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3
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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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닌그라드로 가는 기차 안에서 화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두 번째 아내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일기를 읽게 된다. 이 ‘일기’라는 책에서 도스토예프스키 부부는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향한다. 이 두 개의 서사가 이 소설을 이루는 중심축이다. 도박에 빠져 정신분열적인 행동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이 책은 그야말로 레오니드 치프킨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바치는 연서인 것이다. 살아생전 이 책이 끝까지 출판되는 것도 보지 못한 작가의 유대인으로서의 삶이 사뭇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유대인을 증오했던 도스토예프스키를 사랑하는 치프킨의 속내는 어떠했을까. 환상적인 표현들, 도스토예프스키의 많은 작품들에서 나오는 인물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익숙치 않았지만 그래서 또 재밌게 읽었다. 치프킨은 살아생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얼마나 많이 반복해서 읽었을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마음이 애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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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2-2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를 읽을 때마다 아내나 자식들에겐 최악의 남자라는 생각이 듭니다.도박하는 남자...특히 남편감이나 사윗감으론 최악이죠.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을 땐 역시 그의 사생활이나 극단적인 민족주의적,종교적인 보수사상은 잊어버려야겠지요.

스파피필름 2010-02-22 13:42   좋아요 0 | URL
어떤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그 사람의 배경을 생각하지 않기란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일부러 작가 소개를 읽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한국작가들의 경우는 특히 이런 편견이 더 심한 것 같아요.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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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강의 소설은 처음이다. 이 소설의 스토리나 결론은 매우 통속적이고 전형적이다. 하지만 저자가 작품해설에서 말한 것처럼 마지막에는 독자의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진다. 띠용띠용 사이렌 소리라도 들리게 하려는 것처럼 경고용 메시지가 깜빡거리는 것이 아닌가! 시덥잖게 읽어가다가 아뿔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소설의 수많은 문장이나 말들은 어디선가 들었거나 읽었을 법하게 전형적이다. 너 없이는 못살아,류의.. 하하.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이 소설은 사강이 스물다섯이었을 때 쓴 소설이다. 그 나이에 서른아홉의 사랑은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라고 사강은 짐작했는가 보다. 폴이 열서너살 아래의 연하남 시몽과 불같은 연애를 하며 혼란스러워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너무나 전형적이다 못해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폴은 그런 사랑이 노인이 되었을 때나 가능한 사랑의 정점에 다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다. 심한 감정의 기복에는 이제 나이가 들어 초탈해가는 시점에서 한참의 연하남(그것도 엄청 잘생긴)으로부터 듣는 연애의 초기에나 있을 법한 질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설레이지 않기란 힘들다. 반면 중년남자 로제의 무미건조한 연애짓은 상상만해도 **없다. 저자가 말했듯 사랑을 믿는 다기 보다 열정을 믿는 다는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덧없고 변하기 쉬우며 불안정하고 미묘한 사람 사이의 감정이란 것.. 그것을 그려낸다는 것은 사강 스스로가 말했듯 무정형적인 현실이라는 삶보다  형식적인 문학이란 틀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여튼 이 소설,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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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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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하루키의 <1Q84>가 아니었다면 한참 후에나 읽었을 책이다. 조지 오웰은 1984년에 이런 시대가 오리라 상상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그의 상상속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이 책은 재밌는 그러나 매우 끔직한 것들이 등장한다. 텔레스크린, 이중사고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텔레스크린 때문에 주인공 윈스턴은 사생활을 꿈꿀 수 없다. 인간에게 혼자만의 시간, 개인적인 비밀이 보장되는 은밀함을 갖을 수 있는 것은 오늘날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다. 1984년에 사는 윈스턴은 개인의 감정표현조차 숨겨야 한다. 빅브라더라 상징되는 전체주의는 모든 실재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정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을 조정할 수 있기만 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뒤바꾸고 나아가 국가의 모든 체재를 뒤바꿀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객관적인 사실, 역사, 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끊임없이 수정된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현재에 맞게 수정하는 일이 소설 속 윈스턴의 직업이다. 그런데 위조된 역사적 사실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 사람들은 소위 ‘이중사고’하기를 강요당한다. 이중사고란 모순되는 두 가지 사고를 동시에 하는 것이다. 이중사고를 할 수 있도록 윈스턴은 당으로부터 체포되어 모진 고통을 겪고 결국 빅브라더의 세계를 이해의 수준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된다.  


 뒤틀리고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체재 속에서 무력한 한 개인의 진실된 세계는 너무도 쉽게 무너진 것이다. 무서운 것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죽이는 게 아니다. 그들의 견해가 옳을지도 모른다는 게 무서운 것이다. 도대체 둘 더하기 둘이 넷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p.113) 세상이 엄청나게 잘못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확신하는 것조차도 윈스턴에게는 혼란스러운 일이다. 바보들 속에서 자신이 정상이라고 외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비록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이 1984년과 같지는 않으나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을 수 있는 것들이 과연 있기나 한지 의심스러워진다. 윈스턴이 당했던 것과 같은 모진 고통 앞에서 자신의 세계를 올곧이 지켜나갈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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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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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관리사인 블룸은 언론에 의해 사생활이 폭로되기에 이른다. 카니발 시즌 한 댄스파티에서 만난 괴텐이라는 강도 용의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이 결과로 언론과 경찰의 그물망에 걸렸기 때문이다. 사실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지만 읽는 내내 (분량이 짧다.) 마음이 안좋고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신문의 보도기사와 같은 느낌의 문체와 블룸이 당하는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의도는 성공적으로 보인다. 이 책을 읽고 불편함을 느꼈다면 언론의 호도에 놀아나는 우매한 사람들로서 반응을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갖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압권은 블룸의 소지품이 낱낱이 까발리는 장면이다. 어머니를 죽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 기자를 살인하는 블룸의 행동은 결코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었다. 매사에 철저하고 계획적이며 섬세하기까지 한 블룸에게 사생활의 폭로는 어느 누구에게보다도 가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고 오히려 분석적으로 변한 블룸에게 살인이라는 행위는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이성을 가지고 행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건조한 문체로 동시대적인 문제와 늘 연결되어 작품을 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작가의 의도를 잘 살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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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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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처음으로, 말하자면.. 세계문학전집류의 소설 중 가장 처음 읽은 소설이 <달과 6펜스>였다. 그때가 중1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중고등학교 시절 중 중1때의 기억들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제인에어>,<테스>,<개선문>,<죄와 벌>과 같은 소설을 읽었는데 그 의미는 당연하게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다. 다 커서 고전소설들을 읽고 있는데 읽으면서 이래서 고전이구나!를 외치게 된다. 이 소설 역시 그랬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주인공 키티의 감정에 금방 몰입하게 된다.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키티의 삶과 대조되는 삶은 월터를 따라간 중국에서 콜레라환자들을 돌보는 수녀들의 삶이었다. 살면서 목숨을 거는 대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키티처럼 누군가는 사랑에 목숨을 건다. 세상을 유배지로 생각하며 희생과 고통의 삶을 통해 진정한 평화와 자유의 기쁨을 누리는 수녀들과 같은 사람들도 있다. 키티의 인생을 통해 내가 목숨을 걸고 있는 대상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불륜의 사랑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보다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강렬한 느낌으로의 끌림과 마음의 고통을 이 소설을 통해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멋대가리 없는 돼지로 보일수도 있음을 확인하면서 키득거리게 된다. 오히려 키티는 힘든 사랑의 격류를 지나오면서 진정한 자유애의 의지, 동정심과 인간애를 배우는 삶으로 자신을 성장시킨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몇안되는 진리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키티는 자신이 임신한 딸이 태어나게 된다면 자신과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는 희망을 품는다. 숱한 여성들이 자식들을 자신의 삶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사실 자식들의 삶 역시 그들 부모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게 자신의 인생노하우를 그대로 전수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본인이 겪고 느끼지 않는 한 그러한 조언들은 무용지물이 될 때가 많은 법... 이것이 인생의 신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의 제목처럼 인생의 수많은 결 속에서 어떤 점을 느끼고 중요하고 가치로운 것으로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몫이다. 이 한편의 소설을 통해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 그리고 그로인한 한 인간의 성장을 지켜본다는 것이 가슴벅차다.

“도(道). 우리들 중 누구는 아편에서 그 ‘길’을 찾기도 하고 누구는 신에게서 찾고, 누구는 위스키에서, 누구는 사랑에서 그걸 찾죠. 모두 같은 길이면서도 아무 곳으로도 통하지 않아요.” p.235

과거는 끝났다. 죽은 자는 죽은 채로 묻어 두자. 너무 무정한 걸까?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동정심과 인간애를 배웠기를 바랐다. 어떤 미래가 그녀의 몫으로 준비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것이 닥쳐오든 밝고 낙천적인 기백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자신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자 갑자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그들이 떠났던 여정이 추억처럼 떠올랐다.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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