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말 - 황무지에서 대성당까지, 절망에서 피어난 기묘한 희망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레이먼드 카버 지음, 마셜 브루스 젠트리.윌리엄 L. 스털 엮음, 고영범 옮김 / 마음산책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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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하루 종일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다 보니

내가 깊이 생각했던 것, 그래서

하게 된 일이

떠올랐다. 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메리엔-지금 그녀는 자신을 애나라고

부른다- 에 대해 품었던 마음들

나는 물을 한 잔 받으러 갔다.

창가에 한참 서 있었다.

다시 돌아 왔을 때 우리는

다음 주제로 쉽게 넘어갔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대못처럼 파고드는 그 기억.

1983년에 발표한 <대성당>으로 전미 도서상과 퓰리처상 후보에 오른 레이먼드 카버는 미국예술문학아카데미에서 제공하는 스트라우스 기금의 수혜자로 선정되면서 3년 전 부터 학생들을 가르쳤던 시러큐스 대학 정교수 자리에 과감히 사표를 던진다.

그는 자신의 문학적 뮤즈이자 동반자인 시인 테스 갤러거와 함께 위싱턴 주 포트앤젤레스로 이주하고 방문객 사절이라는 팻말을 붙여 놓고 타자기를 치는 동안에는 집안의 전화 선까지 모조리 빼버린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시를 읽고 반나절 동안 시 한 편을 써낸 카버는 <대성당> 성공 이후 단 한편의 소설을 쓰지 못했지만 그의 명성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인터뷰가 줄을 이었고 서평과 추천사를 써 달라는 출판사에서 보내는 편지들이 매일 한 가득 도착했고 문학 행사를 여는 도시 마다 그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각종 문예지마다 카버의 문장을 흉내 낸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을 정도로 1980년대 미국 문학계에 최고의 스타는 레이먼드 카버 였다.


1971년 <에스콰이어> 잡지에 <이웃 사람들> 단편이 처음 실렸을 때부터 카버의 글은 대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이후 카버의 문장을 대폭 뜯어 고쳐서 미니멀리스트라는 호칭을 받게 만든 고든 리시가 편집하는 작품 마다 호평을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더러운 삶을 사는 밑바닥 백인의 이야기를 팔아 먹는다는 악평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의 단편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이 출간 되면서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수록된 단편들이 영화로 제작되면서 레이먼드 카버는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다.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에 책이라곤 없었던 환경 속에서 여덟 살 때부터 술을 마셨고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열 여섯 살의 여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던 레이먼드 카버는 지독한 가난과 파산과 알콜 중독으로 파멸 직전까지 내몰리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학업을 이어나갔고 글쓰기를 포기 하지 않았다.


사랑과 이별, 미움, 질투, 두려움, 슬픔 같은 살아가는 동안 느끼고 겪게 되는 인간의 모든 감정들이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흘러 가게 되는지 카버는 자신이 창조한 모든 인물들의 구석 구석을 냉정하게 들여다 보지만 개개인의 고유성을 존중 해주면서 연민의 시선으로 접근 한다.

단어 하나 하나에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의미를 담은 그의 글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소하지만 살아가는데 절대로 잊어 버려서는 안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스무 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카버는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미 전역을 돌아 다니며 주유소 시급일 부터 튤립 수확, 병원 청소, 화장실 청소, 장난감 조립, 쿠키 공장,교과서 편집일을 전전 하는 동안 파산과 불화, 중독과 이혼으로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대부분은 부부 사이에서 발생한 이야기들로 그의 출세작인 <제발 조용히 좀 해요>에서 보여준 의심과 질투, 분노는 이후에 출간한 작품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사랑'을 전면으로 내세운 이야기까지 지난 시절 고통과 절망에서 몸부림쳤던 모습을 겹겹이 이어 붙여 놓았다.



카버의 단편들을 모조리 읽고 나서 맨 앞 장으로 돌아가 두 번 세 번 읽어 나갈 때마다 그가 살아 왔던 인생들이 보였다.

16살 나이에 임신해서 무일푼에 카버와 결혼한 아내 메리엔은 불안정한 주거지에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도 어떤 일이든 마다 하지 않고 일자리를 찾아 다녔고 남편 카버가 변변치 않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글을 쓸 수 있게 배려 했고 아이들 양육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반면에 남편 카버는 아내가 사회적으로 승승 장구 할 때마다 외도를 의심했고 수시로 폭력을 휘둘렀다.

그는 알콜 중독으로 치료소를 들락 날락 거리는 동안에는 아내에게 칼을 휘둘러서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이런 불화 속에서도 아내는 10여 년 동안 힘겹게 대학에 다녔고 법률가 꿈을 포기 하지 않았고 남편 카버는 아내가 장학금 수혜자로 선정 될 때마다 짐을 싸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리는 속 좁은 남자였다.


남편 카버에게 가정 폭력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결혼 생활을 지키려 했던 아내 메리언 역시 몸과 마음에 병이 들어 알콜에 빠져서 병원에 드나들었고 이런 부모를 뒷바라지 했던 속 깊은 딸 역시 알콜 중독자가 된다.

1977년 지역 문학 행사에서 만난 시인 테스 갤러거와 사랑에 빠진 카버가 먼저 이혼 서류를 내밀었고 5년 후 이혼을 한 카버는 과거의 나쁜 남자에서 벗어나 시라큐스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인생의 날개를 펼쳤다.


미국의 북서쪽에 위치한 워싱턴주의 내륙의 소도시 야키마 출신인 카버는 미국의 전형적인 백인 노동자 남성의 마초적이면서 비굴하고 소심한 성격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흑인과 백인이 완전히 분리된 시절에 성장했던 카버는 초기 작품에서 흑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이며 작품 속에서 거친 용어를 내뱉으며 노골적이게 흑인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과 공포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를 수록 그는 사랑과 공감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나갔고 <대성당> 이라는 작품에서 장애를 가진 흑인과 백인이 하나의 펜을 잡고 함께 대성당을 그려내는 행위를 통해 나와 다른 피부색과 출신의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나누고 만들어 나가는 모습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레이먼드 카버는 다중적인 시점으로 현란한 기교를 섞은 실험적인 성격의 스토리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숨어 있는 나약한 모습을 그린 그는 한때 평론가들로 부터 '더러운 리얼리즘'이라는 혹평을 들었고 그가 쓴 시는 어떤 평론가도 공개적으로 평론을 쓰지 않을 정도로 일절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1983년 <대성당>이 퓰리처 상 후보에 올라갔고 종신직 교수직에 엄청난 문학 기금의 수혜자가 되고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언어로 책들이 번역 되어 미국 단편 소설의 르네상스 시대를 주도 하며 비로소 삶에 환한 등불이 밝혀지던 시기인 1986년 폐암 선고를 받는다.

연기와 기만

저녁 식사를 마친 뒤 타티야나 이바노브나가

뜨개질거리를 붙들고 조용히 앉았을 때, 그는 그녀의

손가락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갔다.

'살아가려면 최대한 서둘러야 해요. 내 친구...'그가 말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말아요! 현재에는 젊은, 건강, 불이 있지만 미래는 연기와 기만일 뿐이에요.! 스무 살이 되는 즉시 인생을 시작해요.

티티야나 이바노브나는 뜨개바늘을 떨어뜨렸다.

-안톤 체호프, <비밀 조언자>

폐의 3분의 2를 들어낸 대 수술을 받은 카버는 매일 아침 동반자 갤러거가 안톤 체홉의 단편 하나를 읽으면 그는 늦은 저녁 시간에 시 한 편을 썼다.

레이먼드 카버는 50년의 세월을 사는 동안 총 두 번의 인생을 살면서 마지막 생애 끝자락에서 체홉의 단편 속에서 자신이 살아 온 지난 날의 삶을 읽었다.

마지막 몇 해를 앞 둔 카버는 체홉의 단편들 속에서 시어들을 골라내고 행갈이를 해서 부분적으로 문장을 다듬어 시의 형태로 만들어 나가면서 체홉의 글 속에 자신의 삶을 끼워 넣었다.


예감

'어떤 예감이 들어요... 어떤 이상하고

암울한 예감 때문에 우울해요. 꼭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을 것만 같아요.'

'결혼하셨나요, 의사 선생님?' 가족이 있으시죠!'

'아무도요. 홀몸이에요. 심지어 친구도 하나 없어요.

부인 말씀해보시죠. 예감을 믿으시나요?'

'오, 그럼요. 믿죠.'

-안톤 체홉 <영원한 기계>


카버의 단편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삶에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 싸움이 시작 되기도 전에 포기하거나 희생하거나 방관하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을 한다.

너무나도 잔인하고 너무나도 무작위적인 주변부 인물들의 암울한 삶의 문제들을 카버는 마치 깃털로 살짝 건드리듯 부드러운 어조로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는 전조등을 켜놓고 속삭이듯 긴장감 넘치는 대화체로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30여 페이지 분량 속에 시작과 중간과 마지막이 담긴 인물들의 삶을 담아낸 카버는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시와 소설을 동시에 썼을 정도로 밑바닥 부터 창작을 차곡 차곡 다져나갔다.



'꿈이란, 결국 우리가 거기에서 깨어나야 하는 어떤 상태입니다. 그런 순간은 발견되어야 하고 상상 되어야 하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

나는 지난 시절에 읽었던 카버의 단편집 보다 그의 시를 자주 읽고 있다.

그가 남긴 시들은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사소한 기억들과 아버지, 낚시, 사냥, 여행,첫 번째 아내와 두 아이들 그리고 두 번째 아내인 시인 갤러거와 기타 다른 사람들의 모습들 그리고 마지막 눈을 감는 모습까지 담고 있다.



만약 내가 운이 좋다면, 온갖 줄을 다 꽂은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있겠지. 튜브가 내 코로도

기어 들어가고 하지만 친구들 겁먹지 마!

지금 얘기해두지만 그거 다 괜찮아.

마지막 순간에 그 정도는 요구 할 수 있지

누군가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모두에게 전화를 돌려서

이렇게 말하겠지 '빨리 와, 얼마 못 갈 것 같아!'

그러면 다들 오겠지. 그러면 나로서는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생길 거야. 내가 사랑하던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의 죽음 중에서

1988년 5월 마지막 인터뷰에서 카버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가난한 노동자 계급에 속한 사람입니다. 어린이였을 때도 어른이였을 때도 저는 그들 중 한 사람이였습니다. 작품을 출간하자 마자 미니멀리스트라는 말을 들었지만 제 소설은 미니멀리즘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습니다. 평론가들에게 검은 잉크로 휘갈겼다는 소리를 들은 시에는 제 삶의 모습이 투영 되어 있습니다.

비록 시인으로 불리지 않지만 지난 시절에 사나흘 정도 술이 깨어 있을 때 시를 쓰고 나면 이야기가 떠올랐고 정신을 차려서 문장에 리듬감을 담아서 수시로 찾아 오는 잔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것에 대해 쓰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쓰다보니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으니 곧 좋아 질 것이고 어쨌든 전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레이먼드 카버


이 인터뷰를 마친 카버는 한 달 후 양쪽 폐에 모두 암이 재발하고 6월 17일 네바다주 리노에서 시인 갤러거와 결혼식을 올린다.

7월 알래스카로 낚시 여행을 떠나고 돌아 와서 시애틀 병원에 입원하지만 시한부 선고를 받고 퇴원한다.

1988년 8월 2일 포트앤젤레스 자택에서 숨을 거둔 카버는 2틀 후 입관 되어 오션뷰 공동묘지에 안장 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가난과 고통에서 발버둥치며 사랑 받기 위해 글을 썼고 사랑 받았다고 생각할 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에 세워진 화강암 묘비에는 '시인, 단편소설 작가. 에세이스트'라고 적혀 있고 가장 마지막 줄에는 <만년의 편린 Late Fragment>라 새겨져 있다.


어쨌거나, 이번 생에서 원하던 걸

얻긴 했나?

그랬지.

그게 뭐였지?

내가 사랑 받은 인간이었다고 스스로를 일컫는 것, 내가

이 지상에서 사랑 받았다고 느끼는 것

-시집< 폭포로 가는 새로운 길>의 '만년의 편린' 중에서

50세로 세상을 떠난 카버는 25년 동안의 다섯권 분량의 소설과 시, 산문, 그리고 서문이 담긴 작가 선집에 수록된 것 까지 포함 해서 총 73편의 글을 남겼다.


그리고 여기 이 책 속에 25년의 작가 인생을 사는 동안 했던 24개의 인터뷰가 500여페이지 분량 속에 그의 인생 철학과 창작 과정들이 모두 담겨 있다.

각각의 인터뷰가 곧 인간 레이먼드 카버의 인생 이야기들로 이어져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결국 읽고 쓰는 행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재능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열정이 있는 사람들만 계속해서 씁니다.'

-레이먼드 카버(1938-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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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5-31 09: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말이 정말 좋네요 재능은 누구나 있지만 열정이 있는 사람들만 계속 쓴다...ㅠㅠ

scott 2024-05-31 10:50   좋아요 3 | URL
네, 열정만이 삶을 지탱하게 만드는 힘 ^^

2024-06-01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01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의가 잠든 사이에
스테이시 에이브럼스 지음, 권도희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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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악마가 인간에게 행한 가장 큰 속임수 입니다.! 악마는 우리 스스로가 운명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지만,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건 종말밖에 없어요. 사당을 짓기 위해 자연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악마의 짓입니다. 이제 그런 짓은 그만둬야 합니다.!]


6월 18일 일요일 오후

대법관 하위드 윈은 어느 대학 졸업식장에서 연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밤 11시 47분 뇌사 상태에 빠져버린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주말 동안 대법원장 하위드 윈에게 어떤 일이 발생한 걸까?

미국 대법원은 회기마다 청문회를 열어 법령을 제정하는데 10월의 첫 번째 월요일이면 윈 대법관과 동료 법관들은 딱한 사정을 가진 자들과 그들을 대리하는 변호사들에게 관용을 구할 시간을 분배해주고 심의를 시작한다.

통상적으로 법률 원칙에 어긋나지 않게 6월 마지막 날 밤 자정이 되면 무죄이든 유죄이든 결과가 나오고 전통에 따라 그들은 마지막 주에 가장 중요한 사안들을 분배하고 판결을 내린다.

사안에 따라 판결이 7월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법관 윈의 재임 기간 동안에는 절대로 그 기간 까지 넘긴 적 없이 6월 30일 날까지 모든 것이 결판 나고 마무리 된다.

대법관이 쓰러지기 전인 밤 11시, 그의 방에 들어간 간병인은 약병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 급히 의료진에게 연락을 한다.


[그녀에게 전해 ...해답을 구하려면 동쪽에서 찾아보라고, 강을 봐야 해. 그 사이에 있는 광장으로 가야해. 라스커, 바우어 날 용서해]라는 말을 남기고 혼수 상태에 빠진다.


다음날 아침 6월 19일 월요일, 대법관의 서기 에이버리 킨은 대법관 윈이 쓰러지기 직전에 자신을 법적 후견인으로 지명했다는 통보를 받고 의문의 혼수 상태에 빠진 대법관 윈을 둘러싼 배후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졸업식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윈 대법관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건가?'


대법관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대통령 측에선 혼수상태인 대법관은 앞서 합의된 내용에 서명 할 수도 없고 법적 후견인 비서에게 대신 투표 할 수 있는 권한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하고 후견인 비서에게 사임하라는 압박을 가한다.

하지만 이런 불의의 상황은 역사적 사례로도 없었고 미국 헌법 3조에 의하면 질병으로 인해 그 직위를 거두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혼수 상태에 빠진 대법관은 스스로 사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법원에서 이름도 자리도 없애 버리지 못한다.

2년 만에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급사 하자 당시 부통령이였던 스토크스가 곧바로 대통령직을 넘겨 받았지만 연이어 터지는 주가 폭락과 마다가스카르에서 발생한 인질 구조 작전 실패, 마이크가 켜진 상태로 사적인 대화가 언론으로 흘러나가 버린 사건들 때문에 지지율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설상 가상으로 그동안 어떤 불협화음을 보이지 않았던 동맹국 인도가 배짱을 부리며 무역 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고 있다.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군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스토크스 대통령측은 이 사실이 대법원측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정황을 포착한다.

그렇다면 대법관 윈이 자신의 서기인 에이버리를 법적 후견인으로 내세워 서명하게 만든 서류는 무엇일까?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 어디에도 어떤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자료들, 사건 기록부들 전부 찾아 봐도 대법관이 에이버리에게 위임한 중요한 문서의 서류함을 찾지 못한다.


-체스다이너모

-아니는 강에 있다.

-뒤마는 아니를 찾아라.

-광장에서


체스 경기를 즐겨 했던 대법관은 체스판 기호물에 암호 같은 알파벳을 표기 해 두었다.

상원 법안 의결을 바로 코 앞에 둔 백악관은 대법관 서기 에이버리를 법원 출임금지 상태로 만들어 놓자 그녀는 경찰과 FBI들의 감시 아래서 손과 발이 묶여 버린다.

에이버리는 자신의 머릿 속에 체스판을 띄워 놓고 기형물을 움직이며 각종 이권이 걸려있는 거대한 로비스트 단체와 국가의 중대한 기밀 사항이 들어 있는 특허권 분쟁, 외국 기업 강제 인수 합병 문제들의 뒤엉켜버린 실타래를 풀고 대법관에게 협박과 위협을 가한 이들을 찾기 시작한다.


-염색체 연구는 비밀리에 행해졌고, 티그리스로스트에 의해 부인 되었다.

-혈통을 대상으로 하는 유전자 연구의 무기화.

-미국 재무부에서 사전 승인 없이 히게이아에 수억 달러의 자금을 지급 했다.

-윌 밴스 소령은 CBIRF에 배정된 생화학자다.

-아프가니스탄, 인도, 쉽게 손이 닿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슬람교도들의 나라

-사라진 과학자, 사라진 예산 분석가, 죽은 간병인, 살해 시도

-외아들을 살리기 위한 필사적인 대법관....


자금이 연방 계좌에서 빠져 나갔다는 증거를 찾아 낸 에이버리는 추적 결과 그 돈이 국토 안보부 소속의 과학 기술 부서에서 나왔다는 정황을 포착해낸다.

일련의 증거와 정황의 퍼즐을 맟춰보니 국가의 법률과 국제 조약에 위배되는 연구에 참여한 이들이 전부 미국 달러를 사용한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디까지 개입했는가?

히게이아가 이 기술을 상용화 시킨다면 잘못된 염색체 변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생물 유전자적 바이러스를 만들 수 있게 된다.

호의와 어리석음의 나라 미국 땅.

정의는 어느 세계에서나 있지만 미국 땅 어디에서도 더 이상 찾기 힘들게 되었다.

염색체 연구 기금,실험 영상과 그밖에 돈의 출처까지 알아낸 서기 에이버리는 반 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증거를 들고 미국 백악관의 문 앞에 설 수 있을까?


6월 27일 화요일

원고: 미 연방 대법원 배석판사 하워드 제퍼슨 윈

피고: 미 합중국


혼수 상태인 대법관의 법적 후견인 에이버리는 고소장을 접수하고 다음날 오전 10시 3분 재판장에 원고 자리에 선다.


대통령의 몰락...

백악관의 대량학살...


언론에서 여러 시나리오들이 흘러 나오기 시작하고 보수 방송에선 에이버리가 변호사 자격증을 잃고 법조계에서 추방될 것인지 아닌지를 놓고 토론이 벌어진다.

에이버리는 윈 대법관의 침대 옆에 서서 그의 손을 붙잡는다.


'정의는 다른 조각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그 세상이 만나는 곳'에서...



<정의가 잠든 사이에>를 쓴 작가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는 예일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로 조지아주 하원의원과 소수당 대표를 역임했고 2018년 조지아주 역사상 가장 많은 표를 얻어 민주당 주지사 후보가 되었다.

그녀는 셀리나 몽고메리라는 필명으로 로맨스 소설을 썼을 정도로 필력을 이미 출판계에서 검증 받은 프로 작가 이면서 미국 주요 정당의 주지사 후보에 오른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으로 미국 정치판에서 '공정한 싸움', '공정한 수', '남부 경제 발전 프로젝트'를 설립해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정하게 의결권에 헌신하며 국가와 국제 문제그리고 시민 사회문제를 폭넓게 다루는 뛰어난 정치인이다.

위스콘신 주(州) 미시시피에서 조선소 노동자로 일하는 부모님 아래서 성장한 스테이시는 노동자 계층 부모님이 국가에서 보조 받은 생활비로 생계를 꾸리는 걸 지켜 보면서 공공 서비스와 시민 참여의 중요성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아버지가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자에게 코트를 벗어주는 모습을 보고 자란 스테이시는 교육열이 높은 부모님의 지원으로 좋은 학군에 공부하며 흑인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졸업생 대표 연설을 한다.

그녀는 명문대학에 입학하고 2학년에 올라갔을 무렵에 LA 흑인 폭동의 불을 붙이게 된 ‘로드니 킹 사건’(Rodney King riots)으로 에이브럼스는 TV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시 조지아주 애틀랜타 첫 흑인 시장이었던 메이너드 잭슨에게 "당신은 (흑인을 대표하는) 젊은 시장이면서도, 젊은이들을 위해 충분히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맹비난을 퍼부어 댔다.

이후 스테이시는 예일대학교 로스쿨로 진학해 변호사 자격증을 따며 한 법률사무소에서 세무사로 활동하던 중 2002년 29세의 나이로 애틀랜타 변호사로 취직해 정부 관련 업무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주 정부의 비효율적으로 운영 되고 있는 비과세 구조, 헬스케어, 공공 부문 재정 등을 주도 면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하기 시작한다.

2006년 조지아주 하원 의원에 당선된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는 미국 흑인 역사상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 하원의원이 되고 주먹구구식으로 공공 운영비를 책정하고 있었던 공화당의원들에게 계산기를 들고 직접 보는 앞에서 계산을 하며 주민들의 세금이 어떻게 빠져 나가는 지 정확한 수치로 맞섰다.

그녀는 때로는 공화당의 눈속임을 향해 돌직구를 날리면서도 정부 개혁을 위해서 공화당과도 협력하며 범죄 개혁에 힘을 합쳤고 1% 저금리 대출 프로그램인 ‘희망(hope) 장학금 제도’를 만들어서 저소득층에게 교육의 문을 열어주었다.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는 ‘조지아 역사상 가장 많이 세금 인상을 막아낸 인물’로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강세를 보이지 않았던 조지아 주에서 숨어 있는 표를 발굴하기 위해 유권자를 찾아 다니며 투표를 독려 해서 기울어진 정치 지형을 바로 잡는데 앞장섰다.

미국 땅에서는 1965년 흑인의 투표권을 보장하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이 통과되어 남부 지역에서 흑인 유권자에 대한 차별적인 투표 제한 조치가 금지됐는데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또는 암암리에 흑인의 투표를 방해하며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행태와 사회적 분위기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곳이다.

2018년 공화당과 민주당을 통틀어 아프리카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주지사 후보로 지명된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는 선거에서 떨어졌고 2022년 재도전에도 실패 했지만 미국 정치계에 흑인 여성 최초로 목소리를 내며 기울어진 미국의 정치 풍토를 바로 잡아나가는데 앞장 서고 있다.


2021년에 발표한 <정의가 잠든 사이에>는 스테이시 에이브럼스가 의정활동을 하며 주지사 선거에 도전 했던 지난 12년 동안 쓰고 또 쓰고 그리고 고치기를 반복한 끝에 완성했다.

이 작품의 출발은 판사 테리사 윈 로즈버러와 나눈 대화에서 시작되었고 소설적 상상력과 생생한 경험을 버무려서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법원과 대법원 그리고 서기들의 움직임과 역할을 현실감 넘치게 펼쳐 보였다.

그녀는 모든 의정 활동과 지역 사회 발전과 방향을 논의하고 토론 하고 각 공공기관과 기타 시설 방문과 연설이 끝마치고 늦은 시간 노트북을 켜고 이 소설을 썼다.

그녀는 <정의가 잠든 사이에>를 쓰는 동안 미국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지며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자료를 찾고 자문을 구하며 소설 같은 현실이 담긴 미국 사법권과 백악관 그리고 나라 밖의 움직임을 담아 냈다.

소설적 결말은 해피 엔딩이지만 현재 미국과 우리 나라 앞에 놓여진 현실은 절대로 낙관적인 상황도 아니고 해피 엔딩으로 향하지도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정치계, 법조계 모두 막강한 불법 자금을 세탁하며 세를 불리는 이권 세력들 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성실하게 하루 하루 살아가며 세금을 꼬박 꼬박 내고 있는 시민들은 이들의 상세한 내막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극단의 양극화·불평등그리고 계층의 갈등만 점점 커져 가고 있다.

이 땅에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이 정의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정의가 잠들어 버린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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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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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들이 부자인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자 아버지는 선뜻 아들에게 유산을 미리 준다.

아버지에게 미리 물려 받은 유산을 온갖 유흥에 흥청망청 전부 소비 해 버린 작은 아들은 그해 흉년이 들어 굶게 되고 굶주림에서 면하려고 남의 집 돼지치기를 하며 얹혀 살아간다.

돼지들이 먹는 쥐엄나무로 끼니를 떼우던 작은 아들은 그마저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거지꼴이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종으로 삼아 달라고 청한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 온 아들을 반갑게 맞이한 아버지는 아들의 입에서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사랑하는 내 아들아.!'라고 외치며 가문의 상징인 반지를 아들의 손가락에 끼워준다.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아들이 집으로 돌아 왔다며 축하 파티를 열자 큰아들이 자신은 집을 떠난 적도 없이 농사를 지으며 열심히 살아왔어도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 돼지 한 마리 잡아 준 적도 없었다며 송아지를 잡고 이웃들을 물러 모아 파티를 여는 아버지에게 원망 섞인 말을 내뱉는다.

'나의 것은 다 너의 것이다. 내가 잃었던 아들을 되찾았으니,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왔으니 아니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누가 복음의 '돌아온 탕자' 중에서


<누가 복음>에 나오는 '탕자'를 그림으로 남긴 화가가 있다.


화가로 정점에 올라 서서 부와 명성을 손에 쥐었던 렘브란트는 서른 살 무렵 부터 누가 복음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 관한 동판화 작품을 많이 그렸다.


서른 살 무렵에 그린 <돌아온 탕자> 속의 아버지는 문 밖으로 달려나가 힘차게 아들을 끌어 않는다.


1668년 생애 끝자락에 완성한 <돌아온 탕자>는 상처투성이 발을 드러낸 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으며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들의 머리를 아버지는 사랑과 용서의 눈빛과 눈길로 쓰다듬고 있다.

이 그림을 수시로 꺼내 보는 시인이 있다.


시인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시 미술관까지 찾아 가서 미술관의 허락을 얻어 이틀 동안 의자를 그림 앞에 놓고 이 그림만 감상했다.

등단 50년을 넘긴 한국 서정시의 거장, 전 세대에게 사랑 받고 있는 시인 정호승은 한동안 시를 버리고 살았으나 시는 지금까지도 자신을 버리지 않고 있다며 질풍 노도 같은 청춘의 시기에 겪은 아픈 이별이 어떻게 시가 되었는지, 서울의 밤을 바라보았던 가난한 가장이 시를 쓰기 위해 과감히 신문사에 사표를 썼던 당시 심경은 어땠는지….

그동안 겪어온 사랑과 고통을 시와 함께 돌아보며 고해 하듯 직접 가려 뽑은 시 68편과 그 시에 얽힌 이야기 68편 속에 깊은 내면을 털어놓았다.


시인

혹한이 몰아닥친 겨울 아침에 보았다.

무심코 추어탕집 앞을 지나가다가

출입문 앞에 내어 놓은 고무함지 속에

꽁꽁 얼어붙어 있는 미꾸라지들

결빙이 되는 순간까지 온몸으로

시를 쓰고 죽은 모습을

꼬리지느러미를 흔들고 허리를 구부리며

길게 수염이 난 머리를 꼿꼿이 치켜든 채

기역자로 혹은 이응자로 문자를 이루어

결빙의 순간까지 온몸으로

진흙을 토해내며 투명한 얼음 속에

절명시를 쓰고 죽은 겨울의

시인들을

돌아 가시기 전까지 매일 밤, 가족을 위한 기도와 일기 쓰기로 하루를 마치셨던 시인의 아버지, 생을 마치기 전까지도 자식들을 걱정했던 시인의 어머니


어제 하루의 안녕에 대해 감사하고 오늘 하루의 안녕에 대해 기도 하는 삶을 실천했던 시인의 부모님의 모습에서 보이지 않게 세상 모두의 안녕을 위해 세상을 떠나는 그 날 까지 솔선 수범 하신 모습에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숯이 되라

상처 많은 나무의 가지가 되지 말고

새들이 날아와 앉는 나무의 심장이 되라

내가 끝끝내 배반의 나무를 불태울지라도

과거리를 선택한 분노의 불이 되지 말고

다 타고 남은 현재의 고요한 숯이 되라

숯은 밤하늘 별들이 새들과 함께

나무의 가슴에 잠시 앉았다 간 작은 발자국

밤새도록 새들이 흘린 눈물의 검은 이슬

오늘 밤에도 별들이 숯이 되기 위하여

이슬의 몸으로 내 가슴에 떨어진다.

미래는 복수에 있지 않고 용서에 있으므로

가슴에 활활 격노의 산불이 타올라도

산불이 지나간 자리마다

잿더미가 되어

잿더미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아

화해하는 숯의 심장이 되라

용서의 불씨를 품은 참숯이 되라

렘브란트가 생애 마지막 시기에 완성한 돌아온 탕자 그림에서 아들의 어깨에 올려진 아버지의 양 손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다.


아버지의 손은 무릎을 꿇고 있는 아들이 입고 있는 옷에 주름이 질 정도로 움켜쥐고 있고 어머니의 손은 어깨 위를 토닥이듯 살며시 감싸 안고 있다.

자신을 용서 하지 못한 채 남도 용서하지 못하는 순간마다 이 그림을 꺼내보고 있는 시인 정호승은 마흔을 훌쩍 넘겨 인생의 방향을 바꿔 시인의 길을 갔다.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했던 소설들이 누군가의 쓰레기장에 버려진 적도 있고 창작의 열의가 꺾여져 버렸을 때는 수년 동안 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먼지보다 더 미미한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으로 좌절의 쓴맛을 보면서도 시를 썼다.

꽃을 보려면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문자와 카톡, 사진으로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언어의 참 의미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듣기 어려워졌고 글자의 자음과 모음의 기이한 조합으로 타인의 행동과 말을 조롱하는 언어들이 SNS 세상에서 시커먼 구름처럼 둥둥 떠다닌다.

10초면 웃고 즐길 수 있는 틱톡 영상이 넘쳐 나고 언제 어디에서든 좋아하는 이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실시간 영상으로 보는 시대에 정제된 언어와 말은 빠른 속도로 축약되고 희화화 되고 있는 시대에 어느 가정에서든 어떤 사회에서든 누가 복음의 '돌아온 탕자'들이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누가 복음을 읽지 않아도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의 그림을 본 적이 없어도 이런 시대에 세상의 모습을 시어에 담아 맑은 영혼의 눈빛으로 세상의 빛과 어둠을 빚어내는 시인이 쓴 글을 읽게 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별밥

하늘의 우물에는 별이 많다.

어머니가 우물가에 앉아 쌀을 씻으시면서

쌀에 아무리 돌이 많아도 쌀보다 더 많지 않다.

물끄러미 어린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지만

나의 우물 속에는 언제나 쌀보다 별이 더 많았다.

지금도 나는 배가 고프면

하늘의 우물 속에 깊게 두레박을 내리고

별을 가득 길어 섞어 별밥을 해 먹고

그리운 어머니를 찾아 길을 떠난다.


어떠한 일에도 감사하고 용서하며 원망하지 않고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인의 성정에 매일 한 편 한편 책장을 넘기며 사랑과 고통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고통이 산문이라면 사랑은 시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을 가슴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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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5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5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5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6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4-02-06 0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글 어떠한 일에도 고마워하고 용서하고 원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다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쩌면 마음이 편하려면 그게 더 좋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쉽지 않은 일이죠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에서 아버지 손은 한사람 손이 아니었군요 그런 뜻도 있다니... 그림에 담긴 뜻을 알려면 오래 봐야겠네요 그런 적 별로 없군요 책에 실린 그림도... 정호승 시인은 그 그림을 오래 봤군요

며칠 뒤면 설 연휴예요 scott 님 설 연휴에는 편안하게 쉬시기 바랍니다


희선

2024-02-06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책을 훔치는 자는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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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곳곳에 50여 개의 책방들이 즐비 한 책의 마을 요무나가에는 신사가 있다.

이 곳 신사에는 서책을 관장하는 미쿠라관에는 이나리 신이 모셔져 있다.

서책을 관장하는 이나리 신을 모신 요무나가신사로 향하는 이들의 염원하는 소원들은 독서, 글쓰기에 관한 것으로 책과 관련된 기원과 욕망, 저주의 말들을 쏟아 내기 위해 전국 각 지역에서 모여 들고 있다.


[1980년에 나온 <정본 수서산서>의 특별 한정판 35부를 10만엔 이하로 구입할 수 있길.

SF작가 도헨 보쿠타로의 창작 의욕에 불을 지펴주세요.

20년 동안 신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인 문학상을 탄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탄다! 타게 해주세요!

서점 매출이 오르기를, 가능하다면 인터넷 서점 아마존이 경영이 악화되거나 스캔들이 발각 되어 망하길]

인간을 위한 신사가 아닌 미쿠라관은 조상 대대로 책을 지키고 보관하고 널리 전파 하는 가문으로 미쿠라관 설립자인 미쿠라 가이치는 책 수집가이자 평론가였고 그의 아내도 책 수집가로 살다 세상을 떠났다.

이 가문의 자손인 아들 아유무와 딸 히루네는 관리인으로 오로지 이 집안 책을 펼치고 읽고 수집하고 관리하고 보존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미쿠라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본 중에 200여권이 서가에서 사라지자 폐쇄를 결정하고 희귀본을 훔쳐간 도난범을 찾는데 온 가족이 혈안이 된다.

미쿠라 집안의 손녀 미후유는 책을 싫어하는 고교 1학년생으로 책을 읽는 것 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맛있는 걸 먹는 걸 더 즐기는 십대 소녀다.

인간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닌 오로지 책을 위해 지어진 미쿠라관에는 몇 개의 방을 제외하고는 인간이 편안하게 쉴 공간이 없다.

할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마자 정원을 없애고 별관을 증설해서 가족들의 거주 공간을 마련했지만 창도 없고 환기구만 있는 그곳은 십대 소녀 미후유에게 감옥이였다.

남아 있는 희귀본을 지키기 위해 폐쇄해버린 미쿠라관에 교복을 입은 낯선 침입자가 슬그머니 들어 온다.

침입자의 이름은 마시로, 낯선 침입자가 입을 열었다.


[미쿠라관의 책. 현재 23만 9122권. 그 모든 책에 '책의 저주'가 걸려 있어. 훔치면, 미쿠라 집안 사람이 아닌 자가 바깥으로 책을 한 권이라도 가지고 나가면 발동하지 이야기를 훔친자는 이야기의 감옥에 갇혀. 이번엔 선택된 건 마술적 사실주의의 저주야. 매직 리얼리즘이라고도 불리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세계에 도둑이 갇히는 저주지.]


서책들이 걸린 저주는 미쿠라관 주변을 에워싸더니 요무나가 마을의 고서점 일대로 퍼져 나가 신호등 색이 뒤바뀌며 녹색빛의 은행나무 잎이 갑자기 샛 노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미후유, 지금부터 도둑을 찾아야 해. 책 도둑을 잡으면 책의 저주는 사라지고 마을도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책을 지키는 가문에서 태어나도 책을 싫어하는 미후유가 과연 책 도둑을 잡을 수 있을까?


비를 몰고 다니는 남자 베이젤과 해를 몰고 다니는 남자 케이젤이 살았던 한모 마을

두 형제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날 여우비를 맞으며 형 베이젤이 거대한 바위를 들어 동생을 향해 던지려는 순간 동생 케이젤은 날카로운 나뭇가지로 형을 찌르려고 달려들자 나그네가 주사위 두 개를 던져 하나는 서쪽, 하나는 동쪽으로 향해 떠나라고 지시한다.

형제는 나그네의 말 대로 각각 서쪽과 동쪽으로 떠나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다.

형 베이젤은 빗물을 받아 놓는 항아리 밑에서, 동생 케이젤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장에서 검은 투구벌레를 발견한다.

서로 각자의 길을 가다 두 형제를 만나게 한 투구벌레, 형제의 이야기는 마을의 전설처럼 전해져서 한모 마을 사람들은 투구벌레 처럼 등딱지가 있는 벌레를 신의 심부름꾼으로 숭배한다.

미쿠라 도서관의 낯선 침입자 마시로는 미후유에게 현재 요무나가 마을이 한모 마을 같은 저주에 걸렸다며 투구벌레를 찾아 낸다면 책 도둑도 잡고 마을에 걸린 저주도 풀 수 있다고 말한다.

한모 마을의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두 형제 베이젤과 케이젤의 이야기가 책 도둑을 찾아 내려는 미후유의 모험과 함께 맞물리며 독자들은 책을 모시고 지키는 가문의 손녀이자 후계자가 책도둑을 찾아 다양한 책들을 만나고 그 책들을 읽은 사람들을 추적하는 동안 그토록 책을 싫어 했던 미후유는 책을 펼치고 활자의 마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작은 산만 한 그 생물은 고개를 젓다가 위쪽 램프와 부딪쳤고, 가엾은 램프는 지면에 떨어졌다. 기름에 불이 붙었고, 순식간에 불꽃이 융단처럼 퍼져나갔다. 그 불꽃이 비춘 생물은 분명히 '짐승'이라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미후유는 언젠가 어린 시절 할머니가 읽어 주셨던 그림책<은빛 짐승>에서 보았던 짐승들이 바로 눈 앞에 나타난다.

노란 여우, 하얀 개, 갈색 말


이런 짐승들을 돌봐주던 사람들 모두 동물의 모습으로 변해 버리고 마을의 저주는 점점 더 강해져서 짐승으로 변하지 않은 인간들의 삶까지 위태로워진다.

하얀 개로 변해버린 미쿠라 도서관의 낯선 침입자 마시로의 등에 올라 탄 미후유는 인간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지만 인도에도 고서점 거리에도 어디에도 사람의 인기척을 발견하지 못한다.

마을 주민들이 전부 사라져 버린 도시에 홀로 남겨진 미후유는 책의 도시였던 마을에 북커스의 버그나 오작동으로 사람을 싫어하는 마을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품는다.


[미쿠라 집안과 연고가 없는 자, 미쿠라관의 장서를 한 권도 반출 하지 말 것. 이 금기가 깨지면 주술, 즉 북커스가 발동된다.]


저주에 걸린 마을 사람들은 여우의 모습이 되고 도둑이 나타나면 미쿠라관과 신사를 제외하고는 세계는 정해진 책에 기초하여 변해버린다.

이 모든 저주는 요무나가신사에 모셔진 제신 혼요미노미코토의 가호로 집행되었고 미후유는 '마을에 거부당한' 그곳 저주를 풀기 위해 신의 거처를 찾아 간다.

미후유는 신의 거처에서 엄청난 가문의 비밀을 알게 되고 첫 페이지 부터 마지막 장

'진실을 알아버리다'를 펼친 독자들은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책들은 진심으로 책과 문자에 대한 사랑이 깊은 신앙심으로 이어진 미쿠라가문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꼈을까?

책을 신성한 가치로 여기며 책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고 보관했던 옛 선인들은 자신의 손 떼가 묻은 책을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하거나 물려 주기 싫었을 정도로 신성 불가침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책의 신이라는 게 고대부터 존재할 리 없었고 종이의 대량 생산과 맏물린 인쇄기의 발명으로 서민들이 글을 깨우치고 자신의 돈으로 책을 구입하고 소장하면서 책의 가치는 더 이상 드높아지지 않았다.

그러니 신처럼 책탑을 숭배하고 모시며 소원을 빌고 책의 신의 권능으로 저주를 받는 현실은 불가능 하다.

하지만 살아 생전 책을 가까이 하며 책을 읽고 쓰며 책의 가치와 효용에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불어 넣었다면 가능할 것이다.

이삿짐을 쌀 때 가장 먼저 처분하는 것이 책들로 처분할 때 가장 헐 값에 매입 되는 것도 책이다.

종이와 인쇄 비용은 날로 치솟아서 만 원 한 장으로 책 한 권을 구입하기 힘들어 졌고 그동안 유용하게 읽었던 책 탑을 팔아 치우면 지폐 몇 장만 손에 쥐어질 정도로 이 세상에서 책의 가치는 무게와 부피에 비해 턱없이 낮다.

이북으로 편리하게 전자 결제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여전히 한 끼 식사 가격의 비용을 지불하고 종이 책을 사는 이들이 있고, 처분해버리기도 아까울 정도로 책탑을 쌓아 놓으며 읽고 싶은 책들을 장바구니에 가득 담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 책의 작가 후마미도리 노와키는 책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서점에 취직해서 온 종일 책 무덤 속에서 살다 미스터리 단편으로 작가로 데뷔해서 데뷔 3년 만에 그해 미스터리 베스트 10에서 6위에 올라가는 작품을 써냈다.

매년 작가 후카미도리가 써내는 작품들은 여러 상의 후보로 올랐고 2015년에 발표한 첫 장편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탄탄한 필력을 갖추었다.

책의 세계로 빠져드는 미스터리 판타지 세상을 그린 <이 책을 훔치는 자는>은 서점 직원들의 극찬과 사랑을 받으며 독자들에게도 보물 같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책을 훔치는 자는>에는 매 챕터 마다 '마술적 사실주의', '하드보일드', '스팀펑크', '호러' 같은 다양한 장르 영역을 넘나들며 네 편의 환상적인 책 이야기가 곳곳에 등장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영역과 이야기 세상을 탐험하며 책의 마법 속으로 빠져 버린다.


사는 동안 책이 거는 주문과 마법에 빠져 보는 것만큼 인생의 도움이 되는 건 없는 것 같다.

스마트 폰 세상 보다 순수하고 유해 하지 않는 공기를 품고 있는 책의 세계

이 책을 읽고 나면 북커버를 씌워주고 싶어 질 것이다.


세상의 모든 책들을 소중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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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1-21 0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이 책 매력에 빠져 버린다... 별난 집안이네요 집안 사람이 아닌 사람이 책을 훔쳐가면 저주가 걸린다니... 책을 싫어하던 미후유는 저주를 풀면서 책을 만나고 책을 좋아하게 되겠습니다 영상을 보는 것보다 책을 보면서 상상하는 게 더 자유롭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 걸 다 똑같이 상상하지 않겠지만...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희선

2023-11-21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3-11-21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커버 예쁘네요. 혹시 저 책을 구매하면 북커버를 사은품으로 주나요? ㅋ

책을 사랑하는 작가의 작품이어서 그런지 내용도 완전 책에 대한 여행 이야기군요~!!

2023-11-21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12-09 0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cott 님 축하합니다 이번주도 거의 다 가고 주말이 왔네요 십이월 남은 시간도 빨리 갈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아직 삼주 조금 넘게 남았으니 잘 지내도록 해야겠습니다 즐겁게... 마음은 가라앉아도...

scott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2023-12-09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육교 시네마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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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도깨비 굴뚝이라는 게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도쿄 시타마치의 화력 발전소에 거대한 굴뚝 네 개가 있었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 하나로도 두 개로도 세 개로도 보였다고 한다. 없어졌다가 생겼다가 하니까 도깨비 굴뚝]

                                                       -온다 리쿠의 <육교 시네마>중에서

도쿄 시내에서 도깨비 굴뚝이 보였던 곳은 어딜까?라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 어느 방향에서 봐도 가로 세로 직선 네 개가 합쳐져 거대한 직사각형 프레임처럼 보이는 곳을 응시해본다.

여기 육교 난간에 턱을 괴고 한 곳을 꼼짝 않고 응시하는 소년이 있다.

소년은 알고 있다.

도로 위에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육교는 도시 전체를 볼 수 있는 특등석이다.

어떤 날에는 부동 자세로 육교 난간에 서 있는 중년 여성이 있다.

그녀에겐 마치 이 세상이 온통 허무함으로 가득 차 보인다.

또 다른 어떤 날

체구가 자그마한 노부부가 육교 난간에 기댄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서서히 날이 저물고 초롱불이 하나둘 밝혀진다. 어슴푸레하고 부드러운 빛이 주변에 내려 앉았다.

이렇게 아름다웠나

이렇게 고귀한 것이었나.

이렇게 덧없는 것이었나.

육교 위에서 보이는 세상이 있다.

아니, 육교 위에 올라가야 만 볼 수 있는 세상이 있다.

타고난 이야기 꾼 온다 리쿠가 7년 만에 발표한 단편집 <육교 시네마>에 총 18편의 단편들이 담겨 있다.

<소설 신초>에 '야마모토슈고로상' 특집과 '괴담 특집'에 실렸던 단편들이여서 미스터리, 호러, 공포, 서스펜스,초 자연적인 장르물 까지 그동안 온다 리쿠 표의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의 색채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각각의 단편들은 작가가 장편을 쓰기 위해 프롤로그 형식으로 가볍게 스케치한 작품까지 들어 있어서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이나 배경 중심 스토리가 또렷하게 드러 나지 않았다.

작가가 구체적인 작품 개요를 작성 하지 않은 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고 나서 쓴 작품부터 로알드 달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과자에 쓰는 나무 열매에 대한 짧막한 이야기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오마주한 다소 만화적인 발상의 작품, 장편<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스핀 오프 단편까지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넘나들었지만 어떤 단편 하나 명확한 마무리 없이 흐지 부지하게 끝이 나버린다.

나오키 상을 수상한 <꿀벌과 천둥> 작품이 출간 되자 마자 정신없이 이어진 인터뷰와 사인회를 하는 동안에 우연히 자신의 시선에 잡혔던 이들에 대한 상상의 스토리 까지 줄줄이 이어져서 나오키 상 수상 이후 작가가 앞으로 어떤 장르의 글을 써나갈지 다양한 문체와 시점을 시도한 단편 조차 기대감을 안고 읽기 시작 한 독자를 허무하게 만들었다.

[나는 공상을 좋아하고 혼자서 잘 노는 아이였다.

그리고 종종 '그것'이 일어났다.

지금도 잘 설명할 수 없는데 이따금 어디 다른 곳의 풍경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다.

시야 가득히 풍경이 나타난다.

마당에서 놀고 있어도 방에 있어도 눈앞에 펼쳐진다.

잘은 몰라도 어딘가 바다에서 가까운 곳 같았다.

멀리 커다란 배 같은 물체가 보이거나 바다가 얼핏 보인 적도 있기 때문이다.]

                                                                            -'첫 꿈' 중에서


단편 '첫 꿈'은 작가 온다 리쿠가 앞으로 쓰게 될 차기작 장편 <추억의 오중주>의 예고편처럼 쓴 작품으로 어린 시절 부터 동경했던 요코하마에 관한 꿈과 몽상가 기질이 넘쳤던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버무릴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교실에 있었다

'그'도 교실에 있었다.

'그'는 두 손을 우아하게 머리 위로 쳐 든다.

나는 교실에 앉아 '그'가 춤추는 것을 본다.

주위에서 춤추는 같은 반 학생들

너도 봤지?

'그'가 내게 그렇게 묻는다.

나는 잠자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환한 햇빛.

나와 '그'는 그해의 '봄의 제전 '속에 있다.

-<봄의 제전> 중에서

작가 온다 리쿠는 차기작 장편으로 발레극인 <봄의 제전>에 관한 작품을 구상 중이라고 후기에 밝혔다.

유명 안무가들이 안무한 <봄의 제전>을 전부 감상한 온다 리쿠는 군무를 솔로 형식의 안무로 설정하고 작품 배경을 학교 교실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스케치처럼 쓴 작품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스토리 없이 어느 고등학교에서 발레를 하는 한 남자 아이를 지켜보는 화자가 등장 할 뿐이다.


7년 만에 발표하는 단편집에 18편의 단편들이 들어 있다 해서 큰 기대감을 갖고 읽었지만 단편들 모두 앞으로 쓸 예정인 작품들의 개요만 살짝 보여 주듯 마무리해서 어떤 작품도 인상 깊지 않았다.

단편집을 펼치자 마자 시작 되는 이야기 <철길 옆 집>도 화면 전경에 보이는 철길을 바라 보던 화자가 호퍼의 그림을 떠올리다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를 언급하며 자신의 집 앞 철길을 지나가는 낯선 이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철길 옆집에 무단 점유 하며 신문을 읽는 남자가 등장 하더니 돌연 사라진다.

그리고 작가는 이렇게 쓴다.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을까?

또 다른 단편인 <악보를 파는 남자>의 배경은 어느 콘서트 홀로 나흘 동안 개최되는 현악기 이벤트를 취재 차 온 잡지 기자가 등장한다.

그녀가 목격한 한 남자가 형형색색의 악보를 팔고 있다.

나흘 동안 잡지 기자는 이 악보 파는 남자를 관찰하며 망상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서술한다.

[ 그 망상이란 이런 것이다.

그는 음악을 팔고 있다.

눈앞에 멋진 곳이 나열되어 있다. 그는 머릿속에 모든 곡이 들어 있어 악보를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다.

그는 머릿속에 자신이 파는 악보의 곡이 빼곡이 들어 있어 언제든지 연주 할 수 있다.

어디서부터나 재생이 가능하다.

셔플 연주도 가능하고 일부 구간을 반복할 수도 있다.]

                                                                  -온다리쿠의 악보를 파는 남자 중에서

이쯤 되면 대단한 스케일은 아니여도 <악보를 파는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 해야 한다.


<악보를 파는 남자>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새하얀 로비의 커다란 창유리 안쪽이라 처음에는 역광 탓에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첫 문장을 읽은 독자들도 문장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남자의 얼굴이 궁금해진다.

작품 속 화자는 스마트 폰을 보고 콘서트가 열리는 홀을 기웃 거리며 악보를 파는 남자 주변인들과 대화 하며 그 남자를 응시하고 있다.

페이지가 넘어가도 그 남자는 악보를 팔고 있다.

이 작품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악보를 파는 남자.

이 순간, 그건 정말로 내 망상 속에만 존재하는 명예 전시가 되고 말았다.'

                                                                     -<악보를 파는 남자> 중에서

그렇다. 이렇게 7년 만에 나온 온다 리쿠의 단편집은 작가가 앞으로 발표할 작품의 맛보기만 살짝 보여 줄 뿐 그동안 나오키 상 수상 이후 떠밀려 들어온 원고 뭉치에 파묻혔던 작가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의 명예스럽지 않은 전시작 물만 모여 있다.


또 다른 단편에는 고등학교 무용반을 배경으로 군무가 특징인 발레 <봄의 제전>을 독무인 솔로로 추고 있는 남학생이 등장한다.

현재 습작 중으로 이 단편 역시 습작처럼 썼다고 후기에 밝혔다.


마지막 이 단편집의 제목인 <육교 시네마>는 작가가 후기에서 이야기 하는 작품의 배경과 집필 이유와는 전혀 다르다.

작가는 고령화가 심각한 일본에서 전국의 인프라가 모두 낡아버려서 어디를 가도 부식이 심한 육교가 흉물이 된 곳이 많다며 도시의 폭력처럼 서 있는 육교에 대한 글을 썼다고 자부 하며 가장 나 다운 단편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후기를 읽고 두 번 세 번을 읽어도 이 작품의 전체 스토리는 모호하다.

여기 수록된 작품들 중에 작가가 후기에 밝힌 데로 앞으로 발표 될 장편들은


오래전 부터 구상 중인 신작 스핀 오프들이라며 아직 집필 중이니 언제 발표 될지 모른다고 언급 했다.


그리고 나.

나도 찾아왔다.

이곳에.

이 육교에

이 거대한 우연의 스크린을 보러...

정말 여기 맞을까.

나는 우뚝 서서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1964년생 온다 리쿠는 1991년 일본 판타지 노벨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하고 이후 2016년까지 일본의 거의 모든 문학상을 휩쓸었다.

이후 발표 된 작품부터 공기가 팽팽하게 들어간 풍선 같은 탄탄한 서사 구조가 서서히 빠져 나가서 이전의 시도 했던 작가의 주 특기인 다양한 시점을 바꿔 가며 회색빛과 하늘 빛의 두 개의 세상을 자유자재로 오고 갔던 화려한 필력이 느슨 해져 버렸다.

이렇게 장편으로 이어지는 맛보기용 프롤로그 같은 단편집을 출간 하고 난 후 2023년 5월에 발표한 <둔색 황시행鈍色幻視行>은 단편 육교 시네마에서 더 크고 화려하게 확장 되어 배를 타고 세상을 질주 하는 이야기로 발전 시켰다.

작가 온다 리쿠는 항상 꿈을 꿀 때 마다 다음 날 눈을 뜨면 꿈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종이 위에 떠오르는데로 휘갈긴다고 한다.

이렇게 쌓여가는 작가의 꿈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야기의 실타래를 타고 작가의 글밥으로 탄생한다.

작가는 그동안 발표한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했던 이들을 추려 내어 다른 이야기로 확장 시켜 나갔다.

그러니 여기 수록 된 작품들은 작가가 앞으로 발표 할 장편의 프롤로그 같은 단편 모음집이여서 대단하게 인상 깊은 작품들은 없고 아쉬움만 한 가득이다.

'우리'가 함께 꾼 '첫 꿈'

맨 처음 꾼 꿈은

어둠 속에 흔들리는 불길, 하늘 높이 치솟은 불길 속에 우두커니 선 두 남녀,

불타는 두 사람

그게 '우리'의 FIRST DREAM'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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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9-03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 실린 소설을 장편으로 다 쓸지... 하나는 썼군요 쓰고 있는 것도 있고... 앞으로 쓸 게 많네요 기다리면 장편으로 나오겠습니다


희선

2023-09-03 2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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