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한 끼 - 아라비아의 디저트부터 산사의 국수까지, 맛과 믿음의 음식인문학
박경은 지음 / 서해문집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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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이지만 내 종교가 그렇게 내 식생활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순절(四旬節, Lent,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전까지의 40일. 기독교인들은 이 시기 동안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해 속죄와 경건의 시간을 보낸다.)에 금식도 잘 하지 않는 나일론 신자여서 그렇긴 하지만. 부활절에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삶은 달걀을 먹는 것 말고는 내 식생활과 내 종교가 관련될 일은 평소에 거의 없다. 하지만 육식을 할 수 없는 불교 승려들이나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는 무슬림들처럼 식생활에서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나와 다른 종교, 다른 문화권인 사람들은 종교 때문에 어떤 것을 먹을 수 있고 어떤 것을 먹을 수 없을까. 종교 덕분에 어떤 음식 문화를 가지게 되었을까. 이런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문화권의 음식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 중동 문화에 관심이 많고 이태원의 터키 제과점에서 파는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중동 이슬람 국가 사람들이 강한 단맛을 좋아하는 이유가 특히 흥미로웠다. 중동의 더위를 이겨내고 금식 기간인 라마단을 지낸 뒤 기력을 빨리 회복하는 데는 단 음식이 도움이 되기 때문에, 중동의 디저트들은 단맛이 매우 강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중동의 무슬림들이 단맛을 좋아하는 데는 이런 실용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도 있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맛있는 식사 등 현세에서 즐기는 쾌락이 내세의 낙원에서 누리는 기쁨의 예시라고 여긴다. 화려하고 다양한 디저트는 낙원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확인해 주는 증거다. 디저트를 즐기는 것이 믿음의 증거라는 내용은 코란에도 나와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한 종교가 어떻게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음식 문화에 영향을 미쳤는지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지구 반대편 먼 곳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욕구가 채워져 갔다.



또한 기독교인인 나도 기독교가 사람들의 식생활과 음식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독교와 관련된 음식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종교개혁에 버터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15~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는 고기와 유제품이 성욕을 부추긴다고 여겨 성직자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사순절과 기타 금식 기간에 버터를 먹지 못하게 했다. 문제는 1년 중 버터를 먹으면 안 되는 기간이 거의 반 년은 됐다는 것이다. 그나마 올리브가 많이 나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부 유럽에서는 버터보다 올리브 오일을 즐겼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육류와 버터를 주된 식량으로 삼았던 프랑스, 독일 등 중북부 유럽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왕족들과 귀족들, 부자들은 돈을 주고 사순절과 금식 기간에도 버터를 섭취할 수 있는 권리를 샀고, 교회는 버터 섭취권을 판 돈으로 화려한 성당 건물을 지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금식 기간에 정해진 규정을 어겼다가 벌금을 내거나 채찍을 맞거나 투옥되기까지 했다. 마르틴 루터는 1520년 「독일 지역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 금식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한 나라 중 대부분이 버터를 주된 식량으로 삼았던 북부, 중부 유럽 국가들이었다. 이렇게 버터는 종교 개혁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으며, 지금도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버터를 많이 먹는 지역에서는 개신교의 세가 강하다. 주 안에서는 다 같은 형제 자매라고 인간의 평등함을 주장하는 종교가, 기본적인 욕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평등에 일조했다는 것이 씁쓸하게 남는다. 그리고 종교만이 일방적으로 인간의 식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식생활 또한 종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 가득 실려 있는 선명하고 화려한 음식 사진들은 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텍스트가 그 음식에 얽힌 교리나 문화를 설명하고 그 음식의 맛을 설명하고 있으면, 이미지는 그 옆에서 실제로 그 음식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면서 낯선 문화의 낯선 음식들이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와 닿게 한다.

낯섦을 설렘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경우 낯섦은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자신과 다른 종교, 문화를 가진 상대가 무엇을 먹는지 또는 먹지 않는지에 대해 조롱하고 공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고 이야기한다. 그 낯섦이 배척이 되고 혐오로 번지는 상황이 너무나 많기에 이 책이 서로의 낯섦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 속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음식 문화가 주는 낯섦이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혐오가 아닌, 나를 넘어선 더 넓은 세상을 만나는 설렘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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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한 끼 - 아라비아의 디저트부터 산사의 국수까지, 맛과 믿음의 음식인문학
박경은 지음 / 서해문집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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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식생활이 생각보다 많은 면에서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책. 내가 믿는 종교가 어떻게 내 식생활에 영향을 미치는지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의 음식 관련 규칙과 금기가 어떻게 사람들의 일상과 문화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새롭게 알게 되어 흥미로웠다. 생생하고 아름다운 음식 사진들이 시각적인 즐거움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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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놀러 갑니다, 다른 행성으로 - 호기심 많은 행성 여행자를 위한 우주과학 상식
올리비아 코스키.야나 그르세비치 지음, 김소정 옮김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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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도서를 볼 나이는 10년도 더 전에 지났다이 책은 청소년 도서로 분류되어 있고이 책의 원서도 아마존에서 고등 교육 교과서(higher education textbooks)’로 분류되어 있다그런데도 이 책을 계속 읽게 된 건 태양계 여행을 위한 안내서라는 독특한 형식 때문이었다이 책은 기존의 우주과학 책들처럼 태양계 안의 각 행성들에 대한 정보를 그저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그 행성들을 여행한다고 가정하고 그 행성에 가는 방법과 그 행성에서 볼 만한 것할 만한 것 등을 설명한다아직까지 태양계 안에서 인간이 실제로 다녀온 천체는 달밖에 없지만태양계 여행을 하는 상상을 하며 태양계의 천체들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그런 기대감으로 책을 펼쳤다.

 

  지구 안에서의 여행도 준비가 필요한데 그저 가겠다고 마음먹고 다음날 훌쩍 우주여행을 떠날 수는 없을 터. ‘지구를 떠날 준비’ 부분을 읽다 시력은 반드시 양쪽 눈 모두 2.0이어야 한다는 구절에서 좌절했다라식 수술은 무서운데 우주로 떠나려면 꼭 받아야 하는 걸까거기에 14킬로그램짜리 완전 무장을 하고 물에 들어가는 생존 훈련, 25미터 길이 수영장을 쉬지 않고 세 번 왕복할 수 있는 수영 실력하루에 40번씩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는 중력 훈련까지지구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우주로 나가는데 이쯤은 당연히 준비해 둬야 한다고 치자하지만 본문에서 태양계 여행을 하다 죽거나 다시는 지구로 못 돌아올 수도 있다고 암시하는 구절들이 계속 나타나니저자들은 태양계 여행을 권하는 걸까말리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달 표면에서 바라본 지구. 저자는 "(달 표면에 도착했을 때) 휴가를 떠나기 전에 머물렀던 모든 장소(지구)를 사진 한 장에 담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진 출처: NASA/GSFC/Arizona State University


  하지만 본격적으로 책 속 여행이 시작되면서 태양계 여행은 때려치우고 그냥 지구에서 안전하게 살까 하는 마음은 사라졌다책을 읽으면서 펼쳐지는 태양계 행성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다태양이 수성의 하늘을 한 바퀴 도는 하루는 176일인데 수성이 태양을 공전하는 1년은 88일이니수성에서는 하루가 1년보다 길다는 이야기화성에는 에베레스트보다 3배는 높은 화산이 있어꼭대기까지 등반하려면 한 달은 걸린다는 이야기목성의 허리케인 대적점은 수백 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는 이야기 등등내가 옛날 사람이었다면 상상력이 풍부한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했을 만한 이야기들이었다.


화성의 위성 포보스는 중력이 매우 작은 곳이다. 저자들은 포보스에서는 한번 도약하는 것만으로 높이가 830미터나 되는 버즈 할리파 빌딩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며, 높이뛰기가 포보스의 주 종목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저자들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출처: Steve Thomas, Olivia Koski, Jana Grcevich, Penguin Books


  이런 태양계 행성들에 대한 사실에 SF적인 상상을 더해 저자들은 천연덕스럽게 태양계 여행에서 볼 만한 것할 만한 것들을 안내한다달에 있는 호텔에서는 지구가 보이는 방을 달라고 하자든가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갈릴레이 위성(갈릴레이가 1610년에 발견한 4개의 목성 위성들이오에우로파가니메데칼리스토가 갈릴레이 위성에 속한다.) 대신 한적한 레다 위성에서 목성을 관찰하자든가토성의 고리에 캔 얼음으로 우주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자든가수백 년 뒤에나 가능하거나수백 년 뒤에도 가능하지 않은 일들을 마치 지금의 관광객들이 하고 있는 양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데실제로 내가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 유쾌했다그런 상상조차 완전한 허구는 아니고 태양계 행성에 대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거나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상상 속 태양계 여행을 마치고 저자와 독자는 지구로 돌아온다모든 여행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거니까저자들이 이 태양계 여행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구의 소중함이다태양계 다른 행성들에서 사람이 도무지 살 수 없는 극단적인 더위와 추위를 경험하고 아무런 생명도 없는 풍경을 본 사람이라면지구의 온화한 환경과 온갖 다양한 생물들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더욱 더 감동적으로 다가올 것이다이 책 덕분에 우리는 상상의 태양계 여행을 하면서 우리의 시야를 넓힘과 동시에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된다.


P. S.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알지만, 본문 앞의 화보 부분만 컬러로 하고 본문 안의 우주 이미지와 일러스트들은 흑백으로 처리한 것이 아쉽다. 특히 목성의 오로라나 천왕성의 푸르른 표면처럼 그 색채를 직접 확인하고 싶은 이미지들이 흑백인 것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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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놀러 갑니다, 다른 행성으로 - 호기심 많은 행성 여행자를 위한 우주과학 상식
올리비아 코스키.야나 그르세비치 지음, 김소정 옮김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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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계를 여행하는 여행객들, 아니 태양계를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유쾌한 태양계 안내서. 달에서 시작해 저 멀리 해왕성과 명왕성, 카이퍼 벨트의 소행성들까지 둘러 보고 오는 여행은 지구의 소중함을 더 절실히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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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톰의 발라드
빅터 라발 지음, 이동현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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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존 소설의 캐릭터와 설정을 다른 작가가 그대로 가져와 만들어낸 2차 창작 소설은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하지만 나름대로의 의의를 지니고 있고 작품성도 뛰어난 2차 창작 소설도 있다도미니카 출신 작가 진 리스는 『제인 에어』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캐릭터 버사 앙투아네트 메이슨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썼다원작에서 주인공 제인을 위협하는 미치광이로 나오던 버사에게 자기 목소리와 서사가 주어지면서그녀를 파멸로 몰아간 제국주의와 가부장주의의 추악함이 드러난다.

  『블랙 톰의 발라드』도 그런 2차 창작 소설 중 하나이다이 소설은 공포 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미국 소설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레드훅의 공포 」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레드훅의 공포 」는 1920년대한 괴짜 노인이 뉴욕의 레드훅 지역에 있는 집을 사들이고 그곳에 수상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한 형사가 그의 행적을 뒤쫓는 내용의 단편이다문제는 백인 작가인 러브크래프트가 이 작품에서 타 인종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이 소설에서 흑인동양인무슬림들혼혈 인종들은 빈민가 구석구석에 숨어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그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일을 꾸미는 것으로 묘사된다.

  흑인 작가인 빅터 라발은 원작에서 어두운 밤 낡은 집의 창문 뒤에 숨어 수상쩍은 웃음을 흘리던 흑인 청년들 중 한 명에게 찰스 토머스 테스터라는 이름과 서사를 부여했다사람들에게 토미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는타 인종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에 시달렸던 러브크래프트의 시선을 걷어내고 보면 악당도 괴물도 아닌 평범한 청년이다그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번 돈으로 늙고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고 있다토미는 딱히 머리가 좋지도 않고 특별한 재능도 없지만 식비와 주거비가끔 도박을 할 용돈만 있으면 삶에 만족하는 순박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레드훅의 공포 」의 주인공 로버트 수댐이 그의 앞에 나타나면서그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수댐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토미를 발견하고그에게 자신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와서 노래와 연주를 해 주면 500달러를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자신과 아버지의 몇 달치 생활비는 되는 거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 토미는 매우 기뻐했지만, 1920년대 당시 흑인이 혼자 백인의 집에 찾아가는 것은 곰과 레슬링을 하러 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토미는 수댐의 집에 찾아가다가 자신을 뒤쫓는 백인 소년들에게 위협을 당한다러브크래프트의 타 인종에 대한 공포가 막연하고 근거 없는 것인 반면토미가 백인들에게서 느끼는 공포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토미에게는 백인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그들 앞에서 착하고 순종적인 흑인인 척하는 것이 일상일 정도였다.

  토미가 수댐의 저택에 도착하자수댐은 책으로 가득 쌓인 서재로 그를 안내한다수댐은 토미에게 토미가 살고 있는 할렘이 어떤 지역인지 말한다. “경찰은 치안 유지와 갱생을 단념해 버렸고차라리 그 병든 지역으로부터 외부 세계를 보호하고자 방벽을 세우는 쪽을 택했어.” 그의 이 말은 「레드훅의 공포 」에서 그대로 가져온 구절이다러브크래프트와 수댐에게 할렘은 온갖 비백인과 혼혈 인종들이 들끓어 음모를 꾸미고 범죄를 저지르는 병든 지역이었지만토미에게는 아버지와 따뜻한 집이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제가 여태껏 살던 곳에 관한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대답한다여기에서 작가가 러브크래프트의 인종 차별적인 시선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뭐 이런 미친 백인놈이 다 있나 생각하던 토미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분명히 뉴욕의 야경이 펼쳐져야 할 창밖으로 바닷속 풍경이 보이는 것이다수댐은 대양의 해저에 한 왕이 잠들어 있고그가 잠에서 깨어나 돌아오면 토미의 인종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비참함은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하지만 잠든 왕이 깨어나도록 도운 자신들에게는 큰 보상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하룻밤 동안 상상도 못할 일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할렘으로 돌아온 토미는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자신들이 추적하던 수댐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토미를 의심하고 추적하던 백인 사립탐정 하워드가토미의 집을 불시 검문하다 그의 아버지가 총을 들고 있는 것으로 잘못 보고 총을 쏜 것이다토미의 아버지는 그저 기타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아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노인에게 탄창이 다 빌 때까지 총을 쏴 놓고도하워드는 자신이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그는 토미에게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얼어붙어 버린 토미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는다며, 흑인들은 개미나 벌 같이 감정이 없는 존재라고 경멸한다하워드와 함께 수댐의 행적을 쫓던 백인 형사 말론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하워드의 악행을 방관하고토미에게 동정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흑인 청년 한 명이 백인들의 폭력에 복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그랬기에 토미는 스스로 수댐의 부하가 되어 그가 외계 종족에서 받은 무시무시한 힘을 얻는다얼마 되지 않아 한 흑인이 피에 젖은 기타를 들고 다니며 수댐의 부관 노릇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뉴욕에 퍼진다순박한 청년 토미에서 무시무시한 범죄자 블랙 톰이 된 그는 수댐의 충성스러운 종 노릇을 하다결정적인 순간에 백인들에게 복수를 한다그를 자기 집에 붙잡아둬서 아버지를 지키지 못하게 한 수댐도죄 없는 아버지를 잔인하게 죽인 하워드도 그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당한다모든 일을 방관하기만 했던 말론은 눈꺼풀이 도려내져다시는 자신이 외면했던 것들에게서 눈을 돌릴 수 없게 된다그리고 토미는 신의 실패작인 인류 전체를 잠든 왕으로 불리는 외계 신과 그 일족에게 넘겨버린다.

  복수를 끝낸 토미에게 남은 것은 허무와 슬픔뿐이다복수를 마친 뒤 그는 절친한 친구 벅아이를 찾아간다온몸이 피로 물든 끔찍한 토미의 모습을 보고 무서운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면서도벅아이는 그를 여전히 예전의 토미로 대한다그러나 토미는 결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예전에 누렸던 평범한 행복도 다시는 되찾을 수 없었다토미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벅아이에게 말한 뒤 창문에서 뛰어내린다더 이상 평범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토미의 모습에서,「레드훅의 공포 」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약자의 입장에 서 본 사람만이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슬픔이다.

  「레드훅의 공포 」는 타 인종에 대한 편견과 혐오로 뒤범벅이 되어 있고서사와 대화도 빈약한 졸작이다빅터 라발은 원작에서 그저 배경으로 그려졌던 인물에게 그만의 이름과 서사를 부여하면서러브크래프트의 타 인종에 대한 공포가 환상에 불과하고 그 타 인종 또한 피와 살감정이 있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단순히 타 인종과 미지의 외계에 대한 공포만을 그린 원작과 달리『블랙 톰의 발라드』는 늘 폭력과 죽음의 공포에 노출되어 있었던 약자들의 슬픔을 담고 있다. 1920년대를 살아간 백인 러브크래프트는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슬픔이다이런 점에서 『블랙 톰의 발라드』는 원작을 넘어서서 원작이 담아내지 못했던 것들을 담아낸 훌륭한 재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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