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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중단편선 1 ㅣ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문학전집 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성일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 본 작품,『안나 카레니나』,『전쟁과 평화』스포일러 포함
『톨스토이 중단편선』 1권은 톨스토이가 30대 초반에 쓴 초기작 일곱 편을 담고 있다. 초기 작품들이라 이후의 작품들보다는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톨스토이의 문학 세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인물 유형들과 주제 의식이 보인다. 톨스토이 문학 세계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이후 작품들보다는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이지 초기작들에서도 톨스토이의 인간에 대한 통찰과 인물 구축, 심리 묘사, 자연 풍경 묘사는 뛰어나다. 각 단편에 대한 감상을 간단하게 쓰려고 한다. 단편들 중 「데카브리스트들」 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아 글을 따로 썼다.
네흘류도프 공작의 수기
네흘류도프 공작은 톨스토이의 말기 작품인 『부활』 의 주인공의 이름이다. 하지만 화자인 '나'는 네흘류도프가 아니라 피에르 베주호프( 『전쟁과 평화』 의 주인공)나 콘스탄틴 레빈(『안나 카레니나』 의 주인공), 또는 톨스토이 자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톨스토이가 스위스를 여행하는 동안 실제로 경험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한 단편이고, 피에르나 레빈이라도 '나'와 비슷하게 행동했을 테니까.
'나'는 스위스 루체른의 한 호텔에서 머물고 있다 어느 날 저녁 한 거리의 가수를 보게 된다. 행색은 초라하지만 그의 노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노래가 끝난 뒤 아무도 그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나'만 그 가수를 대접하려 호텔에 데려오지만, 호텔 종업원들은 '나' 같은 귀족이 쓰는 연회장이 아니라 평민들이 사용하는 연회장으로 '나'와 '가수'를 안내하고, 가수와 함께 있는 '나'까지 은근히 무시한다. '나'는 사람들의 비정함과 무관심에 분노한다. 아름다운 음악에 감동하면서도 정작 그 음악을 만들어낸 사람이 가난하고 초라하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외면하는 모순이 '나'를 괴롭게 한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자신이 거리 가수 때문에 호텔 직원들에게 화를 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이 모든 것은 온 세상이 조화롭게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더 큰 뜻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엉뚱한 결론을 내려버린다. 아직 29세밖에 되지 않았던 톨스토이는 이러한 모순의 근본적인 원인을 깊이 생각하기에 너무 젊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길거리 버스커 출신인,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떠올랐다. 그는 거리 공연을 할 때 자신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이도 서러웠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공연을 보더라도 그 공연자를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대하듯 대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아홉 시간이나 걸어다니면서 목이 아프도록 공연을 했는데도 한 푼도 못 벌었다는 이 단편 속 거리 가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그 다짐을 되새기게 되었다. 사회의 약자들이 겪고 있는 소외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나도 이 시절의 톨스토이보다 더 깊이 생각하지는 못하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알베르트
재능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알베르트는 대극장의 오페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지만, 자유분방한 기질과 유부녀와의 스캔들 때문에 일자리를 잃고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감동한 귀족 델레소프는 그를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하고 일자리까지 주선해 주지만, 알베르트는 술만 마시고 델레소프가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답답히 여겨, 결국은 델레소프의 집에서 나와 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음악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에게서 찬사를 듣는 환상에 빠진다.
말년의 톨스토이라면 예술을 한다며 인생을 낭비하는 알베르트를 단죄했을 것이다. 하지만 30대 청년 톨스토이는 알베르트를 비난하지도 단죄하지도 않고 그저 지켜본다. 그리고 성냥팔이 소녀가 보았던 환상처럼, 아름답지만 사라져 버리기에 슬픈 환상을 선물해 준다. 다른 이의 도움도 뿌리치고 환상 속에서만 행복해하는 알베르트의 모습에 한숨이 나오다가도, 나 또한 알베르트만큼이나 현실에 어둡고 이상에 매달려 살기에 남의 모습 같지 않아 슬퍼진다.
세 죽음
말 그대로 세 개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한 귀족부인의 죽음과 한 평민의 죽음, 그리고 그 평민의 십자가를 만들기 위한 숲 속 한 나무의 죽음. 귀족부인은 편안한 침대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가지만 죽기 직전까지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반면 가난한 평민은 자기 집도 아닌, 북적거리는 여관 벽난로 위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었지만, 잠들듯이 평안히 세상을 떠난다. 그 평민의 십자가를 만들기 위해 숲 속의 나무는 삶을 마치고, 나무가 잘려나간 뒤에도 자연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톨스토이가 지향하는 죽음은 셋 중 평민과 나무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귀족부인을 나무라지는 못하겠다. 나 또한 아직은 삶에 미련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가정의 행복
제목만 보고 톨스토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고리타분한 설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중 가장 몰입이 잘 되었다. 열일곱 살 소녀 마샤는 부모님을 잃은 뒤 열아홉 살이나 많은 후견인 세르게이와 사랑에 빠진다. 10대 후반 미성년자와 30대 후반의 사랑이라니 지금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관계지만, 자신보다 한참 연상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심리는 여자인 내가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묘사했다. 어린애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 어린 여자애가 아니라 동등한 한 사람으로서 그 사람과 마주하고 싶은 마음, 좋아하지만 휘둘리고 싶지는 않은 마음. 30대 남자가 어떻게 10대 소녀의 미묘한 감정을 이렇게 잘 알까 싶다. 마샤와 세르게이가 서로 마음을 확인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그려지는 심리 묘사는 어느 연애 소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주변의 자연 풍경을 통해 두 사람의 설레는 마음을 전하는 솜씨도 뛰어나다.
나이 차이 때문에 망설이고 주저하던 마샤와 세르게이는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두 사람이 인생의 주기에서 서로 다른 지점에 있었다는 것이다. 마샤는 남편과 시골에서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에 만족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매일 비슷한 일상이 지루해졌다. 게다가 마샤는 하고 싶은 게 많은 10대 소녀다. 반면 30대 후반인 세르게이는 이제 안정적이고 소박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마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 나가서 미모로 인기를 얻게 되고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되고, 남편과 점점 멀어진다.
그런데 사교계의 명성은 한 순간의 것이었다. 이제 21살이 된 마샤는 다른 귀족들이 자신보다 어린 귀족 아가씨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한물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100여 년 전에도 지금에도 여자는 외모와 나이로 평가되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한숨이 나왔다. 그제서야 마샤는 사교계가 얼마나 가식과 허영으로 가득찬 곳인지 깨닫게 된다. 세르게이는 마샤 스스로 사교계의 헛됨을 실감하기까지 기다렸다고 말한다. 마샤는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하지만, 세르게이는 이전과 같은 감정, 관계는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단편은 마샤의 마지막 말로 끝맺는다. "그날로 남편과 나의 로맨스는 끝이 났다. 옛 감정은 소중하고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이 되었고, 아이들과 아이들 아빠에 대한 애정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지금 현재로서는 내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행복한 삶의 시작이 되었다."
또 다른 행복의 시작이라지만 예전과 같은 설레던 감정은 이제 포기했다는 것이 슬프다. 그것도 20대 초반의 나이에. 세르게이는 밖에서 사회 생활을 하면서 자기 뜻을 펼칠 수도 있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인 마샤는 사회 활동을 하기 어렵다. 마샤는 자기의 뜻을 펼칠 수도 없고 또 다시 설레는 연애를 할 수도 없고 오직 어머니로서의 보람만 찾으며 살아야 한다. 꿈도 많고 사랑에 대한 기대감도 컸던 마샤, 생명력이 넘쳤던 마샤는 결말에 들어 갑자기 세르게이에게 길들여진 아내가 된다. 새로운 삶을 꿈꾸는 모습에서는 안나 카레니나가, 결국은 한 아내이자 어머니로 가정에 정착하는 모습에서는 『전쟁과 평화』 의 나타샤와 『안나 카레니나』 의 키티가 보였다. 톨스토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정, 가정의 행복을 위해 여자는 정숙하고 가정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 길들여진다. 톨스토이는 피에르와 나타샤 부부, 레빈과 키티 부부, 그리고 자신과 아내의 삶을 통해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이상적인 부부상을 꿈꾸었지만, 실질적으로 아내를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에 아내를 끼워맞춘다. 아내 소피아는 톨스토이가 생각한 이상에 부합할 수 없었고, 톨스토이는 결국 결혼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이후 작품들에서 결혼에 대한 환멸감을 토해냈다.
톨스토이를 위대한 사상가로 만든 것은 도덕과 올바른 삶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태도였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문학가로서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톨스토이의 필력이 워낙 뛰어나서 자신의 사상과 도덕관도 흥미롭게 읽히게 만들지만, 생생하게 살아숨쉬던 인물들은 그의 도덕관에 갇혀 밋밋해진다. 도덕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었다면 톨스토이의 작품들이 더 자유로워지고 생명력이 강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카자크인들: 카프카스 이야기 1852년
주인공 올레닌의 성장기를 그리려던 것이었다면 실패작이고, 카자크(Kazak,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러시아 중앙 지역에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일대와 러시아 서남부 지역으로 이주한 뒤 자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농민 집단. 자치적인 군사 공동체를 이루어 러시아의 변경 지역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의 삶을 그리려던 것이라면 성공작이다. 젊은 귀족 올레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의 판에 박히고 나태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카프카스 지역의 군대에 자원 입대한다. 올레닌이 카프카스에 오면서 소설이 시작되고 올레닌이 카프카스 지역을 떠나면서 소설은 끝나니, 올레닌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올레닌보다 카프카스의 자연 환경과 그곳에 사는 카자크들의 풍속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카자크 박물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톨스토이는 실제로 1851년 카프카스 지방의 군에 입대해서 군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을 소설로 쓴 것이니 카프카스와 카자크 묘사가 디테일하고 생생할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의 남주인공들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나',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나' 자체에 도취되는 면이 있다고 느끼는데, 올레닌도 그렇다. 올레닌은 가식적이고 나태하게 사는 러시아 본토의 귀족들과 달리, 자유롭고 당당하고 강인하게 살아가는 카자크 사람들의 삶에 매혹된다. 그러나 카자크들에게 올레닌은 본토에서 온 러시아군 1일 뿐이다. 차라리 친구 벨레츠키처럼 스스럼없이 카자크들과 어울렸으면 좋았을 텐데, 올레닌은 자신의 상상 속 이상적인 카자크들을 설정하고 그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니 카자크 사람들과 깊이 교류하지 못했고, 처음 왔을 때의 거창한 포부와 달리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결국 본토로 돌아간다. 그나마 올레닌을 진심으로 아꼈던 유일한 카자크인 예로슈카 아저씨만 그를 배웅하지만, 그도 자신이 아끼는 마을 청년 루카와 올레닌 중 한 명을 선택하라면 망설임 없이 루카를 선택할 것이다. 올레닌이 열렬하게 사랑했던 마을 아가씨 마리안카도 올레닌에게 마음이 없는 것이 너무 잘 보여서 안타까웠다.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카자크 사람들에게 가려져 올레닌의 존재감은 희미해진다. 아무래도 작품 활동 초기라 톨스토이가 작품의 구심점을 잡고 주인공의 존재감과 개성을 만드는 데 서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어떤 기행문이나 박물지보다도 생생하게 그 시대의 카프카스와 카자크들의 삶을 전하고 있다.
폴리쿠슈카
무고하고 힘 없는 서민이 뜻하지 않게 불행에 빠진다는 점에서 전영택의 단편소설 「 화수분」 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 폴리케이('폴리쿠슈카'는 폴리케이의 애칭이다.)는 평범한 농노이다. 성품 자체는 선량하지만 젊은 시절 도둑 밑에서 일하다 도벽이 생겨서 물건을 자꾸 훔치다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잃었다. 나라에서 군인을 징집할 때 사람들은 폴리케이를 군대로 보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지주 부인은 폴리케이가 정말 착하게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믿고, 오히려 큰 돈을 받아오는 중요한 임무를 폴리케이에게 맡긴다. 폴리케이는 마님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그 임무를 잘 해내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불행이 그에게 닥쳐온다.
폴리케이는 모자에 돈 봉투를 넣어두지만, 폴리케이도 모르는 사이에 모자가 낡아서 생긴 구멍으로 돈 봉투가 빠져나간다. 폴리케이는 마님의 신뢰를 잃을 것이 두려워 목을 매어 자살해 버린다. 남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폴리케이의 아내는 갓난아기를 목욕시키다 남편에게 뛰어간다. 그러는 바람에 아이는 욕조에 빠져 익사하고, 남편과 아이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아내는 미쳐버린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폴리케이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농부 두틀로프가 잃어버린 돈 봉투를 찾아왔다. 그러나 마님은 폴리케이 가족의 비극을 불러온 돈을 보기 싫다며 두틀로프에게 그 돈을 통째로 준다. 두틀로프는 그 돈으로 병역을 대체할 사람을 사서 징병되었던 조카를 빼내온다. 울며불며 두틀로프를 원망했던 조카와 조카의 가족들은 행복해한다. 그 돈 때문에 폴리케이 가족이 불행해졌는데도, 자신 대신 전쟁에 나가는 용병이 나는 당신들 대신 죽는 거라고 악을 쓰는데도.
번역자의 해설에서는 여지주의 변덕 때문에 죽은 폴리케이를 통해 톨스토이가 농노제의 폐해를 고발했다고 했지만, 나는 소외되는 약자들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을 보았다. 폴리케이 개인의 비극과는 상관 없이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돌아간다. 심지어 폴리케이의 불행 덕분에 다른 누군가는 행복해진다.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으로 인한 것인지 모르고, 알더라도 외면하고 마냥 행복해하기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세상은 여전히 그렇게 차갑고 비정하기에 읽기 가장 힘들었던 단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