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톰의 발라드
빅터 라발 지음, 이동현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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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러브크래프트가 음산한 배경으로만 이용했던 캐릭터에게 자기 목소리와 이름, 서사를 부여해 그가 괴물이 아닌 사람, 그것도 기쁨과 슬픔을 느낄 줄 아는 사람임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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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
박찬효 지음 / 책과함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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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니는 말괄량이>(1961) 스포일러 포함


  전에 일하던 회사에서 남자 상사와 남자 아르바이트생들이 내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지금은 딱히 성차별이라는 게 없지 않나요오히려 여자들한테 더 유리한 세상이잖아요?” 나는 이렇게 되물었어야 했다면접 볼 때 결혼할 나이인데 앞으로 결혼할 계획 있나요?”라는 질문 받아본 적 있어요집 앞 골목에서 갑자기 모르는 남자한테 끌려가서 강간당할 뻔한 적 있어요글을 쓸 때 조금이라도 페미니즘 성향이 드러나면 악플을 받을까 두려워서 자기 자신을 검열해 본 적 있어요하지만 그때 나는 뜻하지 않은 질문에 당황해 논리적으로 답하지 못하고 두서없이 몇 마디밖에 하지 못했다.

 

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는 내가 정확히 답하지 못했던 그 질문에 단호하게 대답한다표면적으로는 여권 신장이 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경쟁 상대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미디어에서는 그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그리고 2000년대 이후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가 사실은 이전 시기부터 지속되어 왔던 것이고각 시기마다 국가가 가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가족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져 왔다고 주장한다저자는 이 책에서 1950년대부터 2020년 현재까지 신문잡지영화드라마 등의 미디어에 이러한 여성혐오가 어떻게 반영되어 왔는지 추적한다.


  1950, 60년대의 한국 영화에도 자기주장이 강해 남성을 압도하는 여성들이 등장했다하지만 그녀들은 실질적으로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여성상을 상상한 존재에 불과했기에그저 과장되고 희화화된 가상의 캐릭터로 남았다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해 실질적으로 가부장제 질서를 흔들 가능성이 있는 여대생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사치스러우며 정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1950, 60년대 미디어에 나타났다똑같이 고향을 떠나 먼 타지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공부하는데도남자 대학생들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반면 여대생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치정 사건에 휘말리는 부정적인 모습이 부각되었다기혼 여성은 사회 활동을 해도 가정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에서 해야 했다부업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는 것은 여러 신문 기사들에서 장려되었지만기혼 여성이 자아실현을 위해 사회 활동을 해야 한다는 언급은 당시의 신문 기사들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가정의 번영이 곧 기혼 여성의 자아실현으로 여겨졌으며사회에서 명성을 드날릴 만한 재능을 갖고 있어도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활약하는 것보다는 주부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 더 중요시되었다.


  1980, 90년대에는 여성에게 불리했던 법들이 개정되는 등 표면상으로는 여권이 신장되는 듯했지만모든 사회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가부장 권위의 추락과 여권 신장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나타났다경제력과 도덕성을 모두 갖추고 가족을 모범적으로 이끄는 가부장은 현실에서 존재하기 어려웠기에실제로 모범적인 가장이 되기보다는 가족 제도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는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가부장제라는 신화를 지키려고 했다사회에 진출해 남성들의 경쟁자가 될 여대생에게는 학업을 소홀히 하고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성과 결혼해 신분 상승을 추구한다는 편견이 씌워졌고이혼녀는 과거의 여성들처럼 인내하지 않고 이기적인 이유로 이혼을 하고자녀들도 돌보지 않으며 성적으로 문란한 이미지로 미디어에서 그려졌다사회 활동을 하려는 여자들을 가정에 묶어두려는 전략도 나타났다. 1990년대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여주인공 박지은(하희라)은 대학원에 진학할 정도로 공부 욕심도 많고 당찬 여성이었지만남주인공와 사랑에 빠지면서 공부를 중단하고 모범적인 전업주부가 된다딸의 재능을 알고 딸이 사회 활동을 할 것을 기대했던 여주인공의 어머니(윤여정)가 결혼을 말리며 하는 말은 2020년인 지금에도 와 닿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절절하다.

 

제발 넌 공부해공부해서 엄마가 못 가진 또 하나의 널 확실하게 빛내면서 살란 말이야나처럼 결혼이란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져서 나 자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이렇게 되지 말고엄마 친구들 지금 사회적으로 한다 하는 친구들 더러 있다걔들 만나면 다르다빛이 나후광 같은 게 있단 말이야자신 있고 당당하고엄만 그런 친구들 만나면 참 비참해져아는 게 살림밖에 없으니까화제도 궁색하고자신도 없고엄마 죽고 싶어너 그렇게 되고 싶어?”

 

그러자 여주인공은 이렇게 대답한다.

 

사랑하는 사람 열심히 뒷수발해 주는 거 얼마나 아름다워사회활동이 반드시 더 가치가 있는 건 아니잖아내 가정 하나 잘 꾸리는 게 가장 근본적인 사회 기여국가 기여야혼신을 다해서 어른 모시고남편 비뚜로 안 나가게 내조하고아이들 문제 안 만들고그게 얼마나 가치 있고 아름다워?”

 

행복한 결혼이 여성에게 진정한 자아실현이며주부로서의 헌신이 무엇보다 위대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각각 약사와 모델이라는 직업을 통해 경제력을 갖추고 경력을 쌓아 나가던 다른 여성 캐릭터들도결혼 전에는 자기중심적인 철부지였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인격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이렇게 신세대에 속하며 학력이 높거나 경제력이 있는 여성들조차 가족 제도로 포섭하려는 모습이 당시 미디어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남성보다 우월한 능력을 지닌 알파걸따뜻한 모성과 사회적 능력을 모두 갖춘 워킹맘이 언론 보도에 자주 등장하며, 2010년대 이후로는 국가 차원에서 여성의 경력 단절 방지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언뜻 보면 국가가 여성의 활발한 사회활동을 지원하면서 성 평등을 실현하려는 것 같지만더 복잡한 맥락이 숨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지금까지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아버지의 경제력만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려워져가족 제도를 지탱하는 데 여성의 경제력이 필요하게 되었다문제는 지금도 부부의 가사 분담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직장 일과 가정 일을 병행해야 하는 기혼 여성이 남성만큼 자아실현을 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공론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로 진출한 여성들이 경쟁상대로 떠오르자 20대 남성들 중 상당수가 자신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반페미니즘 정서를 갖게 되었다그러나 사실상 군대를 다녀온 학점 3.5점인 남자와 학점이 4.0인 여자 중 취업이 더 잘 되는 것은 남자이고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한 지위에 놓인다한국은 성별 임금 격차가 OECD 국가 중 가장 크고재력과 권력을 놓고 사회 최상층에서 싸우는 경쟁은 남성과 여성 사이가 아니라 주로 같은 남성들 사이에서 일어난다그런데도 미디어에서는 성공한 전문직 기혼 여성의 모습이 부각되고 여학생의 취업이 쉬운 것으로 왜곡되며전업주부가 남편의 경제력에 기생하는 존재로 그려져남성의 적이 여성이라고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저자는 더 나아가 여성 혐오가 남성과 여성 간의 대립뿐만 아니라 여성 안에서의 갈등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그 어느 때보다 대학 진학취업에서의 경쟁이 심해지고 경제적 문제로 결혼과 육아가 힘들어진 지금가정을 지탱하고 더 나아가 자식들을 통해 더 나은 사회적 지위로 올라가려는 모성 경쟁이 심해질 것이다여성혐오의 최종 도착지는 여성 간의 갈등과 경쟁의 심화이며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가부장제 질서가 유지될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개인은 각 시대의 사회 질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국가는 그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며 미디어는 그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용되어 현실을 왜곡하곤 한다아버지어머니아내남편여대생전업주부취업주부 등 다양한 존재들이 각 시기의 상황에 따라 특정한 역할을 요구받아 왔다우리가 누구여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규정하는 사회 질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고신자유주의 시대인 지금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하지만 나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며나보다 우위에 서서 내 밥그릇을 빼앗는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분노와 혐오를 쏟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평등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그것이 저자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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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
박찬효 지음 / 책과함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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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과연 성 평등을 향해 발전해 왔을까. 가족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각 시대마다 여성들에게 어떤 혐오 이미지가 덧씌워져 왔고 그것이 미디어에서 어떻게 그려졌는지 각 시대별로 살펴본다. 진정한 성 평등을 이루려면 미디어 속 허상이 아닌 우리 자신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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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
하현 지음 / 빌리버튼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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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는 내게 외국어라기보다 생존 수단이다취업과 재취업을 위해서는 영어 점수가 있어야 되는데 토익토플텝스, G텔프 등 각종 영어 능력 시험들은 유효 기간이 2년밖에 되지 않는다싫어도 2년에 한 번씩은 영어 시험을 봐야 하는 나로서는 영어 공부가 의무였기에낯선 언어를 새롭게 배우는 설렘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런 설렘을 느끼게 해 준 언어는 프랑스어였다대학원 때 불문과 교수님의 조교로 일하게 되면서 프랑스어를 알아두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학부에서 진행되는 교양 프랑스어 수업을 청강했다막상 조교로 일하고 보니 프랑스어가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예전부터 호기심과 호감을 느끼고 있던 언어였기 때문에청강을 마치고 나서도 독학을 했다문법 위주로 독학해 말하기와 듣기는 잘 못하지만 프랑스어 텍스트를 어느 정도 독해할 수는 있게 되었다그 덕분에 예전이라면 그냥 까만 건 글씨요하얀 건 종이였을 각종 프랑스어 텍스트들을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기쁨이 생겼다내가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더 넓어졌다는 기쁨이었다.

 

  ‘낯선 언어를 배우면서 만난 의외의 기쁨을 담았다기에,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도 내가 느낀 것 같은 기쁨을 이야기하는 책인 줄 알았다읽어 보니 이런 기쁨이 나오기는 한다저자는 길에서 지나쳤던 작은 카페의 이름이 스페인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TV에 나오는 스페인어권 사람들의 말에서 아는 단어가 들릴 때배움의 결실을 확인하는 작은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궁금해 하고 기대했던 스페인어와 스페인어권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rr’은 그냥 ‘r’로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혀를 굴려서 ㄹㄹㄹㄹ로 발음해야 한다는 것스페인어에서 의무를 나타내는 표현에는 개인의 의무를 말하는 것과 공공의 의무를 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되어 흥미로웠다. ‘Mi amor(내 사랑)’ ‘Mi cielo(내 하늘)’, ‘Mi vida(내 생명)’, ‘Mi tesoro(내 보물)’ 같은 미사여구로 연인을 부른다는 점에서 스페인의 정열이 느껴지기도 했다스페인에서는 소울메이트를 ‘Media naranja(오렌지 반 쪽)’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직관적으로 와 닿는 사랑스러운 표현이라고 느꼈다.

 

  같은 라틴 계열 언어권이다 보니 내가 알고 있는 프랑스어와 비슷한 점들이 많아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도 있었다일반적인 것에 붙는 부정관사 ‘a/an’과 특정한 것에 붙는 정관사 ‘the’, 두 개의 관사만 알면 되는 영어와 달리스페인어와 프랑스어 모두 여성형과 남성형단수형과 복수형으로 관사가 나뉜다그리고 두 언어 모두 영어와 달리 반말과 존댓말이 있고반말과 존댓말에 해당하는 인칭과 동사 형태가 따로 있다또한 스페인어에도 프랑스어에도 그냥 나는 옷을 입는다/샤워한다/면도를 한다고 해도 될 텐데 직역하자면 나 자신이 입게 한다/샤워하게 한다/면도를 하게 한다는 재귀의 개념이 있다책을 읽으면서 스페인어를 제대로 공부한다면 프랑스어에서 공부한 문법 개념들이 꽤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들 중 어떤 이야기를 해도 몇 발자국만 나아가고 만다는 것이다이 책에 실린 주제들은 더 깊이 파고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주제들이다스페인어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기본형은 남성 단수형인데왜 여성은 기본형이 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사용자가 수천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으로서 영어나 스페인어 같이 전 세계 수십 개 국가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쓰는 강한 나라의 말이 모국어인 사람들에게 느끼는 부러움. ‘존재와 상태를 나타내는 be 동사가 따로 있다는 것정말 흥미롭고 더 깊게 풀어낼 여지가 많은 주제들인데그에 대해 사유를 하기보다는 상념들을 늘어놓는 데 그친다. 좋은 에세이집은 책 한 권을 관통하는 주제에 집중하고, 책에 실려 있는 각 글마다 주제가 다르다면 에세이집이 아니라 잡문집이나 일기라고 한다. 이 책은 작가의 머릿속을 흘러가는 상념들을 풀어놔서인지 스페인어나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 외에 너무 많은 것들을 쏟아 놓아 '스페인어' 또는 '스페인어를 배우는 나'에 대한 에세이집이라기보다는 잡문집이나 일기장에 가깝다. 

 


  이 책이 '스페인어'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작가가 스페인어에 대해 호기심은 있지만 열의는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작가는 그저 배워 본 적이 없는 낯선 언어이고가까운 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언어가 스페인어여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기로 선택했다함께 학원을 다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스페인어권에 여행을 가기나 유학을 갈 생각도 없고스페인어를 아주 잘 하겠다는 생각도 없다그래서 복잡한 동사 변화나 시제 같은 스페인어의 어려운 부분을 공부하기 싫어한다학원에 가다 쓰러지기까지 해 자체 여름방학을 한 달간 가진다몸에 무리가 가서 쉰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방학 동안 스페인어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아 남들에게 뒤쳐져 의욕도 잃어가는 심정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딱히 아프거나 중요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닌데 마지막 수업도 가지 않는다마지막 수업을 가지 않았다는 말 뒤에 역시 놀러가지 말고 학원에 갔어야 하는데...’라는 문장이 붙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어린 아들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마지막 외국어 수업에 참석하지 못한 한 영화 주인공을 생각하면 이런 태도가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는 한다내가 스페인어라면 작가에게 너 나한테 관심이 있기는 해?”라고 물었을 것이다. 작가 본인도 이야기한다. 스페인어를 사랑하지 않고 약간의 흥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사랑은 노력 밖의 영역이라고. 

 

  물론 작가의 말대로 배움이 숭고할 필요는 없고외국어를 배우는 데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도 않다라틴어 전문가인 한동일 교수도 라틴어 수업에서 있어 보이려고 라틴어를 공부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했고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작가는 이 책에서 스페인어 자체보다는 스페인어를 공부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고 궁금한 것은 마음껏 질문할 수 있게’ , ‘조금 더 뻔뻔해지고 자유로워진’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하고무엇인가를 열정적으로 해서 성과를 얻어내려는 일에 지친 사람들은 별다른 열의 없이 일상에 작은 균열을 내려는 마음에 공감하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고 위로를 얻고꼭 스페인어가 아니더라도 사소한 것에 새롭게 도전할지도 모른다그렇게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는 것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ㅇㅇ해도 괜찮아’ 류의 에세이는 이미 충분히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괜찮아그저 일상을 좀 더 새롭게 만들면 돼그래도 어느 정도는 내게 남는 게 있을 거야이런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열정을 강요하는 꼰대도 아니다누구나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니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좋다하지만 글 쓰는 사람이라면 남들과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생각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내가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을 놀랍도록 날카롭게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포착하는 글을 읽고 싶다. ‘내가 이래서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 읽는 사람이구나를 실감하게 하는 글을 만나고 싶다.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이 책으로 쓰기로 한 소재나 주제에 대해 호기심 이상의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자신이 정말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쓸 수 있는 소재를 골라야 했다. 애정이나 열정이 아니라 증오나 혐오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더라도 한 권의 책으로 만들 만큼 강렬한 감정과 집중력을 끌어내는 소재여야 했다. 자신에게 한 책을 관통하는 열정과 애정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소재를 골랐으니, 그 소재를 깊게 파고 드는 대신 자신이 일상에서 느끼는 상념들과 뒤섞인 잡문집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독자인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쉽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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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
하현 지음 / 빌리버튼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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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를 배우면서 보낸 시간들과 그 시간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소탈하게 풀어놓았다. 글을 더 깊이 풀어내면 좋을 텐데 글마다 몇 발걸음씩만 내딛고 멈추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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