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는 지금 실생활에서 사용되지 않고 있고, 서구권의 수많은 학생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문법이 어려운 언어다. 그런데도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서강대에서 진행되었던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은 많은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까지 청강하러 올 정도였다. 그의 수업이 단순히 언어를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라틴어에 담긴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화, 사회 제도, 법, 종교, 그리고 로마를 계승한 유럽 국가들의 역사와 문화까지 다루는 종합 인문 수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강의를 정리한 책 『라틴어 수업』은 인문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라틴어 수업』이 출간된 지 1년 뒤 출간된 김동섭 교수의 『라틴어 문장 수업』 은 여러 면에서 『라틴어 수업』을 벤치마킹한 흔적이 뚜렷하다. 책의 제목부터 라틴어 수업으로 사랑을 받아온 교수가 수업 내용을 정리한 책을 낸다는 기본 콘셉트, 한 챕터당 하나의 라틴어 문장을 통해 라틴어와 관련된 지식들을 전달하는 형식까지 『라틴어 문장 수업』은 『라틴어 수업』 과 닮아 있다. 하지만 진정한 벤치마킹은 벤치마킹하는 대상의 장단점을 분석해 자신의 것을 더 낫게 만드는 것. 두 책이 각각 어떤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각각 어떤 독자들에게 더 와 닿을지 살펴보려고 한다. 여러분이라면 누구의 라틴어 수업을 듣고 싶을까?



'나는 왜 라틴어를 공부하는가'라는 질문의 답


  라틴어를 공부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나는 왜 라틴어를 공부하는가'이다. 한동일 교수는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계획이나 원대한 포부가 있지 않고, 그저 '있어 보이기 위해' 라틴어를 공부하는 것처럼 유치한 이유도 많다. 그러나 처음부터 거창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면 숨이 막힐지도 모른다며, 칭찬 받고 싶고 잘난 척 하고 싶어 하는 유치함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동일 교수는 말한다. 위대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치함이라는 점에서 그는 이러한 유치함을 '내 안의 위대한 유치함 Magna Puerilitas Quae est in me 마그나 푸에릴리타스 쿠에 에스트 인 메'라고 부른다. 라틴어를 공부하는 자신만의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학생들을 이끄는 것이다.

  반면 그 질문에 대한 김동섭 교수의 답은 보다 실용적이다. 그는 본문에 앞서 '라틴어를 배우면 좋은 열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영어 어휘의 50퍼센트 이상이 라틴어이다, 현대 학문의 용어들은 대부분 라틴어이다, 인지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언어이다, 전 세계에 라틴어의 후예들이 있다, 등의 열 가지 이유들은 대부분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유들이다. 라틴어를 배워서 어딘가에 써먹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명쾌하고 실용적인 이유들이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깊이 있는 사유 VS 얕고 넓은 지식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이 사랑을 받은 이유는 라틴어와 관련된 인문학적 지식과 사유의 깊이이다. '만일 신이 없더라도 Etsi Deus non daretur 에트시 데우스 논 다레투르'라는 한 문장을 통해 고대에서 현대까지 인간이 종교와 세속을 분리시켜 온 과정과 정교분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내공에 감탄하고, 로마인의 음식, 놀이, 나이, 욕설, 장례문화부터 법과 제도, 역사까지 로마에 대한 흥미롭고 다양한 이야기에 빠져든다. 라틴어 문장과 관련된 지식을 자연스럽게 엮어나가는 한동일 교수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뛰어나다. 존댓말로 이야기하는 부드러운 문체가 직접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을 더해준다.

  또한 『라틴어 수업』 이 다루는 라틴어 문장 중 삶의 태도와 죽음에 대한 격언이 많다 보니, 삶과 죽음에 대한 한동일 교수의 성찰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죽음은 예정되어 있고 삶은 유한하지만,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그의 가르침에 많은 학생들과 독자들이 위로를 받는다. 반면 뻔한 이야기를 라틴어로 포장했다, 주목적인 라틴어 공부보다 저자의 인생관 이야기가 더 많다는 비판의 목소리들도 제기된다. 

  김동섭 교수의 『라틴어 문장 수업』 이 전하는 지식은 그보다 얕고 넓다. 『라틴어 수업』 이 309페이지, 『라틴어 문장 수업』 이 303페이지로 전체 분량은 서로 비슷한데 『라틴어 수업』 에서 다루는 문장은 28개, 『라틴어 문장 수업』 이 다루는 문장은 78개로 『라틴어 수업』  이 다루는 문장 갯수의 3배에 가깝다.  『라틴어 문장 수업』 의 한 챕터가 『라틴어 수업』 의 한 챕터의 3분의 1 분량이 될 수밖에 없다. 소개하는 라틴어 문장이 더 많으니 문장과 관련된 이야기도 더 다양하지만, 『라틴어 수업』 만큼 한 문장을 깊이 파고들지는 않는다. 김동섭 교수도 라틴어 문장에 관련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내용의 중심은 라틴어와 그와 관련된 지식이다. 문체도 다른 대부분의 교양 서적들과 같은 평범한 평서문이어서 더 실용적인 느낌이 든다. 라틴어 문장과 그에 관련된 지식을 엮어나가는 솜씨는 한동일 교수보다 투박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인생관 대신 다양한 지식을 듣고 싶은 독자들은 이 쪽이 더 끌릴 수 있다.


라틴어에 대한 흥미 심기 VS 라틴어 실력의 기초 쌓기


 『라틴어 수업』 의 첫 챕터에서 한동일 교수는 자신의 수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라틴어 실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에 대한 흥미를 심어주고 라틴어를 통해 사고체계의 틀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양 수준으로 공부하는 학생들까지 라틴어 문법을 철저히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틴어 단어의 어원이나 문법에 대한 설명도 중간중간에 나오지만, 라틴어를 통해 본 로마와 유럽의 학문과 문화, 역사, 법 등 다채로운 면모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호기심을 가지면 그 나라의 언어를 더 쉽게 익힐 수 있고, 새로운 지식들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김동섭 교수는 『라틴어 문장 수업』 의 서문에서 라틴어를 모르는 독자들이 문장을 순서대로 따라 읽으면서 라틴어를 독학하게 하는 것이 집필 의도라고 밝힌다. 그래서 문장마다 단어별로 분석하며, 그 문장이 문법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설명한다. 『라틴어 수업』 의 부록이 라틴어 수업을 들은 제자들의 소감인 반면, 『라틴어 문장 수업』 의 부록은 라틴어의 알파벳과 발음, 기본 문법과 라틴어 공부에 도움이 되는 웹사이트 목록, 명사와 형용사, 대명사의 곡용표다.(곡용은 명사의 격과 성, 수에 따라 명사의 형태가 변화하는 것이다.) 정말 라틴어 실력의 기초를 쌓고 싶다면 교재를 따로 사는 것이 좋겠지만, 이 라틴어 문장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해석되는지 알고 싶고 라틴어 문법을 좀 더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라틴어 문장 수업』 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로마의 희곡작가 테렌티우스Terentius의 말처럼, 사람 수만큼 생각도 다르다 Quot hominibus, tot sententiae 쿠오트 호미니부스, 토트 센텐티아이. 한동일 교수의 깊이 있는 지식과 사유를 더 사랑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김동섭 교수의 다양한 지식과 자세한 라틴어 문법 설명을 더 좋아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어느 책을 읽든, *읽고 행복하시길 Utere Felix 우테레 펠릭스.  

* 로마인들이 책을 선물할 때 적어넣었던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틴어 문장 수업 - 하루 한 문장으로 배우는 품격 있는 삶
김동섭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컨셉, 형식 등 전반적인 면에서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을 벤치마킹한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라틴어 수업‘보다 소개하는 라틴어 문장의 수를 늘리고 각 문장을 단어별로 분석해 문법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차별점을 두었다. 라틴어와 관련된 지식은 ‘라틴어 수업‘보다 얕고 넓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들 중 동의할 수 없는 것들도 있고, 이 책이 자기계발서처럼 느껴진다는 의견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가르치는 모든 사람과 독자들, 삶을 깊이 사랑하고 자신이 늘 옳지는 않다는 것을 인정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가르침에 귀기울이게 된다. 책을 덮었을 때 정말 존경할 만한 교수님의 명강의가 종강했을 때 느꼈던 뿌듯함과 아쉬움을 느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3년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아주 단순해 보였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남자가 아내의 불륜 상대인 남자와 그의 임신한 아내를 죽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담당한 형사 쉬유이許友一는 뭔가 미심쩍다고 느낀다. 수사 방향을 놓고 선배 경찰과 술집에서 말다툼을 한 다음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경찰서에 출근하니 뭔가 이상하다. 지금은 분명히 2003년인데, 다른 사람들은 오늘이 2009년 3월 15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6년 동안의 기억을 잃어버린 형사가, 6년 전 살인사건의 진상을 찾아간다. 이 한 줄의 줄거리 소개만으로도 흥미롭다. 쉬유이와 기자 루친이盧沁宜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2009년의 이야기와 과거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면서 예상치 못한 진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쉬유이는 살인사건의 진상뿐만 아니라 자신이 잊어버렸던 자신의 진실까지 마주하게 된다. 


  이런 추리소설에서 반전을 미리 알게 되면 재미가 없는데, 바보 같이 책을 이리저리 들춰보다 딱 반전이 밝혀져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하지만 반전을 알고 나서도 그 반전이 밝혀지기까지의 전개 과정이 흥미로워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반전을 뒤엎는 또 다른 반전이 있었다. 


  두 번째 반전을 통해 밝혀진 범인과 범행 동기는 억지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다. 자신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주인공의 캐릭터가 앞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급격하게 바뀌어서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주인공의 캐릭터가 변하면서 작품 전반을 지배하던 분위기도 갑자기 변한다. 참혹한 살인사건과 기억상실,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무거운 소재와 중간중간에 인용되는 데이빗 보위의 노래 'The Man Who Sold the World'의 섬뜩한 가사가 빚어내는 안개 속 같은 분위기가 결말에서 싹 걷혀 버린다. 


  좀 더 무게감 있고 어두운 스릴러를 기대했다면 아쉽겠지만, 주인공이 기억상실과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안개 속을 뚫고 나오는 과정을 풀어가는 이야기의 힘이 뛰어나다. 그리고 찬호께이의 다른 작품들처럼 홍콩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지금의 홍콩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후의 작품들보다는 무게감이 떨어지지만 이야기 자체의 흡인력이 뛰어난 추리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지와 소재의 어두운 분위기와 달리, 가볍게 읽기 좋다. 범인의 범행 동기가 조금 억지스럽고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 갑작스럽게 변화해 결말 이전까지의 그 인물이 맞는지 위화감이 느껴지지만, 결말까지 이야기를 흥미롭게 이끌어나가는 재능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