석)

주요 학력과 경력
- 서울 법대 재학 중에 고시 삼관왕
- (사법시험 최연소, 행정고시 수석, 외무고시 차석), 서울 법대 수석 졸업
- 법학석사(Harvard Law School, Yale Law School)
- 법학박사(Juris Doctor, Columbia Law School)
- 수원지방법원 판사
- New York, New Jersey, Illinois, Washington, D. C. 변호사 자격
- 당시 세계 최대 law firm인 Baker & McKenzie 근무
- 탐라대학교 부교수, 국민대학교 강사
- 서울시와 6개 구청 법률고문, 조달청 법률고문, 공무원연금관리공단 법률고문
- 경찰청 법률자문위원, 서울시행정심판위원, 서울시지방세심의위원
- 서울시공무원교육원 강사, 세무사, 변리사


방송 출연작품

SBS 코미디 전망대, KBS 코미디 세상만사, 김미화의 생생경제연구소, MBC 라디오 FM모닝쇼 법을 아는 것이 힘이다, SBS 라디오 스트레스 제로쇼 물어봐도 돼요, SBS 솔로몬의 선택 (2003년)

저서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2003)


고승덕씨 누구인가
[정치] 1999년 04월 30일 (금) 00:00

고승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2, 3, 4학년 때 차례로 고시 3과를 패스해 세상의 이목을 끈 뒤 약관 27세에 수원지법 판사를 시작했다.

그의 '간판따기' 는 하버드.예일.서울대 법학석사, 컬럼비아대 법학박사 (Juris Doctor) 로 이어졌다. 특히 3년 과정인 컬럼비아대 법학박사 학위를 2년으로 단축한 기록이 눈에 띈다.

광주 출신의 高씨 가문은 부친이 의사, 외숙이 대법관, 숙부가 전남대 약학대학장을 지냈고 형제들이 고교 수석입학.졸업을 하는 등 최고 학벌에 법조.의료계의 탄탄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전영기 기자 / 중앙일보

htttp://www.gamiddle.com 고승덕 변호사가 운영하는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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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05-02-12 13:42]
[프레시안 이승선/기자]10년전 노점상으로 모은 2천만원을 가지고 10평 남짓한 공간에 마련한 카페가 지금은 4천평이 넘는 대형 카페로 발전했다. 국내 카페 브랜드 인지도 1위, 국내 외식업소 고객 만족도 1위의 '민들레영토'가 그곳으로, 이제는 미국과 중국 등 해외진출도 추진중이다.
  
  민들레영토의 성공비결, '감성마케팅'
  
  본점인 서울 신촌 민들레영토는 8백평 빌딩 전체가 카페이다. 10년 전 하루 1백명 정도의 고객이 찾아오던 이 곳은 지금은 하루 1만명이 찾아온다. 그 비결은 '감성마케팅'이다.
  
  <민들레영토 희망스토리>(랜덤하우스 중앙 간)는 마케팅MBA(주)의 김영한 대표가 민들레영토의 지승룡 대표를 6개월 동안 수십차례 만나 그의 이야기와 마케팅 포인트를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우선 민들레영토를 '감성리더와 감성사원이 운영하는 감성공간'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 짧은 표현에는 수많은 위기와 창조적인 해결과정에서 구축된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경영방식이 압축돼 있어 이제는 초일류기업들이 벤치마킹하는 '감성마케팅' 사례가 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민들레영토의 대표 지승룡은 39세에 성직자를 그만두고 나서야 자신의 몸에 장사꾼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서비스하는 문화카페라는 전혀 새로운 비즈니스 영역을 개척하며 그는 20개의 민들레영토를 전국에 건설했다.
  
  지승룡에게 첫 위기는 서른여섯에 이혼을 하면서 예수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에 전파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이 허망하게 무너졌을 때였다. 멀쩡한 성직자도 교회가 모자라서 목회활동을 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이혼은 목회자에게 치명적인 핸디캡이었다.
  
  그는 3년간 닥치는대로 집 근처 종로 정독도서관에서 2천권의 책을 읽으며 패배의식을 달랬다. 어느덧 그는 경제와 경영분야의 책을 섭렵하는 등 사회 복귀에 필요한 책을 중점적으로 골라 읽고 있었다. 재혼에 성공한 유치원 선생님과 만난 것도 이 도서관이었다.
  
  93년 가을 정독도서관에서 나와 인사동의 조그만 한 카페에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며 30분 정도 사색에 잠겼던 그에게 주인은 "손님, 이렇게 혼자 오래 앉아 계시면 영업에 지장이 있습니다. 그만 일어나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지승룡은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편하게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이 이렇게도 귀하단 말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데, 도시의 모든 공간이 이렇게 장삿속에만 빠져 있단 말인가?'
  
  그때 하나의 영감이 떠올랐다. 외로운 도시인들이 고향의 집이나 어머니의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휴식공간을 만든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야. 옛날 시골다방에서 마담이 손님에게 편안한 대화 분위기를 제공했듯, 도시인이 쫓겨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카페를 만들면 어떨까?
  
  가래떡 장사로 모은 초기자본 2천만원
  
  그러나 돈이 없었다. 한 달 동안 80명을 만났지만 단 한 푼도 돈을 빌리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초기자본을 만들어내야 했다. 어느날 길거리 노점에서 떡볶이를 먹던 그는 가래떡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의 상품이라는 발상을 떠올렸다.
  
  이때 정독도서관에서 읽은 경영도서들이 힘이 됐다. 어떤 장사를 해도 다른 사람과 다르게 해야 성공한다는 지침에 따라 가래떡 장사를 하기 위해 신사복에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으로 강남의 고급아파트 단지를 입지로 선정했다.
  
  주변에서는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음식인 가래떡을 부자동네에서 팔기로 한 그를 보고 장사의 기초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난 그는 가래떡이 강남에 사는 중년부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다. 중년부인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머니'라고 불렀다.
  
  "이거 쌀로 만든 떡인데 제가 지금 막 뽑아왔습니다. 이 떡을 오늘 집에 가지고 가셔서 요리하시면 가족들이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제가 지금 방금 뽑아온 떡입니다."
  
  장사가 잘 되는 날은 하루 20만원 넘게 수익을 올렸다. 가래떡 장사로 약간의 돈이 모이자 그는 이번에는 의류 재고품 판매에 나섰다. 그 무렵 신문에서 의류회사마다 재고로 골치를 앓고 있다는 기사를 눈여겨 본 것이다. 정가의 25%에 재고품을 받아 팔리는 물건만 결제하고 나머지는 반품하는 조건이었다.
  
  정가의 50%에 판매를 하니 이윤이 짭짤했다. 떡장사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2천만원의 초기자본이 모아졌다. 이제 카페 사업을 시작할 때가 왔다. 연세대 신학과를 나온 그는 모교가 있는 신촌을 사업 장소로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2천만원 예산으로 가게를 얻으려고 부동산 중개소를 찾아간 그에게 중개소 주인들은 "가게 없다"는 퉁명스러운 답변만 했다. 알고보니 적어도 억대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창업 관련 서적에서 읽은 정보를 떠올렸다. 좋은 가게를 얻는 노하우였다. '내려가는 길목에서는 장사를 하지 마라,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추후 확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등의 원칙을 가지고 3개월간 신촌 일대를 관찰했다. 그러던 중 신촌 기차역에서 연세대 정문 쪽으로 난 이면도로 부근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하루종일 서서 살피다가 카페를 하기 에 딱 맞은 장소 하나를 발견했다. 그곳은 연세대 쪽 골목 안 기찻길 옆에 있는 양장점이었다. 위치가 골목 안쪽이고 뒤편은 기찻길이어서 인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주인은 권리금만 1억원을 요구했다. 몇주일간의 줄다리기 끝에 임대보증금과 권리금을 합해서 7천만원으로 깎았다.
  
  2천만원밖에 없었으므로 나머지는 월세로 돌릴 작정이었던 그는 "가게를 계약하기 전에 반드시 건축대장과 등기부등본을 확인하라"는 창업 지침에 따라 구청에서 건축대장을 떼어보았다. 가게를 하려면 영업허가를 받아야 하고 허가를 받으려면 건축물관리대장에 등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양장점 건물은 건축물관리대장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무허가 건물이었다. 그는 주인에게 "이곳은 무허가건물이더군요. 구청 담당공무원들이 그러는데 머지않아 철거하고 이 거리를 아름답게 꾸밀 계획이라고 하더군요"라며 재협상에 들어갔다. "없던 얘기로 하자"는 주인은 며칠 후 보증금 1천5백만원,월세 70만원의 조건으로 계약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음료 못파는 10평짜리 카페 오픈
  
  카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9개월 만에 10평짜리 가게를 열었다. 카페에서 무엇을 팔 것인가. 음식과 음료 나아가 종업원의 서비스를 판다는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팔기로 했다.
  
  손님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카페에 온 손님을 쫓아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결정한 게 리필이었다. 어머니는 자식이 아무리 많이 먹어도 낯을 찡그리지 않는다. '드시고 더 드세요'의 마음가짐으로 손님을 대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허가 건물이어서 음식을 팔 수 없었다. 그는 예전에 친구와 함께 갔던 한 카페가 머무는 시간을 기준으로 1시간에 1인당 5천원을 받고 누구나 먹을거리를 사가지고 올 수 있도록 했던 것도 무허가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는 구청 담당자에게 "무허가 건물이라서 음료를 팔 수 없다면 장소사용료를 받으면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구청 직원은 '선례가 없으니 알아서 하라"면서 "자판기를 들여놓으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까지 내놓았다.
  
  그는 장소사용료로 '문화비'를 받되 카페 안으로 먹을 것을 가지고 오는 손님은 막지 않기로 했다. 자판기에서 파는 음료값에 장소사용료를 포함시키고 고급종이컵을 사용해 싸구려라는 느낌을 없앴다.
  
  나아가 회원제를 실시해 입회비를 내면 도형을 이용해 자아실현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양장점이었던 10평짜리 가게에 탁자 6개를 놓은 카페라고 하지만 무허가여서 간판도 달 수 없었다.
  
  그는 지나가는 학생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간판 자리에 영어로 'Break the Impossibility Habits'라고 크게 써놓고 차를 파는 곳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커피자판기를 하나 사서 쇼윈도 앞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흔들의자를 두 개 사서 부부가 앉아 있었다. 아내는 공주옷을 입고 남편은 스웨터를 입고 앉아 커다란 활자로 인쇄된 영어 성경책을 읽었다. 실내에는 항상 새소리, 물소리 같은 환경음악을 틀어놓았다.
  
  첫날 2명의 손님이 찾아온 뒤 한 달도 안돼 하루 1백명씩 손님이 찾아왔다. 그러나 돈은 적게 받고 많이 퍼주는 영업방식으로 하다보니 하루 5만원 정도밖에 벌지 못했다. 둘이서 하루 막일을 해도 10만원씩 버는데, 둘이 하루 종일 일을 해서 얻는 수입이 5만원이라는 노력에 비하면 적은 돈이었다.
  
  '퍼주기 장사'의 사업화
  
  그는 여기서 '곱하기 공식'을 통해 카페 영업을 사업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잔금을 1년 뒤에 주고 그 동안 이자를 지급하는 식으로 일단 카페를 대형화시킨 것이다. 10평 카페와 옆 가게 두 곳을 사들여 1백평으로 카페를 넓힌 것이다.매출이 비약적으로 신장하면서 매달 수천만원씩 순익이 남았다.
  
  민들레영토에서는 찻값을 따로 받지 않고 문화비를 내면 민토차를 기본으로 커피, 레모네이드, 녹차 등 다양한 종류의 음료를 3번까지 리필해서 마실 수 있다. 조용히 책을 볼 수 있는 독서실과 여러 사람들이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세미나실, 연극과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게다가 고객들이 직접 참여해서 자신들만의 콘서트를 열거나,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공간도 갖추었다.
  
  감성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그는 오감마케팅까지 동원했다. 시각적으로 아릅다게, 청각적으로 분위기 있게, 후각적으로 향기롭게, 촉각적으로 부드럽게, 미각적으로 입맛에 맞도록 카페를 설계한 것이다.
  
  저자는 특히 민들레영토가 제공하는 '감성체험' 마케팅에 주목한다. 서비스 공간에 한 사람이 오래 머물면서 자리를 점유하면 효율이 떨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래 머무는 동안 그곳에 친근감이 생겨서 다른 상품들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손님이 오래 머물면 다른 손님들이 민들레영토에 왔을 때 이곳은 항상 손님이 많은 인기 있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주게 된다. 고객도 뛰어난 인테리어가 되어 손님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손님들이 항상 있으면 서비스 사원들도 긴장하여 근무의욕이 높아지고 서비스 스킬도 향상되는 부대효과도 있다.
  
  위기 때마다 위력을 발휘한 '문화공간'
  
  그러나 사업 확장 후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서울시가 '아름다운 서울'을 만든다는 취지에 따라 서대문구청은 기찻질 옆 건물들을 헐고 공영주차장과 공공시설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하루 아침에 카페가 없어질 위기의 순간에 그는 디지털 세대에 주목했다.
  
  그는 카페에서 토크쇼를 열고 '이곳이 헐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단골 학생들은 즉각 구청에 민원을 제기하고 구청 홈페이지에 하루 수백 건의 글을 올려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민들레영토 지키기 운동에 나섰다.
  
  연세대는 물론 이화여대,서강대 학생들까지 온갖 유흥시설로 덮인 신촌에서 민들레영토는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공간이라면서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사태가 이쯤되자 구청에서 실태조사를 나와 마침내 서울시로부터 계획을 철회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민들레영토가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도시인들의 문화공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도시문화연구소'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주인이나 대표,사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소장'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지승룡은 '문화공간'의 경쟁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서 이번에는 대학로에 민들레영토를 오픈하기로 했다. 신촌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지만 밀린 대금들 갚는데 돈이 다 들어가 당시 통장에는 1백만원도 없었다.
  
  어이없어 하는 아내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포 확장 계획을 밀어부쳤다. 원하는 건물이 매물로 나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등기부등본을 확인하니 경매 절차가 진행중이었다. 은행 지점장으로부터 건물대금의 90%까지 대출을 약속받은 그는 경매로 건물을 낙찰받았다. 그러나 IMF가 터지면서 대출을 약속한 은행이 다른 은행으로 넘어가면서 잔금을 치르지 못할 위기가 닥쳤다.
  
  6부 이자의 사채까지 끌어써야 할 상황에서 대출에 부정적이었던 한 신용금고회사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알고보니 이사장의 여비서가 이 가페의 단골로 '문화공간'으로서의 민들레영토에 대한 지원을 간청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된 것이었다. 또다시 '문화공간'으로서의 카페의 위력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민들레영토가 스타벅스와 다른 점
  
  저자에 따르면 지승룡은 "경영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진정한 문제는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못찾는 데 있다느 것이다. 그는 "문제는 해결의 시작이다. 남들이 풀지 못하는 장애물을 해결하면 성공을 앞당길 수 있다"고 보고 그것들을 창조적으로 헤쳐나갔다.
  
  "일주일을 굶어보면 인생을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굶주린다는 것, 그것도 죽기 직전까지 굶주리면 인간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다. 배가 고파본 사람은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만들고 고객 중심의 서비스를 하게 된다.
  
  사업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종업원들이 함께 움직여줘야 한다. 그래서 민들레영토의 도우미들부터 감동시켜야 한다는 게 지승룡의 원칙이다. 동일업종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어려우면 상대적으로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 상대적으로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는 것은 매출액 대비, 이익 대비로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는 뜻이다.
  
  급료가 높으면 우수한 도우미를 채용할 수 있고 다른 곳으로 쉽게 옮겨가지 않고 오랫동안 일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카페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손님들에게 실천할 사람들이 직원들이지만 주인 마음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민들레영토가 도우미 자신들의 것이라고 느끼게 하기 위해 '마스터 제도'를 도입했다.
  
  마스터 작위는 1년 이상 근무자 중에서 민들레영토의 경영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성실하게 근무하며 경영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선발해서 작위식을 거행하고 일정액 이상의 매출을 올렸을 때 인센티브도 주어진다.
  
  그는 요즘도 민들레영토의 홈페이지를 통해 커뮤니티 공간을 넓혀가고 있다. 아예 고객들의 미니 홈피를 찾아서 매일 밤 마실을 떠난다. 고객들의 생각과 감성을 이해하는 통로이기도 하면서 인터넷 시대에 걸맞는 고객관리 일환이기도 하다.
  
  그는 신촌 신관을 오픈하면서 스타벅스와 차별화된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스타벅스는 세계 어디에서나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민들레영토는 여러 지역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 지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민들레영토는 중국과 미국에 해외지점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은 북경에서 시장조사를 거쳐 현지직원이 토지매입 등의 준비작업을 하고 있고, 미국도 LA에서 조만간 오픈할 예정이다.

이승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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