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독본 - 〈아Q정전〉부터 〈희망〉까지, 루쉰 소설·산문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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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고향」스포일러 포함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고향

 

  좋아하는 드라마의 명대사가 루쉰의 이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 이 구절을 좋아했다지금까지도 책상 앞에 써 붙여 놓았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이 구절이 루쉰의 단편 소설 고향속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알 뿐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는 몰랐었다십여 년이 지난 지금 고향을 처음으로 읽게 되면서 내가 사랑하는 이 구절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알게 되었다.


  「고향의 주인공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게 되었다고향집을 처분하러 20여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어린 시절의 정겨운 모습이 아니었다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황량하고 쓸쓸했다기와 사이에는 풀이 돋아나 있을 정도로 고향집은 낡아버렸고일가친척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조카만 남아 있다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는 흉년과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며 겉늙어 예전의 생기를 모두 잃어버렸다위의 구절은 주인공이 어머니조카와 타향으로 떠나는 배에서 희망에 대해 생각하다 하는 말로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렇게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주인공은 조카를 비롯한 미래 세대들에게서 희망을 본다자신과 고향 친구는 성인이 되어 재회했을 때 계급 차이(주인공은 지주의 아들이고 친구는 소작농의 아들이다)로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지만아직 어리고 순수한 조카와 친구의 아들은 계급 차이는 신경 쓰지 않고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한다주인공은 그 아이들이 자신과 친구가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살기를 바란다고향의 주인공처럼 루쉰은 지금 세대보다 미래의 세대가지금의 세상보다 미래의 세상이 더 발전하고 진화하기를 바랐다.

 

  그는 중국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역사가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한 시대와 노예가 되어 잠시 안정적으로 살았던 시대가 교차해 온 역사였을 뿐이라고 말한다이민족 정복자나 권력자가 사람들을 노예로도 삼지 않고 개나 소를 죽이듯이 쉽게 죽였던 시대와노예가 되어 착취당하더라도 그나마 목숨은 부지했던 시대루쉰은 권력자와 부자들을 위해 힘없는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이 희생되어 왔던 중국의 역사를 인육의 잔치라고까지 한다그의 또 다른 단편 소설 광인일기에서 피해망상증에 걸린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하고 공포에 사로잡히는데그저 정신병자의 망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다실제로 인육을 먹는 것은 아니라 해도 사람이 자신을 위해 동족을 해치는 세상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왔으니.


  「광인일기의 주인공이 미쳐 있는 동안 쓴 일기는 식인해 보지 않은 아이가 혹시 아직도 있을까아이들을 구하라는 구절로 끝난다루쉰은 아무도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고그 시대를 만드는 것이 청년들의 사명이라고 말한다그는 청년들이 인육의 잔치판을 치워버리고 생존하고 발전하기를 바란다자신이 길을 안다고 그럴 듯한 간판만 내세우는 자칭 지도자들을 따르기보다는친구들을 찾고 그들과 단결해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근대 이전의 낡은 관습과 근대의 새로운 사상이 서로 충돌하고외세의 간섭과 침략이 계속되는 혼란스러운 당시의 중국 사회에서그는 자신조차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며 청년들 스스로 길을 찾아가기를 바랐다.


  100여 년 전 중국 작가 루쉰이 동포들에게 외쳤던 이 이야기들이 왜 시간과 국경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걸까죽임당하거나 노예가 되어 착취당해 왔던 식인의 역사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지금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을의 위치에서 착취당하거나 을이 될 기회조차 없어 내일의 생계를 걱정한다수많은 사람들이 청년들의 멘토를 자처하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공허한 소리만 늘어놓거나 근거 없이 희망을 이야기할 뿐이다오히려 자신은 누군가에게 길을 가르쳐주고 이끌어줄 입장이 못 된다고 말하는 루쉰이 더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그저 다 잘 될 거라는 말보다희망이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지 의심하면서도 끝까지 절망과 싸우려 했던 루쉰의 절박함이 더 와 닿는다.

 

  루쉰이 끝까지 놓지 못한 희망은 이루어졌을까그가 자신이 살던 시대의 어두움을 뚫고 희망을 보려던 그때로부터 100여 년 뒤의 미래 세상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루쉰이 살던 세상보다 나아졌을까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은 지금도 계속되니 어떤 면에서는 정체되어 있고그의 조국에서는 이제 그처럼 쓴소리를 하는 사람은 발을 붙일 수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 더 후퇴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을 더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기 자신조차 냉정하게 평가하는 그의 비판 정신은 숫돌처럼 우리의 정신을 날카롭게 만든다헛된 희망이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할까 경계하면서도청년들이 자신이 겪었던 공허함과 적막함을 다시 느끼지 않도록 위로하려는 그의 따뜻한 마음은 100여 년 뒤의 우리에게도 와 닿는다희망이 있다고 섣불리 낙관하지도없다고 섣불리 비관하지도 않고 다른 이들과 손을 잡고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길 바랐던 마음고향의 마지막 구절을 늘 보면서도 알지 못했던 그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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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독본 - 〈아Q정전〉부터 〈희망〉까지, 루쉰 소설·산문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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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이 오는 것을 막는 모든 것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까지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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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미술가와 걷다 - 나치 시대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이현애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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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 태어나 두 차례의 큰 전쟁과 사상 초유의 잔혹한 정권을 견뎌내야 했던 독일 예술가들. 그들 각자가 어떻게 사회가 주는 시련과 제약에 맞서 살아가고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어갔는지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이 세상에 맞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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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밤의 미술관 - 하루 1작품 내 방에서 즐기는 유럽 미술관 투어 Collect 5
이용규 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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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출판사 면접에서 ‘요새 미술 분야 베스트셀러 1위가 뭔지 아느냐’, ‘그 책을 읽어 봤느냐’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 이후로, 지금 미술 분야에서 인기가 있는 책들을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사 책을 만들고 싶다고 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책에만 관심이 있었지 독자들이 좋아하는 책에는 너무 관심이 없었다. 여러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들을 훑어보면서 공통적으로 미술 분야 베스트셀러로 꼽힌 책이 『90일 밤의 미술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평소에는 읽지 않는 ‘하루 1페이지 OO’ 유의 책이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좋아하는지 직접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게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외국은커녕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도 망설여지는 이 때, ‘하루에 한 작품 내 방에서 즐기는 유럽 미술관 투어’라는 이 책의 콘셉트는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 책은 유럽 곳곳의 유명 미술관에서 가이드 투어를 진행해 온 현직 도슨트docent(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엄선한 작품 90점을 90일 동안 한 점씩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각 나라별로 챕터가 나누어져 있고, 각 나라별 챕터 안에는 각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한다고 추천하는 작품들이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런 구성이 각 나라, 각 미술관을 차례대로 방문하면서 미술 작품들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챕터 앞에는 그 나라에 있는 주요 미술관들이 어떤 곳인지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고, 챕터 마지막에는 미술관 전경을 담은 사진이 들어가 가이드북을 들고 여행하는 느낌을 더한다. 외국 여행이 그리운 독자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유럽 미술관 기행을 하는 셈이다. 


  유럽 미술관들에서 직접 가이드 투어를 진행해 온 도슨트들이 각 작품을 해설한다는 데서 독자들은 신뢰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쓴 다섯 명의 도슨트들은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동안 유럽 각지의 유명 미술관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여행자들에게 미술 작품을 설명해 왔다. 특별히 독창적인 시선으로 각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지는 않지만, 그 작품을 볼 때 알아두면 좋은 배경 지식과 그 작품 자체의 특징 모두를 충실하게 설명한다. 해설이 존댓말로 쓰여 있어 도슨트들의 해설을 옆에서 바로 듣는 듯한 느낌이 든다. 도슨트들이 각 작품의 해설 끝마다 붙여 놓은 감상 팁들도 그림을 감상하는 데 좋은 힌트가 된다. 


  한 작품에 대한 해설은 4, 5페이지 정도이다. 4, 5페이지면 출퇴근 시간이나 점심시간, 자기 전에 잠깐 짬을 내어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다. 하루에 그림 하나와 4, 5페이지의 글. 그만큼의 위로와 교양이 지친 하루의 끝에 마음을 달래줄 수 있다. 많은 그림을 보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림 하나에 집중하며 그 그림이 전해주는 아름다움과 감정에 위안을 얻는다. 아주 적은 양이어도 지식을 쌓았다는 것 자체가 작은 성취감을 준다. 하루치씩 작품 해설을 읽을 때마다 목차와 찾아보기의 체크박스에 체크를 할 수 있게 해, 이 작은 성취가 눈으로 보이게 한다. ‘사는 게 쉽지 않을 때 이 노래를 꺼내 먹어요’라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지치고 힘들 때 이 책을 꺼내 교양 한 스푼, 위안 한 스푼씩 떠먹게 하는 게 이 책의 의도가 아닐까. 그 의도가 독자들에게 와 닿기에 호응을 얻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이 요즘 서점에 넘쳐나는 ‘하루 1페이지 OO’, ‘365일 OO’ 유의 책 중에서 군계일학이라고 할 만큼 특출나지는 않다. 도판의 화질도 도슨트들이 설명하는 디테일을 볼 수 있을 만큼 좋지는 않다. 직접 그 미술관에 가서 작품 실물을 보고 확인하라는 의도라 해도 코로나든 재정 상황이든 미술관에 직접 가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해서, 본문에 설명된 디테일을 포착한 세부 도판을 넣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좀 더 깊이 있게 미술사 지식을 쌓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가볍고 얕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하루에 필요한 만큼의 위로와 지식을 주는 것도 책이 할 수 있는 소중한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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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밤의 미술관 - 하루 1작품 내 방에서 즐기는 유럽 미술관 투어 Collect 5
이용규 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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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행하는 ‘매일 읽는 미술관‘류 책 중에서 특출나지는 않지만 무난한 미술사 안내서. 특별히 새로운 시각이 담겨 있거나 독창적인 편집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서 휴식하고 설명을 읽으며 교양을 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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