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라 캐더의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19세기 중반 뉴멕시코 교구 사제로 온 장 마리 라투르 신부의 서사적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사제의 이야기지만 종교적 틀 안에서만 한정되지 않고 선교를 펼치는 지역의 멕시코 원주민과 인디언들의 토속 신앙과 관념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흩뿌려져 있다.  사제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태생과 문화, 심지어 신앙을 가지고도 교감하고 사랑할 수 있는 접목의 지대에서 돋보인다. 이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작가의 선구자적 통찰과 포용력이 없이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확장의 영역이다. 뿐만 아니라 윌라 캐더의 전매특허라 할 만한 장대한 풍경의 묘사가 일품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보여주듯 그녀의 묘사적 언어는 날카롭고 찬란하다. 언어가 상기하는 감각적 심상의 폭과 깊이가 경이롭다.


 


자연을 자신의 편의대로 가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서구인의 시각과 그것에 어떤 변형이나 훼손없이 공존을 도모하는 인디언들의 시각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 죽음을 어떤 불가피한 종말이 아니라 하나의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관조하는 사제의 모습은 이 이야기의 백미다. 또한 사제에게서 세속적 욕망을 제거해버리지 않음으로 하나의 온전한 인간상을 창조해 낸 것 또한 미덕이다. 인간적인 욕망, 무언가를 건설하고 남기고 싶은 마음은 낯익은 것이다. 그 낯익음 속에서 지향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공감을 얻는다. 


주교의 인생에 있어 마지막 몇 주일 동안, 그는 죽음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것은 지나간 <과거>였다. 미래는 미래 스스로 저저로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죽어 가는 것에 대해 지적인 호기심이 있었다. 한 인간의 믿음과 가치의 척도에 있어 일어나는 그 변화에 대해...... 점점 더 생각할수록 그에게 인간의 삶은 자아의 경험, 말하자면 자아 그 자체가 아니라 자아가 겪는 경험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확신은 그의 종교적인 삶과는 별개라고 생각했다. 

-윌라 캐더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p.323


인간의 삶은 자아의 경험"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지나가는 모든 일들을 통과하며 견딜 수 있다. 그 일들에 잠식되거나 무릎이 꺾이거나 하는 대신 그 모든 일들을 경험하고 그것이 과거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그것들을 회고하게 될 것이다. 그때의 선택과 행위를 섣불리 심판하는 대신 그 불가피함 속에 오롯이 견뎌낸 자신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종국에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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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2-07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일들에 잠식되거나 무릎이 꺾이거나 하는 대신 그 모든 일들을 경험하고 그것이 과거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이 책도 궁금하네요. 레삭매냐님께서 극찬하셨을 때부터 궁금했는데, 블랑카님께서 읽으신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읽으니까 더 읽고 싶어지네요 ^^

blanca 2021-02-08 09:59   좋아요 1 | URL
윌라 캐더는 사랑입니다...

단발머리 2021-02-07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디언 마을의 사제 이야기라는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백미라고 하셨던 부분, ‘죽음을 하나의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관조하는 사제의 모습‘에 대한 부분이 무척 궁금합니다.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1-02-07 18:33   좋아요 2 | URL
<나의 안토니아>,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통장 잔고가 남아 있는 한 그냥 구입, 소장하셔야 할 책입지요.
더 말을 보태는 건 구차한 일일 정도로요. ㅋㅋㅋㅋ 이러다가 후회하셔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

단발머리 2021-02-07 18:42   좋아요 0 | URL
저는 책 한 권에 혹했는데 이리 한권 더 던져주고 가시렵니끼?!? @@

다락방 2021-02-07 18:47   좋아요 2 | URL
저 < 나의 안토니아> 소장한지 십년 넘었어요. 네, 아직 안읽었고요.. 🙄

단발머리 2021-02-07 18:49   좋아요 1 | URL
일단 구입, 소장각이라 하시니 읽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가 봐요🙄

Falstaff 2021-02-07 19:10   좋아요 1 | URL
아이고, 뭔 말을 못해요. ㅋㅋㅋㅋ
이 책하고 안토니아는 쉬운 얘기로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란 말씀입죠.
후회하시면 제가 책값 물어드리겠습니다. 저, 절대로 열린책들하고 자매결연 맺지 않았습니다. ㅋㅋㅋㅋ

아냐, 아냐.... 안토니아만 걸기로 하겠습니다! 자고로 남아 일언은 풍선껌이니, 제 맘입니다. 하하하.....

단발머리 2021-02-07 19:28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나의 안토니아> 재미없으면 폴스태프님이 책값 물어주신대요. 저 살까요?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2-07 19:27   좋아요 0 | URL
일단 사시는 게 옳은 결정 같아요. 그 다음은.... 모르겠어요. 일단 사세요!! ㅋㅋ

blanca 2021-02-08 10:01   좋아요 1 | URL
ㅋㅋㅋ Falstaff님 당연히 여성분이라 생각했는데... 제가 하고 싶은 말 다 해주셨군요. 저는 <우리 중 하나> 너무 읽고 싶은데... 번역 얘기 때문에 망설여져요. 원서로 읽자니 너무 피곤하고요..

다락방 2021-02-08 10:34   좋아요 0 | URL
저는 우리 중 하나 도 사뒀어요. 저를 어쩌면 좋을지...😔

잠자냥 2021-02-08 16:25   좋아요 0 | URL
푸하하. 폴스타프 님 여성설! ㅎㅎㅎㅎㅎㅎ

Falstaff 2021-02-08 17:25   좋아요 2 | URL
ㅋㅋㅋ 저도 여성설이 재미있어서 답글을 달려고 했는데 <나는 고백한다>가 느므느므 재미있어서 도무지 짬을 못 내겠더라고요.
이제 3권까지 다 읽었습니다. 말 그대로 강추!!!!
오늘은 도미회에 쐬주, 낼은 조상님 성묘, 모레나 독후감 쓸 예정입니다. 크하, 개봉박두!
 

소용이 전부처럼 실질처럼 호도되는 사회에서 가장 소용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누군가는 책을 읽는 일을 그렇게 이야기한다. 


어떤 우울과 생의 급박한 일들이 한꺼번에 닥칠 때 역설적으로 더 그런 일을 생각하게 된다. 걱정을 하고 거기에 침잠하고 모든 소용과 실질로 달려가는 일 대신 물러나고 읽고 쓰는 일, 고리타분한 것들,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에 푹 빠져버리고 싶다. 사는 건 이런 게 아니라고 믿어보고 싶어지니까 그렇다.





이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 제목만으로 저자와 번역자에게 큰 빚을 졌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 말이 너무 좋아 계속 곱씹으며 이미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좋아해 버렸다. 그리고 읽고나서는 더 좋아졌다. 사실  서문부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정경을 그리면 그냥 지게 된다. 이런 삶도 있다.


영하45도까지 떨어지는 추위 속 노역으로 완전히 녹초가 된 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초상화 밑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당시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에 대한 강의를 열중해 듣던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나는 감동에 젖어 프루스트를 생각하곤 했다. 코르크 벽 탓에 난방이 조금 과하게 된 방에서 죽은 그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종일 일하고 돌아온 폴란드 포로들이 게르망트 공작 부인 이야기나 베르고트의 죽음, 또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그대로 전해주고자 했던 그 소중하고 아름다운 내면 묘사를 그토록 집중해 듣고 있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놀라고 감격할까, 하고 말이다. 더욱이 그가 죽은 지 20년이나 됐을 때였는데 말이다.

-유제프 차프스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그렇다. 저자 유제프 차프스키는 소비에트 연방 그랴조베츠 포로소용소에 함께 수용되어 있던 포로들을 위해 그곳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했다. 놀라운 점은 그가 참조할 그 어떤 책도 심지어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단 한 권도 그는 소지하고 있지 않아서 모든 것을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대목을 거의 정확하게 기억해서 인용했다. 죽음이 지척에 있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신뢰할 수 없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포로들은 절망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는 대신 가장 안 어울릴 것 같았던 지적 환희를 위해 그 빵 한 조각 나오지 않는 배움의 시간을 기꺼이 공유한다. 포로들이 각자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에 종사했던 직업에서 가져온 머리 속 지식으로 각 분야에서 스승이 되었고 열성적으로 제자가 되어 이 은밀하고 위험한 수용소 대학은 문을 열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유제프 차프스키의 프루스트에 대한 강의록이다. 


우리는 지적 노동을 해서라도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우리를 잠식하는 쇠약과 불안을 극복하고 뇌에 녹이 스는 것을 막아야 했다.

-유제프 차프스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러한 배경을 차치하고라도 이 프루스트 강의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프루스트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다 갖춘 경이로운 통찰을 준다. 프루스트의 그 처절할 정도의 정밀한 거리두기식 관찰기가 가지는 궁극의 의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빠지면 정작 잘 안 보이는 맹점이다. 이것을 한 발짝 떨어져서 거시적으로 통시적으로 종합하고 분석해 주는 강의가 더없이 필요한 이유다. 나는 마치 그 수용소에서 그들과 함께 바닥에 앉아 차프스키의 열성적인 강의를 듣는 착각이 들었다. 그에 따르면  프루스트는 무엇보다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 인간을 관류하는 시간, 그 흐름 자체를 구현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분권은 그에게 반하는 하나의 타협이었다. 시간이 파괴하는 모든 것, 변질시키는 모든 것, 그럼에도 궁극에 그를 사로잡은 그 단 하나의 의미를 그는 자신의 생과 뒤섞인 작품 그 자체로 구현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이 '단 한 권'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루스트가 원했던 형태가 아닌 것이다. 행갈이도 여백도 장도 부도 없기를 그가 소망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어느 죽어 있는 하나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평행우주 같은 우리의 또 다른 삶 그 자체가 되기를, 그 흐름 자체를 형상화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얘기였다. 기억과 회상,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섞여드는 그의 서술은 그러니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의 기법이 아니라 치밀한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들 그 자체, 느끼는 생각하는 그 행위 자체를 언어로 포획하는 일이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그것의 구현을 위해 자신의 삶 자체를 제물로 바쳤다.


프루스트 강의는 그들이 인간 이하로 추락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안전망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감상하고 때로 그것을 위해 삶도 바칠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을 경청하며 때로는 살아남고 때로는 견디고 때로는 그대로 죽어 버렸을 그들의 그 빛나던 시간을 잠시나마 엿본 것만으로 나는 많은 위안을 얻었다. 차프스키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프랑스 예술에 바치는, 내 소박한 감사의 공물"에 나도 나름의 소박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지향해야 하는 하나의 별을 그가 가리켜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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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4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4 1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타인에게 차마 드러내기 힘든 심연이 있다. 

모든 인간은 복합적이다. 대외적으로 인권을 존중하자며 정의를 부르짖으며 자기 부하 직원에게는 갑질을 일삼는 사람이 있고 세상 없는 독실한 종교인이 아이들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경우도 있다. 어릴 때는 사람을 단면적으로 파악하고 받아들였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이분법이었다. 내가 지지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무결한 사람이어야 했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미덕이 결여되어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인체의 신비 만큼 인간의 미스터리함을 느낀다. 어제 미덕을 행했던 사람이 그 날 밤에 약자를 폭행하는 스토리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누군가를 칭송하거나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동조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나는 욕망 앞에 선 인간을 믿지 않는다.


나이가 많아지면 이렇게 믿지 않는 것이 많아진다. 두려운 것도 많아진다. 사회적 연계가 강화되며 자기가 아닌 주변인의 이권과 안전에 좋든 싫든 개입하게 되며 때로 비겁해진다. 그래서 N번방 사건이 나왔을 때, 그것을 수면으로 노출시긴 최초 제보자이자 취재 기자가 20대 중반의 대학생 둘이라는 데에 놀라운 한편 수긍이 갔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성별을 몰랐을 때 바로 남학생으로 가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용감한, 이런 대단한 일을 한 주체로 자동반사적으로 나는 왜곡된 성편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학습은 놀라운 것이다. 무언가를 용감하게 고발하는 주체로 자동적으로 우리는 남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는 여대생 두 명인 익명의 '추적단 불꽃'이었다. 2019년 7월 기자를 꿈꾸는 대학생이었던 불과 단은 '탐사 심층 르포 취재물' 공모전을 준비하며 구글링을 하다 우연히 '와치맨'이 운영하는 구글 블로그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텔레그램 '번호방' 링크를 타고 아동, 청소년 성착취물 공유 단체 채팅방인 'N번방' 잠입취재로 이어지게 된다. 텔레그램은 독일에 서버가 있는 모바일 메신저이다. 자기 신원을 노출하지 않으며 각종 불법촬영물을 공유하고 범죄를 공모하는 터전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한 곳이다. 


N번방은 언론으로 크게 보도되었지만 이것이 막연히 사이버 성범죄라고만 추측할 뿐 정작 여기에서 이루어진 범죄가 실생활과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 이 범죄의 핵심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도는 높지 않다. 이곳의 핵심은 성범죄 대상이 자기 결정권이나 자기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는 어린이, 청소년이라는 점이다. 그들을 성적으로 유린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파괴한 각종 불법촬영물을 미끼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협박하고 조롱하였으며 심지어 주변의 지인들을 능욕하는 각종 불법촬영 영상물을 올리고 그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모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 촬영물을 각종 가상화폐로 거래하며 그 채팅방에 들어와 있는 유료회원들을 상대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이것을 제작하고 유통시킨 범죄자들 뿐 아니라 문제는 이 대화방에 들어와 있던 팔천 명이 넘던 회원들이다. 그들은 이 촬영물을 감상하고 지인을 능욕하고 각종 사회 일탈적인 발언을 주고받는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에 대한 색출과 처벌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불과 단의 평범하게 생각했던 선량해 보이는 지인도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이십 대 중반에 믿었던 주변인들의 괴물 같은 심연을 들여다본 불과 단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는 N번방에 집중하느라 그것을 세상에 터뜨린 이 두 여학생이 겪었을 트라우마와 신변에 대한 걱정은 정작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는 그 둘이 그것을 취재하는 과정뿐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맞닥뜨린 각종 성추행과 성편견에 따른 차별적 발언 등으로 갖게 된 상처와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나보다도 훨씬 어린 여대생들의 성장 과정 및 대학교, 취업시장에서 겪게 된 일들이 어쩌면 그렇게 한 치의 진보도 없이 똑 닮았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세상에서 어린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부당한 일들을 끊임없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구나 싶었다. 그것에 반기를 들면 나는 예민하고 성마른 여자가 되고 넘어가면 무던하고 적응력 좋은 사회인이 되는 것이라는 구도가 염증스럽다. 


N번방을 발본색원한다고 해서 음지에서 자라나는 거대 욕망의 뒤틀린 재현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은 선악 구도를 뛰어넘어 한계를 모르고 타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행태가 사소한 것이라 여기는 순간 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누구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축소 환원되어 유린될 수 있고 그것은 자본주의 화폐로 거래되며 이권 사업으로 커갈 것이다. 자기 몸을 지키는 거부 의사를 표명하기 어려운 취약 입지에 있는 아이들, 약자들이 가장 먼저 범죄의 타겟이 될 것이고 이것은 끊임없이 은폐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려 할 때 우리는 그 카르텔의 침묵의 주변인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상시 감시체계가 작동하고 언론과 우리 모두가 주시해야 하는 지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비단 성범죄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반응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의 어긋남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짓밟는 폭력의 지대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지 않는가? 인간이 인간을 욕망의 대상으로 물화할 때 벌어지는 참혹한 일들은 마땅히 엄벌로 다스려야 하는 범죄다. 


불과 단은 아직 세상을 믿는다. 그들의 믿음에 배신하지 않는 응답이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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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1-29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감사한 리뷰에요, 블랑카님.
언제나처럼 좋고, 감사한 리뷰입니다.

blanca 2021-01-30 08:54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기 전까지는 너무 막연하게 모호하게만 알고 있었더라고요. 놀라웠어요. 나의 20대를 돌이켜 보면 참으로 하기 힘든 행동이었을 텐데... 그리고 그때와 사회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 더 절망을 느낍니다.

수이 2021-01-29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리뷰를 읽어도 읽어야지 읽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기만 했는데 블랑카님 리뷰는 읽으면 정말 지금 당장 읽고 싶어지는 힘이 있어요. 꼭 읽어보겠습니다.

blanca 2021-01-30 08:55   좋아요 0 | URL
수연님, 이 책을 많이 읽어주고 기억해 주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안 그래도 벌써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희석되고 이것은 성범죄자들의 형량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네요.

얄라알라 2021-02-04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아주 오래된 유죄] 초반부 읽고 있는데, 이 책과 같이 읽으면 더욱 좋겠군요!! 표지만 보고 책 소개 제대로 안 봤던 책인데, 리뷰 고맙습니다!

2021-02-04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년 새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경이로운 작품이었다. 자신의 죽음과 실존을 직시하는 게 인간으로서 얼마나 두렵고 거대한 과업인지 적나라하다. 사형 집행을 앞둔 뫼르소가 참회와 사후세계를 설득하려는 사제 앞에서 거기에 반기를 드는 모습이 절정이다. 


나는 유신론자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약하고 죽음을 직시할 수 없기에 유신론자다. 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악행과 이기심이 합리화되는지를 경험하고 보고 들었다. 최근 정인이 사건만 해도 그렇다. 소위 종교의 지도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이 행한 악행과 그것을 알고도 모르고도 방조했던 또 다른 그들의 행태에 분노한다. 신앙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최선의 것이 되자고 기도하는 것을 합리화는게 아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자신들과 피를 나눈 가족 안에서만 유효하고 그들의 부귀영화를 이 생에서 이루기를 기도하며 타인의 삶, 타인의 고통에 눈 감고 때로 온갖 편법, 폭력을 저지르는 행동도 그저 그 종교 안에서 다 사면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자인한 것이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하는 도구로써 신을 동원하는 일은 악행 중의 악행이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지금까지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보던 캐릭터의 전형성과 어긋난다. 정의롭지도 않고 매력적이지도 않고 감정 과잉도 아니다. 오히려 양로원에서 죽은 어머니의 나이도 모르고 장례식에서 돌아와서는 푹 잘 수 있음에 행복을 느끼고 다음날 바로 데이트를 나가는 등 어떻게 보면 소시오패스처럼 보일 지경이다. 심지어 이웃의 치정 사건에 기꺼이 연루되어 대신 복수를 해준다. 그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시로 삶의 자잘한 일상들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표현한다. 독자들은 그를 때로 불가해하다고 황당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는 우리 내면의 가장 꺼내어 놓기 힘든 부분을 직설적으로 대변한다. 사회에서 기대되는 그 모든 어떤 전형들에 철저하게 위배되는 모습.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지만 생의 쾌락

에는 기꺼이 열려 있는 모습. 


거기에는 카뮈가 투영되어 있다. 
















스물두 살에 쓰인 카뮈의 에세이들은 그가 한참 지난 뒤에 다시 출판하며 붙인 서문에서 그는 이 글들이 서툴지만 여기에 다른 어떤 책들보다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다고 얘기한다. 자신의 원천인 "가난과 빛의 세계"가 이 <안과 겉> 속에 있다고 고백한다. 


인생이라는 꿈 속에, 여기 한 사나이가 있어, 죽음의 땅 위에서 자신의 진리를 발견했다가 다시 잃고 나서 전쟁과 아우성, 정의와 사랑의 광란, 그리고 또 고통을 거쳐, 죽음마저 행복한 침묵이 되는 이 평온한 고향으로 마친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안과 겉> 서문


여기에 있는 <아이러니>는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바라본 늙음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담겨 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이 떨어진 그 거리를 뚫고 노년의 고독과 소외, 권태에 대하여 마치 단편소설처럼 노인들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그들 자체가 되어 이미 그 초라하고 외로운 노년과 죽음을 경험한 듯하다. 자신의 역할, 자리, 발언권을 얻지 못하고 고독하게 구석에서 소외되는 그들의 이야기를 스물두 살의 청년이 들려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아랍의 까페에서 카뮈가 회상하는 어머니와의 가난한 유년,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 <긍정과 부정의 사이>는 노벨 문학상을 받는 위대한 소설가로 아들을 키워냈다는 것을 예감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은 빈민가의 한 어머니의 고단한 삶에 대한 아름답고 슬픈 추도사다. 아픈 어머니와 함께 누워 세상에서 격리된 두 사람만의 그 엄청난 고독, 고통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서글프다.


어떤 사나이가 고통을 당하며 거듭되는 불행을 겪는다. 그는 그 불행들을 참고 자기의 운명 속에 자리를 잡는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에 모든 것이 허망해진다.

-알베르 카뮈 <긍정과 부정의 사이>

그 사나이는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한다. 모든 것을 이룬 나이에도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단순함과 투명함만을 받아들이려는 의기도 때로 꺾인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지점을 안다.


표제작인 <안과 겉>에서 카뮈는 우리가 가지고 갈 카뮈의 이야기를 응축하여 표현한다. "인생은 짧은 것이기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큰 용기란 빛을 향하여서도 죽음을 향하여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일이다."라고. 


그것은 여전히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빛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 결국 인간이 평생에 걸쳐 달성해야 하는 과업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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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7 1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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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8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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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7 1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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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8 09: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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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는 날 병원에 갔다  시간이 남아서 이전에도 간 적이 있는 근처의 동네 서점에 갔다. 신혼 때 살던 아파트 입구의 대학가로 빠지는 모퉁이에 있는 아주 작은 서점이다.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는 것도 편리하지만 이때의 문제는 얻어 걸리는 책이 없이 온전히 자신의 취향,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것으로 읽기가 한정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여러 책을 주인장의 선별 하에 배열해 놓은 서점의 방문은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그곳에서 만난 예쁜 책. 책을 사기 위해 무심코 산 책이었는데 젤다에게 한동안 푹 빠졌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 뮤즈. 가십걸.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를 있게 한 여자. 이런 선입견을 일거에 박살내는 책이다. 스콧의 것으로 알려진 작품들 중 몇몇은 엄연히 아내 젤다의 것이었다. 심지어 젤다가 정신병원에서 쓴 자전적인 소설 <왈츠와 함께>는 스콧이 자신이 쓸 내용과 겹친다고 강제로 많은 부분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녀의 정신병은 스콧이 젤다의 글쓰기를 방해하는 하나의 구실이 된다. 


<젤다>에는 젤다가 스콧의 이름으로 혹은 공저로 발표한 단편소설 다섯 편과 아홉 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정교한 플롯이나 대단한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공감각적 심상을 표현한 문장들의 절창은 경이로울 정도다. 또 언뜻언뜻 스콧 피츠제럴드의 문장들과 젤다의 그것이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흡사한 대목들이 있다. 재즈시대의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던 그 낭비의 찰나적 아름다움의 묘사와 그것에서 정작 소외되는 내면의 심연의 대비들이 그러하다. 


스콧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던 시간들을 그린 것만 같은 <남부 아가씨>는 마치 그 둘과 함께 사랑에 빠지고 이별하는 듯한 착각이 드는 읽기를 만드는 감각적인 작품이었다. 


모든 곳에는 그곳만의 시간이 있다. 겨울철 한낮 유리 같은 햇살 아래의 로마, 푸른 거즈 같은 봄날 석양에 덮인 파리, 그리고 뉴욕의 새벽 틈새로 흘러드는 붉은 태양, 따라서 당시의 제퍼슨빌에도, 내 생각에는 지금도, 다른 곳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름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은 길모퉁이 가로등들이 깜빡대고 칙칙대며 켜지는 초여름 밤 여섯 시 반쯤에 시작해서, 공 같은 백열전구들이 나방과 딱정벌레로 까매지고 먼지 자욱한 거리에서 놀던 아이들이 잠자리로 불려 들어갈 때까지 이어졌다. 

-젤라 피츠제럴드 <젤다> 남부 아가씨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에서는 스콧이 젤라의 일기나 편지글을 표절하여 자신의 책을 낸 것을 익살스럽게 지적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참으로 서글프게 느껴진다. 아내의 편지글, 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베껴 써서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세상에 내어놓고 유명세를 누리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 발레,그림, 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그 어느 분야에서도 제대로 된 평가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정신 분열증으로 전기자극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서 대기하다 잠긴 문 안에서 화재로 죽어버려야 했던 젤다의 운명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게이도 여전히 살아 있다. 모든 정처 없는 영혼들 속에. 상류층의 풍속대로 계절을 따라 순례에 나서고, 퀴퀴한 대성당들에서 구릿빛 몸과 여름 해변의 사라진 마법을 찾고, 안정과 성공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 리츠를 지금의 리츠답게 만들고, 대양 횡단 여행을 이브닝드레스와 다이아몬드 팔찌의 비공식적 업무로 만드는 모두의 마음속에.

-젤라 피츠제럴드 <젤다> 오리지널 폴리스 걸



<오리지널 폴리스 걸>의 어느 날 죽음으로 표표히 화려한 사교계에서 퇴장해 버린 게이라는 여자를 얘기하는 화자에는 엄연히 젤다가 있다. 젤다는 게이에 대한 사람들의 표면적 이해와 오해들, 게이의 마음 안에 숨어 있는 욕망과 결핍을 마치 스스로를 변호하듯 이야기한다. 게이가 "언제나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서 낭만이 달아날까 봐 걱정했다."는 이야기는 사실 젤다 자신의 것이다. 대중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소위 그 시대의 셀럽으로 온갖 억측과 가십의 대상이 되었던 젤다의 내면에는 남편의 유명세에 가려 스스로의 재능과 꿈을 실현할 수 없었던 좌절감과 함께 언젠가 반드시 스러지고 말 그 시대의 번영과 낭만의 최첨단을 향유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공존했다.


젤다는 우리에게 찰나처럼 지나가 버리는 그 모든 젊은 한 순간의 아름다움과 낭비와 순수와 열정의 가운데에 거기에 여전히 숨쉬고 있다. 그 모든 오해와 실패와 망각과 죽음도 함께 있는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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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1-06 16: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젤다의 인생을 소설로 쓴 거 읽었어요. 드라마로도 나왔고요. (드라마는 못 봤어요)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고 피츠 제럴드 욕도 했습니다. 특히 ‘밤은 아름다워라‘를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blanca 2021-01-07 09:06   좋아요 1 | URL
아, 어떤 소설일까요? 피츠제럴드는 당시의 시대관을 반영한 나쁜 남자의 전형인 것 같아요. 아내의 재능을 가로채고 질투하고 글쎄, 이게 아직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어렵겠지만요. 저는 젤다가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와 거의 겹치는 존재라고 생각했었어요. 부잣집 딸에 철 없고 향락과 사치만 일삼는. 그런데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거더라고요. 문장력이 아주 탁월해요. 발레도 이십 대에 다시 시작해서 입단 제의까지 받을 정도였다니. 그래도 그녀의 사후 그녀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 다행입니다.

유부만두 2021-01-07 09:20   좋아요 1 | URL
<Z: A Novel of Zelda Fitzgerald> by Therese Anne Fowler 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