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썰록
김성희 외 지음 / 시공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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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위가 약한 편이라 좀비물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관동별곡>부터 <만복사저포기>, <사랑 손님과 어머니>, <운수 좋은 날>, <소나기>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 문학 작품들을 좀비물로 다시 썼다는 책 소개에 궁금해졌다. 대체 저 작품들에 어떻게 좀비라는 소재를 넣을 수 있을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책에 실린 다섯 편의 패러디 소설 모두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필력도 좋았다. 각 소설에 대한 감상을 간단하게 적으려고 한다.

관동행: Gama to Gwandong (원작: 정철-관동별곡)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현대물보다는 사극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무서운 얘기를 해 달라는 학생들에게 <관동별곡>의 뒷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사 방식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너희 반이 진도 꼴찌다'라는 선생님들의 단골 레퍼토리에 누구나 <관동별곡>을 공부할 때 느꼈을 심정("폭포가 멋지군, 하면 될 걸 갖다가 용의 꼬리가 어떻고, 오바는 또 얼마나 심한지. 그래서 500년 뒤에 니들은 읽기 싫다고 난리를 치고")을 솔직하게 내뱉으니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게다가 <부산행: Train to Busan>을 패러디한 제목의 재기발랄함까지. 잔혹하지만 제목만큼이나 유쾌한 분위기를 끝까지 이끌어가 즐겁게 읽었다.

시골에서 유배 생활을 해다 갑자기 왕의 부름을 받고 강원도 관찰사가 됐는데, 왜 정철은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몇 마디로 압축하고 폭포 얘기나 줄줄이 늘어놓고 있을까? <관동행>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된 단편이다. <관동별곡>의 저자 송강 정철을 모델로 한 우리의 주인공 정 대감은 학식이 풍부하고 유능한 관료였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한테나 쓴소리를 필터 없이 퍼붓는 고지식한 성격. 어린 딸이 처음 만든 물김치를 자랑하는 친구에게 그 물김치가 어째서 못 만든 건지 정 대감이 한 페이지 가득 품평을 늘어놓는 장면에서는 빵 터졌다. 그렇게 지나치게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 대소 신료들은 물론 왕에게 미움을 산 정 대감은 파직되고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벼슬 잘리고 지방으로 내려와 백수가 된 상황을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라는 시 구절로 미화하며 정신승리하던 정 대감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왕이 정 대감을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했다는 것이다. 아내과 종복들에게 모처럼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어 들뜬 마음에 성대하게 관찰사 부임 행차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미친놈이 정 대감에게 뛰어든다. 그런데 그 미친놈이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희뿌옇게 썩은 눈알에 구더기가 끓고 있는 좀비였다. 왕과 조정 신료들은 도성을 제외한 전국에 좀비로 변하는 전염병이 퍼지자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강원도 관찰사에 정 대감을 임명한 것이다. 정 대감 일행의 관동행은 꽃길이 아니라 저승길이었다.


  좀비가 근처에만 나타나도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면서 재채기가 나는 증상 때문에 좀비 감지기가 된 정 대감. 정 대감은 자신의 좀비 감지기 기능과 풍부한 지식을 활용해 백성들과 함께 좀비에 맞서 싸운다. 가족들과 종복들에게 생계를 맡기고 하염없이 때만 기다렸던 잉여인간 정 대감이 자기 재능을 활용해 진정한 리더로 변화해 가는 모습이 나름 감동적이었다. 남편을 지키기 위해 비녀 하나 들고 좀비에게 달려드는 유씨 부인의 용기와 사랑에 뭉클해지기도 했고. 나름대로의 사연과 잘생긴 외모, 뛰어난 무예 능력을 갖춰 조력자로 활약할 줄 알았던 마을 청년이, 결국은 좀비 치료제만 들고 도망가 버리는 대목은 클리셰를 깨서 신선하게 느껴졌다. <관동별곡>의 구절들과 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까지 삽입해 역사물로서의 무게감도 살짝 넣었다. 작가 후기에서는 "단점 몇 개는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하지만 독자인 내가 보기에는 장점이 많았던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만복사 좀비기(원작: 김만중-『금오신화』 중 <만복사 저포기>)

<관동행>과 같은 역사물이지만 판소리 한 마당을 하듯 유쾌하게 입담을 펼치는 <관동행>과 달리 서정적으로 <만복사 저포기>를 재해석하고 있다. 작가는 왜 <만복사 저포기>의 주인공 양생이 젊은 나이에 가족들과 떨어져 만복사에서 혼자 지내게 됐을까, 라는 의문에서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왜구가 쳐들어온데다(고려시대가 배경이기 때문에 임진왜란은 아니다) 왜구에게 죽은 마을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면서 양생을 포함한 생존자들은 만복사로 피신하게 된다. 언제 좀비에게 습격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양생은 혼인을 하고 손주를 낳아 어머니께 효도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다, 원작처럼 부처님과 저포 내기를 해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스님들과 절에 함께 숨어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좀비일 거라 의심하고, 양생 본인도 그런 의문을 품지만 그녀가 부처님이 보내주신 배필이라는 생각에 그녀를 감싼다.

맹목적으로 아가씨를 지키려는 양생의 모습이 순정남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정작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는지는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 찜찜하게 느껴졌다. 결국 양생은 이미 좀비에게 물려 감염되어 좀비가 되었고, 양생 때문에 절 안의 모든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있었다는 반전이 밝혀진다. 양생은 그녀가 좀비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어주지만, 좀비 소탕 대원인 그녀에게 양생은 가엽지만 생존자들을 위해서 퇴치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엇갈림이 안타깝고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양생뿐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절 안의 모든 사람들까지 안타까웠다. 그들에게서 좀비가 됐을 리는 없지만 전쟁과 기근 등 온갖 환란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 갔을 역사 속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원작: 주요섭-<사랑 손님과 어머니>)

원작의 문장까지 하나하나 비틀어 원작과 한 문장 한 문장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옥희의 아버지 경선이 살아 있다는 것. 그러나 심한 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처지고, 옥희의 친할머니는 아들의 병을 며느리 탓으로 돌리며 옥희 어머니를 심하게 구박한다. 스물네 살의 나이에 여섯 살짜리 아이의 어머니이자 며느리, 아내로 살면서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에게 근거 없는 미움을 받고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옥희 어머니. 가부장제의 억압 아래서 그녀는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며 이 지옥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매일 밤 기도한다.

남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어머니가 사랑 손님에게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긴장감이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순한데 이상하게 사랑 손님만 보면 맹렬하게 짖던 개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면서 긴장감은 더욱 증폭되고, 결국 어머니와 사랑 손님의 관계, 그들이 아버지에게 한 짓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피비린내 나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자신이 해방되기 위해서 남편도 시어머니도 마을 사람들도 망설임 없이 좀비로 만들고 살육해 버린 어머니가, 마침내 기차에 올라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는 희열이 느껴진다. 아직 스물네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옥희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던 원작 속 어머니와 달리, 이 작품 속 어머니는 좀비라는 수단을 이용해 스스로 해방을 쟁취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잔혹해지는 전개가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옥희 어머니의 이런 반란이 통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운수 좋은 날(원작: 현진건-운수 좋은 날)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들 중 가장 원작과 거리가 멀다. 잘 나가는 모델이자 추리소설 작가였던 주인공은 남편과의 이혼과 슬럼프로 망가져 간다. 전 남편의 재혼 소식을 들은 그녀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대리 기사를 불러 전 남편의 결혼식장으로 쳐들어가는데, 이것이 <운수 좋은 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대리 기사의 성이 김씨라는 점에서 아, 설마 싶었다. 그런데 이 김씨가 정말 김 첨지였다. 그것도 좀비가 된 김 첨지.

좀비가 되는 전염병에 걸려 아내와 아들마저 죽은 뒤 김 첨지도 그 전염병에 걸렸지만 그는 죽지도, 이성을 잃지도 않았다. 좀비가 된 게 분명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결국 설렁탕 한 숟가락 먹이지 못하고 아내를 떠나보낸 이후로 김 첨지는 고기를 입에 댈 수 없었다. 슬럼프에 빠지면서 고기에 집착하며 날씬했던 몸무게가 이전의 두 배로 늘어났던 주인공은 김 첨지 때문에 채식밖에 할 수 없는 좀비가 된다. 그녀는 좀비가 되면서 날씬하고 아름다웠던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만, 인육에 대한 갈망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라올라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외모가 아름다웠을 때는 주인공을 칭송하고 욕망하던 사람들이, 주인공의 외모가 망가지자 그녀를 꺼리고 비웃는 모습이 씁쓸했다. 그래도 다른 단편들에서 무수히 썰리고 죽어 나가던 다른 좀비들에 비하면 주인공은 훨씬 나은 처지다. 채식만 하면서 살면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피, 소나기(원작: 황순원-소나기)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주인공 그녀는 <소나기>의 소녀가 진흙이 묻은 스웨터와 함께 소년까지 같이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면서 원작을 잔혹하게 변주했다. 이 단편 속 소녀는 소년과 함께 무덤에 묻히는 대신 무덤에서 깨어난다. 좀비가 된 채로. 소년은 소녀가 좀비가 된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지키다가, 결국 소녀가 살인과 식인을 하는 것까지 돕게 된다.

작가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처럼 원작의 문장들을 그대로 빌려오거나 살짝 변주하는 방식으로 원작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하얗고 화사했던 소녀의 피부는 혼자 흑백사진에 들어 있는 것처럼 잿빛으로 변했고, 소년과 소녀에게 한 마디 건넸던 이웃 아저씨는 소녀에게 처참하게 죽임당한다.  슬프게도 소년에 대한 순수한 감정이 아닌, 자기 친할아버지까지 속이면서 살아남으려는 생존본능이 소녀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도 소년은 끝까지 소녀를 지키려 한다. 김 선생이 소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소년은 그 자신이 희생양이 될 때까지도 소녀의 곁을 지켰을 것이다. 이렇게 맹목적일 정도로 순수해서 더 잔혹한 소년 소녀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렛미인』을 떠올리게 했다. 평범한 인간인 소년이, 다른 사람을 죽여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소녀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원작과는 또 다른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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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썰록
김성희 외 지음 / 시공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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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물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학생 시절부터 익숙한 명작 소설들이 이렇게 좀비물로 변주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게 본 작품은 김성희의 <관동행>. 고등학생들을 괴롭히는 <관동별곡>으로 유쾌한 사극 좀비물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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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으로 백제를 읽다 - 나뭇조각에 담겨 있는 백제인의 생활상
백제학회 한성백제연구모임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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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고대의 국가인데다 다른 나라에 멸망당해서인지 백제 관련 사료는 다른 시대에 비해 유난히 적다. “토기 파편 몇 조각을 가지고 논문 수십 페이지를 쓰려니 죽겠다는 백제사 연구자분의 한탄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날 정도다사료 부족으로 허덕이는 백제사 연구자들에게 단비 같은 존재가 목간木簡이다목간은 종이가 보편화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썼던 나뭇조각이다. 1999년 부여 궁남지에서 백제시대 목간이 대량으로 출토된 이후로 20여 년 동안 목간을 통한 백제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지만연구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 연구 결과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그래서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중 독자들에게 목간을 통해 새롭게 해석한 백제사를 들려주려 만든 책이 목간으로 백제를 읽다.

나주 복암리에서 발굴된 목간들. 백제의 지방들에서도 문서 행정이 이루어졌고, 지방 관리들이 주민들의 연령대별 인구 수, 재산 상황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시대의 목간들에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정치행정과 관련된 것이다백제 조정에서는 목간과 종이를 활용해 문서 행정을 운영해 왔기 때문이다종이로 된 행정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니 백제시대의 문서 행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려면 목간을 연구할 수밖에 없다부여 쌍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같은 우리나라 사서에는 없고 주서같은 중국 사료에만 나와 있던 외경부라는 중앙 행정 기구의 명칭이 적혀 있었다. ‘외경부의 철로 면 10냥을 대신한다고 쓰여 있는데철과 면은 특산물로 바치는 세금인 조調에 해당하는 물품이다이를 통해 외경부가 조세 등 백제의 국가 재정을 관장하는 행정 기구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또한 수도인 부여뿐만 아니라 나주 같은 지방에서도 목간이 발굴되어 지방에서도 목간을 활용해 문서 행정을 운영했다는 것이 밝혀졌다나주 복암리에서 발굴된 호적 목간에는 해당 지역의 연령대별 인구수와 전답별 면적가축의 수가 적혀 있다여기에서 백제의 지방 관리들이 주민들의 인구수와 재산소득 상황까지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이와 같이 백제시대 목간은 현존하는 역사서에 남아 있는 내용을 증명하고 보완할 뿐만 아니라백제사에 대한 새로운 내용까지 밝혀내고 있다.


부여 쌍북리에서 출토된 구구단 목간(왼쪽)과 해독본(오른쪽), 9단부터 2단까지 구구단이 적혀 있다. 이 목간 덕분에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이미 구구단이 활용되어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진 출처: 한국문화재단


  백제시대 목간은 백제의 정치행정뿐만 아니라 백제 사람들의 학문 수준도 알려준다2011년 부여 쌍북리에서는 2단부터 9단까지 구구단이 기록된 목간이 발굴되었다그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구구단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일제 강점기에 일본을 통해 구구단이 들어왔다는 설까지 있었다그러나 백제시대의 구구단 목간이 발견되면서 삼국시대부터 이미 구구단이 활용되어 오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도 외우는 구구단이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겠지만백제가 멸망한 지 수백 년 뒤인 중세시대의 유럽에서도 숫자를 쓸 줄 아는 것은 소수의 상류층과 지식인들뿐이었고 이들조차 덧셈과 뺄셈밖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그렇기에 구구단 목간은 백제가 복잡한 산술 체계를 이해하고 활용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목간을 통해 백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한다백제 왕들이 묻혀 있는 부여 능산리 고분 옆에는 왕들의 명복을 비는 절 능사陵寺가 있다이 능사 터에서 자기사子基寺라는 세 글자가 적힌 목간이 발굴되었다. ‘자기사라는 절에서 능사에 보낸 물품에 붙인 꼬리표로 추정된다조경철 교수는 자기사를 아들의 터가 되는 절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이 절을 부모가 아들을 위해 세운 절이라고 본다부여 왕흥사 터에서 출토된 사리함에 왕흥사는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절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조경철 교수는 왕흥사가 자기사와 같은 절이라고 가정하고자식을 먼저 보내야 했던 위덕왕의 슬픔을 짐작해 본다능사에서는 오랜 세월 맺은 업으로 같은 곳에 태어났으니서로 옮고 그름을 물어 무엇하겠습니까부처님께 절 올리고 귀의합니다라고 적힌 목간이 발견되었다조 교수는 이 목간에 신라군에게 죽임당한 아버지 성왕성왕과 함께 목숨을 잃었던 백제 병사들에 대한 위덕왕의 슬픔이 담겨 있다고 보고 있다자기사와 왕흥사가 정말 같은 절인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고능사에서 발견된 목간에 대한 해석도 연구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지만목간을 통해 역사 이면에 담긴 백제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해 보려는 시도가 신선하게 느껴진다.

 

  대중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다 보니 학술서보다는 쉽고 부드럽게 이야기를 풀어가려는 것이 느껴진다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정도다글씨 크기가 크고 행간도 넓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다편집과 디자인이 세련되고 깔끔하며모든 사진 자료들이 컬러로 되어 있어 보기에도 좋다. 

 

  하지만 각 챕터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시대 목간들 중 중요한 몇몇 목간들을 공통적으로 다루다 보니 겹치고 반복되는 내용들이 꽤 있다물론 각 장을 맡은 저자에 따라 목간을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저자가 설명하지 않은 내용을 이야기하지만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그리고 연구 결과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책이다 보니 대중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몇 줄의 목간에서 백제의 정치행정사회문화에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을 유추해 내는 학자들 덕분에 우리는 백제의 숨겨진 면들을 보게 된다중국일본의 사료나 유사한 사례들까지 살펴보면서 목간에 적힌 사실의 파편들을 역사로 재구성해내는 것이 놀랍다수십 만 점의 목간들이 출토된 중국과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500여 점의 목간만이 출토되었고그 중 70퍼센트는 신라 목간이라고 한다하지만 지금도 여러 지역에서 목간이 꾸준히 출토되고 있다고 하니백제에 대해 더 많은 것이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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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으로 백제를 읽다 - 나뭇조각에 담겨 있는 백제인의 생활상
백제학회 한성백제연구모임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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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독자가 읽기에 조금 딱딱한 면이 있다. 하지만 차근차근 읽어가다 보면, 작은 나뭇조각 위의 몇 글자를 통해 백제의 숨겨진 면을 드러내는 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깔끔한 편집과 디자인, 컬러 사진들 덕분에 만듦새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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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김선지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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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원에서 미술사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미술사에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있었던가?” 내가 프리다 칼로를 이야기하자 교수님이 말했다. “프리다 칼로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 아류잖아또 다른 사람은 없어?” 나도 다른 학생들도 위대한 여성 미술가를 한 명도 더 말하지 못했다하지만 교수님은 틀렸다프리다 칼로는 결코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아류가 아니다그리고 이렇게 질문했어야 했다. “왜 미술사에는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없을까?”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이것은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klin이 던진 질문이다렘브란트루벤스마네모네반 고흐피카소까지 수많은 남성 거장들이 미술사에 이름을 남겼다그런데 이들에 필적하는 여성 거장은 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노클린은 미술사에서 여성 거장이 나타나지 않은 원인으로 남성 중심 사회의 성차별을 지목했다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술 교육을 받는 데도 작품 활동을 하는 데도 제약을 받았고어머니이자 아내로서 육아와 가사 노동을 떠맡았기 때문에 온전히 작품에 집중할 수 없었다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는 그렇게 자신을 옭아매는 가부장적 사회의 성차별과 싸우며 자신의 길을 개척했던 여성 미술가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 실린 21명의 여성 미술가들 중 대다수가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여성 미술가의 작품은 남성 미술가의 작품보다 열등한 것아류로 여겨지거나심지어 동시대의 다른 남성 미술가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다.


마리에타 로부스티, <자화상>, 1580년.

마리에타 로부스티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의 딸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수백 년 동안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져 있었다.


  그렇게 지워진 여성 미술가 중 한 사람이 마리에타 로부스티Marietta Robusti우리는 마리에타 로부스티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잘 알고 있다본명인 자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보다 별명인 틴토레토Tintoretto’로 잘 알려진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화가마리에타는 틴토레토의 자녀들 중 예술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고틴토레토는 평생 동안 딸과 공동 작업을 했다딸이 서른이 될 때까지 결혼조차 허락하지 않고자신이 죽을 때까지 한 집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데릴사위를 들였을 정도로 틴토레토는 딸에게 집착했다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군주들이 마리에타를 궁정화가로 채용하려 했지만틴토레토는 마리에타를 자기 작업장에서만 일하도록 했다.


<소년과 함께 있는 노인의 초상>, 1585년.

틴토레토가 아닌 마리에타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까지 소장처인 빈 미술사박물관에서는 틴토레토의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마리에타가 아이를 낳다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후틴토레토의 창작 능력은 급격히 떨어졌다페미니스트 미술가 그룹인 게릴라 걸스Guerilla Girls는 사실상 틴토레토 작업장의 핵심이 그녀였기 때문에 그녀가 죽은 뒤로는 틴토레토가 예전만큼의 창작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마리에타가 자신의 서명을 남긴 작품은 단 한 개였기에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아버지나 다른 남성 화가의 작품으로 전해져 왔다최근 르네상스 시기 여성 미술가들의 작업을 재조명하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아버지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들이 그녀의 그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녀를 떠나지 않았던 아버지의 그늘이 이제야 조금씩 걷히고 있는 셈이다.


  마리에타가 겪었던 가부장제의 억압 외에 여성들이 미술사의 거장으로 자리 잡지 못하게 했던 원인이 또 있다회화와 조각은 미술 분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분야로 여겨졌는데여성들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가족이 아닌 남성 미술가의 수업을 사적으로 들을 수 없었고회화 기술을 익히는 데 필요한 누드 데생 수업도 받을 수 없었다또한 여성은 육체적인 힘도 지적 능력도 부족해 조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이 계속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이 할 수 있었던 예술 작업은 공예와 자수였고이것들은 남성들에게만 허락된 회화조각건축보다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




(위)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골로 뒀던 패션 디자이너 로즈 베르탱이 디자인한 드레스

(가운데) 요아나 쿠르턴, <사냥 장면>, 1700. 종이 공예 작품이다. 

(아래) 영국의 정원 디자이너 거트루드 지킬이 디자인한 헤스터콤 하우스의 정원.


  그래서 저자가 선택한 전략은 미술사의 범주를 회화조각뿐만 아니라 패션공예디자인 분야까지 확장해 살펴보는 것이다그러면서 가난한 시골 소녀에서 세계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된 로즈 베르탱종이 오리기 공예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던 요아나 쿠르턴시력 손상 때문에 화가의 길을 포기했지만 캔버스 대신 정원 조경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 거트루드 지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예술을 펼쳤던 여성들의 삶이 드러난다미술사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 장르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미술사의 거장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그녀들은 분명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많지 않은 분량 안에 21명이나 되는 미술가들을 다루다 보니 한 명당 내용이 그렇게 깊지 않다는 것이다요아나 쿠르턴의 경우 도판을 제외한 텍스트 설명이 4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이제 막 재조명되기 시작한 미술가들이 대부분이라 관련 연구 자료가 부족해서였겠지만좀 더 깊이 있게 여성 미술가들을 알고 싶었던 독자로서는 맛보기만 한 기분이다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21명의 여성 미술가 모두가 유럽 출신이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아메리카 지역의 여성 미술가들은 한 명도 다루어지지 않아서양미술사 책이라 하더라도 유럽 쪽에 치우쳐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근현대에 들어선 이후로 서양 미술 분야에서 활약한 아시아아메리카 지역의 여성 미술가들도 많을 텐데화질이 낮은 도판들이 종종 눈에 띄고 크기를 너무 작게 해 놓은 도판들이 많은 것도 미술사 책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다판면 구성을 수정해서라도 도판을 더 크게 보여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이 아쉽지만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는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 가려져 있던 여성 미술가 21명을 만날 수 있게 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책이다각자 처한 상황과 한계 속에서도 자신이 갈 길을 모색하고 개척해 갔던 그녀들의 삶이아직도 남아 있는 성차별이라는 벽을 허물려고 하는 우리에게 영감과 힘을 준다아직도 전 세계에서 남성 미술가 대 여성 미술가의 전시회 비율이 70 대 30일 정도로 미술계의 성차별은 심각하다그러나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라는 17세기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선언을 마음속에 품고 계속 정진하는 여성 미술가들이 있기에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의 이름을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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