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교회 대한민국 권력 비판 3부작
김진호 외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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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세상을 향한 것. 교회 또한 사회 안에 있고 정치, 경제 등 사회적 상황과 무관할 수 없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가 사회적 영성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게 한다. 제도화된 종교나 교리에서 예수와 그가 우리에게 준 사랑과 연대의 메시지로 돌아가자는 취지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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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 - 시리아 내전에서 총 대신 책을 들었던 젊은 저항자들의 감동 실화
델핀 미누이 지음, 임영신 옮김 / 더숲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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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책이 빼곡하게 들어찬 서가 앞에 두 청년이 있다한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고 있고다른 청년은 서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도서관 풍경이다그러나 이 도서관은 한 달에 600여 차례의 폭격이 쏟아지는 도시 한복판에 있다.


폐허가 된 다라야 시내


 이 도서관이 있는 도시 다라야는 8년째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의 중심에 있다시리아 내전은 2011년 시리아의 민주화 운동과 그 밖의 국내외 정세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시작되었다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권의 민주화 운동 아랍의 봄 50여 년째, 2대에 걸친 아사드 일가의 독재가 계속되어 왔던 시리아에도 찾아왔다다라야 시민들이 독재에 저항하는 비폭력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로 아사드 정부는 다라야를 봉쇄하고 매일 쉴 새 없이 폭격을 퍼부었다다라야의 시민들은 식량과 의약품도 보급 받지 못한 채 매 순간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었다.


다라야의 젊은이들이 세운 지하 비밀 도서관의 모습


  많은 시민들이 견디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그러나 이 모든 진실을 기록하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도시에 남은 젊은이들이 있었다폭격이 시작된 지 1년쯤 지난 2013년 말그들은 무너진 폐허에서 찾아낸 책들로 지하 도서관을 만들기 시작했다책을 안전하게 둘 수 있는 지하공간을 찾아 서가와 소파발전기를 들여놓았다폐허 속에서 1 5천여 권의 책을 모으고종류별로 분류하고목록을 작성해 서가에 꽂아 정리했다다라야 사람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폭격을 헤치고 지하 비밀 도서관을 찾았다.

  그 뒤 2015년에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델핀 미누이는 페이스북에 올라 온 사진을 통해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에 대해 알게 되었다독재 정권의 폭력에 맞서 도서관을 지은 청년들의 이야기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그녀는 2016 8월까지 스카이프(Skype, 국제 인터넷 전화 서비스)로 다라야의 청년들과 대화했고그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지하 비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다라야 사람들


  세상 한구석에 고립된 다라야의 젊은이들에게 책은 밖을 향해 열린 문이었다그들은 다라야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지만온 세상이 책 안에 있었다그들은 배우기 위해미치지 않기 위해정신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책을 읽었다책장 사이에서 미지의 세상을 탐험할 때 책은 견고한 성벽이자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전쟁을 멈추지는 못했지만 전쟁으로 받은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그들은 정부의 검열을 거친 책을 읽어야 했고토론의 장도 가지지 못했다오히려 전쟁으로 사방이 막힌 뒤 그들은 지하 도서관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고 강의를 열고 토론을 펼치게 되었다책은 수많은 사상과 해방을 위한 이야기들을 전해 주었다시리아의 작가 무스타파 칼리파가 12년 동안의 수용소 생활을 그린 책껍질은 아사드 정권의 잔혹함을 고발하면서 강제로 갇힌 상황을 견뎌내는 법을 알려주었다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가 이스라엘에게 억압당하는 현실을 그린 시들은 마치 그들 자신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이제는 식상해진 자기계발서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도 위기 상황 속에서 자아를 지키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책은 그들에게 저항의 수단이자 해방의 통로가 되었다.


폐허가 된 다라야 도서관


  그러나 도서관 밖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아사드 정부는 점점 더 맹렬하게 다라야를 공격했고외부에서 구호품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버렸다다라야 청년들이 기대한 것과 달리 유엔과 세계의 다른 국가들은 다라야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아니주지 않았다결국 2016 8정전협정이 이루어지고 다라야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강제이주되었다그리고 지하 도서관은 지금까지도 폐허로 남아 있다

  책이 패배한 것일까그들의 저항은 실패한 것일까그러나 책을 파괴할 수는 있어도책의 힘을 믿고 책이 심어준 것들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사람들의 영혼은 파괴할 수 없다지하 도서관은 폐허가 되었지만 도서관을 세운 젊은이들은 살아남아 더 나은 삶더 나은 시리아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작가는 그들에게 약속했었다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이 세상에 나와 그 도서관에 있는 다른 책들과 나란히 놓이게 될 거라고그 약속은 반만 지켜졌다시리아가 자유로워지는 날다라야에 다시 도서관이 세워지고 이 책이 그곳의 서가에 꽂히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세상의 야만 앞에서도 여전히 책의 힘을 믿는 사람들에게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은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다

P. S. 1. 
 https://edition.cnn.com/videos/world/2016/10/06/daraya-syria-secret-underground-library-orig.cnn/video/playlists/atv-syria-civil-war/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을 다룬 CNN 뉴스의 영상 링크. 지하 도서관의 모습과 친구들에게 '사서'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도서관을 사랑했던 소년 암자드, 전쟁터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지만 정부군에게 희생된 청년 오마르의 모습이 나온다. 오마르는 이 책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암자드도 적은 분량이지만 등장한다. 

P. S. 2. 

지하 도서관에서 다라야의 젊은이들이 함께 보았던 단편영화 <2+2=5>(원제 Two & Two). 이란 출신 영국 감독 바바크 안바리 Babak Anvari 의 작품이다.(책에는 바바크 아미리 Babak Amiri 로 잘못 나와 있다.) 2+2=5라는 잘못된 답을 강요하는 수학 교사에게 저항하는 영화 속 학생들에게 다라야의 젊은이들은 힘찬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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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의 문화사 Breakfast
헤더 안트 앤더슨 지음, 이상원 옮김 / 니케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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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터를 얹은 노릇노릇한 토스트가 하얀 바탕 위에 놓여 있는 표지부터 눈길을 끌었다. 책을 펼쳐 보니 맛있어 보이는 음식 사진들과 아침식사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읽게 되었다. 언제부터 아침식사를 먹게 되었는지, 아침식사 메뉴로 어떤 음식들을 먹었는지 등등, 너무 일상적이어서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아침식사 속에는 우리가 몰랐던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소박한 빵과 음료로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중세시대 농민들, 14세기 프랑스의 『모뒤스 왕과 라티오 왕비의 책』에 실린 삽화다.


  근대 이전 동양에서 하루 식사는 아침과 저녁, 두 끼였다. 점심을 정식 식사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근대 이전까지 아침식사를 먹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다고 한다. 모든 쾌락이 억압되었던 중세시대에 교회에서는 아침식사를 하는 것을 탐식의 죄로 여겼다. 가벼운 점심과 그보다 더 든든히 먹는 저녁 두 끼면 하루 식사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농민이나 육체노동자, 어린이나 병자 같이 몸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아침식사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 아침식사는 신분 낮은 육체노동자들이나 병자, 어린아이들이나 먹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일반인들은 아침식사를 한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러나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상류층 사람들은 아침식사를 금기시하는 관습을 신경쓰지 않고 아침식사를 했다는 기록을 남겼고, 17세기 신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낡은 옛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다. 18세기 중반에는 아침식사의 인기가 높아져 부유한 사람들은 집에 아침식사를 위한 전용공간까지 마련했다. 교회가 아침식사를 허용하지 않았던 또 한 가지 이유는 아침식사를 할 때 술을 함께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서였는데, 사람들이 해외무역을 통해 들어온 커피와 차를 술 대신 아침식사 때 마시자 교회는 아침식사를 금지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렇게 아침식사는 하층민들이 먹는 천박한 끼니가 아니라 사회 모든 계층이 누리는 합리적인 식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사탄이 마녀들을 위해 차린 식사'는 수프와 오트밀, 빵, 우유, 치즈였다. 참 소박하고 가정적이다. 


  그럼 아침식사로 무엇을 어떻게 먹었을까? 죽은 비교적 저렴하고 만들기도 쉽고, 아침에 먹어도 소화하기 힘들지 않아 전세계에서 사랑 받아온 아침식사 메뉴다. 심지어 17세기 말 스웨덴에서 열린 사탄의 파티에서도 사탄이 마녀들을 위해 손수  수프와 오트밀을 차렸다고 한다. 사탄의 파티 음식 치고는 참 소박하고 가정적인 음식이다. 이웃끼리 같이 먹고 마시는 소박한 식사까지도 사탄과 마녀의 파티로 몰아붙인 것은 아닌가 싶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베이컨과 달걀, 팬케이크로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 왔지만 19세기 후반 도덕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자는 '클린 리빙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아침 식단을 단순한 곡물 중심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했고, 식탁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혼합 곡물 시리얼이 개발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얼을 오래 보관하고, 시리얼의 주된 고객인 어린이들의 입맛을 겨냥하기 위해 시리얼에는 많은 양의 설탕이 들어가게 되었으니 사실상 건강식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럼에도 시리얼은 여전히 건강식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최초의 전기 토스터인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토스터 D-12. 1909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전기 토스터는 번거로운 토스트 굽기를 간편하게 만들어주면서 아침 식탁에 혁명을 불러왔다.


  한편 아침식사의 변화를 통해 변화해 가는 시대상도 엿볼 수 있다. 전기가 널리 보급되고 아침식사를 위한 가전제품들이 부엌에 자리잡으면서 아침의 주방 풍경은 크게 변화했다. 전기 토스터가 생기기 전 토스트의 양면을 적당히 노릇노릇하게 굽는 것은 꽤 까다로운 일이어서 여성의 살림 솜씨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인 1909년 최초의 전기 토스터가 출시되고, 1926년에는 빵이 다 구워지면 자동으로 툭 튀어 오르는 토스터가 최초로 출시되었다. 커피메이커, 토스터, 달걀과 소시지를 굽는 전기팬까지 20세기 전반기 동안 아침식사를 편하게 하는 각종 가전제품들이 등장했다. 부모의 도움 없이 아이 혼자 우유에 타먹을 수 있는 시리얼, 인스턴트 커피, 팬케이크 믹스 등도 아침 식사를 만들 때 수고를 덜어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날 선물로 아침식사 준비에 필요한 주방 기기를 추천하는 1950년대의 광고들, 1세기 전과 다름없이 "여성은 밝고 예쁜 모습으로 아침식사를 차려서 가족, 특히 남편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답습하는 1950년대의 요리책들을 보면 아침식사 준비 같은 가사노동은 여성의 일이라는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것이 보여 씁쓸해진다. 


 작가가 미국인이다 보니 유럽과 미국에서의 아침 식사를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서양 외 다른 지역의 아침식사에 대해서도 언급되지만 다소 뭉뚱그려져 나온 것이 아쉽다. 특히 아시아에서 수억 명이 먹고 있는 밥은 소단원 하나로 다뤄질 가치가 있는데 아침 식사 메뉴의 이야기에 곁다리로 나오는 것이 아쉽다.(원서에서는 다른 제목이었겠지만, 밥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 '밥 죽 빵'이라는 소단원 제목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그리고 작가가 역사가가 아닌 음식 전문 저술가이다 보니 큰 흐름을 잡고 역사책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내용들이 500여 페이지에 걸쳐 단순나열되는 느낌이라 읽다 보면 좀 지칠 수 있다. 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의 선명한 사진들과 아침식사에 관련된 온갖 사소한 이야기들을 보고 있으면 아침을 거르는 사람이라도 아침을 먹고 싶어질 것이다. 아침을 먹으면서 보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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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조선 남자 - 음식으로 널리 이롭게 했던 조선 시대 맛 사냥꾼 이야기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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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먹방의 민족이라고 하지만, 우리 민족만이 먹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세계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SNS에 먹방, 쿡방 영상을 올리고 있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고,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세계 공통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조상들이 음식을 먹고 만들었던 이야기는 흥미롭다. 마냥 엄격, 근엄, 진지할 것 같았던 우리 조상들도 먹는 즐거움 앞에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즐겨먹는 음식이 옛날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요리하는 조선 남자』는 그런 소소한 재미를 안겨주는 역사책이다. 


  조선시대 남자가 요리를 한다니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궁중 요리는 남자 요리사인 숙수熟手들의 몫이었다. 궁중 밖 민간에서 요리는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지만, 음식을 해 줄 아내나 며느리, 딸이 자신보다 일찍 죽었거나 혼자 귀양을 가 있는 신세인 경우에는 남자라도 직접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집권층인 노론 벽파가 천주교도 박해와 함께 남인 등 반대세력을 몰아낸 사건) 때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섬에서 생선밖에 먹을 수 없었던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에게 고기가 먹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정약용은 섬에 사는 들개를 잡아먹으라고 하면서 개를 잡는 덫 만드는 방법과 개고리 요리법까지 적어서 보냈다. 그런데 이 개고기 요리법은 박제가가 고안해낸 것이었다. 박제가는 '한 번에 냉면 세 그릇, 만두 백 개를 먹는 먹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다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를 중시하는 실학자였으니 직접 개고기 요리를 만들 법 했을 것이다.


  박제가의 동료 실학자였던 이덕무는 먹는 것과 식사 예절에 깐깐했지만, 그도 역시 맛있는 것, 특히 단것을 좋아했다. 박제가가 자기가 먹던 단것을 빼앗아 먹었다고 이서구에게 하소연할 정도였다. 이덕무는 자신의 책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카스텔라 레시피를 적어두기까지 했다. 재료는 지금의 카스텔라 재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계란을 거품 내어 공기를 집어넣고 카스텔라의 질감을 폭신폭신하게 한다는 내용이 없으니, 이덕무가 이 레시피대로 만들었다면 카스텔라가 아니라 계란빵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안타까워서 이덕무에게 꿀카스텔라, 녹차카스텔라, 블루베리카스텔라 등등 종류별로 카스텔라를 대접해 주고 싶을 정도다. 이덕무의 학문적 선배인 박지원은 직접 고추장을 쑤어 아들에게 보냈지만, 아들의 답장에 고추장 이야기가 전혀 없자 "왜 한 번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니? 무람없다, 무람없어. ...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주면 앞으로도 계속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라고 아들에게 투덜거렸다. 서책만 들여다 봤을 것 같은 선비들이 직접 요리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레시피를 전수하고,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을까 반응을 궁금해 하다니, 귀엽지 않은가.


궁중 음식연구원에서 재현한 '고종 냉면'. 고종은 야식으로 냉면을 즐겨먹었는데, 동치미 국물과 면 위에 편육을 십자 모양으로 가지런히 얹고, 나머지 빈 곳은 배와 잣으로 채웠다고 한다. 


  이 책의 제목을 '먹방하는 조선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먹는 것 자체를 즐겼던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고려 말의 유학자 이색은 먹는 것을 좋아해서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 감상을 시로 남기기까지 했다. 고려 말 조선 초를 그린 사극들에서 깐깐하고 보수적인 성격으로 묘사되는 이색을 생각해 보면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학생식당에서 밥 먹은 횟수를 출석 횟수로 쳤기 때문에 억지로 맛없는 성균관 급식을 먹어야 했던 유생들은, 복날 특식으로 나오는 개장국을 좋아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냉면을 끼니나 간식으로 즐겨먹었다. 검소한 태도를 중시했던 성리학도, 지금처럼 냉장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한 상황도 먹는 즐거움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책에 실린 조선시대 음식들의 일러스트


참외를 즐겨먹었던 조선 사람들을 그린 책 속 일러스트. 하정우가 영화 <황해>에서 김 먹방하는 장면을 패러디했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의 요리법들도 함께 실려 있다.『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요록要錄』, 『수문사설謏聞事說』등의 조선시대 요리책에서 찾은 요리법들이다.(이 요리책들의 목록은 본문 뒤에 부록으로 정리되어 있다.) 지금과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어 흥미롭다. 조선시대에도 백숙을 만들었지만, 냄비 대신 항아리에 넣고 항아리 주둥이를 종이로 막고 쪘다. 그리고 찹쌀과 마늘이 들어가는 지금의 삼계탕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찹쌀을 닭고기와 먹으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고 마늘도 닭 요리에 넣지 않았다. 흔히 일본 음식으로 여겨지는 회도 고려 때부터 즐겨먹었는데, 무채 위에 굵게 썬 회를 놓는 지금과 달리 회를 가늘게 썰어 무채와 섞어 먹었다고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지금의 요리법과 비교해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요리법과 함께 조선시대 음식들을 그린 일러스트, 음식과 관련된 풍속화, 풍속화를 패러디해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먹는 모습을 코믹하게 그린 삽화까지 실려 있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출판사에서 공을 들여 책을 만든 것이 보인다. 


 작가 자신도 책을 즐겁게 썼다고 한다. 수백 년 전의 요리들과 그것을 즐긴 사람들의 이

야기를 찾는 일이 신기하면서도 이채롭고 즐거웠다는 것이다. 독자들 또한 작가가 찾아

낸 조선시대의 음식 이야기를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책에 나온 음식이나 그 음식에서 

유래한 음식을 먹을 때 이 책에 나온 이야기들을 떠올린다면, 우리의 현재 속에 남아 

있는 조선과 조선 사람들의 삶이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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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로자 - 만화로 보는 로자 룩셈부르크
케이트 에번스 지음, 폴 불 엮음, 박경선 옮김, 장석준 해제 / 산처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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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는 1871년 파리 코뮌과 로자의 탄생으로 시작된다.


  1871년 3월 18일, 평범한 민중들이 봉기해 파리를 장악하고 자유, 평등, 박애의 정치를 펼치려 했다. 이렇게 시작된 파리 코뮌은 두 달간 계속되다가 프랑스 정부군에게 진압되면서 막을 내렸다. 봉기가 시작되기 13일 전인 3월 5일, 폴란드의 작은 도시 자모시치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에게 장미라는 뜻의 이름 '로잘리아 Rosalia'를 붙였을 때 부모는 아이가 정원의 장미처럼 아름답고 조용하게 살아가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 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 1871-1919 는 자기가 태어난 직후에 일어난 파리 코뮌처럼 짧고 격렬한 삶을 살았고, 혁명의 붉은 장미로 남았다. 

  『레드 로자』 는 영국의 만화가 케이트 에번스 Kate Evans 가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삶을 그린 만화다. 거의 모든 대사가 로자와 그녀의 가족, 동료들이 남긴 글을 재구성한 것일 정도로 이 책은 그녀의 삶을 충실하게 전달한다. 그것도 모자라 각 페이지마다 그녀가 했던 말의 원문을 싣고, 작가가 어떤 것을 각색하고 축약했는지까지 알려준다. 똑같은 글을 두 번 읽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로자에 대한 것 중 어느 하나라도 잘못 전달되지 않게 하려는 작가의 성실함이 보인다.  

  로자는 어느 면에서나 소수자였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인이었고, 폴란드인들 중에서도 차별 받는 유대인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보통선거권도 가질 수 없는 여성이었고, 평생 한 쪽 다리를 절었던 장애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약자와 억압 받는 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았다. 로자가 살던 바르샤바에서는 빈부격차가 극심했고, 교수형당한 사회주의자들의 시체가 성문에 매달렸다. "구름과 새와 사람의 눈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내 집처럼 느낄 뿐이다." 이 말처럼 그녀는 고국을 떠나 살면서 세상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의 눈물도 외면하지 않았다.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마르크스의 경제 분석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녀는, 저서 『자본의 축적』 에서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폭로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무력과 손을 잡고 자본주의가 아직 뿌리 내리지 않은 지역을 수탈하면서 부를 축적해 왔다.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패권과 이권을 놓고 경쟁하다 1차 세계대전을 치르기까지 했으니, 전쟁은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강요한 야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점점 발전하면서 자본주의 내부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로자는 자본주의가 내부 모순으로 스스로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작가는 로자의 이러한 자본주의 분석을 만화로 전달하고, 때로는 만화에 직접 개입해 보충설명을 하기도 한다. 

  로자는 혁명에 있어서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담고 있었던 독일 사회민주당(로자는 폴란드 사회민주당원으로서 독일령 폴란드 지역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독일로 이주했다가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게 되었다.)은 궁극적인 목표가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선언했으면서도, 자본주의,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길을 걸어갔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독일 의회에서 전쟁 예산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로자의 동료 카를 리프크네히트 의원이었다. 로자와 리프크네히트는 사민당에서 독립한 '독립사민당'을 창당하고 시대의 야만에 맞섰지만, 1919년 1월 15일 사회민주당 보수 세력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처형당했다. 


죽기 직전 로자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인생의 순간들이 흘러간다.


만화는 로자의 투쟁과 사상을 만화와 주석으로 꼼꼼하게 전달하면서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만화 고유의 장점도 놓치지 않는다. 설명들이 빼곡히 적힌 장면들과 로자의 삶을 가만히 묵상하게 만드는 서정적인 장면들이 공존한다. 로자가 감옥 안에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행복을 느끼는 장면, 로자가 죽기 직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생의 수많은 순간들, 그녀가 영원히 떠난 후 애완 고양이 미미가 지키고 있는 빈 책상, 그 위에 있는 그녀의 마지막 글. "내일이면 혁명이 또 다시 일어나 치켜들 무기를 쟁강거릴 것이다. 그리고 찬란한 승리를 선포할 것이다. 나는 있었고, 으며, 있을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가 없는 빈 책상 앞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다소 투박하고 과장된 극화체 때문에 '못 그렸다', '추하다'라는 평도 듣는다. 그리고 노골적인 성애 묘사 장면들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 휘날리는 듯한 손글씨로 쓰인데다 컷을 빽빽하게 메운 대사들은 가독성이 떨어진다.(원서에서도 대사들은 손글씨로 쓰여 있다.)  하지만 그런 요소들조차 곱고 평탄하게 살기보다 평생 거칠고 험난한 길을 걸었던 로자에게 어울린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는 그녀가 혁명뿐만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도 열정적이었고 자신의 뜻에 충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이 책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삶과 사상, 투쟁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에게 좋은 입문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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