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란 어떤 그림인가
조용진, 배재영 지음 / 열화당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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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에 대해 미술사적 지식만 알고 싶은 사람으로써는 문방사우 장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림과 함께 읽는 동양화의 기본 지식 백과사전 역할을 충실히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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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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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3.


 르네상스 미술사 강의를 들을 때 교수님은 우리에게 매주마다 그림 하나씩을 지정해 주시고, 그 그림을 자기 눈에 보이는 그대로 설명하라는 과제를 내 주셨다.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과제 주제로 나왔을 때, 나는 그림 속 여인은 초록색, 갈색 등 여러 가지 색 옷을 입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수님은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이 상복이라는 학자들의 해석대로 보지 않고,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본 것을 칭찬해 주셨다. 교수님은 아무리 권위 있는 학자의 작품 해석이라도 그대로 믿지 말고, 스스로 작품을 보고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또한 기존의 권위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번역된 제목이나 원제 '보는 방식들(Ways of Seeing)'이나 미술 작품을 보는 하나의 표준 방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들도 공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영국의 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가 40여 년 전인 1972년 BBC TV에서 강의한 내용을 모은 이 책은, 미술 작품을 신성시하고 예술은 어떤 다른 것과도 구별되는 특별한 영역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 도전한다.

  버거는 1장에서부터 이전의 미술사학자들이 미술 작품에 대해 늘어놓았던 미사여구를 걷어내려고 한다. 그는 소득이 낮을수록 미술관을 교회 같은 신성한 장소로 생각하게 된다는 통계 결과를 제시하면서, 작품이 감동적이고 신비스러워진 것은 비싼 가격 덕분이라고 말한다. 복제 기술의 발달로 어디서나 작품의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미술 작품의 진품은 부자들의 것으로 인식되고,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고 지적한다. 미술 작품이 지닌 권위 덕분에 미술 작품 진품을 가질 수 있는 계층의 사람들은 자기 권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품 자체의 가치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진품에 남은 화가의 흔적이, 화가가 그 그림을 그렸던 순간과 우리가 그 그림을 보는 순간을 이어준다고 이야기한다. 미술 작품 진품은 그 작품이 그려졌던 당시의 역사적 순간을 간직해 우리 눈앞에 보여주고 있다.


(위) 한스 폰 아헨(1552-1615), <바쿠스, 케레스, 큐피드> (아래) 현대의 향수 광고


  그는 또한 미술 작품들뿐 아니라 사진, 광고 등 현대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들까지 시야를 넓힌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응시의 대상이 되는지 포착한다. 남성이 다른 사람에게 행사하는 능력으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여성은 자신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기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성 자신조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버거는 벌거벗은(naked) 몸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누드(nude)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자신을 전시하는 것으로 구분한다.  한스 폰 아헨의 작품 <바쿠스, 케레스, 큐피드>에서 케레스는 연인과 함께 있으면서도 연인이 아닌 그림 밖의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그 관객은 자신이야말로 그녀의 진짜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즉 그림의 소유주이다. 현대의 광고 이미지 속 여성도 이미지 밖의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이와 같이 누드 이미지에서 관객은 보통 남자이고 응시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 속 인물은 보통 여자이다. 버거는 이런 불평등한 관계가 지금까지도 많은 여성들의 의식을 형성한다고 말했는데,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현실은 그가 말한 모습 그대로다.


(위)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아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패러디한 배달 앱 광고


  버거는 또한 다른 회화 형식과 달리 그림 속 대상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해 내는 유화의 특성 덕분에 유화는 자신이 지닌 재산을 과시하는 형식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지 속 대상의 물질적인 특성을 생생히 전달한다는 공통점으로 유화와 광고를 연결시킨다. 물론 광고는 종종 사람들에게 익숙한 명화 작품의 언어를 빌려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신을 각인시킨다. 하지만 단순히 유화 작품의 언어를 빌리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이 이미지 속 물건들을 얻은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광고는 유화와 연결된다. 유화가 자신의 현재 상태를 과시한다면, 광고는 광고 속 물건을 얻으면 더 나아질 미래의 상태를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화가 현재 시제로 그려져 있다면, 광고 이미지는 언제나 미래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버거는 이전의 미술사 논의에서 배제되었던 젠더 문제, 경제적 문제 등을 함께 고려하며 다른 방식으로 미술 작품을 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서구 유화의 전통을 현대 소비 사회의 광고와 연결짓는 등, 미술 작품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이미지들을 포함한 시각 문화를 살펴본다. 미술사, 미학이라는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 속 다양한 시각적 체험과 요소들을 살펴보는 시각 문화 연구가 시작된 지 이미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권위를 지닌 기존의 해석과 미술 작품이 지닌 권위에서 벗어나 새롭게 보는 방식의 단초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는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이다. 

* 이 책의 도판은 모두 흑백으로 되어 있다. 열화당 쪽에서는 컬러 도판으로 교체할 수 있었지만 이곳저곳에서 컬러 도판을 가져오다 보면 도판들의 톤이 통일되지 않고 들쭉날쭉해져서 흑백 도판으로 통일하는 쪽을 택했다고 답변했다. 인쇄 기술을 사용해 도판들의 톤을 서로 비슷하게 조절할 수도 있지만, 모두 흑백 도판을 쓰는 쪽이 더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도판들의 톤이 서로 맞도록 조절하면서 컬러 도판을 싣는 쪽을 더 좋아하지만,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독자들 각자의 생각과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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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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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봐야 한다는 시각에서 벗어나 예술을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보는 방식을 제시한 책. 텍스트는 훌륭하지만 도판이 모두 흑백이고 화질도 좋지 않은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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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9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송상기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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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은글에 스포일러 포함. PC에서는 숨은글 기능이 적용되지만 모바일, 앱에서는 숨은글 기능이 적용되지 않으니 모바일이나 앱으로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 스포일러를 피하시는 분은 처음부터 글을 읽지 않으시면 됩니다.


 학교 국어 시간에 1인칭, 3인칭 소설에 대해 공부할 때 한 번씩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면 2인칭 소설은 없을까?' 멕시코의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쓴 이 소설 『아우라』가 바로 2인칭 소설이다. "너는 광고를 읽어. 이런 광고는 날마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너는 곱씹어 읽어 보지. 바로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광고야." 화자가 2인칭 '너'라고 부르는 인물은 주인공인 젊은 역사학자 펠리페 몬테로이다. 작가는 왜 이렇게 독특한 서술 기법을 사용했을까?


  작품 뒤의 해설에서는 주인공을 '너'라고 부르는 화자가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라고 설명한다. 화자는 다른 사람의 내면은 전혀 설명하지 않지만 주인공 펠리페가 어떤 것을 보고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빠짐없이 이야기한다. 소설 속의'너'를 모두 '나'로 바꾼다면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뀌게 된다. 1인칭 주인공 시점과 이 소설의 2인칭 시점은 어떻게 다른 효과를 줄까?

 펠리페는 작품 속에서 자신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괴기스러운 상황 앞에 놓여 있다. 죽은 남편의 회고록을 정리하면 거액을 지불하겠다는 귀족 노부인 콘수엘로의 광고를 본 펠리페는, 연구비를 벌 생각으로 콘수엘로의 저택에 찾아갔다. 펠리페는 회고록을 정리할 동안 자신의 저택에 머물러 달라는 콘수엘로의 부탁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낮에도 어두침침한 저택에서 펠리페는 존재하지도 않는 정원, 불에 타 죽는 고양이 같은 이상한 환상들을 보게 된다. 펠리페는 콘수엘로의 시중을 들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조카딸 아우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아우라는 때때로 이상행동을 보인다. 펠리페는 콘수엘로가 아우라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펠리페 자신이 이야기하는 1인칭이나 3인칭 작가가 말하는 것과 달리, 2인칭 시점은 펠리페의 머릿속 또 다른 자신이 펠리페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자신과 분리된 또 다른 자신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은 작품에 기괴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더하면서, 작품 자체의 결정적인 반전을 암시한다.

* 스포일러 부분 


접힌 부분 펼치기 ▼

 펠리페를 '너'라고 부르는 화자가 사실은 펠리페와 같은 사람, 펠리페의 또 다른 자아인 것처럼 콘수엘로와 아우라는 같은 인물이다. 아우라가 콘수엘로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고,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양을 잡고 손질하는 모습, 회고록과 사진 속에서 아우라와 똑같은 모습으로 묘사되는 젊은 시절의 콘수엘로는 이런 반전의 복선이 된다. 콘수엘로는 젊은 시절 동물들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실험을 한 끝에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간직한 아우라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우라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콘수엘로가 펠리페에게 보여준 환상인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든 주술을 사용하든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자동인형인지, 자신이 잠시 젊어지는 약을 마신 건지 알 수 없다.

 

펼친 부분 접기 ▲


  작품의 결말에서도 비밀의 진상은 완전히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비밀의 진상을 정확히 알고 싶었던 사람에게는 답답할 수도 있지만, 그 모호함이 작품을 더욱 더 괴기스럽고 신비스럽게 만든다. 흑백으로 된 고전 공포 영화를 볼 때와 같은 느낌을 주지만, 또 다른 자신이 머릿속에서 말하는 듯한 2인칭 시점은 영화로는 옮길 수 없는 문학만의 장치이다. 작품 뒤에 실린 작가 후기에서 작가는 "'너'라는 단어는 모든 시공간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넘나들며 유령처럼 움직일 때 나 자신이 된다.', '한 여성의 목소리로 젊음과 노년, 삶과 죽음을 분리할 수 없고, 젊음, 노년, 삶, 죽음이라는 이 네 가지가 서로를 부른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고 말한다. 작가의 말처럼 정체성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확고하고 통일된 것이 아니라는 것, 욕망은 젊음과 노년의 경계도 뛰어넘어 자기만의 생명력을 얻는다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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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9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송상기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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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해서 더 공포스러운 고딕 호러. 우아함, 신비, 기괴함, 에로티시즘이 섞여 색다른 매력을 만들어낸다. 2인칭 시점이라는 독특한 기법도 이 소설만의 수수께끼 같고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고전적인 분위기를 살려 영화화되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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