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포함

세상에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은 많다. 그 중에는 『운명』 못지않게 훌륭한 작품들도 많다. 그런데도 『운명』 을 선택한 것은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였다. 꿈도 사랑도 손에 닿지 않고, 희망도 없는 지금의 상황이 버거웠다. 일상에서 겪는 소소한 불운과 불행은 신경을 갉아먹으면서 나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끌려간 소년 죄르지가 수용소 생활에서 어떻게 고통을 견뎌내고 행복을 찾은 건지 알고 싶었다. 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고통을 견뎌내는 법을 알고 싶었다.

1944년 여름, 유대계 헝가리인 소년 죄르지는 근로봉사를 가던 길에 갑자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전까지 죄르지는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박해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외출할 때 노란 별을 외투에 달아야 하는 것도, 통금시간을 지켜야 하는 것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한 유대인 친구가 그에게 우리 유대인이 남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을 내면에 지니고 있기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는 무심코 반박했다. 만약 유대인 아이와 다른 평범한 아이가 병원에서 서로 바뀌었다면, 유대인 아이는 평범한 사람으로, 유대인 아이와 바뀐 아이는 유대인으로 취급받았을 거라고. 사람들은 단지 노란 별을 보고 우리를 유대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그러자 친구는 울음을 터뜨렸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특별하기 때문에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 때문에 이 고난을 당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운명이 어떤 목적이나 이유에 따라 (예를 들면 신이 정한 대로) 움직이지 않고 순전히 우연에 따라 움직이며 예측할 수도 없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운명의 부조리함은 아무 걱정 없이 살던 죄르지에게도 닥쳐왔다. 누가 유대인인지 결정하는 기준도 애매모호하고, 유대인이기 때문에 아무 죄 없이 죄수 취급 당하고 죽임당하는 것도 부조리하다. 그러나 죄르지는 이렇게 가혹하고 부조리한 일들을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터무니없이 적은 식량을 아껴 먹고 감시인들의 눈을 피해 요령을 부리며 체력을 비축한다. 식량이 좀 더 많이 배급되는 부헨발트로 옮겨진 것에 기뻐하고, 저녁 점호 전의 짧은 휴식시간을 즐긴다. 묵묵히 노동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상상한다. 상상은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까. 죄르지는 이렇게 수용소에서의 하루하루를 견뎌나간다.

1년쯤 지났을 때 해방의 순간이 왔다. 그 순간에도 죄르지는 자유의 몸이 된 것 못지않게 오랜만에 맛있는 고기 수프를 먹게 된 것을 기뻐한다. 죄르지에게는 자유의 몸이 되기 전 날과 자유의 몸이 된 날 모두 자신이 살아가는 삶 속의 하루이고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르지에게 수용소 생활이 지옥 같지 않았냐고 묻고, 시간이 수용소 생활을 견디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죄르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죄르지가 분노하며 자신이 겪은 고통을, 나치에게 당한 일들을 세상에 폭로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죄르지는 말한다.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으면 견디지 못했겠지만, 한 단계 한 단계를 지나면서 그 단계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완수해 나갔기에 견딜 수 있었다고.

직접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죄르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죄르지가 자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수용소 생활의 고통을 이야기했더라도 그들은 결코 죄르지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죄르지처럼 15살에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년 동안의 수용소 생활은 케르테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고, 홀로코스트라는 주제가 그의 문학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문학 세계의 시작인 『운명』 은 케르테스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데뷔작인 『운명』을 쓰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쓰고 싶지 않았다. 나 자신에 대해서 쓰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통을 응시하고 기억하며 13년 동안 이 소설을 썼다. 한국어 번역판 기준으로도 300페이지가 안 되는 짧은 소설을 쓰는 데 13년이 걸렸다. 그만큼 소설을 쓰는 과정은 그에게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가 『운명』을 쓴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 말도 떠오른다. "고통스러운 경험은 말하기 힘들다. 세상에 문학이 있어 다행이다." 10대 시절부터 수년간 교사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했던 경험을 소설로 쓴 대만 작가 린이한이 남긴 말이다. 그녀는 결혼식 전날 밤 늦게까지 이 소설을 쓰는 데 매달렸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10년이 넘도록 들여다 보거나, 가장 행복한 날의 전날까지도 되새기면서 문학으로 남긴 걸까.

문학은 고통의 원인이나 고통 그 자체를 없애주지 못한다. 그러나 고통을 직시하고 견뎌낼 수 있게 돕는다. 사람들은 죄르지에게 과거의 고통을 잊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지만, 죄르지는 과거의 고통들까지 자신이 걸어온 삶의 한 걸음 한 걸음으로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길 선택했다. 작가에게 과거의 고통을 직시하고 기억하는 방법은 문학이었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중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 없는 고통이 많다. 그러나 죄르지도 작가도 고통을 하루하루 견뎌내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선택했다. 나는 죄르지에게서 하루하루의 고통을 견디면서 그 안에서 작은 행복을 찾는 법을, 작가에게서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고 기억하는 법을 배웠다. 삶은 고통을 견디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내 운명이 된다. 죄르지는 "운명이 있다면 자유는 없다. 자유가 있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으며 고통스러운 삶이라도 그 안에서 내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 책이 내게 이것을 알려주었기에 나는 오늘도 계속해서 걸어가고 살아간다.

P. S. 헝가리어 원서를 직역한 민음사판(유진일 역)과 독일어판을 중역한 다른우리판(박종대 · 모명숙 역)을 한 문장 한 문장 비교하면서 읽었다. 원문 없이 한국어 번역판들만 가지고 비교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하지만, 헝가리어도 독일어도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두 가지 번역판 사이에서 원문의 흔적을 더듬어 나갔다.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느껴지는 건 박종대 · 모명숙 역이지만 문맥을 봤을 때 유진일 역에서 오역이 바로잡힌 것이 보인다. 그리고 유진일 역이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사유를 만연체로 풀어낸 케르테스 특유의 문체를 살리려고 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수용소에서 들리는 다양한 유럽 언어들을 박종대 · 모명숙 역에서 한국어로만 표기한 것과 달리, 유진일 역에서는 원문으로 표기하고 괄호 안에 번역문을 넣었다. 그래서 다양한 언어가 오가는 수용소가 더 실감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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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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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지만, 삶으로, 문학으로 고통을 견디며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주었다. 그래서 계속 살아가고 걸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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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모델, 미국 - 미국의 인종법은 어떻게 나치에 영향을 미쳤는가
제임스 Q. 위트먼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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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히틀러의 모델이라니, 선뜻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스스로를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수호자, 세계 모든 민족에게 개방된 땅으로 자부해 왔다. 히틀러에게 미국은 최대의 적이었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은 미국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인 민주주의와 평등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이 책은 나치 독일이 반유대주의 법인 '뉘른베르크 법'(1935년 발표)을 제정할 때 미국의 인종 차별적인 법들을 참고했다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법학자인 저자는 미국이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을 역사의 어두운 면을 파헤친다. 


  수많은 인종이 섞여 있는 미국이지만 건국 당시부터 인종주의(인종의 생리학적 특징에 따라 민족 사이의 불평등과 억압을 합리화하는 비과학적인 사고방식)는 미국 법에 스며들어 있었다. 미국 초대 의회에서 제정된 법 중 1790년의 귀화법은 "자유로운 백인 외국인"에게만 귀화를 허용했다.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에서 해방된 흑인들에게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1868년에는 "미국 영토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모의 시민권 여부와 관계 없이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 받는다"는 수정헌법 14조가 헌법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문맹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법, 노예 해방 이전에 조상이 투표권을 가졌을 경우에만 투표권을 주는 "조부조항" 등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으려는 교묘한 인종 차별법들이 생겨났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의 식민 지배권을 넘겨받았을 때 필리핀 사람들은 법적 권리를 가진 미국 시민이 아니라 단순한 "비(非)시민 국적자"가 되었다. 


 나치의 법조인들과 입법자들은 이러한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사례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이 동호회에 가입하는 것만큼이나 쉽다고 비꼬았던 히틀러가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꼼수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나치 독일은 뉘른베르크법에서 유대인의 국적과 참정권을 박탈해 단순한 체류자로 전락하게 했다. 나치 법률가들은 미국인들의 출중한 법적, 정치적 재능과 교양을 보여준다며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법들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인종의 순수성'을 지키는 점에서도 나치 독일은 미국을 모범사례로 보았다. 나치 독일에게 미국은 게르만 족의 친족이자 아리아인의 한 갈래인 노르딕 인종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운 국가였다. "백인과 흑인의 혼인, 백인과 위로 3대 이내에 흑인 조상이 있는 자의 혼인, 또는 백인과 말레이 인종의 혼인, 또는 흑인과 말레이 인종의 혼인은 영구히 금지되며 무효다. 이 조항의 규정을 위반하는 자는 18개월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메릴랜드 주의 혼혈금지법, 한 방울만 흑인의 피가 섞여 있어도 흑인으로 간주한다는 "한 방울 법칙(one drop rule)"은 나치 법조인들조차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진저리 치게 만들었다. 다만 미국이 유대인을 백인으로 취급하는 것만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혈통이나 배우자의 인종, 과거의 노예 신분 등 다양한 기준으로 인종을 규정했던 미국의 법들을 참조해, 뉘른베르크법에서는 조부모 중 두 명이 유대인이고 유대인과 혼인하거나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인 사람을 유대인으로 규정했다. 


 나치가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할 때 미국의 영향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은 독일 외에 인종주의를 법에 적용했던 유일한 나라였고, 그러한 나라가 세계에서 강대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나치를 자극했다. 미국이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독일에 맞서게 되면서 둘은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데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이게 다 미국의 잘못입니다. 미국을 탓하세요."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의 과거에는 우리(미국인)가 잊고 싶어하는 측면도 담겨 있고, 그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계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위치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인 학자인 저자나 미국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뼈 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게다가 현재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는 2016년 대선 출마 당시 출생시민권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올해 10월 30일에도 "외국인이 미국에 들어와서 아이를 낳으면 시민으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모든 혜택을 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뿐"이라며, 출생시민권을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미국에 들어오는 다양한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일삼고 있고,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의 대표였던 극우 인종주의자 데이비드 듀크는 그런 트럼프를 지지한다. 인종주의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려는 이 시기가, 미국인들이 교묘한 인종차별법을 최근까지도 시행하고 있었던 자국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할 때다.


 그런데 이것이 미국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다양한 인종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인종주의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다. 우리는 동양인으로서 인종차별과 인종혐오 범죄의 희생양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는 이민자와 난민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나치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의한 극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극악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 선하다고 자신하면서 자신 안의 악을 직시하지 못할 때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같은 비극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또한 읽고 되새겨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참고 기사: "트럼프 '출생시민권' 폐지 발언에 수정헌법 14조 논란 격화"(2018.12.31.뉴시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1031_0000459692&cID=10101&pID=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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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2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틀러의 모델, 미국 - 미국의 인종법은 어떻게 나치에 영향을 미쳤는가
제임스 Q. 위트먼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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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극악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는 선하다고 자신하면서 자신 안의 악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홀로코스트 같은 비극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인종주의의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우리도 되새겨 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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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 - 생명 과학 기술의 최전선, 합성 생물학, 크리스퍼, 그리고 줄기 세포
송기원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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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인간 유전체(게놈 genome, 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 정보 전체)의 모든 정보를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23년 만에 완료되었다. 인류는 이제 자신의 유전 정보를 모두 알 수 있는 '포스트 게놈(게놈 프로젝트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쉽게 얻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유전 정보를 모두 읽어내고 분석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니, 이제는 역으로 유전 정보를 조립해 인간이 원하는 대로 생명을 설계하고 편집하고 창조하려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런 연구들을 통틀어 '합성생물학'이라고 한다.    


크레이그 벤터 박사의 연구팀이 2016년 3월에 만들어낸 합성 생명체 Syn 3.0. 인간이 합성한 유전체만으로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합성생물학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2010년 미국의 생명과학자 크레이그 벤터는 한 세균의 유전체를 인공적으로 합성한 다른 세균의 유전체로 교체했고, 인간이 교체하고 합성한 유전체로도 세균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2017년 8월에는 인간의 배아에서 유전체를 성공적으로 교정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유전자 조작 농산물(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을 먹어도 안전한지는 궁금해하면서, 그 밖의 생명과학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생명과학은 앞으로의 인류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생명과학자 송기원 교수가 생명과학이 최근 어떻게 진행되고 발전되고 있는지, 이런 상황 속에서 고민할 문제는 무엇인지 소개하기 위해 쓴 책이  『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 다.


​  이 책의 저자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을 몇 달 전에 읽었었는데, 같은 저자가 같은 주제의 내용을 쓴 책이다 보니 이 책과 겹치는 내용이 있다. 겹치는 부분은 복습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가 2017년 3월에 출간된 책이니 그때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반면, 이 책은 그 이후의 상황과 이슈들까지 다루고 있다. 또 다른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책이 나오면서 이 책의 시의성 또한 떨어지겠지만, 2018년을 전후해서 생명과학 분야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 그리고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에서 소개됐던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CRISPR, 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회문 구조(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똑같은 구조) 염기 서열 집합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유전자를 편집하려면 필요한 부분만 잘라내는 유전자가위가 필요하다. 2012년 세균이 자기 몸에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를 크리스퍼라는 유전자 사이에 저장해 두고 있다가, 다음에 같은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저장된 정보를 통해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 염기서열을 인식해 잘라버린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원리를 응용한 크리스퍼 가위는 기존의 유전자가위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이전의 유전자가위들과 크리스퍼 가위의 특징을 비교하고, 크리스퍼 가위 기술을 활용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말라리아모기에게 불임 유전자나 말라리아 전달을 차단하는 유전자를 이식하는 연구, 인간 배아의 유전체를 편집하는 연구 등 크리스퍼 가위를 활용해 동식물이나 인간의 유전체를 인간의 의도대로 편집하고 교정하려는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  그러나 이 책은 크리스퍼 가위의 단점과 합성생물학의 문제 또한 이야기한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다른 유전자가위에 비하면 정확한 편이지만 엉뚱한 부분까지 같이 잘라내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그리고 인간의 세포는 매 순간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고 있기 때문에, 성인의 세포를 가지고 유전자 교정 시술을 할 경우 시간이 지나면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수정란이나 배아 세포였을 때 세포의 유전자를 편집해야 수정란이나 배아 세포에서 만들어진 모든 세포의 유전자를 영구적으로 교정할 수 있다. 



박사와 고양이, 생쥐 캐릭터가 합성생물학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일러스트. 한 챕터당 하나 꼴로 실려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또한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자연의 간섭을 피할 수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말라리아 모기 불임 유전자 연구는 자연의 힘에 부딪치게 되었다. 처음 4세대까지는 불임 효과가 나타났지만, 세대가 지나갈수록 불임 효과를 상쇄시키는 또 다른 변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생명과학 기술이 아무리 빠르게 발달해도 자연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내고야 만다. 그리고 유전자를 변형시킨 생물이 생태계로 유출되었을 때 기존의 생물과 전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인간 유전체를 모두 분석했다 해도, 어떤 유전자를 편집했을 때 의도했던 효과 외에 또 어떤 효과가 나타날지 지금의 기술로서는 예상할 수 없다. 


​  이렇게 이 책은 최근의 생명과학, 특히 합성생물학의 명암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대학교 때 교수님의 강의보다 명쾌한 필기 노트로 동기들의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던 송기원 교수는 이 책에서도 최대한 쉽고 명쾌하게 최근의 생명과학 연구와 그 원리들을 설명한다. 송기원 교수를 캐릭터화한 것으로 보이는 박사 캐릭터와 고양이 캐릭터, 생쥐 캐릭터가 그림을 통해 합성생물학의 원리를 설명하는 일러스트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처음에는 이 책이 그런 일러스트들로 이루어진 책인 줄 알았다. 막상 책을 읽어보니 텍스트가 주이고 일러스트는 한 챕터당 하나씩만 나오지만, 합성생물학의 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캐릭터들이 귀여워 과학책의 딱딱한 느낌을 덜어준다. 


​  이 책을 통해 지금의 생명과학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연구자들도 버거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생명과학이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책뿐만 아니라 더 많은 생명과학 관련 소식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생명과학이 영향을 미치는 날은 생각보다 빨리 올지 모르고, 이미 와 있을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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