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월드
커비 로자네스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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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판타스틱 월드》



아마 신학기가 시작될 때인가 보다. 인터넷에서 학용품 할인 행사를 살피다가 별 목적도, 이유도 없이 24색 색연필 세트를 하나 주문했다. 받아서는 언제 쓸지도 모른 채 책꽂이에 꽂아두고 구경만 하다가 드디어 ‘컬러링 북’에다 ‘컬러링’이란 걸 하게 되었다.

 

《판타스틱 월드》는 사실적이기 보단 판타지 영화에서 나올 법한 상상력이 풍부한, 초현실주의 그림들처럼 독특하고 직관적인 디자인이라 기대가 컸다. 책을 받아 한 장 한 장 그림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그림 속에 푹 빠져드는 듯 했다. 넓은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동물들과 새, 꽃, 나비 귀여운 미니몬, 환상적이고 힘이 넘치는 그림은 섬세하고 실제로 움직일 듯 보였다. 마치 색만 예쁘게 채우면 마법이 풀릴 것처럼.

 


그리고 드디어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색연필을 앞에 놓고 제일 먼저 컬러링 할 그림을 고르려는데, 너무 난감했다. 모든 도안이 복잡한데다 작고 비슷한 캐릭터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난 색감도 미적 감각도 상상력도 제로 아니던가. 결국 컬러링 전에 일단 인터넷에 접속해서 컬러링은 어떻게 하는 건지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컬러링 팁을 알려주는 동영상과 포스팅들이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렇게 용기를 얻어 그나마 조금 단순해 보이는 그림으로 첫 작품 시도! 아...역시 힘들었다. (해골)


 


두 번째 시도에선 옆에 굴러다니던 싸인펜도 써 보았지만 역시... (이집트)



 

그리고 그 와중에 수채 색연필과 워터 브러쉬라는 걸 알게 돼서 파버 카스텔 36색과 스테들러 워터브러쉬 2개, 고체 물감까지 추가로 구입 후, 또 시도. 전의 컬러링 보다는 나아진 것 같았지만 역시...(새)



이리저리 보다가 컬러링의 작은 팁들을 알게 되면서 압박감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컬러링의 본래 목적을 떠올리며 하루에 조금씩 시도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의 많이 허술하지만 애정 어린 나만의 작품들을 매일매일 조금씩 완성해가고 있다.

 

《판타스틱 월드》컬러링 북은 내게 제대로 된 첫 번째 컬러링 북이다. 그래서 애정도 크고 잘하고픈 마음도 큰데 멋진 작품을 완성하는 결과보단 이리저리 궁리하며 매일매일 조금씩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 같다. 처음에는 빈 공간 가득 빨강, 파랑, 노랑 원색을 가득히 채우는 것 밖에 못했는데, 부족하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즐거움을 느끼며, 도중에 멈추지 않고 한 페이지의 작품 정도는 끝낼 수 있게 되었다.




《판타스틱 월드》의 컬러링은 앞서 말한 대로 작은 캐릭터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색을 채우기 보다는 섹터를 나누어 비슷한 계열의 색감으로 농도를 조절해서 컬러링하면 좋을 것 같다. 색연필만으로도 좋고, 물감이나 수채 색연필 혹은 파스텔을 함께 이용해서 옅은 색으로 바탕색을 칠해 놓고 작은 부분을 채워가는 방법도 좋은 것 같다. 빈 공간에는 바탕색을 칠하거나 노을, 별, 하늘, 구름, 햇살, 물방울 등 원래 도안과 어울릴 법한 것들도 그려주면 작품이 더욱 풍성해 질 것 같다.



 

워낙 솜씨도 감각도 부족하지만 컬러링을 하다보면 얼마나 집중이 잘 되는지 모르겠고 책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느낀다. 왜 사람들이 ‘컬러링’을 ‘힐링’이라고 하는 지 잘 알게 되었다. 나 또한 일상에 조그만 활력과 자신만의 명상이 필요한 독자들에게 컬러링를 권하고 싶고, 이 컬러링 북《판타스틱 월드》또한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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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변호사
존 그리샴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수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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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량 변호사》

 


 

얼마 전에 이민자들을 따라 미국으로 간 고대 신들과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생겨난 현대 신들의 대결을 다룬 <아메리칸 갓>이라는 미국 드라마를 보았는데, 흑인을 나무에 매다는 것을 표현한 장면이 “Strange Fruit”이라는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와 극심한 인종차별로 고통을 받던 흑인들의 역사와 연결이 되면서 예전에 읽었던 <속죄나무>가 새삼 떠올랐었다. 그래서 그런지 ‘존 그리샴’의 신작 소식에 놀라우면서도 몹시 반가웠다.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찾아보니 2014년 <속죄나무> 이후 3년 만이다.

 

생각해 보면 <속죄나무>에서도 일명 불량 변호사가 등장했는데, 그 때의 변호사는 인종차별이 횡횡하던 시대에 흑인의 변호를 맡았기 때문에 불량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지만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변호사는 진짜 불량변호사가 아닌가 하는 정도의 불량이다. 주인공인 변호사가 수임하는 사건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사건이나 돈이 많이 떨어질 것 같은 사건, 그 누구도 맡지 않으려는 누가 봐도 나쁜 놈인 사람의 사건 등이다. 그러다 보니 늘 목숨의 위협에 시달린다. 양쪽에서.

 

범죄자들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거나 생각보다 형이 많이 나오면 변호사를 위협한다. 그 반대로 경찰을 비롯한 법조인들은 범죄자를 변호하는 특히 동료 경찰이나 판사, 변호사를 살해한 자의 변호를 맡는 주인공은 범죄자 보다 더 싫어해서 늘 린치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 속에 살아간다. 그래서 그는 폭발 위협에 당하지 않으려고 사무실도 내지 않으며 밴 한 대를 개조해서 총을 지니고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일하는 게 일상이다. 한 사건에서 인연이 된 덩치 좋고 건장하며 과묵하기 까지 한 비서 겸 법무사 파트너의 비호를 받으며.

 

소설은 억울한 누명을 쓴 한 남성을 변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설은 언 듯 단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몇 가지 사건이 나중에 하나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 중 첫 번째 사건은 이 소설의 주제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초동 수사만 제대로 해도 바로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좁고 패쇠된 지역의 사람들과 경찰은 그냥 범인이면 좋겠다는 사람을 찍어 거짓말과 광기로 살인자로 몰아간다. 거짓 증거와 증인을 만들다가 결국엔 주인공에게 한방 먹는 검사와 판사의 모습을 보면 과연 누가 법을 모독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어지는 에피소드들도 미국 법조계를 통렬히 비판하고 비리와 부조리를 아주 세련되게 풍자하고 있다. 사형수가 대기하는 ‘붐붐룸’에 판사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집행을 앞 둔 범죄자가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 사형을 언도한 판사와 검사의 사무실에 폭발사고가 이어지고 심지어 교도소에 폭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사형수는 펑! 하고 사라진다.

 

가장 재미있고 답답하고 가슴 아픈 에피소드는 바로 3부 ‘전투경찰’이다. 파트너가 주인공에게 “우리 장난감 병사들이 또 가택 침입을 해 난장판을 만들어놓은 것 같습니다, 사상자도 있고요.”(167p)하는 장면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형사 2명이 조용히 현관을 두드리면 될 걸 완전무장한 경찰 특공대가 탱크까지 끌고 한 밤중에 한 가정에 침투하고 총을 난사해 개와 아내를 죽였다. 그러나 경찰을 범죄자로 오인해 총을 쏜 남편이 오히려 범죄자가 된다. 미국은 어떤 이유에서건 경찰을 쏘면 유죄가 되는 모양이다. 결말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주인공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사건들이 이어진다. 자신이 투자하고 뒤를 봐주고 있는 이종 격투기 선수의 심판 폭행 사건, 경찰 간부의 딸 실종에 사건에 관계된 남성의 사건, 이로 인해 그에게 닥친 일생일대의 위기, 연쇄 살인 혹은 납치범과의 두되 싸움, 아들의 양육에 관련된 변호사인 전 아내와의 다툼 등이 엮이기도 하고 꼬이기도 하며 아주 흥미롭게 이어진다.

 

이 소설은 굉장히 코믹하고 흥미롭고 적절한 긴장감까지 유지하고 있다. 아마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왜 그런 인간쓰레기들의 변호를 할 수 있느냐?’ 고. 아마 이런 질문을 한번 정도는 해보지 않았을까? 누가 들어도 아는 로펌에서 온 국민의 지탄을 받는 사람을 변호하고 결국 집행유예나 무혐의로 풀려나게 해 줄 때.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한다.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누구나 변호를 받을 권리는 있으니까.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주인공의 조력자들, 일명 내부 고발 자들은 그 조직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인데 그 이유는 누구보다 능력이 있고 공정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변호사는 ‘불량’ 변호사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이는 너무나 부당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을 정의를 원하지만 정의란 ‘그때그때 우리가 정의로 여기는 것’이다. (p15). ‘진실’ 따위가 아니라.

 

소설을 읽다보면 대체 누가, 무엇이 불량인지 헛갈린다. 돈만 밝히고 형량 거래나 하는 주인공이 불량인지, 광기에 사로잡혀 언론에 놀아나는 사람들이 불량인지, 자신의 영달만 챙기는 정치인들이 불량인지, 시민을 대리해서 뽑아 놓은 사람들이 만드는 법 조항이 불량인지, 약자를 찾아 괴롭히는 이 사회가 불량인지. 무거운 주제를 너무나 경쾌하게 그려낸 작가의 능력에 새삼 놀랐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소설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재미있기까지 하니까. 역시 존 그리샴이다. 무조건 읽으시길. 정말 후회 없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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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의 문제 진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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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의 문제》

 


 

<나를 아는 남자>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작가 ‘도진기’와 그가 창조해 낸 매력적인 캐릭터 ‘백수 탐정 진구’. 진구 시리즈는 <순서의 문제>를 시작으로 <나를 아는 남자><가족의 탄생>에 이어 가장 최근 2017년 6월에 발표된 <모래바람>으로 이어진다. 이런 작품은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는 게 재미있는데 어쩌다 보니 순서와 상관없이 시리즈를 다 찾아 읽게 되었다. 그만큼 기대가 큰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순서의 문제>는 백수탐정 진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그가 해결하는 자잘한 사건들을 모아놓은 ‘사건 집’ 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단편들이지만 이야기는 이어지고 주인공도 같다. 앞으로도 이어질 진구의 활약에 서막을 여는 작품들이라고나 할까? 진구가 셜록홈즈 라면 왓슨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해미’ 와 만나게 된 과정과 그 둘의 캐릭터가 잘 표현되어있다.

 

소설 속 해미는 진구와 소개팅으로 만나게 되었고 진구가 해미의 큰 아버지에게 닥친 위기를 해결해 주면서 둘은 사귀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해미는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진구를 닦달하고 사건을 물어다 주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찰떡궁합 케미를 자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살짝 언급된 베일에 싸인 진구 과거의 비밀은 앞서 말한 <모래바람>에서 본격적으로 그려지게 된다. 난 이미 그의 과거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진구와 해미의 만남과 관계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소설은 총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순서의 문제>는 좁은 고시원에서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사는 진구가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특유의 촉으로 냄새를 맡은 사건을 담고 있다. 대리운전 손님인 남자가 진구에게 자신이 준 휴대전화로 강원도에 가서 자신에게 전화를 하고 오면 50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진구는 이상한 제안에서 범죄의 냄새를 맡고 과감하게 조사를 시작한다. 어떻게 되느냐고? 이 사건에서 진구는 아파트 한 채를 살 만큼의 수입을 얻게 된다. 멋진 해결!

 

여기서 진구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야 한다. 그는 착하고 선한 얼굴에 미끈하게 잘 빠진 훈남이다. 그런 그가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 경우는 단 한가지다. 돈! 물론 사건 자체에 흥미를 느껴야 하겠지만 그 역시도 어떤 대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외의 시간엔 늘 집에서 이렇다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린다. 물론 여기에서 어김없이 해미가 등장한다. 그녀는 지하철에서 본 한 이상한 남자의 이야기로 진구의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하지만 <대모산은 너무 멀다> 그건 해미의 이야기가 재밌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돈’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랄까?

 

그리고 하나 더. 돈 냄새가 나지 않더라도 그가 움직이는 경우는 해미의 강요에 의해 혹은 해미의 안전을 위해 해결해야 될 일이 있을 때이다.<신(新)노란방의 비밀><뮤즈의 계시> 게다가 해미가 물어오는 사건은 자기 가족, 먼 친척의 일이기도 해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다.<티켓다방의 죽음><환기통> 그리고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해미와 함께 해외여행을 가기로 한 늦잠을 자, 안 그래도 까칠한 여친의 화를 돋우어 위기에 봉착한 진구가 깜찍한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한 사건은 아마도 그 어떤 사건보다도 긴박한(?) 사건이 아니었을까.<막간: 마추피추의 꿈>

 

그는 법을 이용하거나 살짝 법을 비껴 자신의 이익과 실리를 취한다. 정의감 때문에 사건을 맡거나 해결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냥 백수다 ‘어둠의 변호사 고진’처럼 변호사도 아니고 형사도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인터넷 기사를 뒤져 사건을 파악하고, 유족인 척 연기를 하거나 때론 과감하게 경찰의 신분증을 위조하거나 언젠가 배운 문 따는 기술로 가택 침입을 하기도 하는 아주 재미난 인물이다.

 

<뮤즈의 계시>에선 도진기 작가의 또 다른 캐릭터, 앞서 언급하기도 한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잠깐 등장해서 그의 활약에 양념을 치기도 한다. 그 둘은 앞으로 장편 <가족의 탄생>에서 대결 아닌 대결을 벌이게 되고, ‘이탁오 박사’와 함께 맞서게 되는 등 꽤 괜찮은 만남을 이어가게 된다.

 

이렇게 보니 난 미래에서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진구야, 나 미래에서 왔어. 넌 앞으로 멋진 활약을 하게 될 거야. 그리고 고진이란 변호사 봤지? 좀 기분 나쁘게 생긴 남자 말야. 그 사람 잘 봐둬. 너랑 아주 재미난 관계가 될 거거든.’ 다음 작품이 정말로 기다려진다. 이번엔 가장 최근 작 <악마의 증명>을 읽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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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웬디 워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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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가 있다면 미련 없이 싹싹 지우고픈 힘든 일을 한 번씩은 겪어봤을 것이다. 아픈 이별일 수도 있고 끔찍한 사고 일 수도, 혹은 그 대상이 미운 사람일 수도 있고. 그럴 수 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비참하게 날 버린 옛 사랑도 지우고, 부당하게 당했던 아픈 일들도 지울 수 가 있다는데 말이다.

 

이 소설은 이런 바람을 실제로 행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마 이런 일을 겪은 부모라면 누구나 상상해 보지 않았을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 제니가 몹쓸 짓을 당했다. 안 그래도 사춘기에 위태위태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리라. 어리지만 어엿하게 여성으로 성장하고 있는 제니는 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함께한 조금은 아슬아슬한 위험이 도사린 파티에 참석했다. 딸은 평소 좋아하던 남학생에게 퇴짜를 맞고 술에 취한 채 집 뒤편 숲으로 가다 얼굴에 가면을 뒤집어 쓴 남자에게 1시간이 넘도록 유린을 당했다.

 

제니의 부모는 제니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를 최소화 한다는 ‘기억 망각’ 치료를 받게 한다. 이 치료는 ‘벤자트랄’이라는 약물을 이용해 단기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분비되는 단백질을 차단해 시냅스의 작동을 막아 단기 기억을 폐기 시키는 치료법이다.(p33) 이때까지는 아무 문제없었다. 제니는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기억하지 못했고 강간을 당할 때 입었던 외상을 치료한 후 큰 무리 없이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잘 지내나 싶었던 제니는 8개월 후 자살을 시도 한다. 그리고 제니와 그 부모는 이 소설의 화자인 정신과 의사 ‘앨런 포레스터’ 박사에게 기억을 찾아달라는 제의를 하게 된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포레스터 박사이다. 사건이 일어난 페어뷰의 유일한 개업의. 게다가 그는 제니와 같은 기억 망각 치료의 후유증을 가진 ‘숀 로건’ 이라는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제니의 고통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에 있었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사고 당시 느꼈던 고통, 두려움, 공포 등의 정서와 감정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제니는 기억과 맞닿지 않은, 불쑥불쑥 찾아오는 정체모를 공포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자살을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박사는 제니를 치료하며 제니의 부모와의 상담 치료도 진행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부부의 비밀.

 

소설은 제니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박사가 행한 흥미로운 치료과정, 숀 로건의 사연과 제니와의 교감, 제니의 가족에 얽힌 은밀한 비밀에다가 제니의 사건에 연루된 박사의 아들, 아버지와 의사의 윤리 사이에 방황하는 박사의 모습, 범인을 찾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제니 아버지의 모습 등이 얽혀 독자를 끝 모를 곳으로 데리고 가다가 그런 추악한 비밀들이 만나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작가의 솜씨에 많이 놀랐다. 결말은 만족스러웠지만 그 과정은 그리 매끄럽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여러 역할 속에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교묘하게 상황을 만들어 가는 박사의 모습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범인인 만든 제니 등의 흉터, 그리고 그 흉터가 가리키는 사건의 진실. 마지막에 밝힌 박사의 변명 아닌 변명은, 독자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소설은 여러 가지 생각의 관점을 제시한다. 부모가 부모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자녀가 뇌의 성장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미성년자라고 해서, 자녀의 선택과 의지에 상관없는 결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성인이고 부모라면 그들이 내리는 결정은 늘 옳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 그리고 망각이 신의 선물이라곤 하지만 진정한 치유는 고통에 맞서 극복하는 것이지 않을지.

 

인간의 기억이란 것이 얼마나 약한가. 몇 달 전에 본 영화의 결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같은 일을 두고도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모양으로 기억하는 추억이란 것들, 누구에겐 즐거움 이었지만 누구에겐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을 많은 일들, 가해자와 피해자의 엇갈린 증언들. 조금의 암시만으로도 기억을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다지만 아픈 기억은 왜 그렇게 잊히지 않는 건지. 기억의 허술함에 가족이란 관계, 부모의 역할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 의미 있는 시간을 남겨준《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제니 가족에게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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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 진구 시리즈 4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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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

 


 

‘도진기’ 작가의 신작이 나왔는데 그것도 백수 탐정 진구 시리즈라는 소식에 고민하지 않고 서점에 들렀다. ‘도진기’ 작가는 전직 판사로 현재는 변호사로 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가다. 미스터리,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아주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판사를 그만 두었다는 얘기에 ‘이젠 작품 활동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쓸 것’이라며 두 손 들어 반기던 팬 들 중 한명이 바로 나였다.

 

‘도진기’ 작가의 작품은 ‘백수 탐정 진구’ 시리즈와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가 있는데 나는 어딘가 암울하고 시니컬한 고진보다는 그나마 좀 더 밝은 느낌에 엉뚱하고 돈을 좀 밝히는 진구를 살짝, 아주 조금 더 좋아한다. 게다가 진구 옆에는 진구 바라기, 엉뚱 발랄 구김살 없는 여자 친구 해미가 있으니까. 둘이 아웅다웅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사건 자체를 해결하는 것만큼이나 재미있다.

 

진구 시리즈는 <순서의 문제>, <나를 아는 남자>, <가족의 탄생>, <모래 바람>이 있는데 나는 ‘도진기’라는 작가를 <나를 아는 남자>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 진구에게 더 애정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스케일로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 <붉은 집 살인사건>,<라트라비아타의 초상>,<정신자살>,<유다의 별>,<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가 압도적이다.

 

또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진구와 고진이 한 번씩 만나게도 하고 가공할 만한 악의 화신 ‘이탁오’ 박사와의 대결을 그리기도 하며 작품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작가는 단편집이나 직업을 살려 법률 교양서를 내기도 했지만 앞서 언급한 것 때문에 장편을 좋아한다. 꾸준히 활동해서 이야기를 이어가 주기를 바랄 뿐이다.

 

《모래바람》는 진구의 이야기다. 그는 왜 그 똑똑한 머리로 이렇다 할 직업도 가지지 않고 백수로 살아가며 탐정 일도 딱히 열정적으로 임하지 않는지, 대체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인지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시점은 <가족의 탄생> 이후 한 반 년 정도가 흐른 후이다.

 

한 대형 투자회자의 회장에게 아들의 애인이자 자신의 비서인 여자의 뒷조사를 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진구. 그러나 그 여자가 자신의 초, 중, 고 동창이며 자신의 거의 유일했던 친구였던 ‘연부’임을 알고 거절한다. 진구 바라기인 해미는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낌새를 채고 진구에게 둘 사이를 추궁하지만 대답을 회피하는 진구를 의심하며 그 둘의 과거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둘의 비밀이 과거 중학교 때 역사학자였던 아버지들을 따라나선 실크로드 탐사 길에 있음을 눈치 채고 당시 이야기를 담은 책을 구해 읽기 시작한 해미. 그 책 속에 그들의 과거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연부와 진구의 아버지는 같은 역사학자로써 경쟁 관계에 있었고 연부와 진구는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갑내기 친구로 아버지들의 영향으로 경쟁 관계가 되었다. 그러던 그들이 함께 실크로드 탐사를 갔다가 지독한 모래 폭풍 속에서 나란히 아버지를 잃고 말았고 그 후 둘은 자연스럽게 멀어진 것이다.

 

진구는 그럼 어떤 일을 의뢰받게 된 걸까? 과거의 일이 현재의 일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소설 속에선 연부와 회장, 회장 아들이 결혼 문제로 갈등관계로 그려지고 그런 와중에 회장이 살해당하고 만다. 그 사건에서 어떤 틈을 엿본 진구는 본능적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어 회장의 부인과 거래를 하려고 한다. 진구는 연부와 어떤 관계이며 회장의 살인 사건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걸까?

 

이번 작품은 사건자체보다는 진구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 해주는 데 비중이 더 크다. 결국 과거의 진구와 현재의 진구가 어떠했고 또 어떻게 달라졌는지, 왜 그가 ‘그’가 되었는지. 소설은 액자 식 구성으로 과거 실크로드 탐사의 이야기가 거의 같은 비중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굳이 따지자면 여러 건의 사건이 등장하는 샘이다. 결국 아버지 둘을 삼킨 ‘모래바람’이 현재의 진구와 연부를 만들었다고나 할까? 탐사 이야기는 무척 생동감이 있고 묘사가 현실적이라 책장은 순식간에 넘어갔다.

 

작가는 역시 사소한 것 하나하나 공들여 포석을 놓고 어디 한번 맞혀보라고 독자들을 도발한다. 현재의 이야기는 쉽게 풀렸지만 사막에서의 일은 조금 어려웠고 사건보단 진구와 연부의 처지에 안쓰러움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이제 진구의 과거도 밝혔으니 다음 작품에는 어떤 사건으로 돌아올지 너무나 기대 된다. 그 전에 아직 읽지 못한 소설집 <순서의 문제>,와 <악마의 증명>을 읽어보련다.

 

 [추리미스터리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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