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 글로벌 시대, 치열했던 한중일 관계사 400년
오카모토 다카시 지음, 강진아 옮김 / 소와당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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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김영철 씨가 광복절 특집으로 기획된 모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통해 영국을 방문하여, 한국에 대한 왜국된 정보를 수록한 영국 교과서 수정을 약속받고 돌아왔다는 뉴스 기사를 읽었다. 우리나라가 1인단 10달러 이하의 원조를 받는 나라며, 경제적으로 발전이 덜 된 나라로 분류되어 있었고, 중국어를 사용한다는 설명도 있었다고 한다. 김영철 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심지어 한국이 중국에 포함된 나라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외국의 교과서가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리나라에 대한 정보와 자료가 부족해서 UN 자료를 받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영철 씨는, “일본의 경우 매주 자기 나라의 변동사항을 (영국의) 저자에게 알려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타까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2008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지 64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61년째가 되는 날이다. 그런데 8월에는 광복절과 건국기념일과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날이 또 있다. 8월 29일 '국치일'이다. 모든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긴 치욕의 날이다. 우리는 이날의 치욕을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르지 않는가. 내년이면 '경술국치'(庚戌國恥) 100주년이 된다고 한다. 웰스라는 역사가는 "역사를 통해 배우는 가장 분명한 사실은 인간은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역사의 교훈을 새기지 못하면, 부끄러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이라는 책은 8월의 역사적인 감흥을 새롭게 일깨워준 책이다. 책 제목이 기분 나쁘지만, 더 기분 나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것과, 더 기분 나쁜 것은 세계 열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우리나라의 부끄럽고 안타까운 역사를 마주하는 일이며, 그것보다 더 기분이 나쁜 것은 일본인 학자가 쓴 책을 읽으며 이러한 자국의 역사를 배우고 있는 나 자신이다. 지극히 유치한 감상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솔직한 심정이니까. 그런데 돌이켜 보니, 우리는 줄곧 이렇게 반응해왔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 기분 나빠하기' 말이다. '나쁜 놈'들이라고 욕하기 전에, 이제라도 진지하게 반성하며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역사의 창을 통해 과거는 물론 '오늘'에 대한 성찰과 '내일'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은 조선 반도를 둘러싼 역학 관계, 즉 국제정세와 조선의 외교 관계를 살핀 책이다. 뻔한 말이지만 다시 깨닫는 것은 나라에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시대를 읽는 눈이 있어야 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씁쓸하다. 책을 읽을수록 조선의 독립이 '미완'이라는 명제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광복(光復), 우리가 속히 회복해야 할 빛이 아직 남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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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랜드 - 신경심리학자 폴 브록스의 임상 기록
폴 브록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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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곧 스토리이다.


저자를 '학자'라고 불러야 할지, '작가'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사일런트 랜드>(into the silent Land)는 폴 브록스라는 신경심리학자의 임상 기록이다. 그런데 내용이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다. 임상 기록이라는 선입견이 첫 장의 내용부터 아리송하게 만들었고, 곧 설명이 나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가는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특별히 어려운 의학 용어나 내용이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이 책은 임상 기록이라는 느낌이 없다.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다. 어떤 내용들은 동화처럼 아름답다. 신경장애에 걸린 사람들의 임상 기록이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라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추천사'를 보니, "뇌의 기능에 손상이 왔을 때 현실적으로 얼마나 심한 손실인지를 평가하는 전산화된 기능검사가 임상에서 시행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이 평가와 진단을 전담하는 학문이 바로 신경심리학"이라고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일을 하는 신경심리학자가 신경장애에 걸린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쉬운 말로, 뇌를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책이 임상 기록처럼 읽히지 않고,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저자의 독특한 문체와 서술 방식 때문이다. 저자는 환자, 즉 뇌를 다친 사람들을 '관찰'하는 3인칭 시점이 아니라, 독특하게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한다. 즉, 나(I)의 입장에서, 환자 자신이 이상 행동을 할 때의 느낌과 심정을 이야기하고, 그런 시각에서 이상행동 증세를 묘사한다. <사일런트 랜드>는 신경증 환자의 사례들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도 저자의 경험이 형이상학적 우화와 자전적 명상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뇌를 다친 환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그리며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고 하여, 영국 언론은 이것을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이라고 했다고 한다. 

책에는 뇌의 손상을 입은 기이하고 파격적인 사례들이 등장한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사람, 자신의 머릿속에 물고기가 헤엄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온몸의 피가 밤사이 다 말라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똥을 자꾸 먹어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마디로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과 해석이 새롭다. 나는 몇 번을 읽으며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려 애썼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읽을 때는 이해될 듯 하면서도 다시 생각하면 어렵다.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온전한 자아라는 것은 없다.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누구나 분할되어 있는 불연속적 존재이다. 우리의 자아의식을 뒷받침하는 심리과정 - 느낌, 생각, 기억 등 - 은 두뇌의 여러 영역에 흩어져 분포되어 있다. (...) 그런 것들은 허구의 작품에서나 통합된다. 그래서 인간은 스토리를 말하는 기계이다. 자아는 곧 스토리이다"(73). 뇌를 다친 사람들, 즉 신경장애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 부조리한 이야기도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마디로 이렇게 주장한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스토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스토리가 우리를 말해준다는 거다"(74)라고. 저자의 설명이 이해가 되는가?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은 뇌 손상을 입은 환자이든 정상인이든 똑같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 신체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보통 심장의 위치에 손을 댄다. 다시 물어보면, 뇌의 위치에 손을 대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곧 알쏭달쏭해진다. 자아와 의식과 마음을 '나'라고 느끼면서도 그런 의식 활동을 하는 '나'에 대한 성찰과 이해, 곧 철학적 질문을 별로 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사일런트 랜드>는 물질적인 뇌와 눈에 보이는 이상행동만이 아니라, 뇌의 활동과 자아(I)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함께 탐색한다는 점이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하지만, 동화처럼 아름답고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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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원
니콜라스 스파크스 지음, 김진주 옮김 / 퍼플레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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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사랑을 믿으세요?

’찾아가는 운명, 다가오는 사랑’이라는 매우 낭만적인 글귀와
카드가 그려져 있는 책의 표지를 보니,
지치도록 보고 또 보았던,
’욘사마’ 열풍이 풀게 했던 ’겨울연가’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배용준이 열연했던 ’민형’(준상)이라는 인물이 타로 카드 한장을 뽑아 들었는데,
그때 그 카드의 이름이 ’운명의 수레바퀴’였다.
’유진’의 선배는 그 카드를 ’민형’(준상)에게 선물하며,
마치 예언을 하듯 운명의 상대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 알려준다.
똑같은 카드를 가진 사람이 바로 운명의 상대라는 말과 함께.

’운명적인 사랑’ 따윈 믿지 않는 사람들의 메마른 정서를 씻어주기라도 하듯
감성을 한껏 자극하는 <럭키 원>은 그 이야기가 ’겨울연가’ 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만약, 오래 전에 찍은 나의 사진을 들고 한 낯선 남자가 국토의 절반을 걸어 찾아온다면?
아직도 이런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우연히’ 주운 한 장의 사진이 ’마법’ 같은 행운을 불러오고,
’무작정’ 사진 속의 여자를 찾아 미대륙을 절반을 걸어서 여행하고,
사진 속 여자의 전 남편과 ’필연성을 동반한 우연’으로 얽히고,
그럴 작정은 아니였는데, 어느새 서로에게 끌리며 사진 속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소울메이트’처럼 완벽하게 어울리는 ’커플’이 된다.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이러한 ’운명적 설정’이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법’한 사랑임을 증명하듯,
개연성을 위한 여러 가지 장치도 잊지 않고 있다.
우선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우연히’ 하게 주운 사진이지만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어떠한 미신이라도 믿고 싶어질 것이다.
또한 사진의 배경을 단서로 미지의 여인을 찾아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주인공 남자는 사진 속 여자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계산’해낸다.
이야기의 후반부에서는 ’운명’과 ’스토킹’ 사이에서 갈등도 일어난다.

내가 아는 가장 운명적인 사랑이야기인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영화를 보면,
선생님 이병헌이 학생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명대사가 나온다.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가루만큼 고운 가루 같은 밀씨 하나를 떨어뜨려서,
그 밀씨 하나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바로 저 바늘 위에 꽂힐 확률!
그런 엄청난 확률로 우린 만난 것이고, 그것을 ’인연’이라고 부른다"고.
(정확하지는 않지는 대충 이런 대사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하게 되는 사랑은 모두 ’운명적인 사랑’이 아닐까.
사랑을 꿈꾸기 시작하고부터 줄곧 나도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려왔다.
그런데 너무 ’요란한’ 운명을 기대하느라 모든 ’운명적 인연’을 놓쳐버린 듯하다.
지금은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럭키 원>과 같은 환상을 품기에는
그간에 사랑에 대해 직접, 간접적으로 겪은 실망이 너무 크다.

<럭키 원>이 말해주는 것은 어쩌면 운명처럼 다가오는 수동적인 사랑이 아니라,
내게 다가온 사랑을 ’운명’이라고 믿고 가꿔가는 적극적인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 사랑은 기적이 된다고 말이다.

문학이니까, 소설이니까 이런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다시 어떤 기대감이 살짝 자리한다.
내게도 사랑이 올까?
’바로 이 사람이다’ 하고 알아볼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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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과
기무라 아키노리, 이시카와 다쿠지 지음, 이영미 옮김, NHK '프로페셔널-프로의 방식'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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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속도로 돌아가는 세상을 살아가다가 문득 한 번씩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차오르면,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싶어진다. 올해는 유난할 정도로 자주 그런 욕구에 시달린다. 아마도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나에게 꿈과 지표가 되어주었던 소중한 분들이 훌쩍 우리 곁을 떠나는 일이 잦아서 더욱 그런 것 같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까지 그렇게 떠나가는 분들을 보며, 내가 지금 목표하며 전력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기적의 사과>는 목표를 향해 뛰어가던 나를 잠시 멈춰 서게 한다. 사과를 재배하는 한 농부의 우직한 삶은 나에게 진정으로 ’위대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 가르쳐준다. 전에는 부도덕한 정치인이나 기업인, 지식인들을 비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 솔직히 그들이 가진 권력과 재력과 학력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고, 그들이 가진 힘을 나도 쥐고 싶었다. 반대로, 낮은 자리에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존경심을 가졌지만, 솔직히 마음으로는 그들처럼 살기를 동경하지 않았다. <기적의 사과>에서 만난 한 농부 할아버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연농법’을 사과 재배에 도전한 그 무모한 삶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진심으로 좇고 싶은 위대한 삶의 가치를 배웠다.

’농약을 쓰지 않고 사과 키우기’가 전 생애를 걸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닌 일일까? ’기무라 아키노리’ 씨는 그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우연히 계기로 시작된 실험적인 농법이었지만, 한번 미치니 포기할 수 없었다. 화학 비료 사용을 멈추자 사과 밭은 벌레들의 천국이 되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과가 꽃을 피우지 않아도(꽃이 피지 않으면 열매도 없다는 말이다), ’파산자’라는 놀림을 당해도, 가족들의 생계가 곤란해질 정도로 가계가 기울어도, 농사일을 못하는 겨울철에 부랑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노동을 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사과나무에게 힘을 내달라고 사정을 하며 6년간 이를 악물었지만, 농약을 다시 사용하는 것밖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다고 느꼈을 때 농약을 다시 사용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바보’가 된 농부는 죽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자살하기 위해 오른 산의 숲에서 비로소 해답을 발견한다. 그동안 땅 위에 사과나무만 바라보았지, 사과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 밑, 즉 흙은 바라보지 못했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렇게 고집스럽게 ’자연농법’을 실천한 9년 만에 드디어 기무라 씨 사과밭에 사과 꽃이 만개했다. 기무라 씨가 키워내는 ’썩지 않는 사과’의 비밀은 자연의 생명력이다. 기무라 씨는 사과를 키우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사과나무라고 말한다. 자신은 그저 사과나무를 도울 뿐이라고.

<기적의 사과>를 읽으며 내가 더욱 감동한 대목은, 자신의 농법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기무라 씨가 이렇게 재배된 농작물의 가격을 ’내리라’고 충고하는 부분이다! 농약을 쓰지 않고 재배한 농작물의 희소가치나 쏟아 붓는 노동력을 생각하면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이 당연한 일 일터인데, 기무라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높은 가격에 판매되면 무농약 재배 작물은 부유한 사람들만 먹을 수 있는 ’사치품’이 되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특수 재배’라는 단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무농약 무비료 재배 작품이 가격 경쟁력을 가져야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선택할 것이고, 그러면 농가에서도 진지하게 무농약 무비료 농작물을 지배할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기무라 씨의 설명이고, 그렇게 되는 것이 꿈이다.

농약을 쓰지 않고 사과를 키우는 방법을 연구하느라 이가 몽땅 빠져 버린 얼굴로 사람 좋은 웃음을 웃고 있는 이 농부 할아버지는 자신의 사과 재배법을 전매특허로 만들지도 않고, 적어도 누구나 살 수 있는 가격에 자신의 사과를 판매하며 여전히 소박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휴가철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자연을 삶의 터전이 아니라, 유희의 대상으로 만들어놓고 며칠의 휴가를 즐기기 위해 나머지 날들을 살고 있는 듯하다. ’엿새’ 동안 열심히 파괴를 일삼다가 ’하루’ 신나게 자연에서 놀며, 결국 자연을 ’소비’하는 삶을 사는 우리들. <기적의 사과>를 일궈낸 한 농부의 삶과 철학은 미친 듯이 자연의 생명력을 파괴하며 사는 우리를 멈춰 서게 한다. 끝을 모르는 이윤추구의 욕망, 한계를 모르는 소비생활, 편리한 것에 집착하는 우리의 태도에 빨간불을 켜준다. 다시 생각한다. ’농약을 쓰지 않고 사과 키우기’가 전부를 걸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그것은 이 땅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위대함이라고! 창조주의 마음과 손길을 지닌 한 농부의 ’위대한 삶’에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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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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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화 되어가는 지구촌은 국가의 경계선을 적극적으로 지워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본과 노동력과 상품과 소비가 국경을 넘나드느라 국경선이 닳고 있다. 그런데 계층간 구별짓기와 거주의 경계선은 오히려 더 견고하고 선명해지고 있다. 가진 자는 가진 자들 끼리, 없는 자는 없는 자들 끼리 모여 살며 자연스러운 거주의 경계가 그어진다. 몇 해 전에, 미국 내의 백인 학생들이 동양계를 피해 이동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흑인, 또는 히스패닉들의 유입으로 마을이 시끄럽고 지저분해진다고 느끼는 백인들이 백인들만 사는 새로운 마을을 만들고 이사했던 것처럼, 지금은 학교에서 동양학생을 피하여 자기들만 모이는 학교나 동양계가 적은 마을로 옮기는 사례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국경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웃의 경계에는 더욱 견고하고 높은 벽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13구역’이라는 프랑스 영화를 보면, 정부에 의해 철저히 격리되고 범죄자들이 장악한 위험지역이 나온다. 미국도 흑인 빈민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은 ’위험 지역’으로 인식된다. 갱단이 지배하는 무법천지 위험지역. 흑인 빈민이 아니라면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그 지역에 ’인종과 빈곤 문제’를 연구하고자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한 괴짜 사회학도가 있다. 바로 어렸을 때, 인도에서 이주해온 ’수디르 벤카테시’이다.
 

저자 수디르 벤카테시는 함께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이 "컴퓨터에 들러붙어 앉아서 빈곤의 원인을 밝혀줄, 조사 자료에 숨겨진 어떤 유형을 찾아내려고만 애쓸 때", 직접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미국 최악의 빈민가인 로버트 테일러 홈스라는 곳에서 갱단의 한 지역 보스와 친구가 되고, 마약상, 코카인 중독자, 무단 입주자, 매춘부, 포주, 사회운동가, 경찰, 주민 대표, 공무원들과 어울리며 1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미국 최악의 빈민가를 구석구석 탐색하며, 밀착 연구한 보고서가 바로 <괴짜사회학>이다. <괴짜사회학> 사회학 이론이나 사회학적 분석이 드러나게 서술되어있지는 않지만, 조직폭력배와 직접 어울리면서 도심 빈민가의 작동 원리를 관찰하고 인터뷰한 생생한 보고서이다. 그래서 제목은 <괴짜사회학>이지만 이론서가 아니라 마치 소설처럼 읽힌다.
 

시카고에서 가난한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주류 사회에서 분류된 채, 정부의 방치 속에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최하층’ 도시 거주민, 로버트 테일러 주택단지의 수천 가구들의 삶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남긴다. 그들의 삶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갱단들의 ’무법적 자본주의’이다. 가족 파티, 운동 경기를 즐기는 빈민촌의 삶은 어쩌면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마약과 매춘과 폭력과 차별이 일상으로 버무려져 있고, 불법 경제 활동이 자연스럽고,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섹스’를 화폐처럼 사용하고 있다.
 

범죄조직까지 글로벌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요즘이다. 세계를 잠식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빠르게 양극화의 격차를 더욱 벌려놓고 있다. 만일 ’13구역’이나, ’로버트 테일러 홈스’처럼 조직폭력배가 장악하는 빈민 지역이 우리나라 도심에 생겨난다면? 내가 그곳에 속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인가?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추락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많은 담론을 쏟아내며 복지와 정책과 계획을 논하지만, 소리만 시끄러울 뿐 사회의 어두운 그늘은 걷혀지기보다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괴짜사회학>은 도시 빈민가의 삶과 구조적 반복을 생생하게 보여줄 뿐, 처방은 내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자들에게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는 분명하게 알려준다. <괴짜사회학>은 "대부분이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대상인,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데 별 관심이 없는" 사회학 통계와 처방은 가짜라고 말한다. 연구대상자들의 삶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노력 없이 그들의 문제를 논하고, 해법을 논하는 것은 모두 기만이요, ’헛소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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