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장수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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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누구의 엄마도 아니다. 지금 나 한 사람의 삶만으로 벅차고, 앞으로 엄마가 될지 되지 않을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엄마로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싶었다. 우리 엄마부터 엄마가 된 친구들, 선후배들, 지인들, 그리고 내가 공공장소에서 마주치게 될 이름 모를 엄마들까지, 나는 수많은 엄마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네가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르는 거야."라고 말하는 대신 "엄마로 사는 게 나한테는 이래."라고 말하는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다. 이 책은 MBC 라디오 PD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삶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은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모성애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지도 않고, 비혼과 비출산을 결심한 사람들에게 아이를 낳고 키우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나는 엄마가 된 게 이렇게 좋은데 너는 이 행복을 모르겠지. 넌 왜 결혼 안 하니? 왜 아이를 안 낳니?"라고 말하는 친구나 친척을 만났을 때의 곤혹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에, 엄마가 될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이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나는 비혼과 비출산을 선택한 당신을 응원한다. 지지한다. 그 선택에 따르는 행복을 충만하게 누리길 기원한다. ...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 아니듯 아이는 행복의 증명이 아니며, 당신이 선택에 따르는 무게를 감당하는 딱 그만큼 나 역시 내 선택의 대가를 치르며 살고 있다.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행복'을 늘어놓듯이, 비혼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 역시 그만의 행복을 나열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내 글이 '결혼과 출산이 정상적인 삶'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공고화하는 데 일조하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결혼과 육아가 부담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행복보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로 한 선택의 대가가 더 와 닿을 수밖에 없다. 한 번도 임신하고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태동을 처음 느꼈을 때, 첫째가 갓 태어난 동생을 처음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뭉클함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아이가 없고 고양이를 키우는 나로서는 아이의 몸짓 하나 하나가 신기하고 사랑스럽다는 이야기에 내 고양이를 대입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와 사람 대 사람으로 소통하면서 느끼는 감동은 고양이와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반면 나 혼자 살아가기도 빠듯한 경제적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막막해지고, 공공장소에서 도무지 통제가 안 되는 아이들을 마주치면 저 아이들을 집에서 키우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지 두려워진다.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문제들은 다양하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아이에게 먹일 돈까스를 튀기다 기름이 튀어 화상을 입는 것 같은 사소하고 사적인 문제들이 있다. 다른 한편 아빠와 엄마의 육아와 가사 배분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문제, 노동 시간은 긴데 정부에서는 보조금만 지원해 주니 아이와 지낼 시간이 부족해지는 문제처럼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도 있다. 저자는 사적인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면서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는 분노한다. 사회과학 서적이 아니니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거나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친밀감과 연대감을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부모가 아닌 사람들은 부모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충을 헤아려보고 그 고충을 자아낸 원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로서가 아닌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 중에서도 공감되는 것들이 있다. 마침 회의에서 바보 같은 소리만 하다 나온 것 같았을 때,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났어도 나 자신이 기여한 건 없는 것 같아서 좌절감을 느낀다는 구절을 읽었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한 건가 싶어 자책하다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게 위로가 됐다. 좀 더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은 먹는 것과 같고 그 감상을 글로 쓰는 것은 똥을 싸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에도 공감했다. 많이 읽고 보기만 했지 아무 것도 쓰지 않으면 뭔가 묵은 것이 내 안에 쌓인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글 마렵다'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안다. 머릿속에 묵혀 뒀던 글을 마침내 썼을 때의 후련함도. 또한 요즘 같이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그만큼 생각지 못한 곳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때에 글을 쓰는 사람의 두려움도 공감한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의 서평을 썼다가 정말로 악플이 달리고 나서부터는 더 두려워졌다. 하지만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글이 과연 좋은 글일까? 그런 글을 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글을 쓰는 것의 목표는 욕을 먹지 않는 게 아니다, 글을 쓰면서 욕을 먹을까에 신경 쓰는 것, 실수할까 걱정하느라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이 책의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다.


  이 책은 육아 문제를 심도 있게 분석하는 책도 아니고, 육아의 꿀팁을 제시해 주는 책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자 엄마로서 살아가는 삶을 털어놓은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이가 없는 나는 아이가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 이 책이 모든 엄마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다른 사람,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한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몰랐던 세상 한 귀퉁이를 보게 되고, 세상을 점점 더 많이 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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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장수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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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하기보다는, 아이를 키우는 삶이 어떤 것인지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아이가 없는 사람이 아이가 있는 사람의 마음속을 잠시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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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
라오 핑루 글.그림, 남혜선 옮김 / 윌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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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결혼을 할지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오래도록 서로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렇게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중국의 노부부 라오핑루 할아버지와 메이탕 할머니의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다. 60년을 함께한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반 년 동안이나 라오핑루 노인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림으로 그려두면 그 속에는 아내가 살아 있을 수 있다 여겼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정이 마음을 움직이니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함께한 60여 년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니 18권이나 되는 화첩이 되었다. 그 화첩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 이 책 『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다.


(위) 젊은 시절의 라오핑루와 메이탕 (아래) 노년의 라오핑루와 메이탕


둘의 시작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낭만적이거나 운명적이지 않았다. 둘은 집안에서 맺어준 사이였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마음에 들어했고, 정혼하자마자 60여 년간의 긴 연애를 시작했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둘의 삶도 평탄했겠지만 험난한 역사 때문에 둘은 고된 세월을 함께 견뎌내야 했다. 핑루는 젊은 시절 조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싸웠지만, 국민당 출신 부대에 소속되어 싸웠다는 것이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항일 전쟁이 끝난 뒤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을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고, 결국에는 내전까지 벌이게 되었다. 국민당이 패배해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함께 국민당 소속 부대에서 싸웠던 전우들도 대만으로 떠났지만, 핑루는 중국에 남아 있었다. 결국 핑루는 노동 개조(공산당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그런 세력으로 의심받는 사람은 강제 노동과 세뇌 교육을 받아야 했다.) 대상이 되어 1958년부터 22년 동안이나 가족들과 떨어져 살며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1년에 한 번만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직장에서는 남편과 이혼하라고 했지만, 아내는 남편의 결백함을 믿는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끝까지 남편과 헤어지지 않았다. 1979년에 노동 개조 처분이 철회되면서 핑루는 마침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신혼 시절 함께 누워 달을 바라보며 월병을 먹었던 기억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이미지 출처: http://www.visualdive.com


험난한 인생사이니만큼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쓸 수 있었을 텐데도, 핑루 할아버지는 일기를 쓰듯 담담하게 인생사를 기록한다. 로맨틱한 사랑의 말도, 애절한 이별의 순간도,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도 없다. 소소한 일상들만이 그림 일기를 채우고 있다. 연애 시절 호수 공원을 함께 거닐며 이야기하고, 신혼 시절 함께 침대에 누워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월병을 나누어 먹었던 기억 같은 행복한 일상부터 서로 떨어져 지내던 시절의 가난하고 고단했던 일상들까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살면서 겪은 수많은 소소한 일들이 무슨 특별한 연유도 없이 마음 깊은 곳에 흔적으로 남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소중히 기억되곤 합니다." 소중히 기억하고 있는 그 모든 순간이 사랑이었다.


눈이 나빠서 일어났던 일들을 가지고 서로 놀리는 핑루와 메이탕


핑루는 메이탕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는 원래 눈이 좋았는데도 근시인 메이탕에게 맞춰 늘 영화관 앞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다 근시가 되고 말았다. 메이탕은 논에 심은 모와 부추를 구별하지 못했고, 핑루는 배추와 양배추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눈이 나빠졌다. 그런데도 핑루는 드디어 메이탕에게 보조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메이탕이 "당신은 어째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수!"라고 타박을 놓아도 핑루는 허허 웃기만 했고, 화를 내도 오히려 얼마나 힘들었으면 화를 내겠냐고 가엽게 여겼다. 부록으로 실린 메이탕의 편지들에서는 반대로 메이탕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한다거나 보고 싶다, 그립다는 말은 없지만 자신과 아이들은 괜찮으니 당신 몸부터 챙기라는 말은 편지마다 빼놓지 않는다. 남편 없이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버거웠을 텐데도 남편부터 먼저 걱정하는 것이 메이탕의 사랑이었다.


2008년 메이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둘은 영영 이별하게 된다.

이미지 출처: http://www.visualdive.com


핑루가 돌아온 1979년부터 메이탕이 세상을 떠난 2008년까지 두 사람은 29년 동안 함께 지냈다. 그러나 고된 노동과 가난으로 둘은 건강이 많이 상해 있었고, 나이가 들면서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됐다. 둘이 번갈아 큰 병치레를 하느라 둘은 번갈아서 서로를 간호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함께 지낸 29년 중에서도 두 사람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낸 시간이 짧았던 것이 핑루에게는 큰 한으로 남았다. 그렇게 함께한 시간이 길었는데도 아쉬워하는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바다는 깊지 않네.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다보다 깊다네.

핑루와 메이탕의 이야기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의 깊이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일기장처럼 담담한 글과 소박한 그림에 담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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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
라오 핑루 글.그림, 남혜선 옮김 / 윌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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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을 때는 월병을 같이 먹고 떨어져 있을 때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상이 곧 사랑이었다. 이렇게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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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에는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을 옆에 끼고 공부했고, 지금은 책을 읽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전 앱을 켠다. 하지만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수십만 개나 되는 단어의 뜻을 일일이 사람이 정리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은 몇 번 해 봤지만. 명성 높은 영어사전인 메리엄 웹스터 사전의 편찬자 코리 스탬퍼가 쓴 에세이『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짐작만 했었던 사전 편찬자들의 고충과 보람을 알게 되었다. 영어사전을 만드는 영어 원어민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국어사전을 만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웹사전 기획자 정철의 대담집『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이다. 미국과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은 서로 언어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 다른 만큼 서로 다른 고충을 겪고 있지만, 사전 편찬자로서 공통된 고민을 품고 있었다. 


영어 VS 한국어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내내, 내가 아는 영어는 전체 영어의 아주 작은 일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hella(캘리포니아에서 '아주'라는 뜻으로 쓰이는 부사)', 'irregardless(앞에 부정접두사 'ir'이 붙어 있어서 정반대의 뜻일 것 같지만 regardless(무관한)와 동의어이다.)' 등등 이 책에서 난생 처음 본 영단어들 때문만은 아니다.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영어 문법이 영어 교재에 정리되어 있는 문법들처럼 질서정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they(그들)'가 3인칭 복수라고 배웠지만, they는 단수로도 쓰일 수 있다고 한다. "The crowd are loving it(사람들은 그걸 좋아한다)'이 미국 영어에서는 비문이지만 영국 영어에서는 비문이 아니다. 집합명사인 'crowd(군중)'는 미국 영어에서 단수로 취급되지만, 영국 영어에서는 단수로도, 복수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저자를 비롯한 웹스터 사전 편찬자들조차 예외와 불규칙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영어 문법의 늪에 빠져 혼란스러워한다. 그래서 저자는 영어를 사랑스럽지만 통제불능인 아이에 비유한다. 수십 년간 영어사전을 만들어온 원어민조차 영어를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영어 원어민이 아닌 한국인 독자인 나는 어떻겠는가. 머릿속 한쪽에 묻혀 있던 영어 문법 지식을 끌어올려도 저자가 말하는 영어에서의 미묘한 어감 차이와 문법상의 혼란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한국인이 쓴 국어사전 이야기를 읽으면서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 국어사전뿐만 아니라 백과사전, 한국어-외국어사전 등 다양한 사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국어사전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 세계 수십여 개 국가 수십 억 명이 사용하는 영어는 어느 한 국가 한 지역을 기준으로 표준을 정하지는 않는다. 반면 한국어는 국가가 어문 정책과 사전 편찬에 깊이 개입해 표준어 규범을 제시한다. 저자는 언어의 사회성을 위해 일관성 있는 규정이 제시되어야 하지만, 그 규정이 언어의 유동성을 막아서는 안 되고, 국어사전은 규범보다는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영어 사전에 대한 고민은 아무래도 남의 이야기이지만, 한국어와 국어사전에 대한 고민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지나칠 수 없는 고민이다. 또한『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에서는 번역자가 친절하게 번역해도 포착할 수 없었던 미묘한 어감 차이를 이 책에서 포착할 수 있다. '딱 부러지다'는 결단력을 뜻하는 쪽에 가깝고 '똑 부러지다'는 정확하다는 뜻에 가깝다. '만들다'와 '짓다'는 동의어지만 '친구를 만들다'는 자연스러워도 '친구를 짓다'는 어색하다. 한국어 원어민만이 포착할 수 있는 어감 차이다. 물론『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를 통해 영어에 담긴 영미권의 역사, 문화를 알게 되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우리말에 대한 고민과 우리말 속 미묘한 어감의 차이들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이 내 몸에 맞는 옷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에세이 VS 대담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는 저자가 사전 편찬자로서 수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느낀 고충과 보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에세이다.  어린 시절부터 활자 중독이었으며 언어, 특히 모국어인 영어와 사랑에 빠진 저자에게도 사전 편찬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get', 'take' 같은 간단한 단어에 수십 가지 뜻과 용법이 담겨 있어 'take' 항목 하나를 수정하는 데만 한 달 가량이 걸렸다. 하이픈을 단어에 넣을지 말지, 넣는다면 어느 위치에 넣을지 같은 사소한 문제들 앞에서도 언어 감각을 발휘해야 한다. 단어의 정의를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 매일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사람을 녹초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고충들조차도 저자는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유쾌하게 그려낸다. 반쯤 자포자기한 사람의 자조적인 농담이긴 하지만, 그 속에는 자기 직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보다 좀 더 무게감 있는 대담집이다. 저자는 다음Daum 어학사전을 담당하고 있는 웹사전 기획자로서, 어느새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사전과 사전 편찬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이 책을 기획했다. 저자는 수십 년 동안 사전을 만들어 온 편찬자 여섯 명과의 대담을 통해 우리나라 사전이 걸어온 역사를 돌아보고, 사전의 현재를 진단하고 사전의 미래를 꿈꾼다. 편찬자들의 사생활도 이야기하고 농담도 주고받긴 하지만 사전에 대한 좀 더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던 종이사전 편찬자 VS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웹사전 기획자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의 원서와『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 같은 해(2017)에 출간되었다. 그러나 둘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시대는 다르다.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의 저자 코리 스탬퍼는 수십년 간 종이사전을 만들어 온 사람이고, 이 책에서도 종이사전을 만들고 개정하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주로 이야기한다. 책 마지막에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들이 무료로 웹사전을 찾아보게 되면서 사전 편찬자들이 겪는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날로그 시대에 종이사전을 만들던 이야기다.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 아날로그 시대부터 수십 년간 사전을 만들어 오던 사람들과의 대화이지만,『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보다 디지털 시대 사전이 맞게 된 미래와 위기에 좀 더 많은 비중을 쏟는다. 인터넷과 데이터베이스 관련 기술이 발달하면서 웹으로 예문을 수집할 수 있게 되었고, 단어가 어느 연령대, 어느 분야에서 얼마만큼 쓰이는지도 정확히 통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웹사전은 종이사전에 비해 분량의 제약을 덜 받고, 언제든지 수정 가능하다. 남북 공동 국어사전을 만든다면 웹사전에서는 '북한 모드'와 '남한 모드'를 각각 만들어 변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종이사전을 옮겨받은 포털 사이트들은 웹사전의 내용을 채우고 수정하는 데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는다. 웹사전 편찬자인 저자는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수정을 할 뿐이다. 그러니 수십년 간 종이사전을 만들어 온 사람들의 경험은 전수되지 않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웹사전 기획자는 아날로그 시대의 종이사전 편찬자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디지털 시대에 사전이 나아갈 길에 대해 고민한다. 

 

사전 편찬자들 모두의 고민

 

  두 책은 영어와 한국어, 미국과 한국의 차이만큼 서로 다른 고민과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사전을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 웹스터 사전의 편찬자들이 문법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단어들, 비속어들을 사전에 넣었다고 항의를 받을 때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은 어떤 신조어를 넣고 넣지 않을지 고민한다. 사전에 실렸다는 것은 그 단어가 언어 속의 한 단어로 인정 받았다는 뜻이니까. 사전은 독자들에게 하나의 규범으로 여겨지기에, 영미권의 사전 편찬자들이나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이나 그에 따른 책임감을 질 수밖에 없다. 


  단어를 선정하고 난 다음에는 단어의 뜻풀이에 대한 고민이 이어진다. 얼마나 자세히 써야 할까. 백과사전만큼 자세히 써야 할까, 백과사전이 있으니 간단한 정의만 적으면 될까. 단어의 이 뜻은 단어의 저 뜻과 사실상 같은 말이 아닐까. 나는 이 단어의 뜻이 너무 자세하게 분류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편찬자는 그렇게 자세하게 분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단어를 정확한 단어로 표현했을까? 개는 개과에 속하는 동물이다, 개과는 개를 비롯한 동물들을 포함하는 생물 분류다, 이런 식으로 돌고 도는 뜻풀이를 한 것은 아닐까? 사전 편찬자들은 수십 만 개 단어 하나하나의 뜻풀이를 놓고 매일 고민한다. 


  단어의 뜻풀이로 한 항목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그 단어가 실제 언어 생활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보여주려면 예문을 넣어야 한다. 사전 편찬자들은 직접 예문을 만들기도 하고, 단행본과 신문, 잡지에서 모은 예문들 중에서 예문을 고르기도 한다. 요즈음에는 웹으로 예문을 수집할 수 있어 한결 일이 수월해졌다. 하지만 그 예문이 적절한지는 웹이나 인공지능이 판단할 수 없으니, 사전 편찬자들은 오늘도 적절한 예문을 찾아 헤맨다. 


  두 책을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언어생활과 지식을 더 풍요롭게 만든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혼자 최초의 영어사전을 만든 새뮤얼 존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척박한 땅에서 따분한 일을 계속하는 무해한 노역자"들은 종이사전, 아니 사전의 위기 앞에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이 아날로그 시대에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가 디지털 시대에도 이어지면서 우리의 언어와 지식에 든든한 토대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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