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 욥기 43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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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블로거)

 

  저 말고 증언한 독자 분이 또 있었나요? 있었구나. 그럼 제가 굳이 증언할 필요가 있나요? 사람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게 다르니까 한 명이라도 더 증언하면 수사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구요? 뭐 그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저는 제가 읽고 느낀 대로 얘기할게요.

 

  이 소설의 부제가 '욥기 43'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찾아보면 욥기는 42장까지만 있어요. 그러면 이 소설은 새로운 욥기라는 얘기죠. 최근직 장로님 인생을 되돌아보면 욥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거든요.

 

  욥이 어떤 사람이냐면요, 옛날 이스라엘에 살던 착한 부자였어요. 하나님 말씀 잘 듣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복을 받았는지 자식도 많고 재산도 많았죠. 그런데 사탄이 하나님한테 욥을 시험해 보자고 제안했어요. 욥이 온갖 고난을 겪어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지 보자구요. 하나님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욥에게는 온갖 고난이 닥쳐와요. 갑자기 자연재해가 일어나서 전재산이 날아가고 강도들이 쳐들어와서 욥의 자녀들을 다 죽였어요. 게다가 욥 본인은 지독한 피부병에 걸려서 밤낮으로 피가 나도록 피부를 긁어야 했어요. 이쯤 되니 욥도 선하게 살아온 자신이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냐고 하나님께 하소연하죠. 그러자 하나님이 욥한테 말해요. 네가 나보다 선하냐고, 나의 뜻을 다 알고 있냐구요. 자신이 교만했다는 것을 욥이 인정하고 순종하자 하나님은 욥의 병을 고쳐주고 전보다 더 많은 재산과 죽은 자녀들 수만큼의 새 자녀들을 안겨줘요. 최 장로님도 선하게 사시다 기차 사고로 온 가족을 다 잃으셨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자살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서 회심하셨다구요. 그 이후로 장로님은 재혼하셔서 아들도 얻었고, 다시 재산도 모아서 이 목양면에 교회를 세우셨어요.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새로 얻은 아들인 최요한 목사죠.

 

  그런데 주일학교에서 처음 욥 이야기를 배웠을 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어요. 욥의 자녀들은 왜 아무 죄도 없이 죽어야 했을까요? 욥이 다시 자식들을 얻었다고 해도, 이미 죽은 자녀들은 돌아올 수 없잖아요? 자녀들은 그저 잃어버렸던 재산처럼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인 건가요? 작가님도 젊었을 때는 아무 죄 없이 죽어간 욥의 자녀들의 마음으로 욥기의 후속편을 쓰고 싶었다고 하셨었죠. 하지만 나이가 들고 아버지가 되고 나니 자식을 잃은 아버지인 욥을 비난할 수 없다, 논리적으로 욥을 이해해선 안 되고, 함부로 그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하셨어요. 저도 그런 마음으로 욥을, 최 장로님을 바라보려고 했어요.

 

  하나님은 최 장로님이 죽으려고 했을 때 최 장로님을 부른 게 당신이 아니라고 하셨었죠.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버지를 살리려고 도움을 구하던 두 번째 사모님의 목소리였다구요. 그때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대요. 결국 최 장로님을 살게 한 건 최 장로님 자신이었어요. 하지만 아내와 자식이 죽은 지 반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게 된 게 부끄러웠겠죠. 그렇게 얻은 새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포장하지 않았다면 장로님은 수치심을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믿음으로 장로님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이끌어 갔을 거예요. 저도 하나님을 믿지만 종종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를 살게 하는 건 하나님보다는, 우리의 믿음 그 자체가 아닐까, 하구요. 최 장로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욥인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욥이라면 적어도 자기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기회는 있잖아요. 만약 우리가 욥이 아니라 욥의 자녀의 처지에 놓인다면요? 죽은 자녀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욥이 새로 얻은 자녀들은 행복했을까요? 욥이 그애들을 그애들 자체가 아니라 죽은 자식들의 대체품으로 대했더라도요? 욥의 입장, 장로님의 입장에 서 보려고 했지만 자꾸 욥의 자녀들의 입장에 서게 돼요.

 

  그래서 방화 사건의 진상이 뭐인 것 같냐구요? 제 생각은 이래요. 최요한 목사는 목사직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어했어요. 더 이상 죽은 이복형을 대신하는 존재나 하나님이 내린 축복으로 살고 싶지 않았던 거죠. 조원효 씨 증언대로 최 목사는 교회 건물과 어머니가 증여해 준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독서실을 사려고 했어요. 자기한테도 맞지도 않고 부담스럽기만 한 목사직 때려치고 독서실 총무 노릇이나 하면서 조용히 살려구요. 그런데 아버지인 최근직 장로님은 농협에 전화를 걸어서 아들에게 대출해 주지 못하게 했죠. 본인은 그게 정말 아들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아들은 유일한 탈출구가 막혀버렸다고 생각하고 삶의 의지를 놓아버렸겠죠. 만진이 학생이 목사님이랑 어떤 꼬마가 싸우는 걸 봤다고 했죠? 목양슈퍼 아줌마는 피해자 중에 정민석이라는 아이한테 아무 데나 불 지르는 습관이 있었다고 했구요. 최 목사는 민석이가 목사실에 불을 지른 걸 보고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거예요. 불을 끄려고 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하지도 않은 거죠.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른 채 사고로 죽은 것처럼 보이려고. 목사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까지 자기 저승길에 끌고 가나 싶긴 한데, 그게 최 목사가 아버지와 하나님에게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반항이었을 거예요.

 

  이게 욥의 자녀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반항이라니, 슬프지 않나요? 지금까지 내 삶은 아버지와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어 왔지만, 죽는 것만큼은 내 뜻대로 하겠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제 자신이 욥인지 욥의 자녀인지조차 모르겠어요. 사는 것도 힘들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는 것도 무섭지만, 내 의지로 죽는 건 못하겠거든요. 그러니 최 목사가 그랬던 것처럼 반항도 할 수 없어요. 앞으로도 저는 하나님도, 욥도 이해할 수 없겠죠. 욥의 자녀 같은 처지에 놓이더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구요. 다만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제 자신을 구할 수밖에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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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 욥기 43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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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도 욥의 자녀도 피와 살로 된 인간이었음을 느끼게 하는 현대 한국 버전 욥기. 여러 사람의 진술을 통해 사건의 진상과 주인공들의 진실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누쿠이 도쿠로의『우행록』도 떠오른다.『우행록』보다는 가볍고 경쾌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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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세상에서 죽다
리루이 지음, 김택규 옮김 / 시작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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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백사의 전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만화책  『백사전』 을 통해서였다. 전설의 내용은 이랬다. 인간이 되고 싶어하던 백사가 있었다. 백사는 천 년을 수련해 마침내 아름다운 인간 여인의 모습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에게 백소정白素貞이라는 인간 이름을 붙였다. 백소정은 인간 남자인 허선許仙과 사랑에 빠져 혼인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법해法海라는 승려에게 정체를 들켜, 항저우의 서호西湖 호숫가에 있는 뇌봉탑雷峰塔 아래 갇히게 되었다. 만화책에서의 결말은 백소정이 낳은 아들이 훗날 장성해 탑 아래 갇힌 어머니를 구해준다는 해피엔딩이었다. 


노을이 지는 서호 풍경. 사진 왼쪽의 탑이 백소정이 갇혀 있다는 뇌봉탑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백소정이 영원히 탑 아래 갇혀버리는 것이 <백사전>의 원래 결말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얼마 전에 읽은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에서 리루이李銳라는 현대 중국 작가가 <백사전>을 토대로 『인간세상人間』이라는 소설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이 우리나라에는 『사람의 세상에서 죽다』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이후로 돌고 돌아 <백사전>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이 소설은 자신이 백소정의 환생이라고 믿는 현대인 여성 하추백何秋白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법해는 백소정을 뇌봉탑 아래 봉인하면서 '탑이 무너지는 날에 백사가 풀려난다'는 시 구절을 남겼다. 하추백은 1924년 9월 25일, 뇌봉탑이 무너지는 날 태어났다. 뇌봉탑 아래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뇌봉탑 여기저기를 후벼파댄 결과였다. 영영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탑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무너진 것이다. 인간의 잔인함은 뇌봉탑뿐만 아니라 하추백의 삶과 백소정의 삶까지 짓밟았다. 서로 접점이 전혀 없어 보이던 두 여인의 삶이 조금씩 겹쳐 보인다. 

  백소정은 인간이 되기 위해 2999년 동안 깊은 동굴에서 수련했지만, 밖에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사람 목소리에 동굴에서 나와버렸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도와달라고 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백소정을 시험하려 했던 관음보살이었다. 관음보살은 백소정에게 인간의 잔인함이 없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잔인하지 못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었는데도 백소정은 끝까지 인간처럼 잔인해지지 못한다. 자신이 요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약초를 구해온다. 자신의 약 제조 비법을 훔쳐가 놓고도 변명만 늘어놓는 이웃집 노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자기 동족들을 수도 없이 죽인 인간들이 괴질에 걸렸을 때, 자기 피만이 해독약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 피까지 인간들에게 내어주었다.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인간들이 자기 피가 오히려 독이었다고 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백소정은 순순히 자기 목숨을 내어준다. 그녀가 평생 동안 유일하게 해친 인간은, 그녀가 친자매처럼 아끼던 청사 요괴 청아를 배신하고 죽인 청년이었다. 

  단지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고통 받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백소정이 남긴 유일한 혈육 허사린은 겉보기에는 다른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새와 작은 동물을 잡아먹고 땅 위를 기는 뱀의 습성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평범한 인간처럼 살기 위해서 허사린은 본성을 억눌러야 했다. 그런 허사린을 유일하게 이해해 준 것은 마을 훈장의 바보 딸 향류낭이었다. 향류낭은 현실에서 "하루를 못 봤는데 3년을 떨어진 것 같았어!"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지만, 꿈속에서는 뱀도 인간도 아닌 존재로 살아야 하는 허사린의 괴로움을 혼자 알아채고 위로해준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줬던 향류낭마저 다른 남자에게 억지로 시집가기 전날 밤 자결해 버린다.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의 진실을 들은 뒤, 허사린은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했는데도 인간 세상에서 관리로 살지 않겠다며 뱀 흉내를 내는 광대가 된다. 아들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해준 허선은 다시는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것으로 태어나지 않겠다고 말하고 정말 눈이 멀어버린다.

  요괴가 아닌 인간, 그것도 현대인인 하추백은 '비정상'으로 간주되고 배제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백사전>을 원작으로 한 전통 연극에서 허선 역을 맡았던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자신이 백사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청년은 그녀에게 전생의 인연을 이어가자며 달콤하게 말했고, 둘은 결혼했다. 그러나 1957년 '백가쟁명百家爭鳴, 백화제방百花齊放' 운동(공산당이 반공산당 사조를 완화하려고 지식인, 학생의 표현의 자유를 장려한 운동. 하지만 공산당은 지식인들의 공산당 비판을 빌미로 대대적으로 지식인들을 숙청했다.)이 일어났을 때, 남편은 하추백이 자신에게만 털어놓은 비밀까지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며, 하추백을 '인간 세상에 해를 끼치는 독사'라고 몰아붙였다. 그녀는 남편의 폭로로 강제노역을 하고 남편과 이혼한 뒤 지친 몸과 마음을 안고 고향집에 돌아온다. 그때 여러 해 동안 꽃을 피우지 않았다던 고향집의 매화나무가 유난히 화려하게 꽃을 피워 그녀에게 뿌려주었다. 그때 그녀는 깨달았다. 이 나무가 그녀의 허선이었다는 것을. 백소정은 인간이 아닌 존재에서 인간이 되었고, 허선은 인간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상대가 어떤 존재이든, 어떤 모습이든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 1999년 뇌봉탑 지하에서 법해가 쓴 수기가 발굴되고, 5년 뒤인 2004년, 80세가 된 하추백은 법해의 글을 읽게 된다. 법해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이 백사 전설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일부라는 것을 느끼지만, 하추백은 담담하기만 하다. 하추백은 담담했지만 나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어째서 이 착하고 여린 존재들이 이토록 모진 일을 겪어야 했을까. 다른 인간들과 달랐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세상이 아무리 그들을 모질게 대하더라도 그들은 잔인해지지 못했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현대의 인간 세상에서도 그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환생한 허사린은 뱀에 미친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고, 허사린의 애완 뱀이 된 청아는 인간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라디에이터에 머리를 넣어 목숨을 끊는다. 

  환생한 허사린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하루를 못 봤는데 3년을 떨어진 것 같았어요." 자신에게 이 말을 해줄 향류냥도 없어 스스로에게 이 말을 해준다.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자신과는 다른 존재에게는 한없이 모진 인간 세상.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착하고 여린 존재들을 두 팔 벌려 안아주며 말하고 싶다. 하루를 못 봤는데 3년을 떨어진 것 같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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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세상에서 죽다
리루이 지음, 김택규 옮김 / 시작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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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하루를 못 봤는데 3년을 떨어진 것 같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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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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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나라부터 현대까지 3천여 년의 중국사를 살펴보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 등 각 분야로 나누어서 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중국사를 이끌어간 주요 인물들을 통해 살펴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시안, 뤄양, 카이펑, 항저우, 난징, 베이징 등 중국 역사에서의 주요 도읍지 여섯 곳을 통해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이 여섯 도읍지들은 여러 왕조의 중심지였던 만큼 여러 시대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 특히 1129년 동안 열세 개 왕조의 도읍지였던 시안은 책 전체 분량의 4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고대 상나라 유적지부터 20세기에 공산당이 새로 지은 성문, 최근 시진핑 주석이 내놓은 '일대일로(一帶一路, 21세기에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부활시키려는 프로젝트)' 프로젝트까지 시안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중국이 오롯이 쌓여 있다. 수천 개의 석굴과 10만 개의 불상으로 이루어진 용문석굴이 있는 뤄양은 북위와 당나라 시대의 화려한 불교미술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송나라의 수도였던 카이펑은 강과 가까운 평지 지형이기 때문에 수십 번 수몰되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복구되어 번영을 이루었다. 카이펑의 지하에는 지금도 각 시대의 유적이 겹겹이 쌓여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북방의 이민족 국가인 금나라에게 중국 북부를 빼앗긴 송나라는 남쪽 저장성의 항저우로 천도했다. 영토 수복을 꿈꾸던 송나라에게 항저우는 변방의 임시 수도였지만, 아름다운 호수 서호와 비극적인 연인들, 의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혁명가들의 이야기를 품은 도읍지이다. 난징은 난징 대학살이라는 아픈 역사를 통해 역사를 왜,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정주민들의 세계와 유목민들의 세계의 접경지였던 베이징은 정주 민족과 유목 민족,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아우르며 현재 중국의 수도로서 중국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풍부한 이야기들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저자의 필력이 뛰어나다.

 각 도읍지마다, 도읍지의 장소들마다 서려 있는 풍부한 이야기도 장점이지만,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여섯 도읍에 얽힌 중국사를 논평하는 것도 장점이다. 저자는 시안 일대의 유적지를 중심으로 하, 상, 주 삼대의 정확한 역사 연대를 고증해 내려는 프로젝트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大工程'이 고대의 다양한 민족의 역사를 중화민족의 역사라는 단일한 역사 프레임 안에 가두려는 행보라고 생각하고 이를 경계한다. 한편 하, 상, 주 삼대는 하나같이 나라를 어지럽힐 정도의 미모를 지닌 여인들과 그녀들에게 미혹되어 나라를 망친 폭군들 때문에 멸망했다고 기록된다. 저자는 남성 중심 사회, 승자가 곧 정의라는 프레임 때문에 여성과 패자는 역사의 타자이자 희생양이 된다고 지적한다. 올해 나온 책인 만큼 최근의 중국 정세와 고대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며 고대의 역사가 지금의 중국, 미래의 중국에 미치는 영향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속표지에는 중국에서의 여섯 도읍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각 챕터 앞에는 각 도읍지 안의 유적지 위치를 표시한 지도들이 있어, 어느 위치에 각 도읍지와 유적지가 위치해 있었는지, 그 위치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다만 사진 자료가 모두 흑백이고 크기가 작은 것이 아쉽다. 이런 단점이 있지만,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중심지였던 도읍지들을 통해 중국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더 폭넓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책을 들고 여섯 도읍지를 여행하면서 역사의 흔적과 중국의 오늘을 직접 볼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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