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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력
이츠키 히로유키 지음, 채숙향 옮김 / 지식여행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타력
우리 사회가 많은 상처를 받았고 그만큼 지쳤다는 것을 나는 요즘 ‘힐링’ 과 ‘긍정’ 이란 말의 범람에서 느끼고 있다. 치유와 명상, 긍정의 메신저들이 방송가와 출판계에서 대세로 불리고 있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SNS 상에서 그런 분들의 말씀에 영향을 받고 멘티가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나 또한 한동안 그런 물결에 휩쓸려 힘든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대책없는 긍정의 말들이 간혹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실재로 난 10년도 넘는 시간동안 '잘 될거야' 란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아주 가까운 분으로 부터. 그러나 그 시간이 5년이 되고 10년이 되자 이제 그 말이 너무나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 잘 된다. 다 괜찮다 이런 말은 언뜻 듣기엔 힘이 되었지만 다 잘될거란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몇번이나 넘어졌고, 몇번이나 배신을 당하고 또 사기를 당하며 그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나아진 것도 없이 그냥그냥 버텨오고 있는 것이다.
한 술 더떠 요즘은 아예 강요를 하는 분위기다. '긍정'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기도, 우울의 어두움을 퍼뜨리는 사람이 되기도 한 것같다. 다 이루어지니 의심 말고 기도하라는 책에서도,무작정 도전하라는 책도, 또 그런 말들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다들 대책이 없는 격려였다. 또한 그것은 '네가 지금 잘 안되는 것은 믿음을 갖지 못하는 너의 책임' 이란 말인 것 같아, 오히려 나를 더 자책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 것이다.
그럼 정말 그런 긍정은 나의 삶을 다르게 해 줄까? 10년 넘는 시간 노력하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 앞에서, 그래도 믿고 기도하라는 그 지인분의 말씀에서 난 부족해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나의 이 무기력함과 우울함은 바로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일까? 이런 의문으로 난 이 책을 읽었다.
'타력' 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다. 저자는 이 의문의 답으로 바로 '타력'이란 말을 건네준다. 타력이란 자력에 대칭이 되는 말이다. 어원은 '타력본원(他力本願)'즉 하는 대로 내맡김, 내 소관이 아니다 란 말로 일본 정토교의 시조 호넨, 진종의 확립자 신란과 렌뇨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도 한 말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있고, 내 소관에 벗어난 그런 부분이 있다는 그런 정도가 되겠다.
우리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할 수있는 것은 거의 없다.우리는 태어나면서 부터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내 노력 여하에 따라 좀더 건강하게 살아 갈 수 있을 지언정 병과 늙음은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당연한 것을 받아 들이는 것 만으로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저자는 조용하게 말 해준다.
또한 이 책은 철저하게 '일본인에 의해','일본인을 위해' 씌여진 책이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한국에서 태어난 저자는 일본이 패전하면서 졸지에 난민이 되어 겨우겨우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 와중에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일본은 지지 않을 거라는 무모한 믿음이 산산히 부서진 아버지를 보며 삶의 아이러니를 느낀듯 하다.
대 지진으로 수 많은 국민들이 죽고, 사이비 종교 교주가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는 모습을 본 일본인, 전후에 오로지 성장만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 최대한 자신의 마음과 표정을 숨기고 살아왔던 일본인, 성장에 걸맞지 않은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해왔던 일본인, 가난함을 성실하지 못함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일본인, 무언가 부족함이 느껴지면 집단으로 따돌림을 행하는 일본인, 그런 세월을 살아오다 보니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하지 못해 투명인간이 되는 두려움을 살인으로 푸는 일본인.
그런 지치고 상처받은 일본인에게 과거의 웃음과 모습을 되 찾자고 하며 손을 내미는 것이다. 너의 탓이 아니다. 우리는 한계를 가진 인간이다. 쓰러진 자에게 자꾸 일어나라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함께 손을 잡고 울어주자. 무조건 잘 될거다, 무조건 괜찮다고 하는 것도 일어날 힘이 있는 사람에게 가능성이 있는 말이지 더이상 힘이 없는 사람에겐 그저 손을 잡고 함께 울어 주는 것이 오히려 더 힘이 된다. 스스로 애쓰지 말고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힘에 맞겨보자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얼마전 '철학을 권하다' 라는 책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읽은 적이있다. 포로로 잡힌 군인이 모진 고문과 고통 속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무조건 적인 희망, 긍정이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임에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고통이 오래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괴롭힐 수는 있겠으나 나의 정신까지는 어찌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의 정신을 지키는 것 밖에 없다.' 이런 가르침은 고대 그리스 철학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이고 그의 영향을 받은 심리학의 인지행동치료의 기본 가정이다. 이런 자세는 오히려 자신를 강하게 한다.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인정, 오히려 그런 것에서 에너지가 솟아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주는 교훈이 아닐까 한다.
일본인을 위해 쓴 글이라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단점이 드러나고 무한한 경쟁에 휘말려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위기에 몰린 우리를 위해서도 참으로 의미있는 주장이 아닌가 한다. 총 100가지의 작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는 일본이 처한 문제점들과 위기가 잔잔한 필체로 적혀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타력의 힘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이제껏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진종의 확립자 '렌뇨'를 재조명하고 있다. 책의 후반기는 거의 렌뇨가 현대인에게 주는 교훈으로 할애하고 있다.
저자의 잔잔한 글을 읽어가다보면 진짜 일본인, 일본과도 만날 수 있고, 불가의 가르침, 앞서 말한 그리스의 고대철학, 현대의 심리학 인지행동치료와도 만날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앞으로 나아가는 것, 경쟁에서 이기는 것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던 그런 꿈의 세계는 오지 않을 지 모른다. 내가 내 존재를 인정받으려면 나 아닌 다른사람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우리를 감싸는 거대한 빛의 존재를 알기 위해선 짙은 그림자가 필요하듯이 내가 놓친 것, 내가 하찮게 느낀 것들, 웃음 뒤에 감춰진 깊은 슬픔과 우울의 강을 이제 인정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타력은 내가 가졌던 의문에 답을 주었다. 그가 느꼈던 패전의 경험 그 전에 우리 선조들이 느꼈을 고통을 생각하면 너무나 '일본' 스러운 이 책이 아주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무한한 '대책없는 긍정'의 파도 속에서 진정한 '체념' 의 개념을 일깨워준 이 책에 감사함을 느낀다. 아직도 희망과 긍정에 힘을 얻는 사람이 많을 것이지만 나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분명 이 책이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