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라는 말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데 대중가요에서는 왜 이렇게 자주 등장할까? '햅쌀'은 '쌀'이라는 명사에 '그해에 난'이라는 뜻의 접두사 '햇-'이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인데, 왜 '햇쌀'이 아니라 '햅쌀'일까? '케첩'이 원래 중국어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상적인 말들에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우리 삶 속의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가 매일 듣는 노래에도, 매일 먹는 음식에도 숨어 있다. 여기, 일상적인 단어들에서 우리가 몰랐던, 또는 너무나 당연해서 무심코 지나쳤던 삶의 이야기들을 발견하는 책들이 있다. 



1920년대 초 유성기 음반으로 유행가가 발매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 대중가요의 역사는 한 세기에 가깝다.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삶과 사랑, 시대의 단면들은 크게 달라졌고, 그에 따라 대중가요에서 쓰이는 말들도 달라지게 되었다. 이것을 뒤집어보면, 대중가요에서 쓰이는 말들의 변화를 통해 한 세기 동안 우리 대중가요를 듣고 부르던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저자는 음반으로 발매된 최초의 대중가요라고 알려진 <희망가>가 나온 1923년 이후 조사 작업이 이루어진 2016년까지 나온 26000여 곡의 가사를 분석했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가사 속에 특정한 단어들이 나타나는 빈도를 알아보고, 전체 말뭉치(언어 연구를 위해 컴퓨터가 읽고 처리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 언어 자료)에서 그 단어들이 나타나는 빈도와 비교해 보았다. 왜 이 단어가 특히 노래 속에 자주 등장하는지, 일상에서보다 노래에서 자주 쓰이는지 분석해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대'와 '당신'은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지만 노래에서는 자주 등장하는데, 1990년대 이후로 점점 줄어들고 그 대신 '너'라는 2인칭대명사가 점점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손위의 남자 형제'가 아닌 '연인'이라는 의미의 '오빠'는 2000년대에나 처음 등장한다. 술이 등장하는 노래 가사에는 '한 잔'이라는 단어가 따라 들어갈 때가 많다. 왜 그럴까? 이유를 알아보면서 우리는 노래 속에 담긴 우리 삶의 모습과,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노래의 언어』의 저자가 『노래의 언어』를 쓰기 2년 전에 냈던 책이다. 『노래의 언어』가 가사 속 단어들의 빈도라는 수학적 통계를 활용한 반면, 『우리 음식의 언어』에서는 우리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들과 그 어원을 언어학적으로 파헤친다. 하지만 노래 속 단어들이든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들이든 그 안에 담긴 우리 일상의 단면들을 살펴보고, 그 일상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살펴보고 있으니 『우리 음식의 언어』는 『노래의 언어』로 이어지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우리 음식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밥에서부터 시작해서 빵, 국수, 국, 채소, 고기 반찬, 생선 반찬, 후식까지 우리 음식을 종류별로 나눈 뒤 그 안에 속하는 음식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우리 음식을 가리키는 말들과 관련된 언어학적인 지식도 흥미롭지만, 음식 자체와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지식까지 얻을 수 있어 더 흥미롭다. 중간 중간에 저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우리 음식의 언어를 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다.



  세 책 중 가장 나중에 읽었지만 사실은 가장 먼저 출간된 책이다. 『우리 음식의 언어』의 저자 한성우 교수는 『우리 음식의 언어』를 쓰면서 『음식의 언어』를 알게 되었고, 동업자에게 경외와 감사의 마음을 느끼면서도 그 동안 연구해 온 것을 빨리 결과물로 엮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직접 읽어보니 한성우 교수가 자극을 받았을 만하다. 다른 대륙에 있는 나라에 가려면 몇 개월씩 길고 지루한 항해를 해야 했던 그 옛날에도 음식과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멀리, 더 넓게 퍼져나가며 각각의 나라에 맞는 형태로 다양하게 변형되었다. 저자 댄 주래프스키는 케첩, 피시 앤 칩스, 칠면조, 마카롱 등 우리 주변의 음식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느 나라들을 거쳐 지금의 모습과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흥미 있게 풀어낸다. 그 이야기 속에 음식의 세계 문화사가 담겨 있다.


  너무나 흔한 음식이지만 오래된 세계사를 품고 있는 음식이 케첩이다. 케첩은 원래 동남아시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해 중국 푸젠성으로 이어진 생선 소스에서 유래했고, '케첩'이라는 명칭도 그 소스를 가리키는 푸젠성 방언에서 온 말이다('케'는 정확한 한자를 찾지 못했지만 '첩'은 한자 '즙(汁)'의 푸젠성 방언, 광둥어 발음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중국 상인들과 무역을 하던 영국 선원들은 이국적이고 자극적인 소스 케첩을 좋아하게 되었고, 케첩은 영국에 수입되면서 조리법이 여러 가지로 변형되었다. 그러면서 주 재료인 생선이 빠지고 버섯, 호두, 토마토 등 원래 부 재료였던 것들이 주 재료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 중에서도 토마토가 케첩의 대표적인 재료가 되었고, 미국의 케첩 제조 회사들이 설탕과 식초를 더 많이 넣어 케첩의 저장성을 높이면서 토마토 케첩은 지금과 같이 새콤달콤한 맛이 되었다. 이렇게 케첩 하나만 들여다봐도 세계 경제와 무역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저자는 음식과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와 관련된 문화사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음운학을 통해서도 음식의 언어를 들여다본다. 고급 레스토랑은 자신들이 내는 음식이 진짜 재료를 쓴 좋은 음식이라고 사람들이 믿을 것을 알기에, 메뉴에서 구구절절 설명을 하지 않는다. 반면 중간 가격대의 식당들은 손님들에게 자신들이 내온 음식이 진짜라는 확신을 주고 싶어서 '진짜'라는 것을 강조하고 맛있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온갖 수식어를 붙인다. 바삭바삭함이 생명인 크래커의 제품명들에는 삐죽삐죽한 느낌을 주는 자음인 T와 D가 많이 들어가지만, 풍부하고 부드러운 맛을 강조해야 하는 아이스크림의 제품명들에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자음 L과 M이 많이 들어간다. 과거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음식과 그에 관련된 언어를 다양한 학문들로 풀어내고 있으니, 단순히 '문화사'가 아니라 '인문학'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한국 독자로서는 한국 음식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울 수 있다. 아랍의 알코올 증류법에서 기원한 각 나라의 토산 증류주들은 '땀'이라는 뜻의 아랍어 '아라크'에서 유래한 이름들을 갖고 있다. 이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의 전통 증류식 소주는 고려시대 원나라에서 들어와 '아라길주'라고 불렸고, 지금도 전통 소주 제품들 중 '아락'이라는 말이 제품명에 들어간 것들이 여럿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소주도 저 멀리 아랍 지역에서 기원해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개발된 발효된 콩 반죽이 일본의 미소 된장의 선조라는 것을 언급하는데, 그 중간에 있을 한국 된장은 왜 언급도 되지 않는지. 내가 한성우 교수고 『우리 음식의 언어』를 쓰기 전 이 책을 봤다면 우리 음식과 그에 관련된 언어만 집중해서 살펴보는 책을 쓰고 싶다는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내게 교정교열 일을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은 하루에 국어사전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분의 말처럼 언어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쌓아온 다양한 분야의 다채로운 지식과 지혜가 녹아 있다.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들에 어떤 역사와 문화, 지식들이 녹아 있는지 살펴본다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지식을 쌓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언어학, #언어, #인문학, #음식, #노래, #대중가요, #문화사,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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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의 집
사샤 나스피니 지음, 최정윤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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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숨은 글에 이 작품과 『백 년 동안의 고독』스포일러 포함, 모바일 버전과 앱에서는 숨은 글 기능이 포함되지 않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시려면 스포일러 표시 부분 아래를 읽지 않으시면 됩니다.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는, 고요하면서도 뭔지 모를 불안이 느껴지는 외딴 마을 레 카세. 이곳을 배경으로 배신, 도피, 실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소개 글을 보고 알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는 섬뜩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이 마을이 괴물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드네. 그런데 마을이 주민들을 잡아먹는다고?" 뒤 표지에 적힌 이 대사를 보고 그런 기대가 더 커졌고. 불길한 분위기가 감도는 폐쇄적인 마을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다룬 고딕 소설(중세의 고딕 양식으로 된 저택을 배경으로 유령, 살인 등 기괴한 사건이 벌어지는 소설을 뜻했지만, 오늘날에는 그 뜻의 범위가 넓어져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거나 인간의 이상 심리 상태를 다룬 소설까지 포함하게 되었다.)이거나, 『백 년 동안의 고독』처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마을을 그린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일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비현실적인 일은 이 소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청각장애인이 번개를 맞고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제외하면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뿐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마을 밑바닥에 사람들의 온갖 욕망과 악한 마음이 고여 있는 듯한 분위기 때문이다. 두세 사람을 제외하면 소설에 등장하는 마을 레 카세의 사람들은 모두 추잡하다. 불륜은 예삿일이고 마을 어딘가에서 살인, 감금, 중상모략, 배신, 도피 행각, 차별과 혐오 등 온갖 추악한 일이 일어나는데 주민들은 자신들이 멀쩡하고 상식적인 양 행세한다.


  이러한 마을의 진상은 마을 주민들이 한 사람씩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서서히 풀린다.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앞서 이야기한 사람이 보지 못한 그 사람의 뒷이야기가 밝혀지는 식으로. 파이를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쌓아 올리며 마을 전체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솜씨가 뛰어나다. 이야기 하나하나도 역겹지만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마을 사람 20여 명의 이야기를 듣고 스무 편쯤의 막장 드라마에 지쳤을 때 나오는 두 이야기는 독자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따뜻한 인류애가 느껴지는 니코데모와 어머니의 이야기와 상류층과 자신의 계급 격차에 씁쓸해 하면서 풋풋한 우정을 경험하는 마르코 팔라체시 박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 이 마을에서 그나마 고결하고 인간미 있다고 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챕터, 사무엘레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모든 것들을 뒤집는다. 그렇게 이야기가 뒤집히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한결같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표면 아래 인간의 추악함이 숨겨져 있고, 인간들은 자신이 저지른 짓을 숨기면서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어떤 일이라도 저지른다는 것. 그것이 남기는 암울한 그림자는 읽고 나서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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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소설 속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무엘레가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아 젠장, 꿈이네."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복선은 여기저기 있었다. 사무엘레의 연인 클라라가 지적했듯이, 니코데모 템페스티, 아니, 그인 척했던 독일군 패잔병 아미코 프리츠는 세계적인 체스 선수가 되어 얼굴이 널리 알려졌는데도, 그의 옛 연인은 프리츠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프리츠나 그의 양어머니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알도 팔라체시는 아미코 프리츠가 군에서 낙오되고 마을 뒷산을 헤맸다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들려준다. 아버지의 집착에 질려 가출한 엘레오노라는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두어준 보리안이 자신을 구속하려 들자 보리안의 집에서도 나와버린다. 그렇게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엘레오노라가 스스로 사무엘레의 집에 갇혀서 그만을 기다린다. 이런 모순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심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암시를 독자에게 군데군데 남겨둔 것이다.


  실제 레 카세 마을은 사무엘레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만큼 지독한 악의 구렁텅이는 아닐지 모른다. 소설 밖의 우리가 우리만의 어두운 비밀을 감추고 있듯,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마을이 아닐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으니 아예 허구는 아니겠지만 사무엘레가 생각해낸 만큼 극단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갈수록 부풀어나고 더 자극적으로 변하지만, 정작 실상은 별 것 아닌 경우가 많으니. 떠나간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마을 아이들에게는 따돌림당했던 사무엘레의 내면의 어두움이 레 카세를 실제보다 더 어둡고 위험한 곳으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싶다.


  사무엘레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악행을 직시하지 못하고 회피하듯이, 사무엘레도 자신이 만든 이야기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회피한다. 사무엘레는 연인 클라라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목격하고, 그녀를 해안 절벽에서 밀어서 죽였다.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엘레오노라라는 존재를 만들어낸다. 현실에도 엘레오노라가 있기는 하지만 사무엘레의 가상현실 속 엘레오노라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 현실의 엘레오노라는 사무엘레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피해자로, 사무엘레와 어떤 감정적인 교류도 하지 않았다. 가상현실 속 엘레오노라는 실제 연인 클라라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밖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고 결국 바람까지 핀 클라라와 달리 사무엘레 한 사람만을 바라본다. 아버지와 보리안의 간섭은 견디지 못했으면서 사무엘레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사무엘레의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다 죽음까지 함께한다. 사무엘레와 엘레오노라의 최후는 언뜻 보면 애틋하지만, 실제 엘레오노라의 의지와 감정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사무엘레만의 환상이다.


  작가는 결국 자신이 현실이라고 믿는 가상현실을 선택한 사무엘레를 동정하고 그의 최후를 애틋하게 그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두운 과거가 있고 연인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해서 그 연인의 목숨을 빼앗는 게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사무엘레가 무엇보다 진짜라고 느끼는 엘레오노라도 그의 입맛대로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다. 매일 수많은 여성들이 연인이나 남편의 손에 죽는 현실을 생각하면 사무엘레의 환상이 마냥 애틋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무엘레가 자신이 클라라를 죽인 것을 깨닫고도 전혀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엘레오노라와의 행복한 사랑이라는 가상으로 뛰어들었으니 더더욱. 나는 사무엘레를 동정하지 않고, 그와 마지막으로 함께한 것은 허상일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무엘레에게 따뜻한 결말(현실적으로는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사무엘레 자신에게는 행복한 결말)을 준 작가의 선택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쌓아가는 작가의 솜씨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를 마무리한 방식은 높이 평가할 수 없다. 


P. S. 마을 전체가 비현실적인 천재지변으로 사라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결말(『불만의 집』에서는 사무엘레의 머릿속 가상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지만)은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리게 했다. 사무엘레의 머릿속 마을에서 비현실적인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데도 이 소설 특유의 어둡고 기묘한 분위기는 묘하게 마술적 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한다. 마을 사람 한 명 한 명이 최후를 맞는 모습이 각각의 캐릭터에 맞게 잘 쓰여졌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서사도 잘 구축되어 와서, 어쩌면 레 카세 마을의 이야기가 사무엘레의 머릿속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실제인 쪽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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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의 집
사샤 나스피니 지음, 최정윤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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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겹겹이 쌓아가며 전체 마을의 이야기를 구축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품고 있는 어두움과 추악함이 숨을 막히게 한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없는데도 유령이나 괴물이 나오는 고딕 소설보다 더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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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를 하다 - 우리의 몫을 찾기 위해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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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때 사회 교과서에서 정치의 정의를 처음 봤을 때 의아했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자원을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활동이라니정치는 선거에서 뽑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 아닌가뭔가를 나눠주는 게 어떻게 정치가 되는 거지어른이 되고 세상을 알아가면서 깨달았다파이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누구에게얼마만큼 나누느냐가 중요하다는 걸어떻게 파이를 나눌 것인가를 놓고 수많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고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의 입장을 조율해 가는 것이 바로 정치라는 걸그리고 파이가 공평하게 나눠지지 못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고제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으며 그 중 하나가 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는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장영은 작가는 랑시에르가 말한 정치의 정의에 동의하며 정치하는 여성의 범위를 더 넓게 잡았다국회의원이나 장관총리대통령 등 정치 지도자가 되어 나라를 이끌어간 여성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몫 없는 사람의 몫여성의 몫을 찾기 위해 사회적 실천을 했던 여성들로그런 기준으로 선정한 여성 정치인’ 21명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 여성정치를 하다이다.

 

  물론 장관이나 총리 등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 올라몫 없는 사람을 위한 법과 정책을 만들어낸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권력다툼의 한복판인 정계에서 몇 번이고 좌절했다 다시 일어나 권력을 쟁취하고 그 권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여성들의 모습은 존경스럽다하지만 높은 자리에 앉지 않고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친 여성들더 넓은 의미에서의 여성 정치인들의 이야기는 정치가 나와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나 자신도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여성 교육을 금지하는 탈레반의 만행을 고발하며 개발도상국의 여자아이들에게 교육받을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싸운 말랄라 유수프자이그림을 통해 노동자들이 겪는 불평등한 현실을 폭로하고 전쟁을 반대한 독일의 화가 케테 콜비츠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강의와 저술을 통해 여성과 노동자흑인 등 미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당하는 사람들을 대변한 헬렌 켈러 등낮은 곳의 여성 정치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한다그녀들은 여성이라는 것이 핸디캡이 되고 루머나 신체적인 위협비협조적인 사회 분위기 등 온갖 어려움이 따라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이들의 용기와 결단행동력은 힘없는 나 하나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절망하고 무기력해진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이들 모두가 생전에 자신이 한 정치의 성과를 본 것은 아니다여성의 참정권을 찾기 위해 평생을 싸워온 영국의 사회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결국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이 참정권을 가질 수 있다는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독일의 정치인 페트라 켈리는 사회의 약자들을 대변하고 생태 친화적인 정치를 추구하는 녹색당을 주요 정치 세력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지만녹색당이 내분에 휩싸이고 자신도 녹색당에서 퇴출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하지만 저자는 이들을 실패자로 낙인찍지 않고이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실천했고그들이 뿌린 씨앗이 이후에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돌아본다여기에서 이 책에 실린 여성 정치인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과 사려 깊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각 인물을 그렇게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한 명 한 명의 분량이 열 페이지 남짓인데 책의 판형도 작아 각 인물의 삶과 업적영향은 간략하게 설명된다특히 마거릿 대처의 경우에는 정책적인 면에서 과오도 많은데 그녀의 독선적인 면만 조금 언급된다책에서 소개하는 인물의 단점을 너무 자세히 이야기하면 독자들의 동기 부여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오히려 그 인물의 한계까지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이 그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이 책에 실린 글들이 원래 한정된 신문 지면에 싣는 칼럼이어서 그런지 문장과 문장 사이 몇 문장이 편집된 것처럼 연결이 매끄럽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다이렇게 책의 완성도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책에 실린 21명의 여성 정치인의 삶과 정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또한 책의 맨 뒤에는 각 인물의 이야기를 쓰는 데 참고한 책들의 목록이 실려 있어각각의 인물을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들을 또 다른 책들로 이끌어 준다여기에 이 책의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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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를 하다 - 우리의 몫을 찾기 위해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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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선거에서 당선되어 의회나 행정부의 일원으로 일하게 된 사람뿐 아니라, 몫 없는 사람들에게 몫을 돌려주기 위해 싸운 모두를 ‘정치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발상이 좋다. 하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이 어색한 부분이 종종 눈에 띄고, 생각보다 각 인물을 깊게 들여다보지 않아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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