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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ㅣ 지만지 희곡선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안영옥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스포일러 포함
B의 방. 책이 가득 꽂힌 책장. 책상 위 책더미와 필기도구, 온갖 잡동사니 가운데 노트북이 놓여 있다. B가 노트북 앞에 앉아
망연자실한 채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A가 노크한 뒤 방문으로 들어온다. A가 B 쪽으로 다가와 노트북 화면의 예매창을 본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예매창이다.)
A: 이번엔 성공했어?
B: 아니, 어느 자리로 잡을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다 나갔더라.
A: 일단 한 자리 잡고 봤어야지. 고민할 시간이 어디 있어.
B: 그러니까. 간신히 예매대기 하나 잡아놨는데 터질진 모르겠다.
A: (책상 위의 책을 보고) 이거 보려고 원작까지 읽었어?
B: 응, 몇 년 전에 이미 번역됐더라.
A: (책을 펼치고 훑어보며) 되게 얇네. 앞의 해설 빼면 한 100페이지는 되려나. 금방 읽고 책상 위에 올려놓을게.
B: 그래.
(A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다.)
A: (책을 덮고 침대에 앉아 B에게) 이거 내가 생각했던 거랑은 좀 다르다.
B: 어떤 게?
A: 여자들만 나오고 여자들이 이끌어나가는 극이라고 들어서 난 굉장히 페미니즘적인 작품일 줄 알았거든. 그런데 실상은 여자들이 남자 하나한테 목매는 이야기잖아.
B: 그렇긴 하지.
A: 작가가 남자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건가? 여자한테 인생의 탈출구가 남자밖에 없다고 생각하나. 어차피 베르나르다의 딸들 중 한 명이 페페랑 잘됐다고 해도 또 다른 감옥 안에 들어가는 거잖아. 애 낳고 키우고 집안일 하고 남편 시중이나 들게 되겠지.
B: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봐. 20세기 초 유럽에서도 여자들한테 선택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거야. 베르나르다 알바네 가족들이 사는 시골이라면 더 보수적이었을 거고.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와 만나는 것만으로도 권위에 저항한 거지. 아델라가 베르나르다의 지팡이를 빼앗아 두 동강 내는 거 봐. 베르나르다의 권위에 정면으로 맞선 거야.
A: 그러면서 "저한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페페뿐이에요!"라고 말하잖아. "누구도 저한테 명령할 수 없어요!"가 아니라.
B: 남편은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너무 뿌리 깊었으니까. 누구도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와 시대의 인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
A: 시대상을 감안한다 해도 자기랑 사귀고 있다가 돈 많은 언니한테 청혼하는 남자한테 왜 이렇게 집착해? 페페가 아델라를 정말 사랑했다면 돈 때문에 다른 여자랑 결혼하려고 했겠어?
B: 스무 살이면 사랑에 눈이 멀어서 앞뒤 안 가릴 나이야. 게다가 그 시대의 스무 살이면 사랑하는 사람을 죽는 날까지 사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을 거고. 그리고 페페는 아델라에게 사랑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문 밖의 세상, 자유 그 자체였을 거야.
A: 나라면 페페 따윈 차 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찾았을 거야. 아니, 굳이 누군갈 사랑해야 할 필요도 없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데. 그게 진짜 자유지.
B: 아델라한테는 자기 마음과 욕망을 따라가는 게 진정한 자유였어.
A: 아델라뿐만 아니라 네 명의 언니들도, 심지어 늙은 마리아 호세파까지도 결혼이 집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기잖아. 어쩜 다들 그렇게 남자랑 결혼에 집착하는 건지.
B: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도 베르나르다가 우리 집안의 격에 안 맞다고 사이를 갈라놨었잖아. 남편이 죽었을 때 3년상도 아니고 8년상을 치르자고 하면서 그 더운 여름에 문이랑 창문을 다 걸어잠그고. 딸들이 바깥 소식을 듣기만 해도 혼을 내고. 그렇게 자연스러운 욕망을 억눌러 놓으니, 딸들이 더 간절히 사랑과 결혼을 바랄 수밖에 없지.
A: 난 베르나르다가 『토지』의 서희처럼 강인하게 한 집안을 이끌어나가는 멋진 여자일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이 여자는 성별만 여자일 뿐이지 그냥 가부장이야. 여자가 권력을 잡아봤자 결국 같은 여자를 억압할 뿐이라는 건가?
B: 베르나르다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야. 집안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질서가 필요하다고 배워 왔겠지.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가부장적 질서로 통제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어.
A: 그 고집 때문에 오히려 베르나르다네 가족들은 더 큰 비극을 맞은 거야.
B: 그래. 결국 막내딸이 죽는 지경까지 왔는데도 울기 않겠다면서 "베르나르다 알바의 막내딸은 처녀로 죽었다."고 선언하잖아. 자기 막내딸이 자기가 그렇게 손가락질하고 죽어 마땅하다고 했던 여자들과 같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A: 지독한 여자야. 언니들이 막내 동생을 잃고 슬퍼할 틈도 주지 않아.
B: 베르나르다가 그렇게 하고서 예전과 같이 살 수 있었을까? 아무리 완고한 사람이었어도 그러지는 못했을 거야.
A: 가부장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만들어.
B: 딸들뿐만 아니라 베르나르다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되어버린 거지.
(B,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한다.)
B: 이 대사들 슬프지 않아? 폰시아가 큰아들한테 돈을 줘서 창녀한테 보냈다고 했잖아. 남자들한테는 창녀가 필요하다고. 그러니까 베르나르다의 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눠. "남자들은 모든 것이 용서되지." "여자로 태어난 게 가장 큰 벌이야." "우린 우리 눈조차도 우리의 것이 아니니까."
A: 거의 백 년 뒤인 지금도 그 말에 공감하게 된다는 게 슬프다.
B: 여자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이런 괴로움을 직접 말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여자들이 누군가의 어머니, 딸, 아내, 연인이 아니라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고 욕망하고 꿈꾸는 존재라는 걸 보여주잖아.
A: 하지만 페미니즘적인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가부장제가 나쁘다, 까지 말하는 건 좋은데, 가부장제를 벗어나는 방법이 결국은 예비 가부장에게 가는 거잖아. 그것마저 좌절되고. 세상의 질서에 맞서면 결국 이 꼴이 된다는 거잖아.
B: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적인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겠지만, 여성 서사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지금도 이렇게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개성을 보여주고 피와 살로 된 인간으로 느껴지는 작품이 필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내가 본 영화랑 연극 중에서도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이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고, 여자주인공이 그저 남자주인공의 로맨스를 보여주려고 나오는 작품도 많아.
A: 이 극이 처음 나온 지 80년도 넘었는데 아직 갈 길이 멀구나.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아쉽지만, 더 나아갈 단초를 던져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벡델 테스트: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계량하기 위해 고안한 테스트. 영화 속에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둘 이상 나오는가, 그들이 서로 대화하는가,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 외에 다른 내용이 있는가, 이 세 개의 문항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