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길에서 살며 사랑하다 죽다 - 조선의 대자유인 허균의 삶
김용관 지음 / 부글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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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은 죽고 세상은 미쳐가다


그야말로 흐드러지게 한 세상 살다간 한 인물을 만났다.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짧은 한 줄로 역사에 남아 우리가 기억하는 인물이다. 역사는 인물이 아니라 인물의 업적을 빛내지만, 작가는 잊히고 묻힌 인물의 삶에 빛을 주었다. <허균, 길에서 살며 사랑하다 죽다>는 그와 벗들이 살았던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이 지배했던 허균과 그 벗들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허균, 그는 약 400년이 지난 오늘 이처럼 샅샅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머릿속이 하얘진다. 내가 알아왔던 상식이 배반당한 기분이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구나 하는 깨달음만큼이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가지 그에게서 '위대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역사가 기억하는 인물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인격의 고매함이나 높은 기상, 추구했던 이상조차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렇게 지겹도록 탄핵을 당하고 번번이 내쳐지면서도 끝까지 벼슬자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훗날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이 옳다면, 그는 시인으로 태어나 괴물로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역사에서 '천하에 둘 도 없는 괴물'로 불렸다고 전하여지니 말이다. 

<허균, 길에서 살며 사랑하다 죽다>는 허균과 한 세월 그와 함께했던 벗들을 이야기한다. 그 자신이 서자로 태어난 허균의 주변에는 뛰어난 재주를 가졌지만 천한 신분이라는 태생적 사슬에 매인 서자들이 많았고, 전쟁이나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생으로 살아야 했던 여인들과 어울렸다. 그래서인지 사연 많은 기생 매창, 술이 취해야 그림을 그렸던 걸인 화가 이정, 가난에 찌들어 살았던 명필 한호, 시 한 편 때문에 죽은 권필 등 시대를 잘못 만나 그 재능과 뜻을 다 펼치지 못한 안타까운 인생 이야기가 넘친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허균이 사랑했던 친구들이 모두 길 위에서 죽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로 고단한 인생들이다.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의 시집 뒤에 이런 글을 적었다고 한다. "누이는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여인으로 태어난 것이 첫 번째 잘못이고, 무능한 남편을 만난 것이 두 번째 잘못이고, 조선이란 나라에 태어난 것이 마지막 잘못이다"(p. 91). '조선의 괴물'이 되어, 서대문 사거리에서  망나니의 칼에 목이 잘려 죽임을 당한 허균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시인의 감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그가 시인으로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야만의 정치와 미친 세상, 그 세월과 시대를 탓해야 하지 않을까.

허균의 삶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우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탄핵을 받으면서도 어려운 친구를 두고 보지 못해 늘 가까이에 끼고 살았던 허균이 결국 친구의 배신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 세상 그처럼 한 많게 살다간 허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그것은 벗들과 시를 노래했던 그 마음과 그 시간이 아니었을까. 언젠가는 모두 두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날 세상, 그처럼 흐드러지게 벗들에 취하고, 시에 취할 수 있다면 후회 없을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를 말리고 싶었던 내 마음만큼이나, 그도 미친 세상에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던 그 시간을 지워버리고 싶어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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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심겨진 가시나무
원의숙 지음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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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통이 유익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고난을 기뻐하는 마음, 고통에 감사하는 마음을 말이다. <내 안에 심겨진 가시나무>의 저자는 성경의 진리를 깨닫기까지 긴 고통의 시간을 인내해야 했지만, "그 고통의 시간을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소변봉지를 갈고 관장을 하느라 두 손에 똥물이 흐르고, 손가락이 끊어지게 아프도록 암과 싸우는 엄마를 간호했지만, 엄마는 하늘로 가셨다. 고통의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어 엄마가 돌아가신지 4개월 만에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IMF로 남편은 꿈을 접어야 했고, 방 한칸 구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남편은 앞니가 여섯 개나 빠진 채 1년 여를 생활했고, 그녀는 둘째를 낳은 후에 산후통으로 13개월을 누워서만 지냈다. 겨우 일어섰지만 허리 통증은 계속 되고,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는 둘째 딸이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소아당뇨 판정을 받았다.

저자는 무기력과 우울증, 자살충동과 싸워가며 그 고통의 터널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고통의 터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는 이제 ’감사’를 말한다. 사람들은 끌끌 혀를 차지만, 그녀는 ’희망’을 말한다. 엄마의 암 투병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빌린 방 한 칸에 누웠던 그 시간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한다. 큰딸 현아가 새끼 손가락 끝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면서도 더 큰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렇게 그녀는 그 고통의 시간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였음을 고백한다.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까지도 말이다. 여전한 허리 통증에도 웃을 수 있고, 소아당뇨를 앓고 있는 딸을 보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크고 놀라운 비밀이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전진하지만, 만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평안이며, 특권임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가시밭길 같은 고난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내하며 견디어 온 저자를 세상 한가운데 세우시며,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고난을 견디어 온 저자의 삶을 통해 현재 고난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시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며, 그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을 우리의 지혜로는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저 하나님의 일하심이 놀랍고 놀라운 뿐이다.

<내 안에 심겨진 가시나무>를 읽으며 깨닫는다. 하나님의 사람은 삶의 고난을 인내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믿음의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신 일도 아니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일도 아니고, 물 위를 걸어오신 일도 아니라, 바로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일이 아닌가! 그저 묵묵히 고난을 당하신 그 일이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일이요, 가장 큰 순종이요, 가장 큰 믿음의 행위였다는 깨달음이 가슴에 절절이 사뭇쳐 온다. 

여전히 고난 가운데 있으나 당당하고 행복하게 미소 짓는 저자에게서 신앙인의 힘을 느낀다. 믿음의 싸움에서 그녀는 이미 승리했음을 깨닫는다. <내 안에 심겨진 가시나무>를 통해 세상에 외치고 싶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도 유익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 일하시며, 그것을 축복으로 바꾸어주시는 놀라운 분이라고 말이다! 이 신비를 세상에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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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존 - 집중력을 위한 뇌의 재발견
루시 조 팰러디노 지음, 조윤경 옮김 / 멘토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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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진단 : 나는 주의력 격변형!


나는 동료들로부터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종종 듣는다. 그런데 문제는 발동이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집중해서 쓰기 시작하는데도 반나절이 걸렸다. 일단 컴퓨터를 켜고 오늘 온 이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포털 싸이트 세 곳에 접속을 했다. 이메일을 확인하는 중에 몇몇 헤드라인 기사가 눈에 들어왔고, 뉴스 기사를 읽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나는 활동하고 있는 온라인 카페 네 곳만 급히 둘러보고 나서 바로 글 쓰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카페를 둘러보는 사이 문자가 몇 통 왔서 답장을 했고, 전화를 한통 받았다. 그리고 막 글을 쓰기 시작하려고 할 때, 손님이 찾아왔다. 약간 성가셨지만, 막상 열중해서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고, 내친 김에 식사를 하고 왔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에 앉았는데 글을 쓰는 일이 따분하게 느껴져 시간만 질질 끌다가 온라인 게임을 했다. 나중에 시간이 한참 지난 것을 알고 깜짝 놀라 게임을 끄고, 글을 쓰는데 집중하자 마음을 다잡으며 커피를 한 잔 타왔다. 결국 한 시간이면 충분히 끌낼 일을 반나절을 붙잡고 있다.

<포커스 존>은 이것이 디지털 주의력 분산 요소에 의한 전형적인 증상이라고 말한다. <포커스 존>은 이러한 증상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주의력 격벽형과 주의력 결핍형, 그리고 주의력 과잉형이 그것이다. 자가 진단을 해보면, 나는 지루함과 자극 과잉 사이를 오가는 주의력 격변형에 해당한다. 주의력 격변 순환 고리에 갇혀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주의력과 자극의 연관성을 뒤집힌 U곡선으로 설명한다. <포커스 존>은 적절한 자극으로 주의력이 정점에 이르는 ’포커스 존’의 중요성과 훈련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자극과 주의력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인은 사방으로부터 자극 요인의 폭격을 받고 있다. <포커스 존>의 저자는 이것을 "디지털 주의력 분산 요소로 가득한 이 세상"이라고 묘사한다. "하루 24시간 미디어를 접하고 광고가 끊이지 않으며 새로운 첨단기술이 개발되고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영상과 소리, 뉴스, 소음이 몰려들고 있다." 문제는 "세탁기의 거름망이 꽉 차서 더 이상 불순물을 걸러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상관없는 정보를 분류하는 ’성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p. 72). 

그런데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자극 과잉이나 인지적 과부하 상태는 역설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바로, 지루함, 즉 자극부족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지루해서 심각한 시대’라고 묘사한다. 현대인은 매일 지루함과 전쟁을 치르며 자신의 삶을 지루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자극 과잉으로 오히려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포커스 존’을 여는 여덟 가지 열쇠 꾸러미를 소개하는데,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과 미루는 버릇을 없애는 처방이다. 특히 "내가 지금 무엇을 하지 않고 있나?" 하는 단순한 질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초를 다투며 우리의 주의력을 앗아가는 디지털 주의력 분산 요소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이제 ’주의력’은 인생의 성패를 가늠하는 주요한 요소임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목표를 이루고, 성공적인 삶을 살기 원한다면 지속적 주의력에 필요한 뇌의 경로를 책임지고 보호해야 할 때가 왔다. 저자는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실감나는 예화를 들려주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별장을 가진 친구 아버지가 계셨다. 너그러운 친구의 아버지는 자신의 소유지를 해변으로 가는 지름길로 이용하도록 했다. 그런데 한참 뒤 그는 법률상 ’지름길’의 소유권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의로 행한 일로 인해 값비싼 소유물을 잃는 손해를 입은 것이다"(p. 92). 저자는 해변으로 향하는 지름길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매일 ’사용하는 자’가 뇌 경로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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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 조지 모리슨의 주옥 같은 저녁 설교
조지 모리슨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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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요란스럽다. 무서운 속도로 퍼지며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 끔찍한 범죄, 다툼이 끊이지 않는 정치권, 하루 하루가 불안한 경제 등등 쉴새 없이 들썩들썩거리며 세상이 요동치고 있다.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하며 대책을 논의해보지만 불안은 더욱 깊어갈 뿐이다. 세상이 하도 떠들썩하니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와 잠잠히 주님을 바라는 일이 쉽지 않다. 세상과 함께 요동하는 마음은 주님 앞에서도 좀처럼 고요해지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 귀한 책을 만났다. 전도서의 전도자와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는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을 들었다. 조지 모리슨 목사님의 저녁 설교 모음집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는 대략 100전에 선포된 설교 말씀인데, 놀라운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들어야 할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조지 모리슨 목사님의 설교는 "청중의 지성과 감성을 존중한 창조적 설교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하는데, 한편 한편 설교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것이 정확한 평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 교회의 강단에서는 전문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설교, 청소년 설교, 청년 설교, 장년 설교, 노년 설교 등 설교를 듣는 대상의 눈높이에 맞춘 말씀이 선포되는 경우가 많다. 목회자들은 공감을 하겠지만 다양한 계층과 연령층의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설교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조지 모리슨 목사님의 설교는 계층과 연령은 물론 시대를 뛰어 넘는다. 문화까지 초월한다. 그것은 조지 모리슨 목사님의 설교가 '복음의 진수', '복음의 핵심'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림 언어'와 같은 감각으로 선포되는 조지 모리슨 목사님의 설교는 현상을 분석하고 성경을 접목시키는 눈이 예리하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설교에 마음이 베이지 않는 것은, 부드러운 언어를 통해 깨우침을 주고, 감각적인 언어를 통해 우리 마음이 은혜에 푹 잠기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설교 한편, 한편이 얼마나 깊이 있는 묵상에서 나온 말씀인지 조지 모리슨 목사님의 본문으로 사용한 성경 구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 또 주목하지 않은 채 스쳐 지나는 말씀을 통해 놀라운 은혜의 진리를 알려 주신다. 세 편의 설교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첫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행 7:32)는 구절을 통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설교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선포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각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를 따로따로 들으시는 개개인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조리 모리슨 목사님은 이것이 자연 종교과 계시 종교 간의 한 가지 큰 차이라고 설명하신다. "자연 종교가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 하나는 한 영혼을 돌보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다"(p. 13). 나는 이 설교를 통해 내 마음의 짐, 즉 오직 나만이 질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의 짐을 돌보시는 하나님과 만났다. 

또 한편, '그물을 기우시는 분'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베드로가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가 그물 깁기에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물처럼 마모로 인해 찢어진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기워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요, 은혜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본문 말씀이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사 40:28)이다. 조리 모리슨 목사님은 성경 기자들이 위로의 근원으로 자연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에 의문을 가지셨다. 그들이 위로나 인도를 구할 때 언약의 하나님이 아닌 하늘과 땅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조지 모리슨 목사님이 찾은 진리는 이것이다. "자연은 하나님의 직조된 옷"이라는 것이다. 자연의 경이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를 읽으며, 설교자로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에 대한 자기 반성을 해본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필요를 채워주는 설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는 하나님의 존전 앞에 고요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소망하도록 이끌어준다. 

또 하나, 내 마음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는 가르침은 서문에 소개된 조리 모리슨 목사님의 당부이다. "젊은 설교자들은 현대 생활의 독인 서두르는 성향을 경계하는 게 좋다. 쓸데없이 부산떨며 서두르는 버릇, 사소한 일에까지 끼어들고 집착하는 작금의 풍조, 그것이 우리에게서 많은 좋은 것들을 앗아가고 있다. 내 경우, 사색하고 묵상하는 여유는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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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인격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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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 모두 13번째 인격을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세계적인 석학 피터 드러커는 <단절의 시대>에서 정치, 경제, 교육은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과거와의 단절(斷絶)로 엄청난 진통을 겪고 있는 현 시대의 혼란과 고통을 꿰뚫어보았다. 그러한 단절은 이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사이로 침투해 ’우리’를 개인과 개인으로 분리하여 놓았다. 나는 가끔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 틈을 비집고 길을 걷거나, 전철을 타거나, 카페에 앉아 있으면 문득 한 사람, 한 사람이 낱알갱이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러저러한 단절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지독한 외로움과 우울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통에 세상에는 심리-상담학이 득세를 하고 있다. 출판, 영화, 교육은 물론 독서치료, 음악치료, 미술치료, 놀이치료 등등 각종 치유 프로그램까지 심리-상담학의 영향력이 대단하다. 치유 프로그램에 거의 중독 수준으로 좇아다니는 사례도 종종 볼 수 있다. 사회에서는 심리-상담 치료에도 의료보험을 적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심리-상담학의 이론이 득세를 하는 가운데 과거에 강조되어 왔던 미덕의 자리에 덕목이 대치는 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인간관계에서 겸손, 예절, 정직과 같은 개념들이 강조되어 왔다면, 요즘은 경청, 이해, 공감, 격려 등의 개념이 강조되고 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이해하주고, 공감해주고, 격려해주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여 ’관심’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낱알갱이로 살아가는 세상에 ’진정한 관심’이야말로 서로의 삶을 이어주고 보듬어주는 중요한 가치요, 능력이 아닐까.

<13번째 인격>은 그러한 관심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채 인격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살아가는 한 소녀(치히로)와 초능력에 가까운 공감능력을 타고난 미모의 여성(유카리)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유카리는 심리학 용어로 ’엠파시’의 능력을 가진 ’엠파스’이다. 다른 사람의 사고와 감정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을 ’엠파시’라고 하고, 이처럼 상대의 감정을 간파하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엠파스(empath)라고 부른다고 한다. 엠파스인 유카리는 상대가 강렬한 감정적 체험을 반추하고 있을 때 뇌리에 영화를 보는 것처럼 뚜렷하게 시각적인 상이 맺히거나, 자신이 그 소용돌이 속에 던져져 모든 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종종 한다(p. 24). 

엠파스인 유카리는 대지진 피해를 입고 대피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 치료를 돕기 위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 여섯 살 소녀인 치히로를 만난다. 유카리의 엠파시는 치히로가 다중인격으로 살아가는 ’해리성동일성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인 것을 감지해낸다(참고로, 정신과에서는 다중인격을 인정하지 않고 정신분열증으로 진단한다는 설명이 책에 나온다). 치히로를 돕기 위해 나선 유카리는 엠파시를 통해 그녀가 뿜어내는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의 아픈 사연과 마주치며 그녀 안에 살고 있는 인격들과 차례로 만난다. 

다중인격의 치히로, 그녀는 다섯 살에 함께 타고 있던 자동차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트라우마를 안게 되고 이후 철저하게 방치된 채 살아왔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양육에는 무관심한 작은 아버지 부부, 게다가 이지메의 고통과 작은 아버지의 성적 학대까지,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지만 누구의 관심과 돌봄도 받지 못했다. 텅빈 집 마당에 있는 ’페스’라는 개에 대한 치히로의 공포는 한 소녀의 극에 달한 외로움과 불안을 보여주는 듯해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치히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을 때마다 스스로 그것을 담당할 인격을 하나씩 만들어냈다. 성처의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과 공포와 분노, 치히로는 그 복잡한 감정을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치히로의 ’13번째 인격’은 이야기의 핵을 차지한다.

이야기의 결말은 그야말로 ’헉!’ 하는 신음소리가 날만큼 공포스럽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한 설명은 못하겠지만 유체이탈 현상과는 별개로 ’13번째 인격’을 통해 고통에 대처하는 우리의 감정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반응양식을 보면, 어쩌면 우리는 모두 13번째 인격을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스터리한 ’13번째 인격’ 때문에 이 소설이 호러물이 되고, 갑자기 임사체험과 유체이탈 현상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는 스토리 전개가 아쉽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심리-상담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치밀하게 연구한 작가의 노력이 곳곳에 보이는데, 간혹 이론적인 설명이 이야기에 녹아들지 않고 ’원형’ 그대로 끼워넣어져 이야기의 흐름을 깨고 튀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살짝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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