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알고 있는 古典의 힘 - 이미 알고 있던, 미처 알지 못한 고전의 재해석!
민경천 지음 / 북메이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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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알고 있는 고전의 힘

 

 

 

요즘 들어 고전을 해석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얼마 전에 만화로 된 한비자를 읽어보기도 했는데 깊이 있는 탐구와는 거리가 멀고, 학비걱정, 취업걱정 등 자신들에게 지워진 인생의 무게에 지친 현대인들의 요구에 맞추어 간단하고 쉬운, 그런 스타일의 책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일게다.

 

 

이 책 ‘1%만 알고 있는 고전의 힘또한 요즘 핫 이슈가 되고 있는 긍정힐링에 초점을 맞추고, 간단하고 짧고, 읽기 쉽게 만든 고전의 압축판이다. 출 퇴근길에 가방에서 꺼내 읽기 쉽고, 어렵지 않으니 머리가 아프지도 않고, 누구나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한다고 말하는 고전을 정리해 놓았으니 바쁜 현대인들에겐 참으로 안성맞춤인 책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한계를 가지는 듯도 하다. 우리가 아는 공자, 맹자, 노자, 장자의 진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탓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노자를 좋아해서 도덕경을 포함한 그의 사상과 관련된 책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이 책은 노자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성인들과 그들의 사상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책이다. 그들이 말하고 그들의 가르침의 구절을 가져 오기는 했지만 저자가 해석해 놓은 말들은 너무나 뻔하고 너무나 피상적인 말들이다.

 

 

다시 말하면 고전을 재해석했다기 보다는 저자가 하고픈 말들을 위해 고전의 구절을 인용했다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알맞은 표현이 아닐까 한다. 저자가 전해 주려는 말도 깊이나 진정성이 느껴지기 보다는, 너무나 상투적이고 너무나 뻔한 말들이다. 마치 어른이 학생들에게 전하는 뻔한 말들, 훈계 진정성이 결여된 위로 같은.

 

 

책의 두께, 손에 편하게 잡힐 듯한 사이즈와 안에 담긴 내용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곁에 두고두고 읽는 그런 책이기 보단, 출근길이나 잠깐씩 시간이 날 때 펼쳐보는 책이기에 적당할 것 같다. 큰 기대는 않는 것이 좋겠고, 머리 아프지 않게 쉽고 편하게 읽기에 어울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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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 북미 최후의 인디언이 천 년을 넘어 전한 마지막 지혜
위베르 망시옹.스테파니 벨랑제 지음, 권지현 옮김 / 흐름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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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인디언 '크리족' 이 주는 교훈 [윤성]

 

 

 

 

 

 

 

우리는 왜 죽을 때까지 일 해야 하는 걸까? 이 지구라는 땅에 언제부터 주인이 생기기 시작했을까? 그 주인이란 사람들은 거기에다 값을 매기고 누구는 사고 파는 것을 반복해 돈을 벌고 누구는 한 몸 뉘일 땅이 없이 가난을 벗어 날수 없는 것일까? 왜 우리는 도시에 번식하는 고양이들이 그저 시끄럽고 기분 나쁘단 이유 하나만으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걸까?

 


아마 이 책 속에 나오는 인디언 크리족이 본다면 그런 우리를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할 것이다. 이 책 속에서 나오는 크리족의 삶을 들여다 보며 '내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었다' 고 한다면 참으로 뻔한 말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을 보며 느낀 것은 그런 뻔한 표현으로는 다 담아 낼수 없을 만큼의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인디언의 복음'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며 그들이 가진 인생관, 철학, 생명을 대하는 태도, 시간의 개념, 소유, 가족의 개념등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은 후 내 삶이 조금은 변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개념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다른 시각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그런 신비로운 경험은 잊혀지고 나는 또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갔다는 것을 이 책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을 읽으며 상기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북미 최후의 인디언 '크리족'의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 인생관, 시간관념, 가족, 사냥, 사물과 생명을 대하는 태도, 종교 등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그들의 삶을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진정한 가르침을 일깨워 주는 책이다.

 

 


놀랍게도 우리의 상고사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 한민족과 인디언들이 한 가족 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한 그런 주장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이 가진 금기와, 종교, 생활 습관이나 생명을 대하는 태도, 가치관등이 지금은 잊혀지고  우리의 정신세계와 아주 많이 닮아 있으며, 그들의 주름진 얼굴이나 인상, 절구, 북이나 소고, 우리의 무당과 비슷한 미타요(샤먼)의 역할 등을 보면 때론 소름끼치도록 비슷하단 것을 알게 된다. 또한 그들의 시간개념과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은 우리의 불교, 즉 동양 사상과도 많이 닿아 있다. 그것은 서양의 기독교적인 정서나 가치관과는 참으로 다른 것이다.

 


이 책에서 느꼈던 그들의 삶과 우리의 잊혀진 유산들을 매치 시키며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득한 옛날 우리의 선조들과 그들은 한 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계절에 따라 함께 이동하며 함께 사냥하고 사랑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상을 하며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니 이 책은 더 진한 느낌으로 다가온 것 같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이 책의 끝장을 넘기고 있었으니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그들의 '시간의 개념' 이었다. 현대인이 느끼는 시간의 개념은 일직선 (단선적) 이다. 시작과 끝이 있고, 전과 후가 있으며, 진보의 개념을 포함한다. 그것은 물질적인 개념에서 현재는 늘 미래보다 부족하단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살 수밖에 없지만, 늘 미래를 꿈꾼다. 일직선인 시간 속에서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가 확실한데 규정할 수 없는 현재는 늘 불만 투성이 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직선의 세계, 미지의 세계, 즉 불안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족의 시간은 '주기적'이다. 그들은 시간을 돌고도는 원으로 인식한다. 의식(儀式)은 절기에 따라 반복되며, 삶 자체가 스스로 순환하며 돌고 돈다. 동물의 이동 또한 생식과 마찬가지고 주기적이며, 늘 제자리로 돌아가는 부동의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자연의 싸이클에 완벽하게 일치되는 삶을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을 떠올렸다. 계절이 반복되듯 삶의 모습도 반복이 되고 죽음 조차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그들의 무심한 삶에 그런 엄청한 의미가 담겨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불가의 가르침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한 현대인은 어떤 일이 반드시 다른 무언가를 초래한다고 보는 '인과적 사고'를 하고 있으나, 크리족은 '공시(共示)적 사고를 한다고 한다. 공시적 사고는 함께 일어나는 일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사고 방식이다. 행동 하나하나가 전체 환경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고, 세상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나 역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생물에 국한 되지 않는 사고 방식이다. 죽었든 살았든 존중하여야 하며 모든것을 균형, 관계, 조화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또한 불가의 인연의 개념과 다르지 않고, 중국 고대 철학과도 연관이 되어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지,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에서 그들의 모든 삶이 이루어 진다. 부모는 아이들을 낳고 자연속에서 키우고, 그 부모는 늙어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도 그의 자녀들이 삶을 이어가며, 그 부모가 죽은 곳에서 다시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들의 사냥은 동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육체적 행위로, 즐거움을 위해 사냥을 하지만, 그들은 살기위해 사냥을 하고 동물들은 그들을 경외하는 인간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다.

 


그들의 종교는 어떠한가? 그들에겐 일정한 양식의 '종교' 는 없을 지라도 이 세상을 움직이는 존재 있다고 믿고 순수하게 그 믿음을 지킨다. 그러기에 그들은 미래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지금 소유를 바라지 않고, 미래를 위해 지금 비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을 철저히 현재를 살고 자신을 보살펴 주는 존재를 믿는다. '선교사' 들이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흥청망청 산다고 비난하며, 미래를 위해 아끼고 비축하라는 가르침을 먼저 주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디언들의 삶은 우리에게 던져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현대의 삶을 모두 버리고 원시의 세계로 돌아가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살아왔고 문명을 이루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무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며, 이 지구의 주인 이라는 생각만은 버려야만 하는 석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함께 구성하는 존재이며, 다른 존재들과 함께 공생하여야 하는 존재 일 것이다. 지구 한쪽에선 모든 것이 남아 돌아 문제 이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너무나 부족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좀더 쉽게, 좀더 많이, 오직 나만이' 이런 탐욕의 시각을 버리지 않는 이상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왜 태어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조차 모르게 살다가 죽을 땐 어김없이 한줌의 재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말이다.  

 


우울이 유행처럼 번진다. 우리는 가진것은 많을 지라도 진정한 행복을 가지지는 못한 것 같다. 매일 매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늘고, 이혼률이 늘고,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노숙자는 늘어만 간다. 좀 더 뺏고, 좀더 가지고, 남들보다 좀더 높은 곳에 가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삶은 진정한 행복으로 나를 이끌어 주지 못한 다는 것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인디언의 삶을 파괴한 것은 우리가 가진 마지막 아름다움과 '인간적' 임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 아닐런지. 그들의 교훈이라도 남아 우리를 이렇게 밝혀주니 정말로 다행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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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온도 - 조진국 산문집
조진국 지음 / 해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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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온도 –‘청춘을 위한 송가(頌歌)-

 

 

약속도 없고 다짐도 없는 시간을 등에 업고 자존심이 더 부서지고, 해지고, 슬퍼질 때까지 다시 글을 쓸 것이다. 다시 대본을 쓸 것이다. 다시 아이디어를 떠 올릴 것이다-거북이를 위하여/ p214 –

 

 

 

 

 

 저자의 글에서 난 나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아무리 서글픈 삶이라도 삐에로는 서커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다. 쇼는 어김없이 시작되고 관객은 쇼가 시작되기에 앞서 삐에로의 우스꽝 스러운 모습을 보며 서서히 기대감을 키우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삐에로의 역할이고, 그러기에 삐에로의 모습은 차라리 슬픔이다.

 

 

 

 

 

나도 처음 알았다. 청춘(靑春) 이란 말의 의미가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서 만물이 푸르게 된 봄철을 말한다는 걸. 그런 사람과 그런 시절을 뜻한 다는 걸. 우리는 지나고 나서야 그 시절의 푸르름을 떠올리고, 그 풋풋한 시절이 다시 오지 못한 다는 슬픈 사실을 알아차린다. 나의 청춘은 어땠나. 지금인가? 아직 오지 않았나?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기엔 난 이미 늘어져가는 피부탄력과 몹쓸 체력을 한탄하는 아줌마가 되었다.

 

 

 

세상은 요즘 들어 유난히 청춘을 언급한다. 슬퍼서 청춘이고, 아파서 청춘이고, 마음만은 청춘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진짜 청춘들의 고통에는 그 어떤 해결책도 내 놓지 못한다. 이건 차라리 기만이고 사기다. 그 어떤 해결책도 내줄 수 없기에 결국은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그것이 바로 청춘이라고 규정해 버린 듯한, 기성세대의 책임회피에다 그걸 팔아먹기까지 하니 상술까지 더 얹어진 기만이고 사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저자는 이미 40대에 들어섰지만 참으로 젊어 보인다. 게다가 나보다도 나이가 많지만 아직도 청춘인 것 같다. 그의 고민과, 그의 아픔과, 그의 방황은 아직도 20대의 그것처럼 싱싱하게 살아있다.

 

 

 

 아직 젊고도 젊은 나이인 내가 이미 놓아버린 그런 것들을 저자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사랑의 아픔이나, 하룻밤 함께 보낼 여인을 찾는 처절한 외로움이나, 좁은 방 한 칸 안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연들과, 그 사연들과 함께 떠오르는 수 많은 청춘의 노래들. 그의 마음에는 나에게는 없는 그런 서슬 퍼런 슬픔이 살아있고, 아직도 잠 못 드는 밤의 낭만이 살아있다.

 

 

외로움의 온도 속에는 참으로 많은 청춘들이 등장한다. 그와 친하게 지내는 동생들과 선배, 친구들, 그가 만난 여인들과, 그 사람들이 겪은 일 속에 등장하는 또 많은 청춘들. 그들은 갈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몰라 고민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며, 돈이 주지 못하는 행복을 그리워한다. 저자 또한 그 속에서 꿈을 향해 달려간다. 부끄러웠던 과거의 가난과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부모님과 뒤늦게 화해를 한다. 그런 아픔을 겪고 그는 지금의 안정과 성찰과 성장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늘 그 시절의 청춘이다. 그는 언제나 삐에로일 것이고, 거북이처럼 다시 차가운 바닷속으로 기꺼이 들어갈 것이다. 나는 한동안 잃어버렸던 그런 감정을 그의 글로부터 얻을 수가 있었다. 그 누구도 청춘의 고민을 대신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그런 청춘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가 없다. 그러니 그런 시절은 곧 지나간다고, 아파서 청춘이라고, 지나면 다 추억이라고, 너는 성장하고 더 나아질 거라고 거짓말의 주사를 놓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런 강렬한 파도를 거치며 30대가 되었다. 나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바보같이 살아온 나의 20, 늘 아프기만 하고 늘 방황했던 나의 청춘, 빛나던 20대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노래로 나의 아픔을 치유했다. 이제는 그 시절의 나를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 책 속에 나오는 많은 청춘들의 노래처럼 난 나의 노래를 불렀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젠 나를 용서하고 새로운 노래를 부를 용기가 생긴 것이다.

 

 

 

 

 

거북이가 알을 낳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다시 차가운 바다로 돌아가듯, 저자 또한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이고 나 또한 그러할 것이다. 거친 인생의 바다에 난 또 주인공이 아닌 삐에로의 역을 맡아야 할 지라도 난 나의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노래를 부르고, 또 다른 눈물을 흘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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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의 신
린지 페이 지음, 안재권 옮김 / 문학수첩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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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의 신

 

 

 


시대는 바야흐로 1800년대 중반. 무법천지 였던 뉴욕 (Gotham: 뉴욕시의 속칭)에 경찰국이 출범했다. 화재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우리의 주인공인 티머시 와일드는 뉴욕 맨하튼의 한 술집에서 바텐더로 10년이나 일해온 남자다. 말하는 입술만 보고 어떤 말인지 알아낼 수있고, 뒷골목의 은어도 좀 할 줄 알며, 섬세하고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매력적인 남자. 그의 형 발렌타인 와일드에 의해 우여곡절 끝에 경찰이 된 그가, 한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면서 진정한 경찰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등장 인물을 얼마 되지 않는다. 사건의 키가 되는 버드, 주인공의 형 발렌타인 와일드, 상사 맛셀국장 , 동료 피스트, 아이들을 주로 돌보는 의사 폴즈그레이브 박사, 불법으로 아이들에게 몸파는 일을 시키는 실키마시, 그가 사랑하는 여인 머시 언더힐, 그녀의 아버지 언더힐 목사, 주인공의 집 주인이 주요 인물들이다.

 


어느 날 밤, 피투성이가 된 잠옷을 입고 거리에 뛰쳐나온 '버드' 라는 몸 파는 일을 하던 거짓말 장이 꼬마 여자아이를 만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그 후 거리의 쓰레기 통에서 몸이 십자모양으로 갈라지고 비장이 사라진 소년의 시체가 발견되고, 버드와 그 소년의 이야기가 연결되면서 소설은 전개가 되고 도시와 떨어진 한적한 곳에 20여구나 되는 그와 같은 아이들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의문은 점점 커져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점은 참으로 묘사가 치밀하다는 것이었다. 첫 도입부는 강렬했다. 피투성이가된 아이를 만나는 장면. 그러나 그 후 시점이 바뀌어 주인공이 술집에서 일하는 장면의 묘사, 그가 화재로 다치고, 그 것을 계기로 사이가 좋지 않던 형에 의해 경찰이 되기까지 몇십페이지나 할애한 그 묘사는 정말이지 읽기가 불편할 만큼 치밀했다.

 


책의 중간중간 한 페이지의 반은 그냥 읽지 않고 건너 뛰어도 될 그런 치밀한 묘사는 이런 추리, 스릴러 물에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사건이 빨리 전개가 되고 손에 땀을 쥐게하는 전개를 바랐다면 이 책은 정말로 인내심을 요하는 책일 터이다. 마치 잘 만들어진 추리, 스릴러 영화를 소설로 옮긴듯한 느낌이랄까. 만일 영화였다면 한 컷에 담을 만한 장면도 그 화면을 떠오르도록 글로 쓰자면 장황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니까 말이다.

 


다른 한가지 특징은 만일 그 시대의 사회상, 거리의 모습, 의상등을 모른다면 읽고 이해하기에 참 어려울 듯 했단 것이다. 우리와는 문화가 많이 다르기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래서 읽기가 더 장황하고 힘들지 않았나 했다. 그래서 책을 읽다 말고 소설의 시대상을 담고 있는 영화를 검색해 보았고, 그런 노력을 기울인 이후엔 소설에 좀더 집중할 수 있었다. 심리묘사에 대한 부분은 참 좋았던 부분이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 영혼을 불어넣고, 그렇게 행동하게 된 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적당했다고 본다. 버드의 모습도 참으로 귀여웠다.

 


추리와 스릴러 미스테리등의 특성상 많은 내용을 말 할 순없지만 이 책을 읽을 계획이라면 먼저 그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사진이나 영화등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이제껏 보아왔던 그런 잔인하고 자극적인 내용의 소설은 아니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우리가 발견 할 수있는 것은, 지금도 여전한 빈부격차, 사람의 목숨따윈 별로 중요하지 않는 악당들, 종교 갈등, 집단 이기심, 그런 것들을 해결하기는 커녕 부추기고 교묘히 이용하는 정치꾼들의 모습 등이 아닐까 한다. 강렬한 반전등도 기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호기심을 자극하는 적당한 수준의 소설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아마 많은 극찬을 받은 것은 문화의 차이와, 무엇을 기대하는 가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는 시각의 차이가 아닌가 한다. 읽을 때는 조금 답답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주인공의 매력이 더 생각나는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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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를 찾아서 1 : 고조선과 대마도의 진실 환단고기를 찾아서 1
신용우 지음 / 작가와비평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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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를 찾아서1-고조선과 대마도의 진실

 


 

 

 

 

 


현재도 위서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인 ‘환단고기’ 가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면 어떻게 될까. 과연 식민사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의 역사학계는 인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직도 독도문제와 위안부 문제로 삐걱거리는 일본과의 관계, 우리의 역사를 중국 변방의 역사로 만들어 버리고 아직도 왜곡을 서슴지 않고 있는 동북공정의 주체인 중국과의 관계는 제 조정 될 수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증거는 찾을 수가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그런 고민을 한번에 해결해줄 실마리를 제시하며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위에 언급한 책이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가 있는 책을 발견한 유병권 역사학자가 발표를 앞두고 일본 극우파에 의해 살해되고, 그 증거를 함께 찾은 주인공인 태영광박사(내과의사)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그 일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중간중간 우리역사가 왜곡되게 된 원인과 현실의 모순과 답답함을 밝히는 것과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기위해 빼돌린 51종 20여 만권의 행방, 이렇게 3가지의 큰 줄기가 이 소설을 엮어 가고 있는 동력이다.

 


그렇다면 먼저 이 소설의 가장 큰 주제인 ‘환단고기’가 어떤 책인지에 대해 아는 것이 먼저겠다. 환단고기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계연수가 편찬했다는 한국상고사를 서술한 역사책으로 《삼성기 상(上) 하(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각기 다른 시대에 쓰여 졌다는 5권 (4종류)의 책을 엮은 것인데, 단군 이전의 환웅이 다스리던 배달국과 그 전신인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까지의 우리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으며, 계연수의 제자인 이유립에 의해 1979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1911년 계연수가 필사한 환단고기 원문이 사라진 점, 계연수의 사후 70년 뒤 제자 이유립에 의해 세상에 공개된 의문점 등으로 사료로서 인정 받지 못하고 있고, 그 의문점에 반하는 증거, 즉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도 많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역사서이다.

 

 

 

 

<사진출처 http://songkye.blog.me/30141053331 >

 


이 소설에서는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를 환단고기에서 인용한 책들이 실재로 존재하고있다는 가정하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숨겨져 있는 그 책을 어렵사리 찾았으나 다시 빼앗기고, 빼앗긴 그 책은 알고 보니 일제가 침탈해간 51종 20여 만권의 역사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주인공인 태영광이 직접 일본으로가 그 책을 찾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소설에 담긴 큰 뜻에 비해 이 소설의 내용은 너무나 아쉬운 것 투성이다. 저자가 주장하고픈 주제를 억지로 주장하기 위한 엉성한 이야기 전개와 구성, 등장인물들의 현실감 없는 묘사, 개연성이 부족한 주인공들의 행동,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 등 굳이 일부러 찾지 않아도 눈에 쉽게 띌 만큼 수두룩하다.

 

 

오히려 소설전개부분이 아니라 중간에 삽입된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게 된 역사적 설명이 소설자체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게 되었는지, 일본과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가 역사를 왜 공부하여야 하고 올바른 역사관이 왜 중요한지를 알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소설의 형태를 빌려야 했을까.

 

 

저자의 문장력은 너무나 아쉽게도 소설 한편을 지루하지 않게 독자들을 몰입할 수 있게 할 만큼의 깊이는 아니라고 감히 말 할 수밖에 없다. 읽으면서 특히 굳이 넣지 않아도 될, 정말로 쌩뚱 맞은, 정말로 3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조악한 묘사의 주인공들의 정사신이나, 후반부에 사건을 급하게 해결하려는 듯한 어이없는 일본 여성과의 만남, 결국 해결하지 못해 죽음으로 밖에 마무리 할 수 없는 결말… 너무도 아쉬운 것 투성이다.

 

 

차라리 이 책이 읽기 쉬운 역사서의 형태로 나왔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한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게 된 이야기나, 덛붙여 수양대군에 의해 우리 손으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한 사실을 설명할 땐 정말로 몰입도가 좋았으니까 말이다. 역사서의 형태를 띈 교양서적의 좋은 예들은 얼마든지 많다. 이덕일, 윤내현, 성삼제 교수등이 이미 그런 훌륭한 일들을 해오고 있지 않은가. 나 또한 그분들의 책을 읽으며 학교에서 획일적으로 배운 식민사학의 역사교육의 폐해를 절실히 느끼며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관심 없는 일반인 들에게 좀더 가까이 가기 위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차용한 저자의 노력에는 정말로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너무나 훌륭한 소설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왠만한 필력이 아니고서야 수준 높은 독자들의 눈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 정도의 내용이라면 많은 독자들이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 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게 생겼다. 특히 주인공 들의 정사씬은 정말 어이가 없을 만큼 조악했다. 그 쓸데 없는 부분을 왜 넣었는지 작가 뿐만 아니라 출판부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훌륭한 주제를 가지고 왜 3류 소설로 만들어 버렸는지 너무나 너무나 아쉽다.

 

 

현재는 이명박 대통령 정권의 말기다. 바로 며칠 전 이명박 대통령이 몰래 통과 시키려고 한 ‘한일 군사협정’ 이 도마 위에 올랐다. 아직도 종군위안부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일부 단체는 학생들에게 일제 강점이 현대화를 가져왔다고 하고,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전락시켰다. 올바른 역사관이 정립되지 않은 정치인은 나라를 팔아 넘길 수도 있다는 것을, 이완용 이후로 발전된 현재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처럼 강렬한 교훈을 주는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그들 변방의 역사로 만들어 버리고 버젓이 웅녀상을 세우고 있는데도 우리 정부는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를 제대로 정립하는 노력은 하지 않고, 뿌리를 식민사관에 두고 있는 우리의 역사학계도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만 바쁜 이런 현실에서 이런 소설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다. 그러나 그 노력만으로 소설의 가치가 인정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감히 신용우 저자에게 바란다. 소설의 형식이 아닌 역사서의 형식으로 다시 책을 내 주기를 바란다. 당당하게 정면으로 부딪혀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주 많이 아쉽고 허점투성이인 소설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고 바란다. 어설픈 문장과 내용에 실망하더라도 욕을 하면서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고 바란다.

 

 

그 만큼 내가 보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며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외치는 단순한 반응 외에, 아리랑을 중국이 빼앗아 갔다고 그냥 화내는 거 외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국가 차원에서 이 일을 해결 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역사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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