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작업실의 자코메티 - 예술과 예술가들 3
제임스 로드 지음, 오귀원 옮김 / 눈빛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내가 알고 있는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 는 젓가락처럼 보일 만큼 마르고 길쭉한 조각상들을 주로 만들었던 조각가였다. 올해 초 열린 자코메티 전시에서 그가 조각가일 뿐만 아니라 화가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그린 독특한 초상화들도 보았다. 그리고 자코메티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작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8개월쯤 지나서 그 영화가 정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다. 그 영화가 <파이널 포트레이트>다.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실제 제임스 로드(위)와 영화 속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제임스 로드 역의 아미 해머(아래)
<파이널 포트레이트>는 자코메티(제프리 러쉬)가 미국인 작가 제임스 로드(아미 해머) James Lord, 1922~2009의 초상화를 18일에 걸쳐 완성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아무래도 18일 동안 그림을 그린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이다 보니, 지루하다는 평이 많다. 원작인 『작업실의 자코메티』 를 도서관에서 빌려왔지만, 미리 읽으면 영화가 더 지루해질 것 같아 일부러 영화를 본 뒤 원작을 읽었다.


(위) 영화 속에서 자코메티와 자주 갈등을 빚는 아내 아네트(실비 테스튀)
(아래) 불륜 행각을 벌이고 있는 자코메티의 정부 카롤린(클레망스 포에시)과 자코메티(제프리 러쉬)
원작을 읽으면서 처음 든 생각은 영화 쪽이 MSG를 쳤다는 것이었다. 자코메티와 아내 아네트(실비 테스튀) 사이의 갈등, 창녀 카롤린(클레망스 포에시)과의 불륜 행각은 원작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다. 자코메티와 아네트의 관계도 그저 평범한 부부로 묘사되고, 영화에서처럼 자코메티가 아네트를 냉대하는 모습은 원작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코메티의 정부 카롤린은 원작에서 그저 자코메티가 최근에 함께 작업하고 있는 모델이라고 몇 번 언급되기만 할 뿐 한 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자코메티가 카롤린과 불륜 관계를 가졌고 그것 때문에 아네트가 힘들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제임스 로드는 자신의 책에서 자코메티의 가정사를 시시콜콜히 파고들지 않는다.

제임스의 초상화를 끊임없이 그렸다 지우면서 고뇌하는 자코메티
영화 안에서 드라마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랬겠지만, 그런 자극적인 요소들이 들어가면서 원작에서 자코메티와 제임스가 나누었던 예술에 대한 대화들은 줄어들었다. 영화에도 자코메티가 세잔과 피카소에 대해 평가하는 대사가 나오기는 하지만, 원작에서 자코메티와 제임스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부터 현대 화가들까지 다양한 화가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자코메티가 평생 동안 갈고 다듬어 온 예술관도 원작에서는 더 자세하게 설명된다.
"중요한 것은 그림이 어떻게 될 건지 생각하지 않고 어떤 선입견도 없이 작품을 하는 겁니다. ... 세잔은 자연 그대로를 그려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 하지만 모두들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세잔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감각을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
그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들조차 매 순간 새롭게 보려고 했고,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점점 더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원작을 읽고서야 그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림을 지웠다 다시 그리는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캔버스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자코메티와 제임스
자코메티가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만드는 괴팍한 인간이라는 것은 원작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영화와 달리 의외로 섬세한 면도 눈에 띈다.
"작업을 조금만 더 합시다. 이 상태로 놓아둘 수는 없어요. 내가 밉죠?" 그가 물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하네요. 내가 왜 그렇겠어요?"
"당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니까 그렇지요."
"그런 소리 마세요."
자코메티는 초상화 때문에 제임스가 발이 묶여 있는 것을 은근히 의식하고 제임스의 눈치를 보기까지 한다. 영화 속 자코메티는 시종일관 "뭐, 자네가 가면 가고 머무르면 머무르는 거지."라는 식의 태도를 보여서 제임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자코메티가 제임스에게 반말을 하는 영화 자막과 달리, 원작의 한국어판에서는 자코메티가 제임스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번역되어서 그렇지만, 자코메티와 제임스의 관계는 영화보다 더 정중하게 느껴진다. 자코메티에게 환멸감을 다소 느끼는 영화 속 제임스와 달리 실제 제임스는 발이 묶여 있는 처지가 달갑지는 않지만 초상화를 완성시키지 못하는 자코메티의 괴로움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를 존경한다.


자신의 초상화를 사진으로 찍는 제임스(위)와 마침내 완성된 제임스의 초상화(아래)
영화에서 제임스는 초상화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자코메티가 그린 초상화들을 사진으로 찍는다. 원작에서는 한 챕터에 하루씩, 하루에 한 장씩 제임스가 찍은 초상화의 사진이 실려 있다. 열여덟 개의 초상화 사진은 처음 봤을 때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다. 자코메티 자신에게는 이 초상화들이 어떻게 다른지 더 뚜렷이 보였을 것이다. 제임스도 오늘은 얼굴이 기울어졌다, 오늘은 형태가 더 견고해졌다는 식으로 자신의 초상화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민감하게 포착한다. 18일 동안이나 계속되는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제임스도 자코메티만큼이나 초상화 작업을 진지하고 섬세하게 대했다는 것이 보인다.
어느 날에는 아무 것도 그리지 못하고, 어느 날에는 꽤 진전을 보인다. 어느 날은 자코메티와 아네트가 싸우고, 어느 날에는 자코메티와 아네트가 화해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인다. 어느 날은 카롤린이 제임스와 자코메티를 데리고 드라이브한다. 영화는 이렇게 단조로워지기 쉬운 18일의 하루하루를 조금씩 변주하면서, 자코메티의 예술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코메티의 예술과 예술관을 좀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원작을 읽어보는 것이 낫다. 자코메티와 제임스가 나누는 예술에 대한 대화는 원작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