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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인격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7월
평점 :
어쩌면 우리 모두 13번째 인격을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세계적인 석학 피터 드러커는 <단절의 시대>에서 정치, 경제, 교육은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과거와의 단절(斷絶)로 엄청난 진통을 겪고 있는 현 시대의 혼란과 고통을 꿰뚫어보았다. 그러한 단절은 이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사이로 침투해 ’우리’를 개인과 개인으로 분리하여 놓았다. 나는 가끔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 틈을 비집고 길을 걷거나, 전철을 타거나, 카페에 앉아 있으면 문득 한 사람, 한 사람이 낱알갱이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러저러한 단절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지독한 외로움과 우울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통에 세상에는 심리-상담학이 득세를 하고 있다. 출판, 영화, 교육은 물론 독서치료, 음악치료, 미술치료, 놀이치료 등등 각종 치유 프로그램까지 심리-상담학의 영향력이 대단하다. 치유 프로그램에 거의 중독 수준으로 좇아다니는 사례도 종종 볼 수 있다. 사회에서는 심리-상담 치료에도 의료보험을 적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심리-상담학의 이론이 득세를 하는 가운데 과거에 강조되어 왔던 미덕의 자리에 덕목이 대치는 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인간관계에서 겸손, 예절, 정직과 같은 개념들이 강조되어 왔다면, 요즘은 경청, 이해, 공감, 격려 등의 개념이 강조되고 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이해하주고, 공감해주고, 격려해주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여 ’관심’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낱알갱이로 살아가는 세상에 ’진정한 관심’이야말로 서로의 삶을 이어주고 보듬어주는 중요한 가치요, 능력이 아닐까.
<13번째 인격>은 그러한 관심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채 인격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살아가는 한 소녀(치히로)와 초능력에 가까운 공감능력을 타고난 미모의 여성(유카리)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유카리는 심리학 용어로 ’엠파시’의 능력을 가진 ’엠파스’이다. 다른 사람의 사고와 감정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을 ’엠파시’라고 하고, 이처럼 상대의 감정을 간파하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엠파스(empath)라고 부른다고 한다. 엠파스인 유카리는 상대가 강렬한 감정적 체험을 반추하고 있을 때 뇌리에 영화를 보는 것처럼 뚜렷하게 시각적인 상이 맺히거나, 자신이 그 소용돌이 속에 던져져 모든 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종종 한다(p. 24).
엠파스인 유카리는 대지진 피해를 입고 대피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 치료를 돕기 위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 여섯 살 소녀인 치히로를 만난다. 유카리의 엠파시는 치히로가 다중인격으로 살아가는 ’해리성동일성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인 것을 감지해낸다(참고로, 정신과에서는 다중인격을 인정하지 않고 정신분열증으로 진단한다는 설명이 책에 나온다). 치히로를 돕기 위해 나선 유카리는 엠파시를 통해 그녀가 뿜어내는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의 아픈 사연과 마주치며 그녀 안에 살고 있는 인격들과 차례로 만난다.
다중인격의 치히로, 그녀는 다섯 살에 함께 타고 있던 자동차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트라우마를 안게 되고 이후 철저하게 방치된 채 살아왔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양육에는 무관심한 작은 아버지 부부, 게다가 이지메의 고통과 작은 아버지의 성적 학대까지,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지만 누구의 관심과 돌봄도 받지 못했다. 텅빈 집 마당에 있는 ’페스’라는 개에 대한 치히로의 공포는 한 소녀의 극에 달한 외로움과 불안을 보여주는 듯해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치히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을 때마다 스스로 그것을 담당할 인격을 하나씩 만들어냈다. 성처의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과 공포와 분노, 치히로는 그 복잡한 감정을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치히로의 ’13번째 인격’은 이야기의 핵을 차지한다.
이야기의 결말은 그야말로 ’헉!’ 하는 신음소리가 날만큼 공포스럽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한 설명은 못하겠지만 유체이탈 현상과는 별개로 ’13번째 인격’을 통해 고통에 대처하는 우리의 감정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반응양식을 보면, 어쩌면 우리는 모두 13번째 인격을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스터리한 ’13번째 인격’ 때문에 이 소설이 호러물이 되고, 갑자기 임사체험과 유체이탈 현상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는 스토리 전개가 아쉽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심리-상담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치밀하게 연구한 작가의 노력이 곳곳에 보이는데, 간혹 이론적인 설명이 이야기에 녹아들지 않고 ’원형’ 그대로 끼워넣어져 이야기의 흐름을 깨고 튀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살짝 아쉬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