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 - 5개의 시선으로 읽는 유전자가위와 합성생물학
김응빈 외 지음, 송기원 엮음 / 동아시아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 외부의 영향으로 유전자 변형이 일어나면서 능력을 얻은 슈퍼히어로 캡틴 아메리카와 헐크

(아래) 유전자 변형 농산물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엽서


  헐크, 엑스맨, 스파이더맨, 캡틴 아메리카 등 유전적 돌연변이나 외부의 영향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으로 능력을 얻은 슈퍼히어로들이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유전자 변형 농산물(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은 전 세계 사람들이 의혹을 가지고 꺼려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삶 속에는 유전자에 대한 욕망과 두려움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일반 대중 중 유전자를 다루는 생명과학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생명과학은 일반 대중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인간의 유전체 전체를 분석하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2003년에 완료된 이후, 인간이 생명체를 설계하고 필요한 형태로 만들어내는 ‘합성생물학’의 시대가 열렸다. 2013년 이후에는 유전체 중 원하는 특정 부위를 마음대로 잘라낼 수 있는 ‘크리스퍼(CRISPR)’라는 유전자가위 기술이 개발되면서 합성생물학이 더 빠르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급속도로 생명과학이 발전하면서 우리 삶에 일어날 변화를 통합적으로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두 명의 생명과학자와 정책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자, 윤리학과 철학을 공부한 두 명의 신학자가 모여 함께 합성생물학을 공부하고,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합성생물학이 불러올 미래를 진단했다. 그 결과물이 이 책『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이다.



(위)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유전체 중 원하는 부분만 잘라 효율적으로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다.

(아래) 유전자 변형으로 다른 돼지들보다 근육양를 늘린 돼지들


  과학자들은 합성생물학이 어떤 학문이고, 지금 어떤 단계에 와 있는지를 설명한다. 합성생물학은 유전자를 부품처럼 원하는 대로 조립해 인공생명체를 합성, 제작하는 학문이다. 세균이 자신의 몸에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를 크리스퍼라는 유전자 사이에 저장해 두고 있다가, 다음에 같은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저장된 정보를 통해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 염기서열을 인식해 잘라버린다는 것이 2012년 밝혀졌다. 이것을 응용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기존의 유전자가위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다. 이미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동식물의 기능 향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에이즈 치료에도 사용되었을 정도로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합성생물학을 통해 만들어진 생명체가 자연으로 유출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한편 사회과학자는 합성생물학과 관련된 전문가의 수가 아직 적어 정책결정자들에게 자문을 제공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한정되어 있는 점, 합성생물학 연구를 지원하는 기업에 비해, 합성생물학을 반대하는 진영의 조직력과 자본이 부족해 양쪽이 동등하게 맞서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합성생물학 연구진들에 대한 관리와 시민들이 합성생물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한국 정부는 합성생물학이 산업의 측면에서 가져올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어 일반 시민과 소통하는 것에는 소홀하다는 지적은 흘려듣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신학과 윤리학, 철학의 입장에서 합성생물학과 그것이 미칠 영향을 고찰한다. 그들은 합성생물학이 창조주로서의 신의 위치를 위협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단지 생물학적 기능을 가지는 기계로 환원시킬 수 있기에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유전자까지 통제하게 되면서, 우연이 만들어내는 가치, 즉 진정한 자유가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리고 생물까지 기업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현실 앞에서, 내가 살아 있듯이 다른 생물도 살아 있음을 공감하는 능력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의 이야기가 다소 원론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선 생명과학이 지금 어디까지 왔고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대중 독자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페이지 수의 한계 때문에 더 깊이 있는 논의를 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과학뿐만 아니라 윤리학, 철학, 정책 등 다양한 관점에서 통합적인 논의를 시도한 것 자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과학의 과학적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이 미칠 영향을 인문학적으로 고찰할 때, 과학이나 인문학 중 한 가지 시각에서만 봤을 때보다 더 폭넓은 시각으로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 - 5개의 시선으로 읽는 유전자가위와 합성생물학
김응빈 외 지음, 송기원 엮음 / 동아시아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명과학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볼 것들에 대해 기초적인 내용들을 제시했다. 아주 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대중 독자들이 지금의 생명과학이 어떤 상황에 있고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 -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는 고전 속 심리여행
신동흔.고전과출판연구모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에 한창 빠져 있었을 때 관련 자료를 검색해 보다,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의 심리를 분석한 책을 발견했다. 우리 고전소설 속 인물로도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인터넷 서점을 뒤져봤더니  『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  라는 책이 있었다. 목차를 보니 한 챕터에 우리 고전소설 한 편씩, 그 소설 속 주인공의 심리를 분석하는 책으로 보였다. 


  책을 읽어보니 제목의 '프로이트'가 주는 인상과 달리, 치밀한 심리학적 분석이라기보다는 고전 속 주인공들의 심리 상담 같았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심리학자들의 이론과 고전소설을 좀 더 치밀하게 접목시켰으면 했던 독자들이라면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위로를 받았다. 고전소설 인물들의 상처에서 내 상처를 보았기 때문이다. 


  홍길동에게서는 피해의식에 짓눌려 사는 나를 발견했다.  홍길동은 서자로서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의적 활동을 하면서도 늘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는 율도국의 왕이라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뒤에도 아버지의 묏자리를 자신이 정함으로써 이복형 대신 적장자 노릇을 한다. 치열하게 노력해 나라까지 세웠는데도 서자 컴플렉스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의 모습이, 어린 시절 따돌림을 당하면서 생긴 피해의식과 어른이 된 이후 갑질을 당하면서 얻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 닮아 보였다. 그가 피해의식을 자양분으로 삼아 남다른 성취를 얻은 것은 본받을 만한 일이지만, 자기 안의 어두운 그림자를 씻어내서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꽉 막혀 있던 가슴이 조금은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심청에게서는 주변 사람들을 강박적으로 보살피려고 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볼 수 없어 오히려 자녀가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을 '부모화'라고 한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존 보울비John Bowlby는 이렇게 역전된 부모-자녀 관계에서 부모화된 자녀가 어떤 심리적 문제를 안게 되는지 설명한다. 부모화된 자녀들은 타인을 강박적으로 보살피고 그들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만, 항상 타인을 배려하는 입장일 뿐 정작 자신을 보살피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조차 스스로 외면한다는 것이다. 심청이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 대신 구걸을 하게 되면서부터 심청-심봉사 부녀의 부모 자녀 관계는 역전되었다. 심청은 아버지에 대한 강박적인 책임감 때문에,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고 인당수 제물이 되는 길을 택했다.  나는 부모화된 자녀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강박적으로 보살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오히려 인간관계가 악화되고 결국은 끊어지는 일을 겪으면서, 내 자신도 돌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다. 


  심청이 인당수 제물이 됨으로써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독립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저자의 해석은, 내게 해결의 실마리를 주었다. 심청은 왕비가 되었고, 아버지를 찾을 때도 자신의 정체가 선녀가 아닌 심봉사의 딸이라는 것이 밝혀질까 걱정한다. 예전처럼 아버지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도 염려하고 돌보게 된 것이다. 심봉사는 뺑덕어미에게 속아 재산을 잃지만, 나라에서 여는 맹인잔치에 자기 힘으로 찾아가면서 스스로 설 수 있게 된다. 내 자신이 스스로 서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다른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걸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깨달았다. 


  이 둘뿐만 아니라,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나태하게 살다 몰락하는 이춘풍, 사랑에 집착하면서 괴물이 된 상사뱀, 일방적으로 힘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억눌려 망가진 사도세자까지 모든 인물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보았다.  내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는 게 뼈아프기도 했고, 나 자신과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는 모습에 희망을 가졌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들과 함께 상담실 소파에 함께 앉아 상담을 받으며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나온 것처럼 후련했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두 가지 버전의 우렁각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 버전에서 원님에게 우렁각시를 빼앗긴 남편은 우렁각시를 그리워하고 원님을 원망하다 죽어버린다. 반면 두 번째 버전 속 남편은, 우렁각시가 왕에게 끌려가면서 '3년 동안 뜀뛰기를 연습해 두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그 말대로 뜀뛰기를 연습한다. 왕에게 끌려간 우렁각시가 3년 동안이나 웃지 않자, 왕은 우렁각시를 웃길 사람을 찾았다. 남편은 우렁각시를 웃기겠다며 입궐해 새털옷을 입고 뜀뛰기를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우렁각시가 웃자 왕은 남편에게서 새털옷을 빼앗아 입고 춤을 춘다. 그러자 남편은 용포를 입고 진짜 왕을 내쫓은 뒤, 우렁각시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간다.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두 번째 버전 속 남편은 아내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놓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아내가 말한 대로 열심히 뜀뛰기를 연습하면서 성장했다. 둘 중 어느 쪽이 될지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나 자신의 서사가 치유와 성장, 행복의 서사가 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 -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는 고전 속 심리여행
신동흔.고전과출판연구모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문학이 있어 다행이라고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준 책. 나의 서사가 치유와 성장, 행복의 서사가 되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마야나
C. 라자고파라차리 지음, 허정 옮김 / 한얼미디어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 스포일러 포함


라마야나는 어떤 작품인가


  최근 개봉한 인도 영화 <바라나시>에서는 바라나시에 온 순례자들이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의 기도를 가만히 들어보면 '라마'와 '시타'라는 이름이 들린다. <바라나시>뿐만 아니라 많은 인도 영화들에서 이 두 이름이 자주 언급된다. 이 두 사람은 인도의 고대 대서사시  『라마야나』 의 주인공이다.  『라마야나』 는   『마하바라타』 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대서사시로,  고대부터 내려오던 코살라 왕국의 왕자 라마의 이야기들을 기원전 3세기에 시인 발미키가 정리한 것이다. 발미키 이후로도 수천 년 동안 여러 문인들이  『라마야나』 를 자기 나름대로 새롭게 정리하고 썼기 때문에   『라마야나』 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수많은 버전의 『라마야나』  중 가장 오래된 버전인 발미키의 산스크리트어 서사시 『라마야나』 가 올해 4월부터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그 버전은 아직 구하지 못해서, 20세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인 차크라바르티 라자고파라차리가 소설로 재구성한 버전의  『라마야나』 를 읽었다. 고대 시인이 아닌 현대 작가가 시가 아닌 산문 형태로 다시 쓴 데다, 영문판(라자고파라차리가 쓴 원문은 타밀어(인도 타밀나두 지역에서 쓰이는 언어))을 중역한 것이니 고대의  『라마야나』 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발미키의   『라마야나』 가 가장 널리 인정받는  『라마야나』 의 표준이긴 해도 유일한 원본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라자고파라차리의  『라마야나』 를 읽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라자고파라차리가 현대인의 입장에서 A시인 버전에서는 이 장면이 이렇게 묘사된 반면, B시인의 버전에서는 저렇게 묘사되었다고 여러 버전의 『라마야나』를 비교 분석하고, 중간중간에 코멘트를 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힌두교의 정신을 담은 고전 라마야나


  라자고파라차리는 저자 서문에서 "카스트, 지역, 언어의 차이를 넘어 수많은 인도 국민들을 한 민족으로 결속시키는 것은  『라마야나』 와   『마하바라타』"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두 책이 인도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더 나아가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할 수 있는 다르마(dharma, 종교의 가르침, 법, 정의, 도리)를 담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라마야나』 의 주인공 라마는 다르마를 지키며 힌두교에서 말하는 모든 미덕을 갖춘, 이상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지금의 인도인들도 라마를 닮으려 하고 그를 인생 모델로 삼는다고 한다. 

  라마는 힌두교에서도 가장 강력한 3대신 중 하나인 비슈누 신의 화신이다. 비슈누 신은 
세상의 질서이자 정의인 다르마를 수호하고 인류를 보호하는 존재인데, 악마들의 왕 라바나가 인간들을 괴롭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라바나는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게서 어떤 신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은총을 받았다. 그래서 신 대신 라바나를 죽일 인간이 필요했고, 비슈누 신은 다사라타 왕의 네 아들로 다시 태어난다. 그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이 맏아들 라마였다. 

  그는 문무에 모두 능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외모까지 잘생긴, 완벽한 왕재였다. 부왕이나 백성들이나 모두 라마가 왕위에 오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계모 카이케이 왕비의 음모로 라마는 아무 죄도 없이 추방되어 14년 동안 숲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거친 숲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내 시타, 동생 락슈마나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시타의 미모 이야기를 들은 라바나가 시타를 납치한다.  라마는 동생 락슈마나, 원숭이 종족인 바나라 족과 힘을 합쳐 시타를 구하러 간다. 


  
저자 서문에서 "이 이야기를 읽고 나면 여러분에게 더 큰 용기와 더 강한 의지, 더 순수한 정신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책에서는 라마의 용기와 의지, 정신력을 통해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다. 그는 어떤 적도 두려워하지 않고, 크샤트리아(카스트 중 둘째 계급. 왕, 귀족 계급으로 전쟁에 임해 백성들을 보호한다.)로서 약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카이케이 왕비 소생으로 자기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된 이복동생 바라타가 다시 왕위를 돌려준다고 해도,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다"며 유배생활을 스스로 계속하니, 사람이 아니라 보살로 느껴질 정도다. 이렇게 완벽한 라마가 시타에 관한 일에는 이성을 잃는다. 여러 가지 고난들로 시타를 구하는 일이 자꾸 늦어지자 초조해하고 불안해한다. 또한 그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기에 겪는 한계들도 있다. 라마가 인간으로서 겪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그에게 공감하고, 그를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 내가 닮아갈 수 있는 존재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탄탄한 서사와 생생한 캐릭터들, 아름다운 묘사


  원래도 교훈적인 내용인데다 라자고파라차리가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러저러하다"는 코멘트를 자꾸 집어넣으니 도덕 교과서처럼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라마야나』 는 이야기의 재미와 문학적인 완성도도 놓치지 않고 있다. 특히 라바나가 시타를 납치하고, 라마가 시타를 구하기 위해 준비하고 전쟁을 치르는 과정의 서사는 기승전결이 잘 짜여 있다. 라바나가 어떻게 라마와 락슈마나의 눈을 피해 시타를 납치했는지, 어떻게 라마가 납치된 시타의 행방을 알게 되었는지, 그러고 나서 어떻게 바나라 족과 동맹을 맺게 되었는지 인과관계들이 착착 맞물리며 이야기는 흥미롭게 전개된다. 라마와 라바나의 전쟁에서도 라마 쪽이 일방적으로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니라, 라마가 위기를 겪기도 해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한다. 

 날아서 인도 본토에서 스리랑카 섬까지 바다를 건너가고, 부상당한 동료들을 위해 약초가 있는 산을 통째로 뽑아오는 등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현실감을 불어넣는 것은 생생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들이다. 인간이라기보다 신처럼 보였던 라마도 아내의 실종에 이성을 잃어버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라마의 동생 락슈마나는 당연히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는 형 대신 화를 내면서, 형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요리사가 쓴 채소로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듯이, 훌륭한 시인은 악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의 기교를 발휘한다."는 라자고파라차리의 말처럼, 악역인 라바나도 매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는 악마 왕국을 번영하게 만들 정도로 유능한 군주이고 스스로 노력해 신도 꺾을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시타의 마음을 얻고 싶기 때문에 그녀를 강제로 취하지 않고 시타를 설득하려 한다.(물론 시타가 끝까지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잡아먹겠다고 해 놓고서, 시타가 자기를 좋아하길 바라는 건 어리석다.) 라자고파라차리는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나태한 기질을 지닌 독자들이 악한 자에게 연민을 느끼기 쉽다고 또 잔소리를 하지만, 잘 만든 캐릭터에 매력을 느낄 뿐인 독자들을 매도하지는 말자. 

  그리고 아름다운 묘사들은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든다. 서사시가 아닌 산문 형태로 다시 쓰였고, 영문판을 한 번 더 거쳐 한국어로 옮겨졌으니 언어의 울림이나 운율 같은 것을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숲의 아름다운 풍경, 시타의 아름다운 모습, 라마와 시타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갖가지 비유들은 『라마야나』 에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보는 『라마야나』

  
  라마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여인을 모욕하고 상처를 주었다. 동맹군을 얻기 위해 적을 뒤에서 공격해 죽이는 비겁한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타의 정절을 의심해 죄없는 그녀가 온갖 고초를 겪게 했다. 라자고파라차리는 『라마야나』 에 대한 이런 비판들이 증오의 심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라마의 결점이 우리 삶에서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라마의 미덕을 받아들이면 된다면서. 하지만 무조건적인 비난이 증오만 표출하는 것과 달리, 건설적인 비판은 우리를 더 나아가게 한다. 

  라자고파라차리가 『라마야나』 를 소설로 재구성하고  중간중간에 코멘트를 넣은 것도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의 일이다.(1957년) 그렇기 때문에 그의 관점도 지금의 우리와는 크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라자고파라차리는 모든 남자가 라마처럼 여성들의 구원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물론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고 억압하는 남성보다는 훨씬 낫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남성이 여성을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여성 스스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그리고 라마가 시타의 정절을 의심한 것은 후대에 힌두교에서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인 내용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 이 부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의 라마야나의 결말은 라마와 시타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해피엔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대 힌두교인들은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기 위해 시타에게 시련을 더 겪게 하는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안겼다. 라자고파라차리 버전 『라마야나』 에서는 시타가 한 번의 시련만 겪고 오히려 그를 통해 자신의 정절을 증명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많은 버전들에서 시타는 라마와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정절을 의심받아 숲으로 쫓겨나고, 결국에는 대지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애니메이션 <블루스를 부르는 시타>에서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현대 여성 니나가 남편에게 의심 받고 버림 받은 시타에게 공감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렇게 현대의 우리로서는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는데도 가부장 제도의 질서 안에서 희생된 시타에게 연민을 가지고, 여성에게만 정절을 강요하는 태도가 어떤 비극을 낳았는지 보는 등, 새로운 시각으로 『라마야나』 를 볼 수 있다. 

 라자고파라차리가 말했듯이, 인도의 고전들은 모든 면에서 인도인들의 국민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라마야나』 는 인도 사람들의 종교관과 가치관을 그대로 담고 있고, 그 중 많은 것들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우리도 공감하고 본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인도인이 아니더라도 『라마야나』  자체의 재미와 문학적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현대인의 시각으로 『라마야나』 를 다시 읽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라마야나』 는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가지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낳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