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vador Dali (1904.5.11~1989.1.23)
살바도르 달리
에스파냐의 대표적 초현실파 화가. 피게라스 출생. 살바도르 달리는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카탈로니아 북부의 작은 마을 피게라스에서 공증인의 둘 때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돈 살바도르 달리)는 예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집안도 중류층에 속하는 비교적 좋은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달리가 태어나기 3년 전에 이미 죽은 그의 형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자신에게서 죽은 형의 모습을 찾으려는 데에 강한 반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후일 그는"나는 결코 죽은 형은 아니며 살아 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항시 증명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너의 형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귀일 하였노라)고 들려주곤 함으로써 어린 달리를 신비의 혼란 속에 빠지게 하였으며 그의 극히 내성적이며 수줍던 성격이 때로 격렬한 폭발을 보인 것도 이 사실과의 깊은 관련을 보인다. 후일 달리는 종교화에 대해 대단한 집착을 보이는데 그의 대표작 (십자가의 요한의 그리스도)는 이때부터 받은 자극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보겠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하얀 암벽이라든가 심연의 바다 등에 경이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1922년 마드리드 미술 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교의 수업에는 만족치 않고 인상파, 점묘파를 거쳐, 미래파, 피카소의 큐비즘 등에 관심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에는 이탈리아의 형이상 회화의 화가 키리코를 알고 나서 몹시 흥분하기도 했는데 그의 초현실적 성향은 그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것이다.


14세 때부터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과격한 성품 때문에 1926년 퇴학당했다. 그는 보기 드문 조숙아로 일찍이 인상파나 점묘파·미래파의 특질을 터득하고 입체파나 형이상회화파 등의 감화를 받으며 작풍편력(作風遍歷)을 하였다.

강한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적 의식적 태도가 농후하며, 젊어서 받은 프로이트의 영향이 일생을 지배했다.그후 1925년 피카소의 신고적주의에 대한 관심을 가져 실험을 거듭했지만 엄격한 기하학에 이내 싫증을 느끼고 만다. 그 밖에도 베르메르, 벨라스케스, 라파엘로에까지 관심을 보여 달리의 고전화에 대한 집착은 평생 그의 생애를 통해 일관되어진다.


미술 학교 재학 시절 반정부 활동함으로 잠시 감옥에 갇힌 바 있는 그는 차츰 무정부적인 타락된 생활이 심화되어 그로 인해 1926년 퇴학 처분을 받고 귀향케 되었다. 1925년에서 1927년에 걸쳐 마드리드 및 바르셀로나에서 발표된 그림들은 다소 모순된 양식의 그림들이지만 매우 면밀하게 그려져있다. 1927년 그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해가 되었다. 파리로 나온 그는 피카소를 만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그의 그림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놀라운 변모를 보인다.

이 시절 그는 피카소의 영향을 직접 받으면서도 그에 구애되지 않았고 미로와의 접촉을 갖고 초현실주의 화가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드디어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약을 하기 시작한다. 그 외에도 큐비즘, 미래파, 형이상 회화파 등에서 얻은 영향이 그나름의 독특한 회화로 이르는 바탕이 된다.

1929년 카다퀘스의 집에는 많은 손님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들 중 러시아 태생 폴 엘뤼아르의 부인 엘레나(갈라)에게서 운명적인 만남을 직감하고 그녀에게 짙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파리에서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그들을 카다퀘스에 방문토록 초청한 것이다. 두 번째의 만나마에서 달리는 돌발적인 웃음과 이상한 행동 등으로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녀 역시 그러한 그의 열정에 못이겨 그에게 이끌리고 만다. 극도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려던 그는 (그녀야말로 나를 치유해 줄 것이다.)라고 믿었으며 그녀에게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들은 1929년 말 파리에서의 작품전이 열리는 도중, 홀연히 그곳을 잠적, 사랑의 도피 여행을 더나 갚은 사랑에 빠져들었으며, 달리는 그때 요람 속의 기쁨을 재음미하기에 이른다. 한때, 달리는 기억의 근원은 태아 적부터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 듯 그 요람의 세계를, (거기는 정말 성스러웠다. 그야말로 천국이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폐쇄된 그 호텔의 방 속에서 갈라와의 생활을 통해 태아의 아늑한 꿈을 만끽한 것이다.
그들은 곧 카다퀘스로 돌아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리가크 항에 조그만 방을 구해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 타인의 아내를 가로챈 아들의 부도덕에 노한 아버지는 결국 그에게 절연장을 보내기에 이르렀고 달라는 그 충격으로 삭발하나 채, 먹다 남은 섬게 껍질과 함께 그 깍아버린 머리카락을 흙 속에 묻고 말았다. 그 매장은 곧 그를 낳고 기를 아버지와 가정이었으며 결국 그는 혈연을 잃은 대신 보다 정신적이며 숙명적인 갈라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녀로 친해 참다운 달리로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달리의 수많은 작품 속에는 갈라가 출현케 되고 모든 여성의 모습이 갈라로 변신되었다. 심지어 성모 마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도 갈라의 형상으로 대신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노이로제에서 고통받는 그를 구하고 치유한 것이 갈라였기 때문이다. 아마 수많은 화가들 중 달리만큼 여자의 내조와 영향을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또하나 달라의 예술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그가 성장한 카다퀘스의 해안과 리가트 항이다. 태양이 불타고 바닷물이 섬, 바위들 사이로 넘나드는 곳에서 변덕스로 그의 기분을 억제하였던 것이다. 그의 리가트 하아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불모의 고장이요, 아침은 난폭하고 거친 명랑함을, 저녁은 기분나쁜 비애를 가끔 느끼게 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특이한 환경이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황량한 땅이지만 깊숙히 위치한 마치 자궁 안과 같은 평안함을 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금세기의 가장 특이하며 괴이한 화가로서 그의 작품 속에는 현대의 작품들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회의, 압도하는 무의식의 위력 등이 내재되어 있다. 즉, 그의 작품 속에는 통속적 경험과 상식으로써는 전혀 감지키 어려운 기묘한 것들로써 이루어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초현실의 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한 그들 두고 어떤 비평가들은 병적인 그림, 또는 광인의 그림이라고들 평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과 개성이 무의식적인 내용물의 홍수 속에 빠져들어 잠적하는 현상은 마치 정신 분열의 증세와도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그림을 두고 광인의 그림이라고 평할 수 있었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달리 자신의 언급처럼 광인과 자신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광인이라면 그의 작품에서 어떤 공감을 느끼겠는가? 만일 그것을 느낀다면 "그것 역시 모순이 아니겠는가?"라는 문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식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때 그의 손이 광인의 손이라 친다면 그의 괴이성을 체외하고라도 극사실적인 기법과 기발한 짜임새의 구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달리는 철저한 자기 본위의 독특한 화가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현대인이 지닌 갖가지 고민, 불안, 모순, 공포, 절망 등이 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1928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나 시인들과 교유하였다. 이듬해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이때 A.브르통에 의해 정식으로 이 파의 일원으로 인정되었다.

그 스스로 ‘편집광적·비판적 방법’이라 부른 그의 창작수법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환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하나의 대상을 2중 3중으로 다른 이미지로 보는 병적인 착각을 이용했다. 즉 말이 여인의 나체로 보인다거나 하나의 풍경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거나 하는 중복상을 교묘하게 화면에 표현했다. 그는 <그림이란 많은 비합리적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천연색 사진이다>라고 정의하고, 이상한 환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현대는 인간의 내적 상상력을 제어하고 인간의 추억이나 향수, 신앙, 전설, 영웅, 꿈들을 과감히 매도한다. 달리는 그러한 상상력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편집광적 비판 방법을 연마하여 자신만의 자유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




그의 의도적인 괴이한 언행과 용모 속에는 비상함과 지속성이 내재되어 있고 그의 주위를 맴돌며 그를 고뇌 속에 빠뜨렸던 수수께끼를 탐구하려는 끊임없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다. 달리의 회화성은 같은 초현실주의자들과 비교할 때 혼란성을 띠고 있으나, 마그리트와 같은 분열성은 보이지 않는다. 또 그가 초자연의 세계를 여실하게 묘사하였고 그 대부분이 그로테스크하며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중세의 화가 보시와 곧잘 비교되며, 달리를 현대의 보시라고 단순화해서 말하는 것에 관해 달리 자신은, (그것은 자기 개성에 관한 가장 나쁜 오해 중의 하나이다. 보시의 괴물은 안개 쌓인 유럽의 숲에 의한 것이며 중세에 대한 심한 소화불의 증세를 나타내고 있다.그러나, 보시의 그림은 형언하기 어려우리만치 세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달리의 그림은 두 세가지의 요소만으로도 그의 환상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환상 미술의 전례를 살펴보면 보시라던가 브뤼겔, 블레이크, 르동, 앵소르 등이 있지만 그들에 비해 달리는 보다 처절하고 본능적이며 노출증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다. 그에게서는 파라노이아와 페티시즘이 특질로 나타나며, 내부와 외부를 전도시켜 마치 내장을 드러내 보이는 듯한 독특한 사실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이를테면 밤같이 어두운 세계를 밝은 양광 아래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달리가 (비합리성에 도전)하게 된 것은 서구의 각국이 정치적 긴장의 팽배와 대립에 의해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1930년대였다.



즉, 유럽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개혁과 부정, 정치적으로는 혁신과 혁명을, 예술적으로는 재래의 예술 형식을 파괴, 부정하는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무렵이었다. 이러한 양상 아래 전개되는 제 미술 운동에 스페인 태생의 작가들이 많은 활약을 보인다. 이를테면 유기적 환상의 세계를 표줄한 건축가 가우디라든가 20세기의 조형 혁명으로 불리우는 큐비즘의 대표적 화가 피카소라든가 그리스 등이 있으며 초현실주의의 미로, 달리 등이 나타난 것이다.

달리는 회화의 목적은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내적세계와 외적세계 사이의 육체적 장벽을 동시에 제거하고 , 현실과 비현실 및 명상과 행위를 서로합하여 혼합되어전생명을 지배하는 초현실성을 창조하는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스페인은 유럽 중에서도 거구에 속하지 아니하며 역사적으로 동방 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인종이나 정치적인 면으로도 파악키 힘든 복합적 요소를 지닌 나라인 것이다. 달리의 말을 빌면 (프랑스은 가장 지성이 풍부하고 합리적인 나라인데 반해 스페인은 가장 비합리적인 또한 가장 신비스러운 나라)라고 한다. 그러한 환경 요인이 그들을 서양 회화의 위기적 상황에서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게 한 것으로 보여진다.

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로 복귀하려는 욕구가 커졌으며, 초현실주의 화가 모임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도 원자과학이나 가톨릭의 신비성을 추구하여 왕성한 제작을 하였다. 40년 미국에 귀화하여 왕성한 제작활동을 하였다. 달리는 (천재의 일기(1964))에서 (미치광이인 채하며 피타코라스적 정확성을 가춘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말하고 잇다. 전후의 달리는 겨우 합리와 비합리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기에 이른다.
작품으로 《피는 꿀보다 달콤하다(1928)》 《기억의 잔재(1931)》 《불타는 기린(1935)》 《레다 아토미카》 등이 있다. L.브뉴엘과 함께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 《황금시대(1931)》 등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작가 연보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

1904년 5월 11일, 프랑스 국경에 가까운 스페인 동북부 지방 피게라스에서 출생. 부친은 공중인.

1908년(4세) 누이동생 아나 마리아 출생.

1913년(9세) 이때부터 유화 등을 그리기 시작.

1917년(13세) 이때부터 19년 까지 피게라스 미술 학교 교사인 호앙 누네스의 지도를 받음. 19세기 스페인 풍속화가 들의 그림을 사랑했고, 또한 인상파, 점묘파의 영향을 받음.

1920년(16세) 이즈음 보나르와, 이탈리아의 미래파화가 카리엘 등의 영향을 병행해서 받음.

1921년(17세) 마드리드 국립 미술 학교에 입학. 프라도 미술관에 자주 다님. 입체파의 영항을 받아, 다다 운동의 주변에 있는 여러 그룹과 광범위하게 접촉, 로루카, 보튀엘과 알게 되었고 이후 친교를 두텁게 함.

1922년(18세)10월, 바르셀로나의 화랑에서 개최한 학생 그룹전에 회화 8점을 출품.

1923년(19세) 이때 이탈리아의 형이상파 , 크레코, 카롤로 카르라의 영향을 받음.

1924년(20세) 학생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1년간 정학 처분을 받았고, 5월에는 반정부 활동 혐의로 단기가 투옥됨.

1925년(21세) 마드리드 미술 학교에 복학. 11월 바로셀로나에서 최초의 개인전. 유망한 신인이란 평을 받음. 이 때부터 27년경까지 헤르에늬 사실주의, 피카소의 신고전주의 큐비즘의 영향을 다분히 받는 작품을 제작.

1926년(22세) 10월. 미술사의 답안 제출을 거부, 마드리드 미술 학교에서 제적됨. 연말에서 연초까지 달마화랑에서 두 번 째 개인전.

1927년(23세) 겨울, 파리로 가서 피카소를 만남. (달빛 비친 정물), (피는 꿀보다 달콤하다) 등 달리의 독창성을 나타낸 최초의 작품을 제작. 학생 시절부터 이때까지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열심히 탐독, 그 영향이 일생을 재배한다.

1928년(24세) 짧은 기간 동안 에른스트, 알프, 미로의 영향을 받음. 10 -12월, 피츠버그에서 열린 제 27회 카네기 국제 미술전에 (빵 광주리), (아나마리아)등을 출품하여 미국과의 교류가 열린다. 겨울에서 다음 해 까지 파리 체재. 미로를 통해 초현실주의 그룹의 시인과 화가들을 소개 받음.

1929년(25세) 여름, 달리 숙소에 마그리드 부처, 폴 엘뤼아르, 갈라 부인 등이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달리와 다랄 부인은 사랑에 빠진다. 친구 믜뉘엘과 공도으로 전위 영화(앙타르치아)를 제작, 3개월동안 파리에서 상연. 10월 20일-12월 5일. 코망 화랑에서 파리에서의 첫개인전을 개최했는데, 프루동이 카탈로그에서 문을 씀. 정식으로 초현실주의의 일원이 됨.

1930년 (26세) (보이는 女人)을 출판, 사랑에 빠진 갈라 부인에게 헌증. (편집광적ㆍ비판적)방법을 제창. 이 방법에 의해 윌리엄 텔의 전설을 테마로 한 일련의 작품 제작에 착수. 브뉘엘과 공동으로 영화 (근전시대)를 제작.
1931년(27세) (기억의 영속)등 편집광적인 시각이 나타나는 작품을 그리기 시작함. 33년까지의 파리의 피엘 콜화랑에서 매년 개인전

1932년(28세) 편집광적. 비판적 방법에 의해 밀레의 만동을 테마로 한 일년의 작품을 제작. 영화 (빠빠우오)에 대본을 씀.

1933년(29세) 11월 21일-12월 12일, 뉴욕에서 미국 최초의 개인전 개최. 변형된 두부에 특별한 관심을 표시한 작품들을 제작 (미노트르)지, (카이에 달르)지의 기고가가 됨.

1934년(30세) 로트레아몽의 시집에 삽화를 그림. 스페인 로사스 해안을 주제로 한 일련의 해안 풍경을 그리기 시작. 런던에서의 첫 개인전 개최. 프루동과의 불화로 인해 초현실주의 운동 그룹에서 제명됨.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

1935년(31세) 비합리성 정복출판. 편집광적. 피판적 방법을 정의.

1936년(32세) 런던 에드워드 템즈 저택의 벽화 제작. (서랍이 달린 미로의 비너스), 내란의 예람 제작. 7월, 스페인 내란 발발.

1937년(33세) 내란을 피해 이 해부터 39년까지 세 차레 이탈리아 여행. 르네상스 회화 내지는 바로크 회화의 거장들 작품에 새로운 평가를 하게 됨.

1938년(34세) 7월, 런던에서 프로이트와 만남. 겨울에서 다음 해까지 뉴욕 체재.

1939년(35세) 뉴욕 만국 박람회에 출품할 (비너스의 꿈)을 제작. (상상력의 독립선언)을 출판. 발레 (바카날)대본을 쓰고 무대 장치를 디자인.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파리를 떠나 다음 해까지 아르카숑에서 거주.

1940년(36세)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스페인을 거쳐 8월에 미국 도착.
48년까지 캘리포니아 주에서 삶.

1941년(37세) 발레(미로) 대본을 쓰고 무대 장치를 디자인. 11월 19일에서 다음 해 1월 11일까지 뉴욕 근대 미술관서 첫 대회고전. 이 회고전은 43년까지 미국 8개 도시에서 순회 개최됨.

1942년(38세) (자전 달리의 숨겨진 생애) 출판.

1943년(39세) 뉴욕에서 초상화전.

1944년(40세) (소설 숨겨진 얼굴)출판. 발레 (미친 톨리스탕), (감상적 회화)의 대본을 쓰고 무대 장치. 모리스 산토스의 환상적 기억 삽화를 그림.

1945년(41세) 뉴욕에서 개인전. 원자 및 원재 내부의 세계에 관심을 표시한 작품을 제시. (호메로스 숭배)그림. 모리스 산토스의 (미로)에 삽화를 그림.

1947년(43세)비키니 원폭 실험과 관련이 있는 (3개의 스핑크스)제작/

1948년(44세) 리가트 항으로 돌아와 고전주의적 그리고 종교적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함.

1949년(45세) 칼라를 모델로 (포르트 리가트의 )를그려 교황 피오 12세에게 보임.

1950년(46세) (리가트의 항도의 성모)를 대작으로 다시 그려, 11월에서 51년 1월까지 열린 뉴욕 개인전에 출품.

1951년(47세)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 제작, 파리에서 (신비선언)를 출판. 원자핵 신비주의의 대강을 제시.

1952년(48세) 단테의 (신곡) 삽화 102점을 제작. (시립자적 성모승천), (원자핵의 십자가)등을 제작.

1954년(50세) 로마에서 대회고전. 이 회고전은 밀라노 등에 순회 전시. (초입방체적 인체)제작

1955년(51세) (최후의 만찬)제작. 솔본느 대학에서 (편집광적 ㆍ비판적 방법의 현상학적 측면)에 대해 강연.

1956년(52세) 7월부터 9월가지 벨기에에서 초기 작품을 많이 포함시킨 대회고전, (근대예술론)출판.

1574년(53세) (tossel에고엘 그랑드)제작.

1958년(54세) 브류셀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에 (샌디에고 엘 그랑드)출품. 탄화주의라 불리느 방법으로 석판화집(돈키호테)를 제작. 파리에서 출판.

1960년(56세) (셰계공의회)제작.

1962년(58세) (데트앙의 대회전) 제작.

1963년(59세) (밀레 만종의 비극적 신화)출판. 뉴욕에서 전람회.

1964년(60세) 9월에서 11월까지 동경, 명길옥, 경도에서 회고전. (천재의 일기)출간

1965년(61세) 다음해까지 뉴욕에서 대회고전.

1967년(63세) (다랭이) 완성.

1968년(64세) 5월 혁명에 대하여 (나의 문화적 혁명)이라 제한 팜플렛 출판

1969년(65세) 프랑스 국영 철도를 위한 포스터 제작.

1970년(66세) 피게라스에 달리 미술관을 세우기 위한 재단이 창설됨. (달리에 의한 달리)집필. 11월 21일에서 다음해 1월10일까지 로레스탐 보이만스 미술관에서 유럽 최초의 중요한 회고전 개최.

1971년(67세) 3월 7일, 그린란드에 달리 미술관 건립. 피게라스의 달리 미술관 천장화를 제작. (달리 만세)출판.

1972년(68세) 4월에서 5월까지 뉴욕에서 최초의 3차원 작품의 전람회 개최.

1973년(69세) (불사 의 10의 처리법) 출판.

1979년(75세) 11월 80년 4월의 파리 퐁피두 미술과네서 대회고전. 화

1980년(76세) 미국의 Art News 지에 클레 특집 주관.

1982년(78세) 파리에서 작품 활동. 주로 판화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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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

에곤 쉴레는 1890년 6월 12일 다뉴브 강변의 튤린에서 태어났다. 비엔나 근방에 있는 이 소도시의 역장이 쉴레의 아버지 였다. 쉴레의 드로잉 감각은 일찍부터 현저하여, 그는 소년기의 대부분을 연필보 그리는 일로 보내었다. 쉴레가 14살 되던해 매독으로 사망한 쉴레의 아버지는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한 처벌로써 쉴레의 소묘들을 태워버렸다. 16살 때, 쉴레는 대리인이던 삼촌과 무관심한 어머니가 내커하지 않는 가운데 비엔나 미술학교로 보내졌다.

1년 후인 1907년, 그의 드로잉을 당시 이름높던 선배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에 보일 기회가 주어졌다. 클림트는 소년의 비상한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 했다. 클림트의 아르 누보 양식과 소재의 영향은 1909년까지의 쉴레의 작품에서 현저히 보인다. 스승의 우아하고 장식적인 형상을 떠나서, 쉴레 자신의 표현적인 스타일이 나타나기 시작한것은 1910년 경에 이르러서였다.

이 시점은 가족으로부터 경제적 후원이 끊어져 고립감과 자기도취적 자기 연민에 빠져있던 때로서, 쉴레는 일련의 심리적, 성적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111년, 조용히 작품제작에 몰두할 은둔처를 찾아, 비엔나를 떠나 모친의 고향인 보헤미아 크라마우로 이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골 사람들이 쉴레의 생활방식, 곧, 여인들과 모델과의 관계를 말 삼고 분개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이웃으로부터의 적개감은 그해 말 비엔나에서 3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노이렝바하라고 하는 마을로 옮겨갔을 때도 되풀이된 현 상이었다. 비엔나와 윈헨, 괼른, 그리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전 시와 함께 화가로서의 명성이 높아가던 참에, 쉴레는 노이렝바하 감옥에 24일간 갇히고 마는데, 죄명은 부도덕과 꾐 으로, 모델로 섰던 가출 소녀가 그를 고발했던 것이었다.

재판과정에서 판사는 쉴레의 드로잉 한 점을 불에 태워, 일찍이 그의 부친이 쉴레에게 가한 모독감을 일깨우게 했다. 감옥살이 경험은 쉴레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 그후로 쉴레의 성격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거의 철두철미 은둔적이 되었고 그리고 자신을 수도승이나 은둔자로 그린 초상화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1915년, 몇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오스트리아 군대에 입대하고, 입대 2주 후에 결혼했다. 군인과 남편이라는 이중의 역할은 스스로가 가한 사회적 추방아의 모습을 그의 삶과 그림의 이미지에서 드러내게 도왔다. 더구나, 비엔나의 군대미술관에 배치가 된 후로는 집에서 거처하며 정규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이 기간에 제작된 초상화들은 덜 과격하며 덜 호전적이었다. 1918년 3월 비엔나 서세션(Vlenna Secession)에서의 개인전은 호응이 좋았고 경제적 보답을 주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번진 악명높은 독감이 10월 비엔나에 당도하자, 당시 임신 6개월이던 쉴레의 아내가 먼저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쉴레는 그 사흘 뒤인 10월 31일 밤에 아내 뒤를 따랐다. 쉴레가 최후로 남긴 작품은 죽어가는 아내를 그린 소묘였다. 사망때까지, 에곤 쉴레는 선과 색채를 대가적인 솜씨로 다를수 있게 되었고, 3천여 점에 이르는 드로잉과 약 3백 점에 이르는 회화를 남겼다, 쉴레의 예술의 내용은 대단히 아름답게 그려 져있다.

그는 분명 구스타프 클림트와 오스카 코코쉬카(oskar Kokoschka)와함께 세기말/세기초의 가장 뛰어난 오스트리아화가 셋에 포함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놀드 쉔베르그 및 루드비히 비트겐스타인과 동시대인으로서, 쉴레는 금세기가 열리던 처음 10년간 비엔나에서 보여진 개인적, 심리적 현상 및 지적 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본질에의 탐구와당시의 지적인 틀안에서 개성의 내부 구조를 탐색하는 것이 비엔나 제국 말엽의 퇴폐와 위선과 함께 쉴레 작품의 내용이 되었다.

쉴레는 1912년 4월 13일 어린 소녀를 유혹하고 아이들에게 에로틱한 그림들을 보여 어린이를 도덕적으로 타락케 했다는 죄명으로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이 화가의 관심과 예술은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나 에릭 피슬(Eric Fischl)과 같은, 성적인 이미지를 이용하는 근간의 현대작가들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쉴레의 미학은 휠씬 복잡하며, 세련되며, 성적인것 그 자체에 촛점을 맞추는 것으로부터는 대단한 거리가 있다. 아름답게 그려진 쉴레의 인물 형상은 단순히 에로틱한 것이 아니라 시각적, 미학적으로 보아 하나의 이상화된 이미지이다. 이에 덧붙여, 쉴레의 선과 구조에서는 서세셔니스트의 비젼과 양식 특히 클림트의 그것을 쉽게 추적해 낼 수 있다. 흥미있는 것은 흔히 간과되고 있는 그래픽 화가인 스타인렌(Steinlen)의 영향과 당시 쟈포니즘(Japonisme: 일본목판화가 서구미술에 불러일으킨 영향)의 도래를 엿볼수 있는 점이다. 여인의 젖가슴을 내보이는 우타마로(vtamaro)의 목판화를 떠올리면 그 관계를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이에 더해, 쉴레가 그림의 빈 공간에 탄탄한 선으로 형상을 그리는 동양적 회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며, 도장처럼 네모난 쉴레의 서명과그 서명이 그림에서 놓이는 위치 또한 동양화의 낙인과 흡사하다.

쉴레의 작품은 크기가 그리 크지 않으며, 작품에 사용하는 재료도 수수하다, 그는 수채, 과슈, 유채, 크레용, 연필 및 담황 색나는 포장지를 제재로 사용하여, 직접성을 최고로 도모했다. (무릎을 꿇은 남자 나체),(자화상, 1910)는 레오폴드 컬렉션에든, 1910년에 제작된 8점의 초상화 중 하나이다.

이 드로잉은 과장된 제스츄너와 현저한 색 대비 및 길게 늘인 수족과 크게 그려진 손과 같은, 쉴레의 형상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약간 왼쪽으로 인물을 놓아 형상의 위와 아래를 잘라낸 구성을 하고 있다. 형체 일부를 잘라 낸 구성 또한 쉴레의 전형적인 것이다. (오렌지-레드 드레스의 무릎 꿇은 소녀),(1910)는 초록색의 흔적을 가미한 여러 다양한 색조의 오렌지 색을 쓰고 있다. 특히 힘있는 선이 두드러져 보인다. 치마 단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선은 이 화가가 시각적인 운동감에 관심을 쓰고 있는 것을 암시한다. 형체를 공간 안에 넉넉히 위치시키고 있어 다시 동양화를 생각나게 한다. (치마를 걷어올린 검은 머리칼의 소녀) ,(1911)는 모델의 앞 단축된 포즈와 절단된 수족, 그리고 정면으 로 취한 자세로 강한 성적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다. 쉴레는 간 혹 나체 주위를 흰색 과슈로 테두리침으로써 동일한 효과를 자아냈다 (꿇어앉은 여인 나체),(1910) 쉴레의 모델들은 흔히 임산부나 사춘기 소녀였다. 이같은 천진함과 적나라한 노출의 겸비는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때 당시의 유럽의 델리키트한 여성미를 제시하는 레이스 주름의 속옷과 끌어내린 스타킹이라는 문맥에서 훔쳐보는 잠정적인 관음적 센세이션을 자아낸다.

에곤 쉴레가 우아하고 장식적인 서세셔니스트의 스타일로부터 작품을 시작했지만, 쉴레의 독창성은 그의 장식이 덜하며, 감정적으로 보다 압축되며, 보다 직접적으로 보다 강하고 굵게 쓴 드로잉 선에 기인한다 그는 또한 서쎄셔니스트의 표면적인 아름다움이라는 미관념도 거부하여, 일그러진 신체와 얼굴로 과장되게 표현된 내면에 깔린 몰골스러움이라고 하는 미의 가능성을 소개했다. 쉴레는 형(form)이라고 하는 대담한 언어를 통해 인간 감정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대개 씻겨져 투명한 그의 색상은 표현성과 구성력을 높이는데 사용됐다. 그의 주요 소재는 자화상과 여인들로써 그의 깊은 관심, 사고, 그리고 감정 을 위한 상징이자 은유로 작용했다. 쉴레의 드로잉은 1913년 후반에서 1915년 사이에 형식적인 변화를 보인다 그는 모델로서 성인 여인을 선호하게 됐다. 그 는 풍만스러움과 조형성을 창출하기 위해 양감있는 윤곽선을 사용했다 이 새로운, 일루젼적인 표면과 양감은「연인들」(1914-15)에서 볼 수 있다

인체들의 어색한 포즈는 이 드로잉에서 하나의 조각적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여자의 얼굴이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남자의 일그러진 포즈는 중앙의 축을 바꾸어 둘로 나누어 낸다. 이즈음에 이르러 완만스런 곡선과 부드러운 선이 주로 사용되며, 사선으로 칠한 색상이 두드러진다. 반면, 색상의 대조는 여전 히 강하다. 그림의 남자는 쉴레이며 여자는 발리 노이질(Wally Neuzil)로서, 그녀는 쉴레의 오랜 모델이며 동반자로 그가 감옥살이를 할 때 매일 그를 방문했다. 그녀는 (비탄하는 여인),(1912)의 소재이기도 하다. 후에, 쉴레가 에디스 함스(Edith Harms)와 결혼한 뒤로는, 새 아내의 대단히 민감한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보다 자연스런 조형언어를 차용하였고, 정밀하고 정확한 드로잉을 엄밀한 색상과 겸용했다.이 기간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덜 공격적이며 왜곡과 과장의 정도도 덜했다. 보다 역동적인 동시에 그러나 자기 만족을 보였다. 쉴레는 예민한 풍경화의 이미지도 또한 창조했다. 그는 형상과 색상의 주목할 만한 조화를 이루어내기 위해 풍경의 제 요소들을 적절히 배치했다. 풍경둥경에서 쉴레는 그의 인체에서와마찬가 지로 정물의 기분이 들게 했다.즉, 적절한 배치, 구성, 그리고 영속감이 그의 작품에서 자아내진다. 그의 풍경화에서도 쉴레의 이미지들은 열린, 빈 심리적 공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쉴레의 드로잉은 거의 언제나 그의 회화보다 높이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쉴레에게는 그의 그림이 그의 소묘보다 더 중요했다. 그는 드로잉을 대단히 신뢰하여 언젠가 그림으로 더 발전되 나갈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단명했던 삶이 이것을 허용치 않았다. 쉴레의 유화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선과두텁게 칠한물감의 겸용은 일찍부터 보 여, 1918년 그의 삶 의 종반까지 이어진다. (웅크리고 앉은 두 여인),(1918)이 두텁게 칠한 밝은 색조의 색을 인체 형상의 외형선과함께 쓴 좋은 예로 써, 인체들은 느슨히 큼직히 쓴 붓놀림으로 그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그런 예들이 있듯이, 쉴레는 그의 소재를 뛰어난 형상력으로 훌륭히 표현했다. 쉴레의 드로잉은 드로잉 그 자체로 감상될 수 있다. 그렇기 에 쉴레가 1950년 이래 점증적으로 독자를 얻어왔던 것이다. 지난 25년간, 쉴레의 대중성은 미술에서 새로이 재부각되고 있는 성적인 소재에 대한 관심 증대와 함께 더 한층 커지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만,관심의 촛점과 관조의 근간으로서, 선과 공간과 색 사이의 관계에 대한 쉴레의 이해가 없었다면 감동적인 예술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쉴레의 작품에 대한 하나의 완전한 초상화를 제공했다. 16세 때 그린 아카데믹한 자연적인 초상화에서 부터 그의 말기의 형과 운동감의 요점만으로 이루버진 초상화가 다 전시되었다. 뉴욕근대미술관에 연대별로 명료히 전시된 이 전시는 쉴레의 내적 의도와 함께 그의 예술적 발달과정을 섭렵해 볼 수 있게 했다. 1912년 4윌 27일, 옥중에서 쉴레는 이렇게 썼다: (내게 예술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생을 사랑한다. 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심층으로 가라앉기를 원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의 심층으로 가라않고자 던 쉴레의 욕망은 이 전시에서 분명히 관찰할 수 있었다. 이 젊은 화가는 1900년으로 바뀌던 직전과 직후에 살았던 자신의 살에 비추어 인간 존재를 응시했다. 우리는 이제 또하나의 세기로 바뀌는 시점에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쉴레의 속삭임을 귓전으로 듣는다. (예술은 모던할 수가 없다; 예술은 원초적이며,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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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들이 사용하는 검은 조근현 미술감독이 가장 기특하게 여기는 소품이다. 내시란 사내가 아니지만 여인도 아닌 존재. 그때문에 이중적인 느낌이 있어야 하지만, 검날의 폭을 좁혔더니 지나치게 여성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밤새 고민하던 그는 ‘민첩하다’는 한단어를 떠올렸고 검날의 가운데를 도려내는 모험을 했다. 날렵한 인상을 주면서도 베고 찌르기가 쉬운 이 검은 근육이 물리지 않도록 식칼에 구멍을 뚫는 이치를 차용한 것. 내시는 관련기록이 미미해 창작의 여지가 많았는데 거세된 남근을 이름써서 보관하는 대나무통이나 거세도구들이 새로 고안된 소품들이다.


 정빈 회화

어릴 적부터 골동품을 좋아했던 정빈은 처소 한쪽 벽을 터서 일종의 갤러리를 만들어 두고 있다. 이방에 걸린 당·송대와 한국고대회화는 진짜 그림을 약간 변형하여 아마추어 동양화가가 모사한 것이다. 수천년된 작품이지만 행여 저작권에 문제가 생길까 염려한 처사.

 

 



쇠좆매

의금부 도사 광헌(이범수)이 애지중지하는 무기. 문헌에 등장하는 쇠좆매는 쇠좆 안에 철구슬을 넣어 휘두르는 잔인무도한 무기로 그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문헌대로 만들면 배우가 다칠 것이므로 동물의 피부 느낌을 살려 재현한 모양새가 이 쇠좆매다.

 

윤서 안경

안경을 구하기 위해 황학동을 드나들던 강정훈 소품팀장은 우연히 안경수집가를 만나게 됐다. 안경은 모양도 좋아야하지만 쓰는 사람의 골격과도 어울려야하므로 한석규와 이범수가 직접 그를 찾아가 이것저것 써보고 안경을 선택했다. 두가지 모두 조선후기에 사용됐던 안경. 한석규가 사용한 철제무테안경은 중인이 썼던 것이고, 동물의 뿔로 만들어 조각까지한 이범수의 안경은 사대부가 썼던 것이다. 영화에는 코팅지를 붙여 선글래스로 만든 한석규의 안경만이 등장한다.

고문기구

의금부에서 사용된 고문기구들로 곤장이나 주릿대처럼 덩치가 큰 것들은 따로 벽에 세워놓았다.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인두와 송곳처럼 낯익은 도구를 제외하면 그 용도를 모르는 것도 꽤 된다고. 구부러진 갈퀴살 여러 개가 붙어있는건 뼈와 뼈사이를 찍어 비트는 기구다.

 

흑곡비사

김대우 감독이 몇가지 견본 중에서 붉은색 표지를 고른 건 그옛날 청소년기에 ‘빨간책’을 읽던 추억때문이었다고 한다. 음란한 내용은 <소녀경>에서 빌려왔고 그림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오돌또기의 작가들이 그렸다. 감독이 원했던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부세화)와 비슷하지는 않지만, 매우 적나라하다.

 

다이어리

황가(오달수)는 유기전 주인이면서 음란서적 유통책이기도 하다. 직업이 두가지인 사람에겐 다이어리가 필요할 것 같아 한지를 묶어 월력까지 그려넣은 수첩을 만들어주었고, 그때그때 적을 수 있도록 붓 대신 목탄을 덧붙였다. 황가가 윤서를 재촉하며 <흑곡비사> 인쇄와 발행일을 챙겨 기록하는 수첩.

 


유기

놋쇠를 불에 달궈 두드려만든 방짜유기는 사람 손이 닿으면 소금기때문에 부옇게 흐려진다고 한다. 매매가 1억원에 달하는 3톤 분량의 유기를 수천만원을 주고 빌려온 소품팀은 행여 손을 탈까 바닥에 떨어질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고, 장터 왈패들과 광헌이 격투를 벌이다가 넘어지는 유기장엔 깨끗이 닦은 헌유기만 넣어두었다. 유기전은 그릇만 팔거라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놋쇠로 만든 풍경과 타악기도 파는 곳이었다

 


<음란서생>에 식기 등을 지원해준 회사는 민화로 유명한 회사이기도 했다. 그에 단서를 얻어 밋밋한 백지 대신 프린트한 민화를 틀에 발랐더니 꽃잎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어여쁜 등이 만들어졌다. 기생집에서 랜턴처럼 매달아두기도 하고 바닥에 놓아두기도 하는 등. 정빈(김민정)도 비슷한 등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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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우 감독은 황가(오달수)의 ① 유기전에 유독 애착을 가지고 있다. 유기전은 음란소설을 필사하고 제본하여 대여까지 하는 장소이고,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며, 모든 사건의 접점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여인들이 부담없이 찾아올 만한 가게가 필요했다. 포목전도 있었지만 뭔가 반짝거렸으면 해서 유기전을 떠올리게 됐다.” 평민의 가게가 상세한 모양새를 전하지는 못하겠지만, 나무로 짠 선반마다 세월이 느껴지는 유기전은, 방을 지나 또 다른 방이 나타나는 깊이있는 공간이다. 가장 안쪽엔 황가의 본업인 음란서적 제작소가 자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에 도서관 지하에 어떤 공간이 있고 그 안에서 열쇠 만드는 노인을 만나게 되는 작품이 있었다. 그렇게 낯선 공간으로 들어가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다 보여주자니 상영시간이 길어질 것 같았고, 느낌을 살리지 못해 아쉽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유기들은 대부분 손으로 두드린 방짜유기인데, 3t 분량을 선반에 쌓다보니 아무리 쌓아도 끝나지 않더라는 게 소품팀이 전하는 고충이다. 이중 함부로 굴려도 되는 유기는 소품팀이 보유하고 있던 헌 물건. 소품을 빌려준 유기회사가 헌 유기까지 깨끗이 닦아주어 비록 무너지는 선반 위일지라도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다.

이 공간은 세밀한 소품들도 상상으로 채워야 했다. 어느 시대 어느 땅이고 평민들의 생활을 기록하는 데는 인색한 것이 역사가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입구로 들어가 통로를 두번 돌고 문을 열면 나오는 ② 밀실은 모사장이와 필사장이의 작업실이다. 밧줄을 매달아 난잡한 내용이 적힌 한지를 말리고, 좁지만 번듯한 작업대도 있다. 한지를 썰고 가지런히 모아 구멍을 뚫고 끈으로 엮는 도구가 필요했지만 딱히 기록이 없어 그 용도에 맞는 형태로 다시 만들어야 했다. 밀실과 선반 사이엔 윤서와 광헌과 황가가 머리를 맞대고 <흑곡비사> 마케팅 전략을 논의하는 평상이 놓여 있다.

이 유기전은 밖으로 나가면 목조건물이 다닥다닥 붙은 ③ 상점거리의 일부가 된다. <형사 Duelist>의 장터 오픈세트가 있던 자리에 (원래는 썼던 자재를 재활용하려 했지만) 새로 지은 이 거리는 황량한 듯 덧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다. 가게의 자재와 형태만 바뀌었을 뿐 현대와 비슷하게 좁고 북적대는 길목이었을 시장을 재해석한 결과다. 조근현 미술감독은 상점거리가 음란서적 제조·유통의 중심지이므로 낮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 듯 한적하고 밤에는 조심스럽게 북적거렸으리라 상상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분위기가 날까 생각하다가 판자로 덧문을 만들어 닫기로 했다. 사람은 없고 바람이 불면 먼지가 휘날리는, 마치 <석양의 무법자> 같은.” 밤이 되면 그 덧문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며 새로 나온 음란소설을 찾는 처자들이 남몰래 문을 두드린다.

역사책 변두리에 내쳐진 평민이니 복식 기록인들 온전할 리가 없다. 남아 있는 기록은 대부분 19세기가 넘어 사진기술이 도입된 뒤의 복식. 정경희 의상팀장은 그런 황가에게도 세심하게 배려한 옷을 지어주었다. 사대부가 소맷자락이 넓어 엽전 한 꾸러미도 넣을 수 있는 도포를 입었다면, 평민은 소매와 품을 좁혀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④ 창의를 입었다. 배색을 위해선 쾌자 대신 비슷한 형태의 서민복 배자를 썼다. 처음 정경희 의상팀장은 소설을 만들어 파는 이라기에 “외국 문물도 앞서 받아들이고 돈냄새도 나는 인물”이라 생각해 황금색이 섞인 의상을 생각했다. 그러나 김대우 감독은 황가가 빈약하고 꾀죄죄하기를 원했다. 정경희 의상팀장은 좋은 옷은 입는 사람이 알아본다고 믿어 하층민의 옷이더라도 까다롭게 원단을 골랐고, 남몰래 샤넬 원단을 쓴 적도 있다. 그런 정경희 팀장이 감독의 주문에 맞춰 찾아낸 옷감은 비단이지만 올이 성기고 겉보기엔 거친 느낌도 나는 인도 실크였다. 그나마도 김대우 감독은 화려하다고 생각해 옷감을 비비고 빨아 남루한 느낌이 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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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옥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말 한옥에 들어가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근현 미술감독은 그것이 20세기 초반 함부로 지은 한옥 탓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음란서생>이 수백년 전 한옥을 다시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근현 미술감독은 한옥 답사를 다니던 시절 눈여겨보았던 경주 양동마을로 내려가 150여채가 넘는 양반 가옥과 초옥을 살피고 ① 윤서의 집을 찾아냈다. 김대우 감독 눈에 들어온 집은 대청마루가 시원하고 족자 한점이 걸려 있는 어느 한옥이었다. 그 집을 기본으로 하여 실내는 흥선대원군의 사택이었던 운현궁에서 골라냈다. 중요한 공간 중 하나이기에 자극적이기보다 담담한 정서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 집에서 조근현 미술감독은 <형사 Duelist>를 찍으면서부터 고심하던 문제 하나를 해결했다. “창호지를 사이에 두고 조명을 비추면 빛이 퍼져서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창문을 뜯어내는 수밖에 없는데, 한옥은 현대건축과 달라 창문 크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도 없다.” 때문에 그가 선택한 소재는 ‘샤’라고 불리는 인조견직물이었다. ‘샤’는 옆에서 보면 창호지와 구분하기 어렵고 빛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직물. 부유한 조선 사대부는 비단으로 벽과 문을 발랐다는 기록도 있어 없는 물건을 가져다 썼다는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좋았다. 그 대신 운현궁 창호지를 뜯어내어 천을 붙이고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창호지를 복구하는 공사를 해야만 했다.



조선 제일 문장가로 담백한 선비였던 윤서는 의상팀한테도 묵직한 짐이었다. 기존 사극과 다른 옷을 입히고 싶었지만 난데없는 인상을 주면 안 됐고 강직하기에 사치를 부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쾌자가 등장했다. 소매없는 겉옷이라 생각하면 맞을 쾌자는 조선 후기에나 사용됐지만 단아한 푸른 색조를 다치지 않으면서 변주를 시도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본 형태는 의금부 도사 광헌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광헌은 한복 원단에 가까운 윤서의 옷과 달리 현대적인 원단을 사용했다. 감독과 미술 관련 스탭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광헌은 부유하게 태어나 외국 문물을 가까이 할 수 있었던 복받은 사대부다. 조근현 감독은 그가 “공부는 못했지만 그림 과외도 받고 하여 취미로 붓을 잡게 되었다”고 짐작한다. 그러므로 광헌은 생기 넘치는 녹색의 무관이다. 텍스처가 도드라지는 원단으로 연두색 옷을 지어입고 패턴 박힌 천을 뒤집는 파격도 시도했다.

② 광헌이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도 처음엔 녹색이 감도는 방이었다. 조근현 미술감독은 민속촌에서 보았던, 붉은 목재를 쓰고 아기자기한 화단을 꾸며놓은 이국적인 한옥을 떠올리며, 푸른 화단이 놓인 광헌집 외벽을 상상했다. 그러나 영화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느덧 초목이 시드는 늦가을이 되었으니 마당에 푸른빛이 남아 있을 리 없었고, 작업실에서도 녹색을 걷어내야 했다. 다만 일본풍이 섞인 녹색비단보료는 살아남았다. 광헌이 소유한 부(富)는 반입식인 정빈의 처소와 비슷하게 입식과 온돌이 섞인 작업실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조근현 미술감독의 추리다. “지금으로 치면 강남에 사는 부유층에 해당하는 사대부들이 먼저 온돌을 시험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꺼번에 집을 뜯어고칠 수는 없지 않나. 아마 잠을 자는 장소는 온돌을 깔고 나머지는 중국처럼 입식이었을 거다.” 광헌은 그림그리는 무관이기에 중국에서 제작해온 탁자와 의자가 유용하기도 했다.



광헌과 윤서가 조우하는 공간은 의금부다. 김대우 감독과 조근현 미술감독은 조선 후기 사진 기록에 영감을 받아 의금부 감옥을 원형으로 설계했지만, 원형 감옥이 들어갈 만한 실내 세트가 없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절충안으로 만족했다. 대신 ③ 고문실에 정성을 쏟았다. 넓은 판석으로 바닥을 깔고 쇠갈고리가 늘어진 고문실은 중세 유럽을 모방한 듯도 싶다. 그러나 조근현 미술감독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사진을 보았더니 고문실은 반지하처럼 낮은 장소에 지어진 듯 싶었다. 그래서 반단 아래에 방을 만들었고, 피를 씻어내기 쉽도록 돌을 깔고 도랑을 냈다.” 피에 젖은 고문기구와 그 피를 씻을 우물이 있는 이 방에서 윤서와 광헌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과 대면하는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시치미 떼는 영화의 느낌, 수묵담채화처럼 은근하며 대담하게”

조근현 미술감독 인터뷰-

<천군> <형사> 이후 또다시 시대극을 선택했다. 이유가 무엇이었나.
=한번 더 사극을 하면 제대로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극은 벽만 만들어선 세트를 지을 수 없다. 기둥이 보여야 하고 기둥을 잇는 들보가 있어서 윗부분까지 올려야 한다. 조명을 하기도 어려워서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미술과 촬영, 조명이 긴밀하게 협조할 필요가 있다. 이번 영화에선 그동안 쌓인 노하우와 함께 일했던 팀들이 커다란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음란서생>을 어떤 톤의 영화로 만들고 싶었는가.
=영화를 준비하던 초반에 김대우 감독과 수묵담채화 한점을 보고 이런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선비들이 있고 가장자리에 건물이 걸쳐 있는 그림이었는데, 색이 연하고 군데군데 붉고 푸른 포인트가 있는 정도였다. 나는 이 영화가 시치미 떼는 영화인 것 같아 그런 분위기의 화면에서 엽기적이고 코믹한 대화가 흘러나왔으면 했다.

-일부러 고증에 얽매이지 않고자 하는 사극도 있지만 그 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조선시대 사용했던 물건들이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근거도 필요했다. 사람들은 눈에 익은 소품이나 의상이 아니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 한줄이라도 문헌이나 기록을 바탕으로 삼았다. <음란서생>을 보다보면 저것이 조선시대 의상의 색채가 맞나, 그때 쓰이던 물건인가 의아할 때도 있겠지만 모두 고증을 거쳤다. 순수하게 창작한 부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내시관과 그곳에서 쓰이던 거세 도구 정도다.

-<음란서생> 촬영이 끝나가고 있다. 가장 보람있었던 기억은.
=배우들이 진짜 그 시대로 돌아가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해주었을 때다. 흔히 영화가 픽션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필름이 돌아가는 순간만은 모든 게 진짜다. 그러므로 카메라에 세트의 두면만 잡힌다고 해서 나머지 두면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리얼한 연기가 나올 수 없다. 모든 스탭의 에너지가 한번에 담겨 구현되는 게 배우의 연기가 아닌가. 그런데 미술이 연기에 도움이 되었다니 내겐 큰 보람이다. 세트와 의상, 소품, 분장팀도 모두 좋았다. 구체적으로 주문하지 않고 믿고 맡겨도 좋은 팀들이었고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상점거리 오픈세트만 해도 애초 <형사> 자재를 재활용하자고 말했지만 세트 제작회사 대표가 욕심을 내서 값비싼 자재로 다시 짓고 말았다. 그 회사, 아마 하나도 안 남았을 거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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