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 영원한 빛, 움직이는 색채 마로니에북스 아트 오딧세이 1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지음, 하지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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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 인상주의의 모든 것!

마로니에북스의 <인상주의>를 읽고 나니,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눈에 들에 들어온다. 자주 가는 카페에 걸려 있었던 그림은 클로드 모네의 ’해돋이’라는 작품이고, 며칠 전 추석 선물로 받은 생활용품 세트에 프린트된 명화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네’와 ’전원의 무도회’라는 작품이었다. 사실 그림을 보고, ’아! 이 그림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인데’라는 생각이 들어 책을 다시 뒤적거려 찾아보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얼마전까지만 해도 낯선 그림이었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노력하면 몇몇 작품들은 그림과 작가와 작품명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기대감이 더 고조되는 것은 익숙하고 낯익은 화가와 그들의 작품이 이 책에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좋아하는 화가가 대부분 인상주의 화가였던 것이다.

인상주의의 탄생에서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 그 전 과정을 다룬 이 책은 마치 인상주의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는 전시회장 같다. 특히 그림의 포인트를 집어주듯 자세하고 분석적인 작품 해설은 그림을 보는 눈을 활짝 열어준다. 명화를 왜 명화라고 부르는지 비로소 조금은 알 수 있을 듯 하다. (명화의 가격을 보면 그림 재테크가 이해가 된다!) 저자는 시대적인 배경이나 미술 기법은 물론 화가의 사생활까지 하나의 작품에 함축된 풍부한 이야기를 풀어준다. 한 장의 그림이 간직하고 있는 사연이, 그리고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가 참으로 풍부하다. 특히 그림을 그릴 당시의 화가의 사생활은 보이는 그림 뒤에 숨어 있는 또다른 빛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인상주의>를 알아가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상주의’의 태동 시기에 보여지는, 비평가들의 반응이다. "교육적이고 도덕적인 목적이 명백한 종교적인 장면이나 고대의 신화를 지겨울 정도로 반복했던" 화풍에 반기를 든 초기 인상주의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이다 못해 모욕적이었다. ’인상주의’라는 용어도 인상주의 화가들이 아니라, 비평가이자 신문기자였던 루이 르루아가 조롱과 경멸의 의미로 붙인 것이라고 한다(p.8). TV나 비행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도 그것은 곧 사라질 것이라고 조롱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변혁에는 반발이 따르기 마련인가 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관심을 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였다. 빛을 받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의 색채, 그 가운데 화가들이 포착해낸 섬세하고 아름다운 순간의 빛깔이 눈부시게 곱다. 서정적이고 모호한 분위기는 요란한 세상에 빼앗긴 분주한 눈과 마음을 오래도록 사로잡는다. 

내가 가장 오래 머물러 선 곳은 ’여성 모델’을 주제로 한 그림들 앞이다. 바느질 하는 여인, 춤을 추는 여인, 글을 읽는 여인, 우아한 자태의 부인, 무료로 모델이 되어준 화가의 가족이나 연인, 아름다운 누드화, 통통한 아이와 함께하는 행복한 여인의 모습 등 화가의 눈에 비친 여성의 아름다움이 전혀 새로운 그 무엇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것은 이론서적으로 ’여성학’을 공부하는 것과는 또다른 전혀 새로운 발견이었다! 여인의 육체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여성, 모성을 지닌 여성, 여인에서 풍기는 지성과 교양의 고상함까지 사회와 역사가 주목하지 못한 여성의 가치와 내면의 아름다움을 정확하게 포착해준 그림 앞에서 전율을 느꼈다. 그림 한 장이 당시의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시대를 공부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도 될 수 있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전하여 주는 감동적이고도 예리한 선구자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기도 놀랍다. 특히 아름다운 모성을 보여주는 그림들은 감동적인 영화 한 편보다 더 선명한 영상으로 마음에 남아 오래도록 그 감동의 여운을 잊지 못할 듯 하다. 인류의 역사는 오래도록 여성을 무시하고 괄시했지만, 화가들에게 여성은 더 없는 아름다움의 상징과 사랑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에 깊은 고마움마저 느낀다.

화가와 그림에 관한 책을 많이 보았지만, 이 책만큼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드는 책은 많지 않았다. 한마디로, 갖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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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철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김모세.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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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가르친 사랑의 원형을 찾아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신앙인들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먼저 만난다. 구세주로 영접하는 경험이 없이는 ’스승’ 예수, ’선생’(교사) 예수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적인 영역을 제거하고 ’역사적 예수’와 그의 가르침만을 본다면 어떨까? 구세주 예수가 아니라, 교사 예수 또는 철학자 예수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철학자>는 철학자이자 종교사회학자인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철학적이고 종교사회학적인 시각에서 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철학적인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의 분석’을 시도한 책이다. 역사 가운데 실제했던 예수와 예수의 생애,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변형되어온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추척하여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가르침의 본질적 핵심에 가닿고자 하는 학문적 작업이다. 그렇다. 이 책은 철저히 철학자이자 종교사회학자의 시각에서 본 예수의 모습이고, 예수의 가르침이고, 사회 안의 하나의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이다. 신앙인들 입장에서는 본질이 제거된 논의라고 생각될 수 있으나 학문적인 시각과 입장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그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는 제자들과 교회의 모습이 사회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일 것이다. 

<그리스도 철학자>가 내세주는 주장을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제도화된 교회를 통해 종교가 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상당 부분 왜곡되었고 오히려 정반대의 길로 나아갔다고 비판한다. 예수가 자유케 한 사람들을 종교 권력이 다시 노예삼고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저자는 철학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휴머니즘’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인간의 이성을 빛으로 내세운 계몽주의자들이 신본주의에 반하여 ’휴머니즘’을 내세웠다고 적대시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이 ’휴머니즘’이야말로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는 르네상스 시기 종교개혁 운동과 더불어 휴머니즘 운동이 태동한 사실에 주목한다. 근대의 탄생을 불러온 휴머니즘의 본질적 가치들이 원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그 뿌리는 내리고 있다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주요 논지이다. (근대 정신의 뿌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오히려 교회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고 종교와 거리를 유지하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학자들에게 더 반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그리스도의 영향 아래 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스도 철학자>에서 말하는 저자의 논지에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직화되고 제도화되고 권력화되고 있는 교회를 향한 ’쓴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하나님이 주신 풍성함에 취하여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이 땅에 권력의 초막을 짓고 배부른 생활을 하느라 어느새 예수님을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비신앙인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착한 행실을 통하여 사회로부터 칭송을 들었던 초대 교회와는 달리 오랜 세월 교회는 세상에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의도된 것’이 아니라 하여도 종교 권력화된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변질시킬 수 있음에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종교를 초월하고, 윤리적인 가르침을 초월하지만,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신앙인들은 개인 구원의 차원을 넘어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의 의미와 사회적 의무를 진지하게 성철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은 혁명적인 가르침을 사회에 선포한 사람은 없었고,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보여준 자도 역사에 없었다. 그 사랑을 실천하여 우리가 바로 그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철학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얼마나 혁신적이고 충격적인 것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현 사회를 이끌어가는 근대 정신의 뿌리를 이룰 뿐만 아니라, 21세기는 물론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의미있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함을 깨우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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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설교자 10인을 만나다
빌 터피 엮음, 김대웅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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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치열한 신비!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라면 누구나 예레미아 선지자처럼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인 백성들 앞에 서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싶은 거룩한 소망을 품을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에는 <위대한 설교자 10인을 만나다>에 실린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설교 제목처럼 ’하나님의 패러독스’가 존재한다. ’설교’라는 행위에 ’치열한’ 신비가 작용하는 것이다. 말씀 선포, 즉 ’설교’ 행위도 하나님의 일부가 되고 동시에 사람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처럼 위대한 설교와 위대하지 않은 설교, 위대한 설교자와 위대하지 않은 설교자, 성공한 설교와 실패가 설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실패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믿고 의지하지만, 설교자가 가지고 느껴야 할 책임감은 실로 두렵고도 두렵다.

<위대한 설교자 10인을 만나다>는 영어권에서 가장 능력 있는 설교자의 10인의 간략한 프로필과 대표 설교, 그리고 인터뷰 내용을 담은 책이다. 대표 설교를 읽고 인터뷰를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설교자 10인 모두가 설교에 대한 정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설교 사역자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일은 결코 녹녹한 작업이 아니다. 성경 연구는 신학교 전과정은 물론 평생을 다 바쳐도 완성될 수 없는 탐구의 영역이다. 게다가 설교는 성경 연구만으로 완성되는 작업도 아니다. 성령의 조명하심과 영감은 물론, "한 손엔 성경을, 다른 한 손엔 신문을"이라고 외쳤던 칼 바르트의 말처럼 복음이 선포되어질 세상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이외에도 설교자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위대한 설교자 10인을 만나다>에 소개된 ’위대한 설교자 10인’은 이상과 같은 능력을 갖춘 고루 갖춘 설교자라 할 수 있다. 위대한 설교를 위해 존 스토트 목사님은 성경연구는 물론 독서 토론 모임을 30년 간이나 지속해왔고, 토니 캠폴로 목사님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다. 프래드 크래독 목사님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 능력을 향상시키려면 매주 한 편씩 단편 소설을 읽고, 편지를 쓰며, 다섯 살 이하의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위대한 설교자 10인’ 중에 유일하게 여성 설교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목사님은 작가를 꿈꾸며 훈련을 받은 글쓰기 기술로 어휘와 이미지가 독창적인 설교를 선포하고 있다.

설교자는 영성과 지성은 물론 도덕성까지 겸비해야 하는 어렵고도 힘든 임무를 맡고 있다. 개인의 인격과 생활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공인으로 노출되며,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아주 작은 실수와 잘못에도 비난의 대상이 되고 권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위대한 설교자 10인을 만나다>의 인터뷰 내용에도 보면 개인의 사생활과 도덕성 때문에 사역자의 자리를 잃고 추락한 목회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영성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지성은 최고의 수준이 요구되고, 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완벽에 가까운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에서 완벽한 설교자의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설교자 10인’을 만나니 도전도 되고 감동도 받지만 기가 죽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감사하고도 감사하고, 자유롭고도 자유로운 것은 부족함도 불구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러서 사용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설교는 분명 하나님의 패러독스이고, 치열한 신비라는 사실이 설교자를 자유롭게 하며 동시에 설교자로서 무거운 책임을 갖게 한다. 어렵고도 험한 길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나의 열심과 최선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 <위대한 설교자 10인>과의 만남은 내게 위대한 도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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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습관의 힘 - 능력을 10배 더 빛나게 하는 자기경영 기술
바바라 패치터 지음, 유혜경 옮김 / 애플트리태일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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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없는 것들은 윗층으로 올라가세요!"

몇 년 전, 배우 신하균 주연의 영화 ’예의 없는 것들’이 영화관에서 상영될 때, 극장 안내 전광판에 흐르는 저 문구를 보고 함께 갔던 친구들과 크게 웃었던 일이 생각난다. 극장 안의 사람들 모두 윗층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농담을 하며 웃었지만, 농담의 뒷맛은 씁쓸했다. 자기주장이나 개성이 득세하는 세상에 ’예의’는 서서히 잊혀져가고, 그렇게 예의를 무시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쾌해지는 일상을 자주 경험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세계의 성공 기술을 다룬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사소한 습관의 힘>을 읽으면서 예의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것은, 공지영 작가의 소설 제목처럼 이 책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는 책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전적 사진기자 출신으로 지금은 세계적인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라는 저자는 비즈니스 세계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비법을 전수해준다. 그러나 비즈니스 세계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비법이라고 해서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들은 아니다. 인사하는 법, 선물하는 법, 회의 매너, 옷차림, 말투, 시간관리, 건강관리, 식사 예절, 이메일 쓰는 법, 감사편지 쓰기, 대화법 등 그의 말대로 ’사소한 습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모든 노하우를 ’성공지향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책을 읽으며 ’예의’를 배웠다. 저자의 비법은 비즈니스 세계의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우리가 익혀야 할 사람으로서의 예의가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는 ’나’에 대한 예의도 포함된다. 

경쟁자를 이기고 살아 남아야 하는 전쟁터와 같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따지고 있는 것은 배부른 소리라고 말하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소한 습관의 힘>이 전하는 가르침은 말그대로 사소한 것들이지만, 그것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1%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아무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이다. 만일 현장에서 누군가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꼼꼼하게 일어준다면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잔소리’나 쓸데 없는 ’오지랖’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명품과 상품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마무리’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소한 습관의 힘>은 일생에 걸쳐 갈고 닦은 나의 실력을 더욱 빛나게 해줄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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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교회 이야기 - 사랑으로 588 전 지역을 변화시킨
김도진 지음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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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에는 경쟁자가 없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참으로 신비롭다. 때로는 그 뜻을 깊이 헤아리기 어렵고, 아무런 예측조차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보고 그 일하심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다. 가나안 교회 김도진 목사님! 하나님은 절망에 처한 영혼을 부르셔서 세상의 소망이 끊어진 자들에게 산소망이 되어 주셨다. 버려진 인생을 부르셔서 버려진 인생을 돌보고 계신다. 너덜너덜 해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자를 부르셔서 치유자로 사용하고 계신다.

한국 교회에는 교회들 사이에 유명한 지역 교회는 많은데 사회로부터 칭찬을 받는 교회는 드물다. 존경을 받는 성도도 드물다. 교회의 부흥과 함께 한국의 경제적 성장도 시작되었다고 하고, 교회마다 교육 사역, 복지 사역 등 곳곳에서 섬김의 사역을 쉬지 않고 있는데, 왜 한국 교회는 사회로부터 이미지가 좋지 않을까? <가나안 교회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해본다. 배불리 먹고 남는 것을 소외된 이웃과 나누고, 내 살 길 먼저 찾아놓고 난 뒤에야 잃어버린 영혼을 생각하는, 우리의 양다리 신앙 때문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쩌면 이처럼 깨어지고 깨어진, 버려지고 버려진, 처참한 인생을 필요로 했을지도 모른다. 순전히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을 버리고 온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말이다. 김도진 목사님은 그야말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기 시작한 그의 인생을 궤도를 이탈한 열차처럼 계속해서 비뚫어지고 어긋나기만 했다. 술, 폭력, 사기, 파산, 판잣집, 빚 등이 그의 인생을 설명하는 단어들이고, 지명수배자, 깡패, 거지 왕초, 알코올중독자, 실패자가 그를 설명하는 단어들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철저하게 깨어지고 낮아지고 실패한 그를 부르셨다. 그가 이처럼 바닥까지 내려가보지 않았다면, 지독한 절망에 처해보지 않았다면, 자신이 노숙자 생활을 해보지 않았다면, 술의 노예가 된 생활을 해보지 않았다면, 더럽고 냄새나고 괴팍하고 폭력적인 노숙자들과 부랑인들을 섬기는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김도진 목사님을 부르셔서 버려진 사람들, 포기한 인생들 소굴로 보내셨다. <가나안 교회 이야기>는 가장 낮은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의 보고이다. 그것은 사랑의 기적이요, 섬김의 기적이었다. 혀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수고의 사랑이 일구어낸 기적이다. 

낮은 곳에는 경쟁자가 없다는 김도진 목사님의 외침이 마음을 울린다. 입술은 언제나 거룩과 희생과 헌신과 섬김을 말하면서도, 교회 안에서조차 조금의 불편도 참지 못하고, 작은 의견 충돌에도 목청을 높이고, 잠시의 고난에도 원망을 쏟아내며, 섬기려 함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우리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은 잠시의 선행이 아니라, ’성육신’이었음을 다시 절실하게 깨닫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김도진 목사님과 똑같은 모양으로, 똑같은 섬김의 자리로 부르신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과 정신은 하나일 것이다. <가나안 교회 이야기>를 읽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부끄러운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자녀이고 싶다는 소망을 다시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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