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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조선 남자 - 음식으로 널리 이롭게 했던 조선 시대 맛 사냥꾼 이야기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15년 11월
평점 :
우리는 먹방의 민족이라고 하지만, 우리 민족만이 먹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세계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SNS에 먹방, 쿡방 영상을 올리고 있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고,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세계 공통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조상들이 음식을 먹고 만들었던 이야기는 흥미롭다. 마냥 엄격, 근엄, 진지할 것 같았던 우리 조상들도 먹는 즐거움 앞에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즐겨먹는 음식이 옛날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요리하는 조선 남자』는 그런 소소한 재미를 안겨주는 역사책이다.
조선시대 남자가 요리를 한다니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궁중 요리는 남자 요리사인 숙수熟手들의 몫이었다. 궁중 밖 민간에서 요리는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지만, 음식을 해 줄 아내나 며느리, 딸이 자신보다 일찍 죽었거나 혼자 귀양을 가 있는 신세인 경우에는 남자라도 직접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집권층인 노론 벽파가 천주교도 박해와 함께 남인 등 반대세력을 몰아낸 사건) 때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섬에서 생선밖에 먹을 수 없었던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에게 고기가 먹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정약용은 섬에 사는 들개를 잡아먹으라고 하면서 개를 잡는 덫 만드는 방법과 개고리 요리법까지 적어서 보냈다. 그런데 이 개고기 요리법은 박제가가 고안해낸 것이었다. 박제가는 '한 번에 냉면 세 그릇, 만두 백 개를 먹는 먹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를 중시하는 실학자였으니 직접 개고기 요리를 만들 법 했을 것이다.
박제가의 동료 실학자였던 이덕무는 먹는 것과 식사 예절에 깐깐했지만, 그도 역시 맛있는 것, 특히 단것을 좋아했다. 박제가가 자기가 먹던 단것을 빼앗아 먹었다고 이서구에게 하소연할 정도였다. 이덕무는 자신의 책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카스텔라 레시피를 적어두기까지 했다. 재료는 지금의 카스텔라 재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계란을 거품 내어 공기를 집어넣고 카스텔라의 질감을 폭신폭신하게 한다는 내용이 없으니, 이덕무가 이 레시피대로 만들었다면 카스텔라가 아니라 계란빵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안타까워서 이덕무에게 꿀카스텔라, 녹차카스텔라, 블루베리카스텔라 등등 종류별로 카스텔라를 대접해 주고 싶을 정도다. 이덕무의 학문적 선배인 박지원은 직접 고추장을 쑤어 아들에게 보냈지만, 아들의 답장에 고추장 이야기가 전혀 없자 "왜 한 번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니? 무람없다, 무람없어. ...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주면 앞으로도 계속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라고 아들에게 투덜거렸다. 서책만 들여다 봤을 것 같은 선비들이 직접 요리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레시피를 전수하고,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을까 반응을 궁금해 하다니, 귀엽지 않은가.

궁중 음식연구원에서 재현한 '고종 냉면'. 고종은 야식으로 냉면을 즐겨먹었는데, 동치미 국물과 면 위에 편육을 십자 모양으로 가지런히 얹고, 나머지 빈 곳은 배와 잣으로 채웠다고 한다.
이 책의 제목을 '먹방하는 조선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먹는 것 자체를 즐겼던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고려 말의 유학자 이색은 먹는 것을 좋아해서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 감상을 시로 남기기까지 했다. 고려 말 조선 초를 그린 사극들에서 깐깐하고 보수적인 성격으로 묘사되는 이색을 생각해 보면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학생식당에서 밥 먹은 횟수를 출석 횟수로 쳤기 때문에 억지로 맛없는 성균관 급식을 먹어야 했던 유생들은, 복날 특식으로 나오는 개장국을 좋아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냉면을 끼니나 간식으로 즐겨먹었다. 검소한 태도를 중시했던 성리학도, 지금처럼 냉장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한 상황도 먹는 즐거움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책에 실린 조선시대 음식들의 일러스트

참외를 즐겨먹었던 조선 사람들을 그린 책 속 일러스트. 하정우가 영화 <황해>에서 김 먹방하는 장면을 패러디했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의 요리법들도 함께 실려 있다.『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요록要錄』, 『수문사설謏聞事說』등의 조선시대 요리책에서 찾은 요리법들이다.(이 요리책들의 목록은 본문 뒤에 부록으로 정리되어 있다.) 지금과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어 흥미롭다. 조선시대에도 백숙을 만들었지만, 냄비 대신 항아리에 넣고 항아리 주둥이를 종이로 막고 쪘다. 그리고 찹쌀과 마늘이 들어가는 지금의 삼계탕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찹쌀을 닭고기와 먹으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고 마늘도 닭 요리에 넣지 않았다. 흔히 일본 음식으로 여겨지는 회도 고려 때부터 즐겨먹었는데, 무채 위에 굵게 썬 회를 놓는 지금과 달리 회를 가늘게 썰어 무채와 섞어 먹었다고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지금의 요리법과 비교해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요리법과 함께 조선시대 음식들을 그린 일러스트, 음식과 관련된 풍속화, 풍속화를 패러디해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먹는 모습을 코믹하게 그린 삽화까지 실려 있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출판사에서 공을 들여 책을 만든 것이 보인다.
작가 자신도 책을 즐겁게 썼다고 한다. 수백 년 전의 요리들과 그것을 즐긴 사람들의 이
야기를 찾는 일이 신기하면서도 이채롭고 즐거웠다는 것이다. 독자들 또한 작가가 찾아
낸 조선시대의 음식 이야기를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책에 나온 음식이나 그 음식에서
유래한 음식을 먹을 때 이 책에 나온 이야기들을 떠올린다면, 우리의 현재 속에 남아
있는 조선과 조선 사람들의 삶이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