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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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은글에 스포일러 포함. 모바일 버전과 앱에서는 숨은글 기능이 적용되지 않으니 스포일러 표시 전까지만 읽으시면 됩니다.


  2013년 홍콩, 한 대기업의 회장이 자택에서 작살총으로 살해당한다. 처음에는 강도의 소행인 줄 알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 뤄샤오밍駱小明 선배 경찰 관전둬振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사건 관계자들을 관전둬가 입원한 병실로 불러모은다. 그런데 관전둬는 암이 악화되어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다. 당황해하는 사건 관계자들에게 뤄샤오밍은 뇌파(뇌의 신경세포들이 활동할 때 발생하는 전파) 검사를 통해 관전둬의 답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뇌파검사기에 연결한 헤드셋을 관전둬의 머리에 씌우고 관전둬에게 질문했을 때 관전둬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검사기 화면의 커서가 Yes 쪽으로, 아니라고 생각하면 No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관전둬에게서 Yes나 No라는 대답밖에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뤄샤오밍은 과연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대만의 작가 찬호께이陳浩基는『13.67』에서 여섯 개의 단편을 통해 관전둬라는 한 홍콩 경찰의 삶을 이야기한다. 2013년을 배경으로 하는 첫 번째 단편부터 1967년을 배경으로 하는 여섯 번째 단편까지 46년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자들은 2013년 66세의 노인이었던 관전둬의 모습부터 1967년 20세 청년이었던 관전둬의 모습까지 여섯 시기의 관전둬를 만날 수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고 그의 인생의 단편들이지만, 그 단편들을 통해 그가 어떤 인물이고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알 수 있다. 천재적인 두뇌와 따뜻한 인간미, 청렴결백한 성품을 갖춘 관전둬가 어떻게 한 사람의 경찰로 성장했고, 살아 왔는지를 지켜보다 보면 그와 함께 46년을 보낸 듯하다. 특히 마지막 단편 「빌려온 시간」을 다 읽고 나면 만감이 교차하며 첫 번째 단편「흑과 백의 시간」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번역자는 관전둬의 일생이 마치 홍콩이라는 도시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고 번역 후기에서 말했다. 그 말대로 관전둬의 일생을 통해 46년 동안의 홍콩의 역사 또한 함께 살펴볼 수 있다. 1997년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된 뒤 홍콩 내 정치 세력들의 대립은 점점 더 심해지고, 사회 운동과 시위도 더 격렬해진다. 홍콩 경찰은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대는 강경 진압하면서 정부를 옹호하는 시위대는 너그럽게 대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 온 부정부패와 범죄조직과의 유착은 홍콩 경찰을 좀먹는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인들은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되면 자신들은 어떻게 될지 불안해한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인들이 경찰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고, 경찰들은 영국인 상관과 대화할 때도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영국에 저항하는 세력은 경찰이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영국과 중국,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공권력과 삼합회 같은 범죄조직들의 권력 사이에서 혼란을 겪어온 홍콩의 역사는 그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관전둬의 삶과 닮아 있다. 


 작가는 한 인물(관전둬), 한 도시(홍콩), 한 시대(1960년대에서 2010년대)를 묘사하는 이야기를 쓰면서 동시에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도 놓치지 않는다. 각 단편마다 잘 짜인 추리와 거듭되는 반전이 독자들의 허를 찌른다. 공학도 출신답게 추리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들도 매우 디테일해서, 페이지마다 담겨 있는 정보량이 엄청나다. 너무 디테일해서 많아진 분량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 정도로 디테일하게 자료 조사를 하고 소설로 녹여내는 것도 보통 역량이 아니다. 


 홍콩의 근현대를 생생하게 담아낸 사회 비판 소설과 잘 짜인 추리를 갖춘 추리 소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작품이다. 홍콩의 번화함과 그 뒤에 숨겨진 어두운 이면들까지 그려내고 있어, 홍콩 누아르 영화에 향수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영화들에서 느꼈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홍콩의 과거를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독자들은 은 소설 속 한 사람의 삶을 통해 46년의 홍콩 역사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 작가의 이름 찬호께이陳浩基는 표준중국어(북경어) 발음으로 천하오지다. 작가의 이름은 광동어로 표기되었는데,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중국인들의 이름은 표준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한다는 외래어 표기 원칙에 따라 표준중국어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다. 간혹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광동어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보이는데, 표준중국어 발음으로 표기된 것이다. 영어판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광동어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다. 관전둬의 광동어식 발음은 꽌짠똑, 뤄샤오밍의 광동어식 발음은 록시우멩(병어 표기로는 Ming이지만 실제 발음은 '멩'으로 들린다.)이다. 왜 작가 이름만 광동어 발음으로 표기했을까. 광동어 표기 쪽이 세계적으로 더 인지도가 높아서일까? 


광동어 발음은 이 곳에서 찾았다.


광동어 발음 사전: http://m.yueyv.cn/


* 한국판 출판사에서 본문 앞에 홍콩 지도를 넣어준 덕분에 각 장의 사건 무대가 어디쯤에 있는지, 등장인물들이 어떤 경로로 이동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원서에는 없던 지도인데, 출판사의 센스가 좋다고 생각한다. 


* 스포일러 부분











* 마지막 단편 「빌려온 시간」에 대한 단상 ▼

 책 전체에 무게감을 더해주는 것은 마지막 단편 「빌려온 시간」이다. 이 단편을 통해 사람의 운명이 얼마나 사소한 것 때문에 바뀔 수 있는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당연히 이 단편의 화자 '나'가 관전둬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이 감을 잡지 못하고 헤맬 때 명쾌한 추리로 설명해 주는 게 관전둬의 역할인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나'니까. 그러나 마지막 대사를 통해 '나'가 관전둬가 아닌 첫 단편 「흑과 백의 시간」의 범인 왕관탕이고, '나'와 함께 영국인 경무처장의 암살을 막은 경찰 '아칠(阿七, 본명이 아니라 경찰 번호 4447에서 딴 별명이다.)'이 관전둬라는 것이 드러난다.


 '나'는 아직 스무 살이 안 되었다고 했는데,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만 20세가 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으니 '나'가 관전둬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천재적인 두뇌의 '나'를 '아칠'이 보조해 주고 있으니 당연히 '나'가 관전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성품을 보면 '나'가 관전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나'도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막으려 하고, 상관들의 눈치를 보다 아이들이 테러로 죽는 것을 막지 못한 '아칠'을 비난할 정도의 정의감은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자신과 형의 안위가 최우선이다. 그래서 경찰이 되게 해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하고 형의 회사에 들어간다. 더 편하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까. 반면 아칠은 상인들이 공짜로 음식을 대접해도 꼭 값을 지불할 정도로 청렴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직접 폭탄 해체 작업에 나선다. 청렴하면서도 정의를 위해서 몸을 사리지 않는 성품은 관전둬다운 것이다. 


 '나', 즉 왕관탕이 경찰이 되어 관전둬와 함께 일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왕관탕은 친형처럼 따랐던 위안원빈과 함께 펑하이 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했을 때, 위안원빈이 불과 3년 뒤에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이 가졌어야 할 모든 것들을 빼앗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관전둬는 자신을 도와줬던 총명한 청년이 46년 뒤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왕관탕뿐만 아니라 관전둬의 운명까지 바꿔버린 것을 보니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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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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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추리와 당시 시대상에 대한 고찰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 장을 통해 관전둬라는 한 인간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그의 삶이 홍콩이라는 사회에 어떤 영향을 받았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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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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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강주룡의 모습과 당시의 보도 기사. 당시 언론들은 강주룡에게 '공중에 머물러 있는 여자'라는 뜻의 '체공녀'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 스포일러 포함

  체공녀 강주룡낯선 수식어에 낯선 이름이다. ‘체공녀滯空女는 공중에 머물러 있는 여자라는 뜻으로, 1931년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인 한 여성 노동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강주룡은 그녀의 이름이다평범한 노동자였으니 고공농성을 했다는 것 외에는 그녀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장편소설의 소재로 삼기에는 공백이 너무 많은 인물인데강주룡을 영웅화하면서 프로파간다로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우려 반 호기심 반인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작가는 서장에서부터 그런 우려를 씻어낸다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비장한 상황에서도 주룡은 배고픔에 지친 나머지 엉뚱한 상상을 한다나 자신을 삼키면 비어 있는 배가 다시 부를 거고뒤집어진 나는 또 배가 빌 거라고그러나 누군가가 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다시 몸을 꼿꼿이 세운다그것이 굶주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가장 나중 된 저항의 몸짓이었다그녀의 저항은 거창하거나 비장하지 않다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저항을 할 뿐이다

  주룡이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서장을 지나 이야기는 그녀가 스무 살 되던 해 혼례식 날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남편을 만나 혼인하기 전 주룡의 삶은 당시의 다른 농민 여성들의 삶과 다름없었다사상이나 투쟁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집안일을 돕다 어른들이 시집을 보내면 시집을 가는 삶그러던 그녀가 어떻게 투쟁하는 사람이 되었던 걸까

  작가는 그녀의 투쟁을 사랑에서 시작된 것으로 재해석했다어머니가 통화현(주룡의 가족이 살고 있던 지역)에서 가장 고운 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토끼 새끼라고 대답했던 주룡은혼인하고 나서는 가장 고운 것이 남편이라고 생각한다그 정도로 주룡은 얼굴 곱고 성정이 순수한 남편에게 빠져 있었다남편이 독립군 활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주룡은 시댁에서 남편을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남편과 함께 독립군 활동에 뛰어들기로 선택했다. “주룡이 독립을 원하는 것은 제 임자 때문이다당신이 좋아서당신이 독립된 나라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 여성은 연애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라는 편견에서 나온 재해석이 아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떤 거창한 대의보다도 더 와 닿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투쟁에 뛰어들었지만주룡은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과 편견억압과도 싸워야 했다독립군 동지들은 주룡을 동지라기보다는 부엌일 해 주는 하녀 정도로 취급했고주룡이 기지를 발휘해 활약하고 대장인 백광운 장군에게 신임을 받자 시기했다심지어 백광운 장군과 주룡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까지 퍼뜨렸다사랑하는 남편마저 주룡에게 열등감을 느끼고동지들이 퍼뜨린 소문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은 주룡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남편이 독립군 활동을 하다 병으로 죽자시댁에서는 남편 잡은 년이라며 주룡을 살인죄로 고소해 감옥에 갇히게 만든다일주일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와 친정에 돌아오니친정아버지는 남편을 잃은 딸을 위로하기는커녕 딸이 과부가 되었다고 부끄러워한다게다가 친정 식구들은 땅 몇 마지기 구해보겠다고 늙은 지주에게 주룡을 후처로 보내려고 한다. “망그러진 간나 거둬주는 걸” 고맙게 여기라면서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온갖 억압을 당한 끝에 주룡은 결심한다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평양으로 간 주룡은 그곳에서 고무 공장에 취직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그녀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뒷받침해 준 것은 노동이었다자기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게 되면서 주룡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다시 시집갈 마음도 없고,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집이니 땅이니 하는 것도 관심 없다. 그저 제 한 몸 재미나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극장 구경도 하고. 저 커피에도 맛을 들이고. 양장도 맞춰보고. 빼딱구두에 실크 스타킹이니 하는 것도 신어보고. 고무 냄새 나는 보리밥 먹어가며 내가 번 돈, 날 위해 쓰지 않으면 어디에 쓴담.”


그녀가 꿈꾸는 새로운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자기가 번 돈으로 자기 한 몸 부양할 수 있고일을 마친 뒤에는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삶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노동이었기에비인간적인 노동 조건과 작업반장의 폭력도 그런 대로 견뎌보려 했다

  그러나 파업단의 교육을 들으면서 그녀는 알게 되었다월급을 제 때 받고손찌검을 당하지 않고아이를 낳고 집에서 쉬면서도 월급을 받는 게 당연한 권리라는 것을자신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고민하던 주룡은 동료가 파업단에 가입했다 회사로부터는 해고할 것이라는남편으로부터는 이혼할 것이라는 으름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파업단에 가입했다자신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사람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사람 대접을 받기 위해서

  인생에서의 두 번째 투쟁을 시작했을 때주룡은 또 다시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과 싸워야 했다평양적색노동조합에서 함께 투쟁하자고 권유하러 왔던 동지 정달헌조차 처음에는 주룡이 여성이라는 것에 당황해한다여성 혁명가 콜론타이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에서도 정작 여성인 주룡이 말할 때는 미심쩍어 하고엘리트 남성인 달헌이 말해야 신뢰한다그럼에도 주룡은 모든 억압을 뚫고 자기 목소리를 낸다오히려 남성 동지들의 모순을 비판한다여성 혁명가의 글을 공부하면서 왜 아내에게는 사상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는지노동자가 으뜸이고 근본 되는 계급이라고 하면서 엘리트들은 노동자를 계도와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는지주룡은 사상을 배울 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라는 당사자성을 활용해 세상의 모순과 억압을 간파하고 그것들과 맞서 싸운다

  이 책의 홍보 문구는 삶이란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투쟁하는 것이다첫 번째 투쟁에서 사랑하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면 두 번째 투쟁에서 주룡은 사랑하는 동지들의 손을 잡았다주룡은 어린 직공인 옥이에게 말한다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고삶이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투쟁하는 것이라면혁명은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 주는 것이 아닐까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고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고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그렇기에 주룡에게 혁명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동지들과 목숨을 걸고 두 번째 파업을 결행했지만 경찰들에게 무참히 진압 당했을 때그녀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혼자서 을밀대 지붕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는 것경찰들의 손으로 끌려 내려간 뒤에도 단식 투쟁을 거듭하던 그녀는 건강을 해쳐 이듬해 서른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소설은 주룡의 마지막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동료 직공 삼녀를 통해 주룡의 최후를 알린다비극적인 최후인데도 소설은 지극히 담담한 문장으로 끝난다. “저기 사람이 있다.” 

  저기 그녀가 있었고또 다른 높은 곳에 자기 권리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그들 모두가 사람이었다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사람답게 살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었다이렇게 이 소설은 우리의 현재와 삶을 위해 투쟁했고삶 자체가 투쟁이자 혁명이 된 한 사람의 삶을 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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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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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일러 포함 


  나는 눅눅한 현실을 그리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성애 묘사가 노골적인 소설도 좋아하지 않는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이하자이툰 파스타)에 실린 단편들은 그 둘 다에 해당한다그런데도 계속해서 읽게 되었다내 입맛에는 안 맞는데하면서도 자꾸자꾸 손이 가서 어느 새 그릇을 싹싹 비워버리게 되는 음식처럼이 단편들의 어떤 점이 취향을 뛰어넘어 나를 사로잡은 걸까.


  우선자이툰 파스타의 단편들은 눅눅한 현실을 그리고 있는데도 유쾌하다눅눅한 현실을 그린 소설을 읽다 보면 나까지 현실의 비참함에 잠식되는 기분이다하지만 작가는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비참한 현실마저 블랙코미디로 승화시킨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서 의 라이벌 다니엘 오’ 감독이 의 유도질문에 걸려 관객들 앞에서 자신의 무식하고 천박한 진면모를 드러낼 때선배 영화인들이 자신의 영화를 홍상수 아류로 폄하하자 주인공들이 술 마시고 섹스만 했다 하면 무조건 홍상수 아류이기까지 한 것이고. ... 사지말단을 자르면 김기덕장식적이고 예쁜 벽지가 붙은 곳에서 살인하면 박찬욱이라고 하겠지.’라고 가 속으로 비꼴 때 깔깔 웃었다.

 

  하지만자이툰 파스타는 그저 유쾌한 데서 그치지 않는다.자이툰 파스타속 인물들은 모두가 성공을 향해 가는 세상에서 낙오되었다는 점에서 내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그들은 실패하고 망했다그들은 실패가 성공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식상한 조언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안다. “실패는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개소리다실패는 인간을 한껏 구겨지고 쪼그라들게 만든다. ... 실패에 그럴듯한 의미를 붙이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된 성공을 해본 사람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아무것도 아니며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고백한다그들은 남들이 쯧쯧너 완전히 망했구나.”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래나 망했다!”라고 스스로 당당하게 외친다그런 당당함 덕분에 분명 비참한 상황인데도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오히려 후련하다.

 

  그들은 망했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는다망해도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들 또한 이 세상에 없던 훌륭한 퀴어 영화를 만들어 칸 영화제의 주역이 되는 것’ 같은 높은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현실에 치여 살아가다 보니 꿈은 저만치 멀어져버렸다그들도 자신이 꿈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지만여전히 사랑하고 살아간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와 왕샤가 선배 영화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동네 노래방 주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나서도 다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처럼이들은 희망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분명 희망적인 메시지는 아니지만이상하게도 위로가 된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라는 또 하나의 걸림돌은 어떻게 넘길 수 있었을까사실 이 책 속 첫 단편의 몇 페이지를 훑어봤을 때 노골적인 성애 묘사에 당황했었다그것도 동성 간의 성애 묘사가 대부분이다 보니 더 낯설게 느껴졌다하지만 찬찬히 더 읽어가다 보니,자이툰 파스타속 섹스는 그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행동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그리고 성소수자들의 섹스도 이성애자들의 섹스만큼이나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렇게 지극히 일상적인 퀴어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주인공 는 동성애를 훈장처럼 전시하지도대상화해 신파로 소모해 버리지도 않는” 퀴어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는데,자이툰 파스타속 단편들을 영화화하면 가 만들고 싶었던 퀴어 영화가 될 것이다성소수자들이 가슴 두근거리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권태에 빠지기도 하는지극히 평범한 사랑을 하는 퀴어 영화.

 

  본문 뒤의 해설에서 평론가 윤재민은 이성애적 관점으로 대상화된 퀴어에 대한 의 비판에 경청할 대목도 있지만, ‘가 세상에 없던 퀴어 영화를 만들려는 것은 그저 남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 욕구의 발로였다고 이야기한다하지만 나는 그에게 퀴어 영화가 단지 인정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선배 영화인들이 그의 퀴어 영화에 퍼부었던 비판들은 퀴어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그대로 드러낸다동성애자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뇌해야 한다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뇌 때문에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한다등등그들을 보면서 는 생각한다. ‘성적 소수자가 뭔지나 알기는 하냐알 리가 없지특별히도 불행하고 이상하게 섹스를 하는 애들 같겠지애초에 보통의 존재로 생각한 적조차 없겠지.’ 보통의 존재인데도 보통의 존재로 간주되지도 못하는 것바로 곁에 존재하는 데도 멀리 있는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여겨지는 것이 그와 같은 성소수자들이 겪는 일상이다그러니 보통의 존재들이 연애하는 퀴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그의 마음 자체는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정말 인정 욕구의 발로였다 해도그 인정 욕구 중에는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 자체로서 살아가고 싶다는 인정 욕구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매력 중 또 하나는 여성 캐릭터를 현실감 있게 구축한 것이다누군가에게서 남성 작가가 쓴 여성 캐릭터도여성 작가가 쓴 남성 캐릭터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그 말에 100프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소설을 읽을 때 작가가 자신의 성별과 다른 성별인 캐릭터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지켜보게 된다.

 

  이 책의 작가는 남성이다그런데 이 책에 실린 단편 일곱 편 중 세 편(부산국제영화제조의 방,햄릿어떠세요)의 화자가 여성이다작가는 여성 캐릭터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하면서그 캐릭터가 품고 있는 감정과 고민들을 섬세하게 풀어낸다.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의 여주인공이자부산국제영화제의 화자인 캐릭터 박소라그녀의 남자친구가 화자인 단편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에서 외모만 예쁘고 머리는 텅텅 비었으며 중학생보다 유치한 자기 예술에 도취된 인물로 묘사된다그러나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의 복잡한 속내가 드러난다그녀는 부모님 돈으로 편하게 사는 듯하지만 시한부 인생인 어머니를 돌보고 있고, SNS에서의 호응이 헛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SNS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햄릿어떠세요의 주인공 는 연예기획사 연습생이었지만 아이돌로 데뷔하지 못했고, 20대 중반에 서바이벌 오디션에 도전하지만 본선에 진출하기 직전 떨어진다그녀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포기와 체념이 최선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지만순수하게 누군가를 사랑했던 시간을 그리워한다박상영 작가의 여성 캐릭터들은 누군가의 고정관념이나 환상 속 존재가 아니라 피와 살로 이루어지고 자기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현실 속 존재로 느껴진다.

 

 실패한 사람들성소수자들여성들작가는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이 흘려두고 온 시절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씹다 버린 껌이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여기는 사람, ... 함부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그렇게 잘난 척을 하며 살다 보니 나 아닌 누군가에게 한 번도 제대로 가 닿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아 버린 사람.” 작가는 이 책이 좀체 웃을 일이 없는 그들에게 건네는 자신의 수줍은 농담이라고 했다그의 수줍은 농담은 내 마음에 와 닿아 나를 울고 웃게 했다나뿐만 아니라 웃을 일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럴 것이다나는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의 가 제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작가에게 매일 농담 하나이야기 하나씩 들려달라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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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삶과 혁명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 삶으로 증명한 사람. 그녀는 여성이자 노동자로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차별과 억압, 편견을 헤치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누군가를 보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꿈과 사랑, 사상을 가지고 살아간 여성의 서사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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