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꾼딸라 - 세계의 고전 인도편 2
깔리다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지식산업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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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색이 주인공인데, 샤쿤탈라와 두샨타의 비중이 너무 적다. 두 사람의 달콤하거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정작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1막에서 서로에게 두근거림을 느끼면서도 그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장면과 3막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밖에 없다. 두 사람이 비밀 결혼을 하고 샤쿤탈라가 두샨타의 아이를 가지고 두샨타가 인드라를 도와 악마를 물리치는 그야말로 주요 내용들은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거의 다 조연들의 대화로 전달된다. 두샨타의 악마와의 전쟁 이야기는 당시 무대 장치와 특수효과의 한계 때문에 직접 묘사하는 데 무리가 있었긴 하겠지만. 희곡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에는 보여주기와 들려주기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보여주기 방식을 너무 아꼈고 들려주기 방식을 너무 많이 썼다.

 

- 군신관계이면서도 친구인 두샨타 왕과 브라만 비두샤카가 말씨름하면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에서 얼마 전에 본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과 내금위장 무휼, 또는 세종과 대제학 정인지가 말씨름하면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비두샤카도 산스크리트 연극의 전형적인 개그 캐릭터라지만, 개성이 약하고 전형적인 이 작품의 인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는 캐릭터이다.

 

- 이야기의 극적인 전개는 약하지만, 시적인 대사들 속에 담긴 인물들 주변의 자연 풍경과 그에 빗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묘사는 섬세하다. 그리고 고대 인도의 풍습과 풍물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흥미롭다. 이에 대해서는 각주를 꼼꼼히 단 번역자의 공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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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꾼딸라 - 세계의 고전 인도편 2
깔리다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지식산업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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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쿤탈라와 왕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섬세하게 그려졌지만, 둘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의 일은 대부분 조연들의 대사로 전달된다. 타이타닉으로 치자면 잭과 로즈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다른 승객들의 대사로 전달하는 셈이다. 이 점이 당황스럽지만 연인들의 마음과 자연 풍경 묘사는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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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티볼리의 고백
앤드루 손 그리어 지음, 윤희기 옮김 / 시공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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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소설 모두 스포일러 있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보통 책 표지 속의 이 소년이 막스 티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겉보기에는 열두 살짜리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고단한 삶을 견뎌온 60세 노인인 막스의 모습을 이 소년의 모습에 겹쳐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어둠 속에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누군가(아마도 앨리스)를 바라보면서, 슬픔을 안으로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막스를 떠올릴 것이다.

 

 사실 이 그림은 ‘데니스 매케일의 초상’이라는 그림으로 이 책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그림이다. 그리고 이 그림 속의 소년이 막스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소년은 특별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큰 중절모 위에 작은 중절모가 얹힌 모호한 이미지의 원서 표지와 달리, 소년의 얼굴을 한 슬픈 막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한국판의 표지는 독자들에게 평생에 걸친 막스의 간절한 마음을 더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사람’이라는 설정이 신선하다고 하지만, 이 설정은 이미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쓰였던 설정이다. ‘벤자민...’의 주인공 벤자민 버튼은 막스 티볼리처럼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는 운명을 타고 났다. 70세까지의 수명을 살도록 예정되어 있고, 겉보기의 나이와 진짜 나이의 합이 70세라는 설정도 같고, 심지어 (소설 속에서) 둘은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이다.(막스 티볼리-1871년생~1930년 사망, 벤자민 버튼-1860년생~1930년 사망))

 

 하지만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막스 티볼리와 벤자민 버튼의 태도는 정반대이다. 벤자민은 사람들이 자신을 몇 살로 생각하든, 자신의 실제 나이를 그대로 밝히며 살아간다. 그 때문에 같은 또래인 힐데가르드와 결혼할 때도 젊은 여자를 탐하는 호색한 취급을 받고, 대학에 입학하려고 했을 때도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는 수모를 겪는 등의 고충을 겪어야 했다. 반면 막스는 ‘사람들이 네 나이가 얼마쯤이라고 생각하면 그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을 평생 동안 따라온 덕분에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대로 살아가야 하는 아픔을 평생 지고 살아가야 했다.

 

 벤자민과 막스 모두 쉽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더 절실히 와 닿는 것은 막스의 삶이다. 시간의 흐름과 자신의 기이한 운명에 휩쓸려 살아가는 벤자민과 달리, 그 둘의 강력한 힘을 이겨내려고 평생을 발버둥 쳐 왔던 막스의 삶이 더 치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원숙하다는 이유로 나이든 남자들을 좋아하는 힐데가르드의 취향 덕분에 벤자민은 쉽게 그녀와의 결혼에 골인한다. 하지만 막스는 50대 중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첫사랑이자 평생의 사랑인 앨리스에게 그저 ‘옆집에 사는 친절한 아저씨’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와의 사건에 휘말려 그녀가 떠나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실제 나이처럼 보이는 35세가 되었을 때 기적처럼 그녀를 만난 뒤에야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진짜 자신과 자신의 가족, 유일한 친구 휴이까지 버려야 했다. 힐데가르드와 결혼하기 위해 주위의 눈총 빼고는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았던 벤저민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벤자민은 자신이 젊어지고 힐데가르드가 늙어가자,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고, 젊은 여성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젊음을 즐긴다. 하지만 막스는 늙어가는 앨리스의 모습조차 너무나 사랑스럽게 여기고, 자신이 젊어지는 것을 들킬까봐 전전긍긍해 한다. 벤자민의 모습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 사랑이 식고 권태기를 겪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반면 막스의 사랑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앨리스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도 변하지 않는다. 앨리스가 그를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앨리스에 대한 그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또 하나 살펴볼 부분은 아들과의 관계이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아무 희망도 없이 하숙집 한 구석에서 술만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던 막스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친구 휴이에게서 앨리스가 자신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제 그에게는 앨리스와 자신의 아들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는 그 희망 하나를 붙들고 미국 전국을 휴이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아들을 찾았고, 마침내 앨리스와 자신의 아들을 찾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열두 살짜리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휴이의 아들 행세를 해야 했다. 자신과 함께 살자는 휴이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그는 앨리스와 아들과 함께 살겠다고 고집한다. 결국 휴이는 그를 위해 자살한다. 자신이 죽어야 고아가 된 막스가 앨리스와 아들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에. 휴이의 희생으로 앨리스와 아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된 막스는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게 된다. 아들 새미는 막스를 늘 ‘오리 대가리’라고 부르고 ‘잠꼬대를 유난히 많이 하고 늙은이 같은 데가 있는 괴짜’라고 생각하지만, 함께 지내기에 괜찮은 친구로 여기는 듯하다. 막스는 친구의 모습으로라도, 그저 새미의 곁에서 함께 지내고 새미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반면 벤자민은 자신의 아들 로스코가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지만, 점점 어려지면서 로스코에게 애물단지가 된다. 로스코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어려지면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잃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아버지에게 자신을 삼촌으로 부르게 한다. 로스코에게 나이를 거꾸로 먹는 아버지는 혐오의 대상,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돌봐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의 단 한 순간 친구로라도 아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삶과, 자신의 아들과 평생을 함께 하지만 아들에게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삶 중에 어떤 것이 더 힘겹고 어떤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하나 살펴볼 것은 시간과 운명을 대하는 태도이다. 벤자민 버튼은 자신이 점점 어려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시간과 자신의 운명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간다. 그는 어려지면서 점점 자의식을 잃어가고 마침내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의 상태로 생을 마친다. 벤자민 버튼의 정신도 나이를 거꾸로 먹기 때문에 그의 정신은 몸의 나이에 따라 흘러간 것이다.

 

 반면 막스 티볼리의 몸은 거꾸로 나이를 먹지만, 정신은 보통 사람들처럼 나이를 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어려져도 막스 티볼리의 정신은 어려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성장해 간다. 그는 자신이 아기의 모습이 되어 자의식마저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에 놓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이미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아직 자의식이 남아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점점 어려지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앨리스와 새미에게 숨길 수 없는 순간, 그리고 앨리스의 새로운 남편인 하퍼 박사가 앨리스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한 집안에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13번째 생일날(실제로는 60번째 생일날) 밤, 아무도 없는 강가로 나가, 작은 조각배에 몸을 뉘였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아팠을 때 처방전을 조작해 모아둔 약들을 삼킨 뒤 영원의 나라로 떠났을 것이다.

 

 벤자민 버튼이 나이를 거꾸로 먹는 특이한 운명을 가졌지만, 보통 사람들처럼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 막스 티볼리는 그런 자신의 운명과 시간의 흐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모든 것에 맞서 끝까지 한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벤자민 버튼...’이 시간에 휩쓸려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풍자한 블랙코미디라면 ‘막스 티볼리의 고백’은 시간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에 맞서 평생 동안 사랑하기로 선택해 왔던 인간의 치열한 삶을 담은 일대기이다. 내게 더 와 닿는 것은 후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가고 사랑하는 것을 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늘 나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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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티볼리의 고백
앤드루 손 그리어 지음, 윤희기 옮김 / 시공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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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거꾸로 먹는 남자의 시간을 거스르는 지독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사실 동명의 소설보다 이 소설에 더 가까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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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단편소설 걸작선 행복한책읽기 세계단편소설걸작선 4
얀 네루다 지음, 이바나 보즈데호바 외 엮음, 김규진 외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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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우리가 접하기 어려운 체코 문학을 접할 수 있게 이런 책을 기획했다는 의도 자체가 반갑다. 그리고 주한 체코 대사까지 이 책에 실릴 체코 단편소설들을 채택하는 데 참여했다니 나름대로 공을 많이 들인 책이다. 다만 카렐 차페크의「배우 벤다의 실종」만 체코어 직역이고, 나머지 단편소설들은 영어나 독일어 중역이라는 것이 아쉽다. 체코어를 전공하시는 교수님이 많이 바쁘셨던 건가. 그래도 중역 치고는 번역이 나쁘지 않다.

 

1. 금주인의 밤, 또는 미국식 즐거움(야로슬라프 하셰크)

 풍자소설로 이름을 얻은 작가답게 문장 하나하나가 단순명쾌하면서 재치 있다. 쾌락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쾌락을 지나치게 억제하는 것도 좋지 않은 법. '금주인의 밤' 덕분에 바사타 씨네 술집 매상이 더 올랐다는 촌철살인 같은 마지막 문장으로 깔끔한 마무리를 짓는다.

 

2. 나의 애견 가게(야로슬라프 하셰크)

 같은 작가가 쓴「금주인의 밤, 또는 미국식 즐거움」처럼 단순명쾌하면서 재기발랄한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다만 '나'와 점원 치첵이 하는 짓들은 사기와 동물학대에 가까워 그냥 웃고 넘어가기는 찜찜하다.

 

3. 마이너스 1(이르지 하우스만)

 돈의 가치가 마이너스가 되면서 사람들은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고 오히려 서로 돈을 떠맡기려 한다. 겉으로 보기엔 이타적인 행동이지만 사실은 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손해를 보기 때문에 손해를 덜 보려는 이기적인 행동.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인간의 본성을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다만 주요 등장인물 없이 상황들만 묘사하고 있어 소설이라기보다는 시놉시스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4. 프라하 가는 길(마리에 푸이마노바)

 한 소년의 어린 시절의 한 장이 끝나는 모습은 서글프다. 하지만 자라나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할 과정이겠지. 전쟁에서 돌아와 잠깐 동안의 정을 나누었던 아버지와도,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 같이 느껴졌던 시절의 고향, 그곳에서 모았던 자신만의 보물과도 헤어지고 소년은 무엇을 만나게 되었을까. 그들과 헤어지는 슬픔을 묵묵히 참아내며 새로운 것과 만날 준비를 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니 먹먹해진다.

 

5. 살로메의 죽음(이르지 카라세크 제 르보비츠)

늙은 살로메라,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살로메라면 세례 요한이 죽은 뒤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나서도 세례 요한의 환상 속에 살다가 권태에 못 이겨서 일찍 자기 목숨을 끊었을 것 같은데. 무엇보다도 자기가 늙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늙기 전에 목숨을 끊었을 것 같은데. 늙고 추해져서 청년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살로메는 생각지도 못해서 내 머릿속 살로메의 이미지와의 괴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살로메가 잠시 젊은 시절처럼 빛나던 춤추는 모습은 읽는 나까지 매혹시켰고, 살로메의 마지막 선택은 확실히 살로메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 리샤네크 씨와 슐레글 씨(얀 네루다)

화자의 생각과 달리 슐레글 씨는 정말 리샤네크 씨가 없어서 활개를 친 것이 아니라, 리샤네크 씨가 없는 허전함 때문에 더 허세를 부렸던 것 같다. 그렇게 오랫동안 미워했다 하더라도, 아주 사소한 것에서 화해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미소가 지어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7. 물의 정령(얀 네루다)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보석들이 한낱 반짝이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물의 정령' 리바르시 씨에게는 보석보다 더 귀한 마음씨를 가진 사위를 비롯한 가족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결말은 씁쓸하지 않고 따뜻하다.

 

8. 산속의 기적(이반 올브라흐트)

 남들한테 빵 조각 하나, 1, 2크로나를 구하지 못해 비굴해지던 유대인 바이니시가 사실은 1000크로나나 되는 비상금을 챙기고 있었다는 것이 반전. 그토록 많은 돈을 저축했으면서도 남들에게 구걸하거나 사기를 쳐서 빵조각이나 동전 몇 푼을 구하는 모습이 옹색해 보이지만, 그의 자식들을 향한 사랑만큼은 따뜻하다. 그가 배가 고파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유쾌한 노래에 그의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다.(하지만 그보다 저축해 놓은 돈으로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사 먹이는 게 더 나을 것 같긴 한데.)

 

9. 파우스트 박사의 집(알로이스 이라세크)

 욕심에 빠져 결국 파멸로 이르는 사람을 보여주는 설화 같은 작품. 나라면 하루는 은화를 음식과 생필품, 학용품, 옷을 살 돈, 교통비 같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사용하고 하루는 은화를 학비, 학자금대출과 우리 집 빚 갚을 돈, 여행비용, 우리 집을 살 돈으로 저축하겠다. 악마는 무서워서 소환할 엄두조차 못 내겠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갈 돈과 저축할 돈이 있고, (전설만 무섭지 않다면) 안락한 집에서 살 수 있는 걸 감사하면서 살겠다. 하지만 나도 막상 그 상황이 된다면 주인공과 같은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10. 붉은 용(요세프 이르지 콜라르)

이야기 짜임새가 탄탄한 작품. 범인의 범행 동기가 자세히 나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주인공과 범인 사이의 신경전을 잘 묘사해냈다. 마지막 주인공과 범인의 대결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다만 '로텐 드라헨'은 그냥 '붉은 용'으로, '슈바르첸 무터고테스'는 그냥 '검은 성모'라고 계속 표기했다면 표기의 일관성이 있었을 것 같다. 이런 집의 이름들은 체코어도 아니라 독일어 단어인데, 독일어판 중역이어서 독일어 단어로 표기된 것 같다.

 

11. 악령(지크문드 윈테르)

 내가 어린 시절 괴담집에서 읽었던 고골의 '마녀의 관(棺)' 비슷한 오싹한 괴담일 줄 알았는데, 결말에서 밝혀지는 진상은 싱겁다. 다만 별 것 아닌 거에 겁먹고 하루 종일 죽어라 종만 친 아버지와 하루 종일 종소리에 시달렸을 동네 주민들과 비명횡사한 매(鷹)가 안타까울 뿐이다.

 

12. 외투 논쟁(스바토플루크 체흐)

 우리 고전소설「규중칠우쟁론기」처럼 사물들을 의인화한 작품. 하지만 외투들의 대화라기보다는 그냥 선술집에 모인 사람들의 대화처럼 보이는 것이 아쉽다. 외투로서 사람 몸에 입히고, 땀에 찌들고, 세탁되고, 낡아서 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애환들을 담아서, 외투의 시각으로 본 주인들의 이야기를 했다면 진짜 외투들의 이야기처럼 실감 나고, 풍자의 효과도 더 컸을 것이다.

 

13.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블라디슬라프 반추라)

자기 아내와 동네 소년이 불륜을 저지른다고 오해를 했다 결국 오해를 풀었지만, 그 뒤 정말로 아내와 소년이 불륜에 빠져 버린 황당한 일을 겪은 주인공.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하지도,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려고도 하지 않은 채 책과 자신의 지식에 대한 자부심에 빠져 살다 큰 코 다치는 주인공의 모습이 남 같지 않아 씁쓸하다.

 

14. 발자국들(카렐 차페크)

눈길 위에서 갑자기 끊겨버린 발자국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주인공보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취객들과 불량배들을 상대하다 사소한 미스터리 때문에 불려온 경감의 애환에 더 마음이 쓰이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고양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녀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아내가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의 속내도 미스터리한 것이고, 경찰은 미스터리가 아니라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에 관심을 가진다는 경감의 말이 신선하면서도 속 깊은 말로 느껴진다. 오랜 연륜을 지닌 베테랑 경찰다운 통찰력이다.

 

15. 배우 벤다의 실종(카렐 차페크)

추리하는 과정은 흥미롭지만 그게 끝이어서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묻고 싶어진다. 증거를 좀 더 모아서 범인을 잡지, 왜 범인한테 진상을 다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범인한테 해코지당할 수도 있는 데다, 범인은 죄책감에 시달릴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 중 유일하게 체코어 직역이어서 그런지, 표기법이 다른 단편소설들과 다르다. 이 책 안의 다른 단편소설들과 달리 체코어 표기가 표준 외래어 표기법과는 맞지 않는데, 체코어 원본을 직역하신 교수님이 체코어에 가까운 발음이라고 고집해서 그렇게 된 듯싶다.

 

16. 사도(얀 와이스)

다른 사람들 수십 명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노인의 망상은 제 정신인 사람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그의 더 없이 화려하고 신비한 망상은 암울한 포로수용소의 현실을 잊고 싶은 사람들을 홀렸다. 이래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초현실주의자들, 표현주의자들이 정신병자들이 그린 그림들에서도 영감을 받은 걸까. 분명히 건강하지 못하고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상상이다.

 

17. 복사꽃 정원의 행복(율리우스 제이에르)

 액자 속의 이야기는 중국의 괴담집『요재지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 두 개를 엮어 놓은 것 같다. 적어도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유럽에 들어온 중국 문학 여러 편을 읽어보고 쓴 듯하다. 주인공들 이름이야 작가가 의도한 원래 한자를 알 수 없으니 한자로 표기할 수 없지만, 근대 이전의 이야기이니 무제(武帝)나 성제(成帝) 같은 중국 고유명사들은 한자음으로 표기해 주고 한자도 병기했으면 좋았을 걸.

 

 그리고 중국 고사나 한시에 대한 주석도 좀 더 꼼꼼히 달아놓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밍에가 소년(움브리아니의 전생)에게 떨어뜨린 부채에 적힌 시는 한나라 성제의 후궁 반첩여의『원가행(怨歌行)』을 살짝 변형시킨 듯하다. 반첩여의 원가행도 주석으로 함께 적어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액자 속 이야기에 나오는 시들은 한시(漢詩)라기엔 너무 직설적이고 주저리주저리 말들을 늘어놓고 있어서 함축적이지 못하다. 한시라면서 비유와 상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루비, 사파이어, 커튼보다 홍옥, 청옥, 장막 같은 한자어를 썼다면 동양 이야기라는 느낌이 더 잘 살았을 것이다. 루비, 사파이어, 커튼 같은 서양 언어의 단어들이 나오니까 서양인이 만들어낸 동양 이야기라는 느낌이 더 강해진다.

 

 요재지이에서 볼 법한 흔한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중국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금(琴)은 들어보진 못했지만 버드나무로 만든 유금(柳琴)이라는 악기는 있다니 소년의 그림 속 어머니 이름은 유금이었을 것 같다. 특히 금과 달리 유금은 이 책에서 말하는 '류트'와 모습이 비슷하다. 유금의 중국어 발음은 책에 나온 라오친이 아닌 류친이긴 하지만. 그리고 밍에는 명아(明娥) 정도? 밍은 밝은 명(明) 자일 가능성이 높고 에(e, 중국어 병음으로는 어에 가까운 발음이다.)가 병음인 한자 중에서는 여자 이름에 쓸 만한 글자가 고울 아(娥) 자이다. 아, 그리고 작가는 소년의 이름을 '황제(黃帝)'라고 지었지만, 나라면 황제(黃帝)의 본명인 헌원(軒轅)이라고 지었을 것이다. '황제(黃帝)'는 이름이라기보다는 군주에게 붙인 시호이고, 황제(皇帝)와 발음이 같아서 불경한 느낌도 있으니까.

 

 이런 설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액자 속 이야기는 전개가 눈에 훤하게 보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결국 아내가 일러준 금기를 어겨서 아내와 이별하겠구나, 밍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구나. 그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한 유물을 지니고 있던 걸 보면 밍에는 이전 왕조 황제의 후궁이나 궁녀였는데, 평생 동안 황제의 눈에 띄지 못했거나,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가 잃어서 평생을 외로워하다 젊은 나이에 죽은 여인의 혼령인 것 같다. 정에 굶주려 자신과 사랑할 사람을 찾다 마음에 드는 소년을 홀린 거겠지. 자기 무덤 근처를 지나가던 소년을 홀린 것도 아니고 태수의 행차를 따라가 저자 거리의 가게에 있는 소년을 찾아낸 데다, 소년이 자신에게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이따금씩 소년의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집념이 참으로 무섭다. 소년은 밍에와 헤어진 걸 안타까워했지만 조금만 더 지났더라면 밍에한테 정기 다 빨려서 죽었을 것 같다. 밍에와 헤어진 뒤에도 소년은 밍에를 찾는 일에만 시간을 허비하다 죽었을 것 같지만 말이다.

 

 내 생각에는 이 이야기가 움브리아니의 진짜 전생 이야기였을 확률보다는 움브리아니가 중국 여행에서 듣거나 책에서 읽은 중국 설화들을 가지고 자기를 대입시켜 망상하다가 만든 이야기였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다. 환상에 빠져 사는 남편에게 집 지키는 개 취급이나 받는 움브리아니의 아내가 가여울 뿐이다. 그래도 꽤 그럴 듯하게 만들어낸 중국풍 이야기이다. 나카시마 미카의 '벚꽃이 춤추며 질 때'를 리메이크한 중국어 노래인 '부생미헐(浮生未歇, 덧없는 삶은 끝나지 않았네)'이 이 단편과 잘 어울린다.

 

18. 꿈을 이룬 정원(얀 하블라사)

「복사꽃 정원의 행복」처럼 동양의 정원이 주 소재로 나오는 단편이지만, 중국 설화에 가까운「복사꽃 정원의 행복」과 달리 담담한 수필 같은 소설이다. 적막하고 고요하고 담담한 일본 단편 소설의 느낌과 비슷하다.「복사꽃 정원의 행복」보다는 주석을 꼼꼼하게 달아놓았다. 일본어 문장에는 일본어 원문까지 함께 써 놓았다.

 

19. 우리는 다섯 명이었어(카렐 폴라체크)

사실 이 소설은 단편소설이 아니라 장편소설 중 두 개의 에피소드를 뽑아온 것이다. 이 에피소드들만으로는 주인공 소년과 친구들의 캐릭터와 관계에 대해 깊이 알 수는 없지만, 천진난만한 소년과 친구들의 이야기가 잔잔한 웃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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