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학살 일기 - 가자에서 보낸 85일
아테프 아부 사이프 지음, 백소하 옮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감수 / 두번째테제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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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폭력에 쓸려 나가는 개인들이라 할지라도 삶의 행복과 존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들에, 한 구절 한 구절을 허투루 읽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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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도
한상호.강성용.김대식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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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동명의 EBS 다큐멘터리를 단행본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년 전, 이 책의 공저자 세 명, 그러니까 다큐멘터리 감독인 한상호 PD와 두 출연자 강성용 교수와 김대식 교수가 진행하는 북토크에 갔었다. 그런데 저자들이 "이 책을 다 읽고 오신 분?"이라고 물었을 때 손을 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 나도 새 회사에 적응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이 책의 도입부 몇십 페이지만 읽고 와서 미안했다. 그 뒤로 이런저런 일들에 치여 살다 거의 1년이 지나서야 이 책을 다 읽었다.

1년 전 북토크이지만 책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라기보다는 다큐를 만들면서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에 대한 수다에 가까웠다는 것은 기억난다(하긴 다 읽은 독자가 한 명도 안 왔는데 어떻게 책에 대해 깊이 얘기하겠는가). 그리고 한상호 PD가 두 가지를 자랑했던 것이 기억난다. 하나는 한국 최초로 생성형 AI 기술을 다큐멘터리에 활용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가 투입되어 새로운 시각으로 인도를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가 단행본에서는 한상호 PD가 기대했던 효과를 이루었을까.

우선 생성형 AI 기술은 종이책에서 눈에 띄는 효과를 내기 어렵기에, 이 책에서도 생성형 AI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책에서는 삽화가가 그린 삽화나 재연 배우들이 찍은 재연극 장면 스틸컷을 대체한 AI 이미지들로 나타나는데, 고증은 당연히 맞을 리 없고 미묘하게 기괴한 부분들이 보인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손가락들이 갈고리 모양이고, 기차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간디의 옷자락과 두 다리는 나무 뿌리처럼 얽혀 있다. 전쟁터에 나온 말들의 얼굴에는 눈이 이상한 방향으로 붙어 있다. 삽화나 사진에 들일 비용은 절약하면서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한 인도풍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 일어난다.

인도학자 강성용 교수와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의 대담이 이 책의 바탕이 되었지만, 단행본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는 화두를 던지는 장면 정도만 나오고 나머지 내용은 줄글로 정리되었다. 그런데 김대식 교수가 강성용 교수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뇌과학자, 아니, 과학자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세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책만으로 보자면 과학자로서의 시선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단행본으로만 보면 김대식 교수가 참여했다는 것이 그렇게 큰 메리트인 것 같지 않다.

그 두 가지를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 책은 꽤 괜찮은 인도사 입문서다. 고대 인더스 문명부터 현대까지 인도를 이뤄온 것들이 무엇이고 그것들이 어떤 역사를 만들어냈는지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어, 인도라는 나라의 역사를 쭉 훑어보기에 좋다. 그 덕분에 인도라는 나라를 만들어온 정신과 본질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아름다운 북 디자인도 이 책의 장점이다. 인도에는 예전부터 관심이 있긴 했지만 나를 홀린 것은 은은한 황금빛의 가네샤 신상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묵직한 적갈색 하드커버 표지였다. 장중하면서도 인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표지에, 본문도 잡지처럼 감각적인 디자인이고 사진 자료도 많아 소장욕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막상 정독해 보니, 같은 장소를 찍은 사진들이 너무 많고 지도는 너무 간략했다. 알고 보니 다큐멘터리에 나온 지도를 그대로 쓴 것인데, 지도에 당시의 주요 도시나 하천, 지형의 이름도 표시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지도나 도표를 좀 더 활용했다면 책의 내용을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다큐멘터리 영상을 찾아보니 영상보다는 책이 낫다고 생각했다. 머리말에서 극장 안에 두 진행자 강성용 교수, 김대식 교수와 함께 인도사를 빛낸 위인들을 불러모아 대담을 진행한다는 야심찬 발상을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만들어진 결과물은 기대에 못 미쳤다. 인도 위인들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객석에 합성했는데, 2차원 이미지의 입과 팔다리만 움직여 마치 종이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인도 위인들의 목소리를 맡은 성우들은 (아마 전문 성우가 아닐 것 같은데) 일반인 같은 발성과 연기를 보여주어 목소리가 위인의 이미지에 붙지 않고 겉돌았다.

게다가 두 진행자가 인도 영화 <RRR>의 주제가 <Naatu Naatu>에서 가져온 듯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중년이고 춤과 연이 없는 두 사람이 추기에는 안무의 난이도가 높았는지 AI로 만든 두 사람의 캐릭터가 춤을 춘다. 그런데 가상 캐릭터에 두 사람의 얼굴만 씌워 놓은 형태인 데다 두 사람이 무한 증식되기까지 하니 기괴해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BBC와 HBO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괜히 비싼 돈 들여 실제 배우로 재연극을 찍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그 두 곳도 CG로 영상을 보강하겠지만).


AI 이미지들 속에서 불쾌한 골짜기가 불쑥 튀어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책은 정제된 글로 정리되고 아름다운 디자인이 뒷받침해 꽤 괜찮은 교양 역사서가 되었다. 나는 책에서나 다큐에서나 연출자의 의도와 결과 사이 괴리를 느꼈지만, 한상호 PD 본인은 나와 달리 대만족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시도를 참신하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시청자들도 있다. 지금은 좀 어설퍼 보일지 몰라도 의도와 결과를 좁혀가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AI를 점점 더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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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도
한상호.강성용.김대식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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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호 PD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생성형 AI와 김대식 교수의 참여가 단행본에서는 특별한 메리트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인더스 문명부터 오늘날까지 인도의 역사와 특징은 깔끔하게 잘 정리돼 있다. 디자인은 아름답고 시각 자료도 풍부하지만, 비슷비슷한 현장 사진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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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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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포 영화는 잘 못 보면서 나폴리탄 괴담은 좋아한다. '나폴리탄 괴담'은 일본의 '공포의 나폴리탄'이라는 괴담에서 유래했는데, 주인공이 일본식 스파게티인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먹으려고 했는데 그 나폴리탄 스파게티의 정체를 알아채고 공포에 휩싸였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작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이렇게 나폴리탄 괴담은 무엇인가를 굉장히 미스터리하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묘사하지만, 정작 그것의 정체는 확실히 밝히지 않는다. 누락된 정보 때문에 그 존재는 듣는 사람의 상상 속에서 더욱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존재가 된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보다 더 큰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도 정보를 일부러 누락시킴으로써 더 큰 공포를 불러오는 전략을 사용한다. 한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쭉 이어나가는 보통의 소설들과 달리, 이 소설은 일본의 긴키 지역(수도였던 교토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옛 수도권 지역)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현상들에 대한 온갖 (가상의) 자료들을 모아놓은 모습이다. 공포 전문 잡지 기사와 인터뷰 녹취 기록,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대로 긁어 온 글과 댓글까지 자료의 출처나 형식도 다양하고 시점도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그렇기에 진상은 직선적인 스토리라인을 따라 밝혀지지 않는다. 각 자료에 담긴 단서들이 퍼즐 조각처럼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져 간다. 퍼즐이 완성되기 전에 어떤 진상이 숨겨져 있는지 알기 어렵기에 더 공포스럽다.

또 하나 공포감을 더하는 것은 긴키 지방이 우리에게 낯선 지역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긴키 지방이 자신이 사는 곳이라 이야기를 상상하기 쉬웠고, 이 지방 사람이 아닌 사람들도 수학여행으로 한 번은 와봤을 곳이기에 친숙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괴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곳도 주택가나 노래방, 회사처럼 일상적인 곳이기에 공포가 일상으로 파고드는 것을 노렸을 것이다. 번역가는 일본에 자주 여행을 간 한국인에게도 긴키 지방은 친숙할 것이기에 작가의 이러한 전략이 유효할 것이라고 본다. 반면 '긴키'라는 지역명을 이 책으로 처음 들을 정도로 일본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긴키 지방은 낯선 곳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더 덥고 습하고, 더 무성하고 깊은 숲과 산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원한이 풀리면 천도되는 한국의 귀신과 달리, 일본의 귀신은 아무나 자기 영역에 들어오면 해쳐서 희생자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이런 일본 괴담 특유의 밑도 끝도 없는 악의가 낯설고 무섭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의 귀신들도 이런 무차별적인 악의를 퍼뜨리는 존재들이기에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어 더 두렵다.

하지만 소설이기에 진상은 결국 밝혀질 수밖에 없다. 결말까지 오면서 커진 공포감은, 결말에서 진상을 알고 나면 그 모든 재앙의 원인이 너무 하찮아 식는다. 이 책을 다 읽은 날 밤 이상하게도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불어 더 무서웠는데, 이 책 속 만악의 근원이 된 존재를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무서운 마음이 가셨다. 세상에 결혼 못 한 게 자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안 만나주는 여자들을 죽인 놈 달래준다고 신사까지 세워줬는데. 몇십 년 동안 제물도 받아 먹고 죄 없는 여자들도 홀려서 신부로 데려와 놓고선, 이제 자기를 잊어버리고 제사를 안 지내준다고 저주를 퍼뜨린다. 그렇게 여자들을 많이 홀리고도 만족을 못 하는지 남녀가 결혼하고 뭘 하는지도 모르는 초등학생 여자애를 납치해 '신부'로 삼는다. 이런 치졸하고 추잡한 귀신을 봤나. 이 책을 읽고 밤에 무섭다면 책 속 귀신의 하찮음을 생각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도 결말까지 조각난 단서들이 서서히 맞춰지면서 그 사이의 공백을 독자 스스로 상상으로 메꿔 가면서 공포를 키워가게 유도하는 실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도 끈적끈적한 악의가 읽는 나에게서도 떨어지지 않는 듯하다. 본문 뒤에 실린 (가상의) 문서, 사진들은 어떤 것은 현실감이 있어서, 어떤 것은 조악해서 오히려 더 불쾌감과 공포감을 일으킨다. 이 책이 곁에 있는 것 자체가 꺼림칙하게 느껴질 정도다. 여러모로 영리하게 공포를 만들어내는 책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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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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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을 알고 나면 이 모든 재앙의 원인이 너무 하찮아서 깨지만, 조각난 단서들이 서서히 맞춰지고 그 사이의 공백을 독자 스스로 상상으로 메꿔 가면서 공포를 키워가게 유도하는 실력이 뛰어나다. 책을 읽고 나서도 끈적끈적한 악의가 읽는 나에게서도 떨어지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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