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쉘터 공간 - 예술과 공학이 만나다 스마트 쉘터 공간 1
고경호 외 지음 / 미진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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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보금자리에 대한 예술과 공학의 고민. 큰 그림을 우선 제시했다. 그림을 채워나가는 것은 후속 연구에서 이루어질 일이다. 도판이 작아서 본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공학 파트가 일반인이 읽기에는 좀 어려운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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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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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현실 속 여인들에 대한 꼼꼼한 관찰을 토대로 생동감 있고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어낸 것이 보인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은 영화 쪽 결말이 더 강렬하고 통쾌하게 느껴졌지만, 원작 속 결말도 그녀다웠다고 생각한다. ‘쌈닭‘은 시장 아주머니의 수다처럼 현실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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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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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포일러 포함 


 19세기 후반 러시아 오룔 지방에서 끔찍한 사건이 잃어났다. 젊은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귀에 끓는 납을 부어 살해한 것이다. 사람들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사람을 그토록 잔혹하게 죽였다는 것에 놀랐다. 오룔 출신인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고향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영화 <레이디 맥베스>의 원작인「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이다. 


  레스코프는「러시아의 맥베스 부인」과 이 책에 실린 다른 단편「쌈닭」을 비롯해 고향 오룔 지방의 다양한 여인들을 그려낸 소설을 12편 쓰려고 했지만, 실제로 소설로 쓰여진 것은 이 두 편이다. 두 단편의 주인공 모두 선하고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인물들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음먹은 일을 한다. 그래서 남들에게 맥베스 부인(셰익스피어의 희곡「맥베스」에서 여주인공 맥베스 부인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남편에게 악행을 더 부추긴다.), 쌈닭(원제는「여전사」)이라고 불리지만, 그녀들은 이렇게 응수할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뿐이라고.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영화 속 캐서린(플로렌스 퓨, 원작에서는 카테리나)의 모습. 캐서린은 가난 때문에 나이 많은 상인에게 팔리듯 시집 온 후 답답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아간다.


"깨어나면 또 다시 러시아의 권태, 상인 집의 권태가 찾아온다. 그걸 견디느니 차라리 목을 매고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이다."


  영화에는 이 문장이 나오지 않지만, 영화 속 주인공 캐서린(원작에서는 카테리나)의 목소리로 읽히는 듯 하다.(영화에서는 배경이 영국으로 바뀌었으므로 '러시아'를 '영국'으로 바꾸면) 젊은 나이에 나이 많은 홀아비 상인에게 팔리듯 시집을 온 카테리나의 삶은 권태의 연속일 뿐이었다. 시집 온 지 5년이 되었어도 아이가 없다고 시아버지와 남편은 카테리나를 죄인 취급 한다. 친한 친구도 없고, 오락거리도 없다. 영화를 먼저 봐서 그런지 소설을 읽을 때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집 안에서 고집스럽고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던 캐서린(플로렌스 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자신에게 제멋대로 구는 하인 세르게이(영화 속 세바스찬)를 만나면서 그녀의 삶은 바뀐다. 세르게이는 카테리나의 방에까지 찾아와 그녀를 유혹했고, 그녀도 세르게이에게 빠져든다. 그녀는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욕망에 눈을 뜨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카테리나의 불륜을 눈치채면서 사건은 비극적으로 흘러가게 된다.


 마침 남편은 장사 때문에 먼 도시에 나가 있는 참이었다. 카테리나는 몰래 시아버지에게 독버섯이 든 수프를 먹여 죽인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늙은 시아버지가 노환으로 죽었을 거라고 여기고 의심하지 않는다. 남편은 돌아와서 카테리나가 불륜을 저지른 것을 알고 있었다며 그녀를 추궁하지만, 그녀는 남편 앞에서 당당하게 세르게이와 키스하고 관계를 가진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남편이 카테리나와 세르게이를 폭행하다 오히려 그 둘에게 살해당한다. 이제 유산을 차지하고 세르게이와 잘 살아보려 했는데, 사람들이 남편의 어린 조카(영화에서는 사생아)를 데리고 와 그애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한다. 그러자 카테리나와 세르게이는 아직 어린 조카까지 목을 졸라 죽여버린다. 


악행을 저질렀는데도 들키지 않아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집안을 차지하는 캐서린


이 사건 이후부터 원작과 영화는 다른 길을 걸어간다. 영화에서 세바스찬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캐서린과 자신의 죄를 폭로하지만, 캐서린은 모든 일은 세바스찬과 하녀 안나가 저지른 것이라고 누명을 씌우고, 자신은 유유히 집안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 반면 원작에서는 마침 교회에서 축일 행사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던 한 무리 동네 청년들이 카테리나와 세르게이의 불륜 행각을 훔쳐보려다, 둘이 조카를 죽이는 것을 목격한다. 이러니 변명할 여지도 없다. 둘은 그대로 끌려가 감옥에 갇히고,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진다.


 카테리나(또는 캐서린)가 저지른 악행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억압하던 것들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원하는 것을 손에 얻는 영화판 결말을 생각해 보면, 원작의 결말은 답답하게 느껴진다. 자기 뱃속 아이의 아버지가 세바스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망설임 없이 그를 버리는 캐서린과 달리, 카테리나는 끝까지 세르게이를 놓지 못한다. 영화 속 캐서린에게 세바스찬은 낭만적인 연애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성적 욕구를 푸는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카테리나는 세르게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카테리나는 철저하게 파멸한다. 


 악행을 저지를 때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주도적으로 행동하던 그녀가 사랑 때문에 무너지다니. 세르게이가 카테리나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다른 여자와 애정 행각을 벌이고 카테리나를 모욕하는데도, 그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하는 카테리나가 답답했다. 세르게이에 대한 애증 때문에 괴로워하던 그녀는 세르게이의 새 애인을 붙잡고 볼가 강에 함께 뛰어들어, 마지막으로 세르게이에게 복수를 한다. 영화의 결말만큼 통쾌하지는 않지만 이 또한 그녀다운 결말이었다. 왜 세르게이가 아니라 바람 핀 상대를 죽였는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세르게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유형지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도록 둔 것이 죽이는 것보다 더 큰 복수였다고 생각한다.(세르게이는 또 다른 애인을 만들고 유형지에서도 특유의 잔꾀로 그럭저럭 잘 살아갔을 것 같지만.)


 19세기의 독자들에게는 악녀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잘 사는 결말이 납득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테리나가 처절하게 파멸하는 결말이라고 해서, 작가가 그녀를 단죄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레스코프는 톨스토이처럼 자기 작품 속 죄인들을 단죄하지 않고, 판단하지도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그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 지는 독자의 몫이다. 


쌈닭


「쌈닭」의 주인공 돔나는 카테리나처럼 극단적인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다. 어떤 때는 따뜻하고 푸근하지만, 어떤 때는 놀랄 만큼 이기적이다. 망설이지 않고 선의를 베풀지만, 그 선의라는 것도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 멋대로의 선의다. 그녀는 아주 선하지도, 아주 악하지도 않은 보통 사람이다. 


 그녀의 선의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것인지는 레카니다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돔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며 귀족 부인들에게 레이스나 다른 옷감을 방문판매하고 있다. 레카니다도 그렇게 알게 된 젊은 귀족 부인이었다. 레카니다는 남편에게 권태를 느끼고 자기 집에 세든 청년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 청년이 레카니다를 속이는 바람에 전 재산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는다. 돔나는 며칠 동안 레카니다를 자기 집에서 묵게 해 준다. 레카니다는 남편에게 돌아갈 여비만 달라고 애원하지만, 돔나는 레카니다가 그 동안 먹고 입고 자는 데 든 비용을 따지며, 고관 대작에게 매춘을 하도록 권한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그것이 레카니다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레카니다는 호강하면서 살 수 있고, 자신은 소개비를 챙길 수 있으니까. 울며 불며 거절하던 레카니다는 결국 고관대작에게 자기 몸을 팔고, 귀족들의 정부, 고급 창녀로 전락하게 된다. 


 돔나가 그저 남편에게 돌아갈 여비만 줬더라도 레카니다는 창녀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돌아간 레카니다를 남편이 받아줬을지는 모르지만) 그런데도 돔나는 여전히 자신이 레카니다에게 선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원망하는 레카니다를 배은망덕하다고 여긴다. 그녀의 말발이 얼마나 구성진지, 분명 돔나의 잘못인데도 레카니다가 얄미워질 정도다.(물론 자신을 거두어준 귀족 부인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 것은 레카니다의 잘못이었고, 돔나가 그것을 폭로할 때는 좀 통쾌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다름 없이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에 충실하게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기꾼에 도둑놈이고 자신은 너무 순진하고 선량해서 당하고만 산다고 항상 한탄한다. 


 그렇게 뻔뻔스러운데도 돔나를 미워할 수 없다. 이 소설의 화자가 돔나의 이런 이기적이고 뻔뻔한 면을 훤히 들여다보면서도 여전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처럼. 화자는 돔나의 이야기를 듣다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돔나를 싫어하거나 돔나와 연을 끊지는 않는다. 그리고 돔나가 자기 자식뻘인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등골만 빼먹히고 초라하게 죽어간 것을 진심으로 연민한다. 완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으니까. 


 다 읽고 나면 시장이나 동네 아주머니의 수다를 한참 듣고 난 기분이 든다. 돔나 특유의 푸근하고 수다스러운 말투를 잘 살려서 더 그렇다. 레스코프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구어체와 방언을 살리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번역자는 돔나의 오룔 사투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하지만, 표준어로 번역된 문장들을 통해서도 돔나의 수다스러움과 오지랖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레스코프의 이 두 단편은 만들어진 이야기라기보다 현실에서 뚝 떼어온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두 단편 속 주인공들은 선하고 정의롭지 않지만, 어디선가 실제로 살아간 인물들 같다. 거친 세상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고 때로는 양심도 내려놓다 감정 때문에 무너지기도 않는 현실의 인간들. 비극적인 결말을 맞아도 천벌을 받았다기보다는 그들의 삶이 그렇게 흘러갔구나, 싶다. 이런 자연스러움과 현실감이 레스코프의 매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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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카렐 차페크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비딕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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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은 다소 엉성하고 로봇에 대한 발상들은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로봇에 대한 발상들이 이 작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그것도 100여 년 전에. 로봇을 통한 현대 사회 비판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함께 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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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카렐 차페크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비딕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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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로봇Robot'은 '노동, 부역'이라는 뜻의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따온 말로,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Capek가 그 개념을 만들어냈다.('로봇'이라는 신조어 자체는 카렐과 공동 창작을 하던 형 요제프가 제안했다.) 사람과 비슷한 인조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는 차페크 이전부터도 있었지만, 과학의 힘으로 인조인간을 만들어 대량생산하고 판매한다는 발상, 현대적 의미의 인조인간은 차페크에게서 처음 나왔다. 그러니 로봇을 처음 등장시킨 그의 1920년 희곡『로봇』은 최초의 로봇 SF라고 할 수 있다. 


  차페크의『로봇』은 1921년 체코 프라하에서 초연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23년에는 런던에서『로봇』 을 놓고 버나드 쇼와 G.K.체스터턴 등 당대의 유명 작가들이 공식 토론을 벌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로봇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했다. 그러나 차페크 자신은 로봇보다 인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 작품을 썼다고 밝혔다. 


 차페크에게 로봇은 생산성과 효율성만 따지느라 인간을 하나의 부품처럼 대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선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무표정한 승객들의 모습에서 로봇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승객들은 아무 생각 없이 출근을 하고 일을 한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인간으로서 배려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노동자를 더 싼 값에 부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노동자의 생산량을 더 늘릴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극 중에서 로봇의 인권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여주인공 헬레나에게 '로숨 유니버설 공장(작품 속 로봇을 만들어내는 회사)'의 관리자들은 말한다. 로봇 덕분에 사람들은 더 싼 값에 빵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로봇은 인간이 아니니 임금을 주지 않아도 돼서, 로봇이 만드는 빵의 가격이 저렴해진 것이다.

이렇게 인류는 로봇의 노동 덕분에 식량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로숨 유니버설 공장의 사장 해리 도민은 로봇 덕분에 인간이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는 세상을 꿈꾸었다. 노예들의 노동 덕분에 정치와 문학, 예술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데만 몰두할 수 있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인간이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여유롭고 즐겁게 살아가길 바랐다. 그러나 노동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인간은 즐기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게 되었고, 노동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도 의욕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아이도 낳지 않게 되었다. 그 사이 헬레나의 요청으로 로봇 개발자 갈 박사는 자의식을 가진 로봇을 개발해내고, 로봇들은 인간의 종 노릇을 그만두고 인간의 주인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결국 로봇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로숨 사의 건축 담당자 알퀴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류를 절멸시킨다. 로봇을 이용해 신세계를 만들려고 했던 도민도, 로봇을 동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려 했던 헬레나도 죽임을 당한다. 알퀴스트는 아직까지도 스스로 노동을 하는 인간이어서 유일하게 살려둔 것이다. 로봇들은 알퀴스트에게 자신들도 인간처럼 번식을 하고 싶다고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지만, 로봇의 설계도는 로봇의 대량생산을 두려워한 헬레나가 불태워버렸다. 알퀴스트는 로봇들을 해부하며 방법을 찾아보려 하지만, 과학자가 아니라 건축가인 그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이 죽어버렸으니 뭔가를 할 의욕도 없다. 그러나 상대방이 해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해부당하겠다며 서로 희생하려고 하는 두 로봇 프리무스와 헬레나(인간 헬레나에게서 이름을 따 왔다.)를 보고, 알퀴스트는 그들이 인간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퀴스트는 그들을 풀어주면서 그들을 통해 생명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두 로봇이 기계라면 알퀴스트는 두 로봇이 생명을 낳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작품 속 로봇들은 기계라기보다는 유기물들을 합성해서 만든 인조 생명에 가깝다. 도민은 로봇이 여러 부품을 조합해 만들어지지만 조립된 뒤 부품들 스스로가 자라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로봇들을 해부하면 피가 나오고, 로봇들은 고통스러워한다. 기계라기보다는 인조인간이었기 때문에 헬레나가 더욱 더 그들을 인간처럼 여기고 도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서로 사랑하면서 인간성을 얻게 되었다. 카렐 차페크가 이 최초의 로봇 SF에서 말하려고 한 것은 서로 사랑하고, 스스로 땀 흘려 일할 수 있는 것이 인간에게 인간성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작품 자체를 보면 구성이 다소 엉성하다. 그리고 작품 속 로봇에 대한 발상들은 식상하게 여겨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봇에 대한 이후의 상상들은 이 작품에서 시작되었고,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이제 작품에서처럼 로봇이 산업 현장에 투입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완전히 대체하는 단계는 아직 아니지만, 로봇과 인간이 공생하는 세상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인간 복제도 시도되고 있다. 복제인간에게서 인간에게 필요한 장기들을 적출하는 상상을 하는 SF들도 나왔다. 로봇과 복제인간 등,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과 유사한 존재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올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고민에서 더 나아가 인간 아닌 것들과의 공존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차페크는 원래 의도했던 현대 사회 비판과 함께 미래에 대한 고민까지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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