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 - 사회와 인간에 지속하는 건축의 가치
김광현 지음 / 공간서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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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서 있는 스님. 저자는 새벽의 부석사를 바라보면서 모두가 그곳에서 느끼는 경건함, 경외감, 성스러움이 부석사의 공동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진 출처: http://www.outdoor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616


  이 책의 제목에서 낯선 단어가 눈에 띈다. ‘공동성’이란 대체 뭘까? 공동성은 어떤 장소와 공간에 대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그 장소만의 가치, 그 장소를 그 장소답게 만드는 본질이다. ‘공동’이라는 말 때문에 공동성이 공동체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공동성은 어느 한 공동체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공동체를 넘어 서로 다른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까지 이어준다. 예를 들자면, 새벽의 부석사에서 예불을 드리는 스님들부터 신도들, 답사하러 온 학생들, 여행 온 관광객들까지 모두가 느끼는 경외감, 성스러움, 경건함이 부석사만이 지니는 공동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공동성이 저자인 건축가 김광현 교수가 생각하는 건축의 본질이자 우리가 지켜가야 할 가치이다. 이 책에 실린 김광현 교수의 글들에서 일관성 있게 이야기되는 것은 ‘공동성의 건축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 유럽 어느 도시에 가도 있는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 교류하려는 시민 공동의 의지가 담겨 있다. 사진 출처: https://www.pps.org/places/piazza-san-marco


  그가 생각하는 ‘공동성의 건축’은 어느 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공동의 의지, 질서, 감각이 무엇인지 묻고 그것을 탐구하는 건축이다.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는 곳을 건축하려고 하는 시민 공동의 의지가 담겨 있다. 직장 어린이집은 직원의 아이들이 회사 모두의 아이들이라는 근본적인 가치에 회사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공감했기에 건축된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이들에게 속해 있는 인간의 본성, 가치에 대해 묻고, 그것을 건축으로 실천하는 것이 건축가의 임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  건축에서 인간 모두에게 속한 가치와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현학적이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지금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 그는 어떤 현학적인 수사나 허세도 거부하면서, ‘팩트 폭격’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지금 우리 건축이 품고 있는 문제들을 거침없이 폭로하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건축학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하나 같이 “저는 어렸을 때부터 건축을 사랑했거든요.”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런 태도는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건축은 현실적으로 도전해야 하는 실천적 학문이다. 이런 본질을 ‘인문학’이나 ‘미학’이라는 포장지로 가려도 건축이 현실의 온갖 문제와 제약들과 부딪치며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나치게 낮은 설계대가, 건축 경기는 점점 나빠지는데 지금도 지나치게 많이 배출되고 있는 건축가들, 단결하지 못하고 각자의 이익이나 입장 차이 때문에 사분오열되는 건축협회, 시민들이 요구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가장 싼 값으로 공공건물을 만들려고 하는 공공기관들까지 건축가가 부딪쳐야 하는 현실은 첩첩산중이다.


  그러나 저자는 공동성의 건축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건축가로서 앞으로 자신이 겪을 어려움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학생에게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제 학교에 들어오게 되면 먼 훗날 내가 건축 작품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그 작품을 넘어 이렇게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그들의 생활에 바짝 다가서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더 풍부해지도록 하는 것에 최종 목표를 두어라.” 그는 건축 안에 사회에 공간과 장소를 제공하고 사회 구성원들을 묶어주며 사회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힘이 있다고 믿는다. 건축을 사랑하고 가꾸며 건축을 설계하고 짓는 이들의 노력을 알면 나 자신의 삶이 풍부해지기에, 건축을 전공하지 않는 일반 국민들에게도 건축에 대한 기초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공동성의 건축으로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그의 꿈을, 건축가들뿐만 아니라 건축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이유다.


* P. S. 이 책에 실린 글들 중에는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에 쓰여진 글들도 많지만, 슬프게도 그 당시의 문제점들이 2010년대인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그 문제점들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저자는 글을 쓴 시점을 명시하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생각을 원래 글 뒤에 덧붙여, 책의 시의성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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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 - 사회와 인간에 지속하는 건축의 가치
김광현 지음 / 공간서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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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붙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건축을 통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라는 이상을 잊지 않는다. 허세와 현학적인 수사 하나 없이 지금의 우리 건축이 품고 있는 문제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철저히 현실에 입각한 대안과 이상을 이야기한다. 건축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도 배워야 할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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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법이론의 전개 법철학연구 총서 5
윤진숙 엮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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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고이 사건을 계기로, 1999년 제정된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에 성희롱을 불법행위이자 성차별로 명시하게 되었다남성 가장인 호주(戶主)를 중심으로 호적을 정리하는 제도인 호주제는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의 잔재로 양성평등에 어긋나기에 2003년 위헌 판결이 내려졌고, 2008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그리고 2017년 10, 23만 여 명의 시민들이 낙태죄 폐지 청원에 참여했고 올해 4월 11일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여부를 선고할 예정이다이렇게 우리 법은 여성의 자유와 평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이런 흐름을 따라 여성 문제페미니즘과 관련된 법학 논문들도 계속해서 나왔고이 책은 그 중 16개의 논문을 뽑아 엮은 것이다.

 

  낙태죄 위헌 여부 선고를 몇 달 앞둔 지금가장 먼저 눈이 가는 글은낙태죄 헌법소원과 여성의 목소리낙태는 1953년 형법 초안에서부터 죄로 규정되었고임신이 임산부 자신의 건강에 위해가 되거나 성폭행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처럼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임신일 경우에만 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했다이미 7년 전인 2012년에 낙태죄에 대해 헌법소원이 제기되었지만헌법재판소에서는 낙태죄 조항이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한다고 보기 어려우며이 조항으로 제한되는 사익(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조항으로 보호되는 공익(태아의 생명)에 비해 중요한다고 볼 수 없다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다고 선고했다그러나 낙태죄가 처음 규정된 이후로 수십 년 동안 태아의 생명은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졌지만태아를 직접 몸 안에 품고 낳고 양육하는 여성들의 권리는 그보다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낙태죄 조항의 역사를 훑어본 뒤이 글은 낙태 경험에 대한 여성들의 인식 조사 결과를 보여준다. “법이 낙태를 금지한다면 원치 않은 출산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84퍼센트의 응답자들이 그래도 원치 않는 출산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고, “법이 낙태를 허용한다면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낙태를 할까라는 질문에는 78퍼센트의 응답자들이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응답자들은 국가에서 법으로 낙태를 허용하거나 금지하는 것과 무관하게 출산은 개인이 선택할 문제라고 답했다또한 낙태 시술은 여성의 신체에도 유해하고 정신적으로도 아이를 죽였다는 고통을 안겨주는 것을 알면서도 낙태를 감행할 정도면 정말 절박하게 낙태를 해야 했던 것이다여성들이 낙태를 쉽게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필자는 그 동안의 낙태죄 관련 논의에 낙태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이 글을 통해 그녀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 밖에도 성희롱성매매여성 채용 할당제 등 여성페미니즘 관련 굵직굵직한 이슈를 다룬 글들이 이 책에 담겨 있지만,동성애혼인에 대한 법적 개입의 딜레마와 가족 이데올로기 해체는 여성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에게까지 눈을 돌린 글이라 흥미롭다억압을 당한 경험이 있는 약자는 다른 약자에게 더 잘 공감할 수 있기에 여성을 넘어 또 다른 약자소수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본 것이다필자는 동성애가 배척되어 온 근본적인 원인이 이성애자 남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집착이라고 보고 있다성소수자들이 이성애자와 다를 것 없는 사회 구성원으로 승인되었지만아직도 동성결혼은 기존의 가족결혼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여겨져 소수의 국가들에서만 허용되고 있다자녀를 가지는 것은 허용하지 않지만 두 동성애자의 동반자 관계는 허용하는 파트너십또는 시민결합 형태로 동성결혼은 서서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과정조차 국가에서 성소수자들의 삶을 통제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배우자로서의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인정받을 필요가 있지만성소수자들이 동성결혼을 허락해 달라며 국가에 매달리고이성애자들의 일부일처제를 흉내 내는 건 아닌지 의문을 품는다성소수자들마저 정상적인 가족에 집착해 국가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려고 한다는 것이다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지금기존의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성소수자들을 '정상화'시키고 정상화되어야만 포섭하는 국가의 모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그러나 성소수자들이 동성결혼을 하고 배우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을 꼭 국가의 품 안에 들어가려는 발버둥이나 이성애자들의 일부일처제 흉내 내기로만 치부해야 할까결혼 자체가 인류에게 뿌리 깊이 이어져 온 하나의 제도이기는 하지만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서로의 배우자로서 떳떳하게 살아가고 싶은 욕망은 이성애자들만의 것은 아니다그러한 욕망도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주입된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사랑하는 한 사람하고만 결혼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성소수자에게 왜 이성애자 흉내를 내고 그래그냥 자유롭게 살아가면 되지.”라고 말하는 것도 이성애자의 또 다른 오만이라고 생각한다동성결혼에 대한 고찰은 흥미로웠지만그 결론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 점에서는 아쉽지만이 책에서는 법 집행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당사자인 약자소수자들의 목소리보다는 엘리트 법조인들의 판단이 더 중요시된다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다이 책에 실린 마지막 논문로여링을 통한 맥락 추론에서는 소수자가 처한 맥락을 추론하면서 변호 업무를 실습하는 교육을 소개하고 있다. ‘로여링lawyering’은 변호사처럼 생각하는 훈련으로 미국의 로스쿨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변호사 실습 교육이다학생들은 의뢰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의뢰인이 어떤 경험을 했고그 경험이 어떻게 법적 문제가 되었는지그 경험이 의뢰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등 의뢰인이 처한 맥락을 추론한다그 과정에서 법의 합리성이나 중립성이라는 명목으로 가려져 있던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그리고 사회복지사심리학자 등 다른 분야 종사자들과의 협동을 통해 법률적인 면과 법률 외적인 면 양면으로 의뢰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이런 제도가 국내에도 도입된다면당사자인 여성이나 다른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법 집행에 반영되기 힘든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문제를 법 집행에서 다룰 법조인이나 법 전공 학생들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법조인은 아니지만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일반 독자들도 읽어 볼 가치가 있다법학 논문이지만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고생각보다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글들도 있다.


  다만 교열 상태가 좋지 않다주술 관계가 맞지 않고 조사가 잘못 쓰인 문장들이 많고오탈자도 많다논문 사이트에서 논문 자체를 그대로 가져오고 다듬지 않은 느낌이다그리고 본문에서 언급하는 날짜들로 보아 2000년대 초반에 쓰여진 논문들도 여러 편 있는데, 10여 년 전 상황을 근거로 이야기하고 있어 시의성이 떨어진다이미 폐지된 호주제와 동성동본 혼인 금지법을 비판하는 논문이 그 대표적인 예다논문을 썼을 당시의 법이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현재의 법이 그때 이후로 어떻게 변했는지는 보여주지 못한다작년 11월에 출간된 책이라면 지금의 흐름을 좀 더 많이 담고 있어야 했는데논문 선정이 아쉽다이러한 점들이 이 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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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법이론의 전개 법철학연구 총서 5
윤진숙 엮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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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어떻게 여성의 목소리를 담고 실제 여성의 입장과 경험을 반영해 변화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어, 법조인은 아니지만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일반 독자들도 읽어 볼 가치가 있다. 다만 실려 있는 논문 중 2000년대 초반에 쓰여진 논문들은 시의성이 떨어지고, 비문과 오자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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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장수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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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누구의 엄마도 아니다. 지금 나 한 사람의 삶만으로 벅차고, 앞으로 엄마가 될지 되지 않을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엄마로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싶었다. 우리 엄마부터 엄마가 된 친구들, 선후배들, 지인들, 그리고 내가 공공장소에서 마주치게 될 이름 모를 엄마들까지, 나는 수많은 엄마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네가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르는 거야."라고 말하는 대신 "엄마로 사는 게 나한테는 이래."라고 말하는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다. 이 책은 MBC 라디오 PD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삶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은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모성애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지도 않고, 비혼과 비출산을 결심한 사람들에게 아이를 낳고 키우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나는 엄마가 된 게 이렇게 좋은데 너는 이 행복을 모르겠지. 넌 왜 결혼 안 하니? 왜 아이를 안 낳니?"라고 말하는 친구나 친척을 만났을 때의 곤혹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에, 엄마가 될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이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나는 비혼과 비출산을 선택한 당신을 응원한다. 지지한다. 그 선택에 따르는 행복을 충만하게 누리길 기원한다. ...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 아니듯 아이는 행복의 증명이 아니며, 당신이 선택에 따르는 무게를 감당하는 딱 그만큼 나 역시 내 선택의 대가를 치르며 살고 있다.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행복'을 늘어놓듯이, 비혼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 역시 그만의 행복을 나열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내 글이 '결혼과 출산이 정상적인 삶'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공고화하는 데 일조하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결혼과 육아가 부담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행복보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로 한 선택의 대가가 더 와 닿을 수밖에 없다. 한 번도 임신하고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태동을 처음 느꼈을 때, 첫째가 갓 태어난 동생을 처음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뭉클함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아이가 없고 고양이를 키우는 나로서는 아이의 몸짓 하나 하나가 신기하고 사랑스럽다는 이야기에 내 고양이를 대입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와 사람 대 사람으로 소통하면서 느끼는 감동은 고양이와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반면 나 혼자 살아가기도 빠듯한 경제적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막막해지고, 공공장소에서 도무지 통제가 안 되는 아이들을 마주치면 저 아이들을 집에서 키우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지 두려워진다.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문제들은 다양하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아이에게 먹일 돈까스를 튀기다 기름이 튀어 화상을 입는 것 같은 사소하고 사적인 문제들이 있다. 다른 한편 아빠와 엄마의 육아와 가사 배분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문제, 노동 시간은 긴데 정부에서는 보조금만 지원해 주니 아이와 지낼 시간이 부족해지는 문제처럼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도 있다. 저자는 사적인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면서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는 분노한다. 사회과학 서적이 아니니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거나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친밀감과 연대감을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부모가 아닌 사람들은 부모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충을 헤아려보고 그 고충을 자아낸 원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로서가 아닌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 중에서도 공감되는 것들이 있다. 마침 회의에서 바보 같은 소리만 하다 나온 것 같았을 때,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났어도 나 자신이 기여한 건 없는 것 같아서 좌절감을 느낀다는 구절을 읽었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한 건가 싶어 자책하다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게 위로가 됐다. 좀 더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은 먹는 것과 같고 그 감상을 글로 쓰는 것은 똥을 싸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에도 공감했다. 많이 읽고 보기만 했지 아무 것도 쓰지 않으면 뭔가 묵은 것이 내 안에 쌓인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글 마렵다'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안다. 머릿속에 묵혀 뒀던 글을 마침내 썼을 때의 후련함도. 또한 요즘 같이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그만큼 생각지 못한 곳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때에 글을 쓰는 사람의 두려움도 공감한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의 서평을 썼다가 정말로 악플이 달리고 나서부터는 더 두려워졌다. 하지만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글이 과연 좋은 글일까? 그런 글을 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글을 쓰는 것의 목표는 욕을 먹지 않는 게 아니다, 글을 쓰면서 욕을 먹을까에 신경 쓰는 것, 실수할까 걱정하느라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이 책의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다.


  이 책은 육아 문제를 심도 있게 분석하는 책도 아니고, 육아의 꿀팁을 제시해 주는 책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자 엄마로서 살아가는 삶을 털어놓은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이가 없는 나는 아이가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 이 책이 모든 엄마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다른 사람,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한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몰랐던 세상 한 귀퉁이를 보게 되고, 세상을 점점 더 많이 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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