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권을 붙들고 나는 울고 말았다. 잘 우는 편은 아닌데 그렇다고 책보고 처음 운 것도 아닌데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나면서 몸을 들썩이며 운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이제 내가 보는 세상은 무언가 아주 많이
달라져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울고 난 다음의 마음은 시원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눈물이 흘러간 자국이 고랑이 되어
스산한 바람이 휙휙 지나가고 있다. 올 겨울은 더 추울 것 같다. 

나는 <태백산맥>의 거대함을 사랑하기보다는, 그 구체성을 사랑한다. 구체성이라는 것은, 삶과 역사에 대한 직접성이다.
이데올로기는 삶에 대한 직접성을 확보함으로써만 역사 앞에서 순결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관념이 아니라  생명의 분비물이다. 생명의 분비물일 때만,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가동시킨다. 우리는 <태백산맥>에서 그렇게 역사를 가동시키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읽는다. - 김 훈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산 속에 남아 끝까지 자신들이 지향했던 이데올로기를 향해 목숨을 던졌던 그들이 떨치고 간 애잔함은 초등학교때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치고 파란 눈의 금발 미군들이 그저 우리나라를 구원하러 온 아주 젠틀하고 샤프한 구원투수 정도로 여겼던 무지함과 더불어 부조화였다. 무언가를 전혀 몰랐지만 이상하게 무언가를 향해 그렇게 전체를 던지고 그 깊은 산 속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던 그들에 대한 아슴프레한 애상은 어린 시절부터|
흐릿하게 나를 감돌았던 것 같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그 애수가 흘러나온 그 지점을 더듬으며 드디어 그 부연 감상의
정체는 제몸을 드러낸다.  

염상진, 하대치, 이태식, 천점바구, 강경애 아무리 그들을 빨갱이라고 욕하고 '무찌르자, 공산당!'을 연호해도 그들은
우리와 피를 섞은 민족이었기 때문에 지향했던 그 이데올로기가 허구였을지라도 그들 자체까지 미워하라는 강요가
어린 가슴에도 슬프게 느껴졌던 것이다. 굶어죽고 얼어죽고 총맞아 죽은 그네들이 그렇게 순정하게 전체를
투신할 수 있었던 그 열정이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느껴진다. 그 지향점이 비록 붕괴되었을지라도.  
무언가를 보고 어딘가를 향해 나의 전체를 던진다는 것은 언제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기
때문에 더 사무치게 아름답다. 하루 세 끼를 먹고 배설하고 몸을 부리는 것이 전체가 되어 버리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너무 스산하지 않은가.

이데올로기의 편벽한 경계 너머로 죄없는 양민들을 몰아넣고 총질해댄 대목에서는 분노가 생목처럼 치밀어 올랐다.
거창양민학살사건 같은 경우는 경악이라는 어휘가 그 감정의 파고를 다 담아낼 수 없음에 절망한다. 공비를 치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배설하고자 피난시켜준다는 거짓말로 한 곳에 죄없는 양민들을 몰아넣고 전원 사살해 버린 사건.
이는 역사를 소수 엘리트가 지배하고 민중은 그저 마구잡이로 눌러 그들이 몰고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고자
했던 천인공노할 작자들의 행태이다. 역사는, 지배자의 웅변이 아니다. 민중의 피가 민중의 숨결이 어루만지며
끌고 가는 생명이다. 

자각하지 못한 자에게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각을 기피하는 자에게 역사는 과거일 뿐이며, 자각한 자에게 역사는
비로소 시간의 단위구분이 필요없는 생명체인 것이다. 역사는 시간도, 사건도, 기록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저 먼 옛날로부터
저 먼 뒷날에 걸쳐져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인 것이다. 올바른 쪽에 서고자 한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으로 엮어진 생명체.
그래서 역사는 관념도, 추상도, 과거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뚜렷한 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크는 것이다.
-10권 294쪽 인용

일제치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인민군 군관이 되어 돌아온 김범준이 벌교읍에서 유일하게 선량한 지주였던 아버지
김사용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제석산 줄기에 숨어 그 수많은 만장들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은 그 하나로 문자들이
하나 하나 웅집되어 슬픈 영상을 만들어 내어 가슴을 쳤다. 숨어서 오열하며 아버지와 작별하는 그 장면에서 이데올로기가
치고 나간 그 공백을 메우는 인간의 정리가 풀어놓은 이야기, 그것은 그 어떤 명분도, 그 어떤 사회적 가치 기준도 떨치고
맨몸으로 나온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다.  

빨치산이 정식 군병력이 아니라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단계에서도 포로교환대상에서도 제외되었고 북에서도 오히려
실패한 투쟁의 주역들로 간주되어 그들은  버려진 채 초라한 최후들을 맞아야 했지만, 목숨을 바쳐 뒷날
역사 속에서 인민해방을 성취한다는 명분밑에 생명을 스스로 내던진 사례들도 많았다는 대목은 비감어린 것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결핍이 일상인 그 숨어사는 투쟁을 행복한 것으로 추억하는 하층민들의 회고는 그네들의 고충이 어떤
것이었는 지를 대변하는 듯해서 속이 아렸다. 그 처절함 속에서도 무시받지 않고 존중받을 수 있었던 그 생활을  아름다운
것으로 회고하는 그들에게 과연 우리는 무엇을 줄 수 있었을까, 이는 현재진행형으로 남겨진 숙제가 아닐런지. 

불사신일 것 같았던 염상진은 적의 포위 속에서 자폭한다. 염. 상. 진.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그의 이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숯장사의 아들로 태어나 사범학교까지 마쳤음에도 당시 그 안정된 직업을 포기하고 끝까지 사회주의 인민 해방이라는 그
이데올로기를 위해 투쟁하다 죽어간 사내. 그의 목은 잘려 악질 빨갱이라고 써붙여져 벌교역 앞에 전시된다. 형과는 완전히 돌아서 철저히 기회주의적으로 살아온 동생 염상구가 달려와 그것을 내리라고 포효하는 장면은 결국 작가가 얘기하고
싶었던 바로 그 얘기가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그것을 뛰어넘을 더 큰 가치가
있을까? 그런 가치가 있다고 믿어 버리는 데에서 모든 사회적 갈등의 불씨는 점화되는 것이다. 그저 다 같은 인간이니까.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중해 주고 배려해 주는 그 기본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무시되었는가. 사랑이라는 더 추상적인 개념으로
확장하지 않더라도 결국 인간이 인간임을 알고 서로를 껴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짜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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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29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권 밖에 못 읽은 저로서는 10권의 저 감정을 오로시 공감할 순 없지만 알 거 같긴 합니다.
태백산맥 문학기행에서 벌교역전에 걸렸던 염.상.진의 머리를 얘기했었지요.
염상구도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했었고...
님이 쓰는 페이퍼에 상품넣기로 해당도서를 넣어주면 좋겠어요. 그 책을 살 때 땡스투하게요.^^

blanca 2009-11-29 20:10   좋아요 0 | URL
주말 잘 보내셨어요? 아, 태백산맥 문학기행 너무너무 가고 싶어요. 관련 페이퍼를 혹시 작성하셨는지 찾아 봐야겠습니다. 아, 글구 페이퍼에 상품넣기를 할 수 있군요. 순오기님은 저에게 알라딘 서점의 등대입니다.^^

순오기 2009-11-30 00:09   좋아요 0 | URL
페이퍼에 상품 넣기를 생활화해 주세요.^^
태백산맥 문학기행은 2007년 5월에 갔는데 디카 화소를 줄이지 않고 찍어서
알라딘에 올리려면 전부 사이즈를 줄여야 해서 여직도 못 올렸어요.ㅜㅜ
문학기행 갔다 와서 포스팅 안 한 것이 한두 개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주말은 방콕하며 읽고 쓰고~ 리뷰대회 마감 앞두고 올인이에요.
9시 40분 닌자 어새신 보고 방금 왔어요~~
으 끔찍한 장면의 연속이라 모자로 가리고 봤어요.ㅜㅜ
 

나는 평생 동안 과분한 영예를 얻었지만 그 어떤 영광보다 나를 흡족하게 해 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립도서관의 관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항상 천국을 도서관과 같은 종류로 상상했습니다.
                                                                                - Jorge Luis Boreges <정혜윤의 침대와 책중 재인용>

 가문의 내력대로 서서히 시력을 잃어 마침내 실명하고 도서관장이 된 그가 상상한 천국에서 단지 책의 겉표지의
 굵은 표제만을 어렴풋이 해독할 수 있었던 그의 이 얘기는 왠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시력을 거의 잃었다는
 어느 개그맨의 안타까운 근황과 더불어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의 기억이 닥치는 대로 읽고 보는 나의 활자중독에
 제동을 건다. 왜냐하면, 나는 늙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노안이 와서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것은
 정말 너무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혹은 라식 부작용으로-..-. 

 무언가를 읽을 수 없고 누군가를 합법적으로 들여다 볼 수 없고, 결코 우연이라도 조우할 턱이 없는 이들이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그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를 더이상 들여다 볼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일 터이다.
 보르헤스처럼 나에게도 천국이란 도서관이다.  읽고 쓰고 또 누군가는 읽어주고 책을 추천해 주고 빌려주고 사주기도 하고,
 그런 세계가 나에게는 전부이고 지향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누군가에게도 일어나고 나와 다른 공간과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이가 발을 내려 놓고 앞으로 또는
 뒤로 허우적대며 걸어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위안이다. 삶과 독서는 어우러지기도 하지만 더로 다른 차원에서
 일으켜 주고 밀어주는 그 맛이 외롭지 않게 해주는 것 같다. 

 결론은 눈을 쉬어야 한다는 것. 더 오래 더 많이 읽으려면. 태백산맥 한 권이 남았다. 그냥 너무 서운해서 그 마지막
 한 권은 천천히 읽어보려 한다. 옆지기가 입이 댓발 나왔다. 자기도 다 이해한다고. 무협지 보던 시절 그 중독성을
 경험해 봤다고, 이러니 그 앞에서 정신무장 교육좀 시키려고 어설픈 사설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코를 골기 시작한다.
 '아리랑'은 천상 내년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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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1-2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din.co.kr/misshide/707100

위의 인용의 인용보니, 이 책 생각나요. 보르헤스에 대한 정말 멋진 책이에요 ^^
리뷰의 링크 두개 있는거도 다 멋진 글. 시간날때 함 보러오세요~

blanca 2009-11-27 11:56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보르헤스 책 정말 읽어보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누군가 추천해 주기를 기다렸죠. 꾸벅~
 

태백산맥 3부 분단과 전쟁 6,7권을 읽었다. 1949년 10월부터 다음에 11월까지 1년을 다루고 있다. 6.25발발 전후 상황에서의
이야기다. 최근까지도 회자되고 있고 그 후속조치가 논란이 되고 있는 '보도연맹' 사건의 묘사는 가슴을 벌렁거리게 한다.
정부주도로(논란이 많은 부분이지만) 반공교화단체를 만들어 좌익색출에 혈안이 되어 심지어 할당량까지 내려
마구잡이로 가입하게 한다음 초기후퇴시에 가입한 이들을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집단학살해 버린 사건. 최소 이십만이
그렇게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니 경악스럽다. 그러니까 쌀주니까 지장찍으라고 하여 엄지에 인주 묻힌 옆집 삼돌이가
갑자기 뒷산에 끌려가더니 다음날 구덩이에 시체로 발견되었다면, 아니, 내 아들이, 남편이, 아버지가 갑자기 그런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예고도 없이 짓밟히고 매장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증이 아닌가.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 

이런 식으로 조정래는 그 학살의 현장에 유독 시간이 잇새로 새어나가지 않게 천천히 다가간다. 독자도 이 대목은
같은 말들이 열 번씩 반복됨에도 건너뛰지 않고 하나 하나의 문자를 잉끄려뜨리듯 눈 속에 박아넣게 된다. 그 만큼
충격적이고 살갗이 아프다. 가장 아픈 지점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았던 그저 그대로 하루하루를
꿰어나갔던 평범한 양민이 역시 왜 그런지,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옆사람과 묶여 총성에 사라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덜 가지고 덜 배우고 그래서 주어진 체제 속에서 비판이나 반항없이 일상을 꾸려나갔다는 이유로. 

동란 초반 북이 우세했을 때 사회주의 해방촌이 몇 달간 건설되어 염상진 일행이 벌교로 귀향하는 대목.
그 혁명이라는 것에. 그 비현실적인 지향에 생명의 줄까지 매달고 어린애 마냥 좋아 날뛰는 그들에게
애달픈 연민이 든다. 결국 그 귀착점이 부패에 의한 자멸이고 돌아 돌아 결국은 다시 자본주의라는 결말이
예고되어 있어 더더욱. 

이런 긴 작품 속에서도 문장 하나 하나에 형형한 불빛을 점화한 작가에게 경탄을 보낸다. 다음 같은 문장. 

묽은 가을안개가 슬픔처럼 들녘 가득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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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 관련 자료를 검색해 보다 그 가문의 내력이 인상 깊었다. 일단 대대로
아주 대단한 권세를 가진 가문이었고, 아버지 홍범식이 금산군수 재직 당시 경술 국치를 비관하여 자결하였고,  
그 자신 독립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월북하여 부수상까지 지냈다고 한다.
한편 그의 손자 홍석중은 그 유명한 <황진이>의 작가로 남한에서 만해문학상까지 수상하였다고 하니 글발도 분명 피를
타고 흐르는 것인가 보다. 월북 관련한 사연이야 민감한 사안이라 가치 판단을 할 대목이 못되고  
그 이전 대단한 가문에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자결한 그의 아버지와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은 그의 전력이, 가진 것과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내던지고 명분 그것도 다수, 대중을 위한 명분에  
투신할 수 있었던 용기가 놀라웠다. 명분이라는 것이 실질적인 이득에 부합될 때야 가장 절묘한 지점이겠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 경우이고 그 지점에서 자신이 가진 것들을 포기하기란 결코 쉬운 걸음이 아니기에. 

경주 최부자는 그 막대한 자금을 끊임없이 독립자금에 부었다고 한다. 또 실지로 12대손 형제 최윤, 최준은 한 명은 친일행각,
다른 한 명은 독립운동을 하는 엇갈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동생 최윤의 친일행각이 형의 독립운동을 위한
위장이었다는 얘기가 잘 알려져 있다니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진부한 용어가 그들 주위에 그대로 얹혀도 괜찮을 것 같다.  

가진 자들이 때로는 그것을 포기하고, 때로는 그것을 나눠주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 그 어떤 이기심에서
발현되는 욕심임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자기가 가진 돈으로 소비욕구를 충족시키고 외국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하는 것이야 그 여건이 되었을 때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바에야 입아프게 욕할 소재로는
힘빠진다. 그렇지만 그래도 절대다수보다 더 나은 여건에서의 인간이 그렇지 못한 다수를 의식하고 때로는 배려하면서
조금 뒤로 물러나 주거나 때로는 앞으로 나와 주는 것이 감정적인 결핍에 후달리는 다수에게 위안이 된다면, 너무 빈약한
요구일까. 솔직히 말하면 덜 화나게 덜 힘빠지게 해달라는 것. 그게 참견쟁이에 욕심쟁이에 열등쟁이의 튀어나온 보기 싫은
입술일지라도.

언론이 가하는 박해는 희생자가 된 사람이 개인적으로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중략> 이러한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치료법은 단 하나, 대중이 관대한 태도를 기르는 것뿐이다. 대중에게 관대한 태도를 기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서,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데서 으뜸가는 즐거움을 찾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러셀의 <행복의 정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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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2부(4,5권) 민중의 불꽃을 마쳤다. 여순사건 이후의 10개월 동안을 그린 것으로
6.25 직전까지 주로 농지개혁 관련된 소작인들의 애환과 분노를 그리고 있다. 춘궁기의 그 처절한 기아와 허덕임,
남의 논을 붙여 먹고 사는 이들의 그 어쩔 수 없는 비굴함, 끊임없이 가진 자들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그 숙명 같은 나날들.
그 추상성을 구체화 하는 날실과 씨실에 매달려 있는 작가의 눈물이 나의 눈자위를 축이는 것 같다.  

일제에서 해방되고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농지개혁 문제였다. 그 농지를 어떻게 몰수하고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문제에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결론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으나 기존의 지주계층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귀결되었으며, 이에도 지주계층들이 불법의 명의 이전을 통한 빼돌리기 등으로 가엾은 소작농들의 꿈은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내일을 꿈꿀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항시 박탈당해 온 그네들의 절망감은 집단 반발로 가시화된다.  

태백산맥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서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군데군데 민족주의자, 주로 극좌나 극우가 아닌 중도 노선을 걷는 인물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역사의 개관은 조정래 자신이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분단의 전후 배경인 듯하다. 물론 작가의 주관이 투영되어 있는 한계는 짚고 넘어가야겠으나, 단순히 북한의 일요일 새벽 삼팔선 남침으로 정의되어 온 6.25 전쟁(나는 이렇게 배웠다)이 얼마나 많은 요인을 품고 있는 지를, 그리고 우리가 왜 아직도 극좌나 극우니 하는 구획 안에
편의대로 사람들을 몰아 넣기를 즐기는 지를 적어도 우리 민족의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게 된다. 요는 친일파의 청산에 관련된
오늘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바로 그 문제에서 출발한다.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다. 미군정의 편의하에 그들은 다시 각종 관직에 등용되었고, 그들의 콤플렉스는 이념 문제를 이용하여 반대파를 처단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조정래는 이념 그 자체에 대한 회의의 가운데에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애정, 민중에 대한 경외를 두고 있다. 공산주의도 또 그것의 반대개념으로 차용되어 이용되어 온 민주주의도 그 이념만으로 인간 세계를 재편하고 행복이라는 지향을 실현할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중과 사랑, 신뢰이다. 그 본질에 대한 간과가 결국 치달은 곳은 반대파에 대한 극도의 증오와 처단이 아닐런지. 

계엄사령관 심재모가 갈렸다. 마을 주민의 대를 잇게 해주려고 해방구에 여자를 들여보내는 것을 용인한 죄목이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부분. 지주들의 악독함에 대한 희화화는 아주 익살스럽다. 소작인들이 머슴방에서 냄새 피워올리며 옛날 야그하는 장면은 백미이다. 나도 그 따땃한 방에서 발냄새 피우며 두부 김치 먹으며 옛날 야그를 듣고 싶다. 

대하소설은 섣불리 잡으면 안될 것 같다. 완전 폐인되는 분위기. 매일 졸립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고 살림이고 모고
다 집어치고 산 속에 들어가 <아리랑>, <한강>, <토지>까지 다 읽고 나오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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