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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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관계에는 끝이 있다. 이 책에 실린 일곱 개의 단편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사소한 엇갈림 때문에 서로 관계가 끊어지거나,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혼자 남겨진다. 상대가 말도 없이 멀어지거나 세상을 떠나서. 

  이런 관계의 단절은 나 자신도 현실에서 자주 겪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약하고 불안정한지, 생각지도 못한 일로 관계가 깨진 적이 수도 없다. 지금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 속에서도 서로 어긋날 기미가 바닷속 암초처럼 숨어 있다. 용하게 서로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는다 해도, 한쪽이 세상을 떠나면 그 관계는 끝난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이 책 안의 단편들은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뜻하지 않게 겪는 관계의 단절을 통해서. 

  그래서 이 책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다. 현실도 우울한데 소설마저 우울한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드니 더 지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도 그렇게 뜻하지 않은 이별을 겪었어'라고 말하는 이 책 속 단편들에게서 위안을 받았다. 나는 왜 그 때 그애를 잡지 못했을까, 그 사람은 갑자기 왜 내게서 멀어졌을까, 우리는 어떤 관계였던 걸까.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고, 고민해 봐도 이해할 수 없다. 실패한 관계들이 남긴 상처가 때로는 쓰라리고 쿡쿡 쑤신다. 내가 멍청하고 관계에 서툴러서 그랬던 거야, 라고 자책할 때 이 책은 말했다. 너만 그런 게 아냐, 네 잘못만은 아냐. 관계는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거니까, 어느 한 쪽의 잘못만으로 끊어지는 게 아니라고. 

  이 책 속 인물들은 어떤 관계든 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가만히 서로의 손을 잡는다. 이미 끝난 관계에서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담담히 관계의 끝을 받아들인다. 죽음으로 갈라진 관계에서도 죽은 이는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과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서 같이 울고 후련해진 기분이 든다.한 점의 허세나 가식, 자의식 과잉 없이 일기를 쓰듯 조용하고 담담한 문체 덕분에 마음이 더 맑아진다. 

  이야기 자체가 흥미진진한 소설도 있고, 사람의 마음을 들끓어 오르게 하는 드라마틱한 소설도 있다.  그래서 『쇼코의 미소』의 서사가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차를 마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듯, 이 책을 읽으면서 끊어진 관계들로 인해 상처 받고 요동 치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모든 관계에 끝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 힘들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다양한 관계의 끝을 보여주는『쇼코의 미소』 속 이야기들에게서 위로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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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조각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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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는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칭송 받는다. 하지만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 같은 그의 작품들을 보면 이전의 회화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 평범한 구상 회화로 보인다. 그런데도 현대의 저명한 철학자들과 미학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현대 미술의 씨앗을 보았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마네가 현대 미술을 시작했다고 하는 걸까?  『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 조각』 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와 조르주 바타이유, 미국의 미술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마네론(論)을  소개하면서, 마네가 어떻게 서양 회화의 전통에서 벗어나 현대 미술을 시작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푸코는 마네가 공간 처리, 조명, 관객의 자리, 이 세 가지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이루었고, 그것이 20세기 현대 미술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인 '13개 퍼즐 조각'은 푸코가 마네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기 위해 선택한 13개의 작품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 <오페라 극장의 가면무도회>,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보르도 항구>, <아르장퇴유>, <온실에서>, <맥주홀의 종업원>, <철도>,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 <피리 부는 소년>, <발코니>, <폴리 베르제르 바>를 말한다. 


에두아르 마네, <오페라 극장의 가면 무도회>, 1873-1874.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이 발명된 이후로 서양 회화에서는 원근법을 이용해 2차원의 캔버스 위에 3차원의 공간을 그렸다. 하지만 그림 속 공간은 환영이고 속임수일 뿐이고, 그림의 진실은 그림이 물감을 바른 평면이라는 것이다. 마네의 <오페라 극장의 가면 무도회>에서는 사람들이 벽처럼 그림을 가득 메우고 있어, 공간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두 개의 커다란 기둥이 그리는 수직선과 그림을 가로지르는 발코니가 그리는 수평선이 직사각형 캔버스의 형태를 반복하고 있다. 마네는 이렇게 그림 속 깊이는 실제가 아니고, 그림은 직사각형 캔버스라는 평면 위에 그려졌다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헤라르트 판 혼토르스트(1590-1656), <중매쟁이>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마네는 조명을 통해서도 그림이 물감을 칠한 평면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서양 회화에는 두 가지 조명이 있다. 내적 조명은 그림 안에 그려진 빛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헤라르트 판 혼토르스트의 그림 <중매쟁이>에서 그림 속 촛불은 사람들의 얼굴에 명암을 만들어 인물에 볼륨감을 주고, 장면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명암 또한 작품에 입체감을 주는 수단이었다. 반면 외적 조명은 그림이 걸린 전시실의 조명 등 화폭 밖의 실제 빛이다. 그러나 얇은 헝겊인 캔버스 안에 실제 빛이 들어 있을 리 없으므로, 그림 속의 빛 또한 환영, 거짓말에 불과하다. 마네의 <올랭피아>에서는 배경이 어둡게 처리되어, 내적 조명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올랭피아의 몸은 명암 처리가 거의 되지 않아 납작하게 보인다. 마네는 그림 속 공간의 깊이와 인물의 입체감을 지워버림으로써, 그림이 현실을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물감과 캔버스로 이루어진 물질, 그림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림이 현실을 재현해야 한다는 목적에서 벗어나 그림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 것, 미술 그 자체를 위한 미술이 된 것이 현대 미술의 시작이었다.

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 바>, 1881-1882.


  그리고 관객의 자리에 있어서도 마네는 서양 회화의 전통을 깨뜨렸다.관객은 어느 자리에서 마네의 작품 <폴리 베르제르 바>를 보는 것이 좋을까? 당연히 그림 속 종업원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그림 한가운데 앞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종업원의 뒷모습과 종업원과 대화하는 남자의 앞모습이 그림 오른쪽에 있다. 이 그림의 배경은 거울인 것이다. 그런데 관객이 그림 속 종업원을 바라보는 위치가 그림 한가운데라면, 종업원의 그림자는 종업원 바로 뒤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림 속 종업원의 그림자는 종업원이 서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한참 떨어진 자리에 있다. 종업원을 정면으로 보는 시점과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보는 시점, 이 두 시점이 한 화면 안에 있는 것이다. 원근법이 발명된 이후로 서양 회화는 한 시점에서 본 장면을 담고 있었고, 관객의 자리는 원근법에 따라 최적의 장면을 볼 수 있는 정확한 한 지점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마네는 원근법의 고정된 한 시점이라는 전통을 깨뜨리고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담는 방법을 통해, 그림은 관객이 자유롭게 자리를 옮기면서 볼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도 마네가 그림의 물질성과 평면성을 강조한 것이 현대 미술, 모더니즘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모더니즘이 한 분야가 자신의 정체성, 순수성을 찾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근대 이전 미술은 문학처럼 성경이나 신화 속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뛰어난 기교로 조각과 같은 입체감을 표현했다. 마네는 그림의 물질성 평면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림이 문학에 종속되지 않고 그림만의 특징인 평면성을 인정해서 회화만의 정체성, 순수성을 보여준 것이다.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카드로 만든 성>, 1734-1735.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푸코와 그린버그가 마네의 그림을 르네상스 이래로 수백 년 동안 이어졌던 원근법이라는 전통을 깬 것으로 생각한 반면, 마이클 프리드는 프랑스의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의 회화론을 깬 것으로 보았다. 디드로는 연극에서 배우가 관객을 의식하면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 없기에, 배우는 관객과 무대 사이의 가상의 벽, 즉 제4의 벽이 있다고 생각하고 연기에 몰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회화 속 인물들이 관객에게 보이기 위해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하는 것 또한 과장된 연극성이라고 비판했다. 프리드는 디드로의 회화론 이후 프랑스 회화에서는 그림 속 인물들이 관객의 존재를 잊어버린 척 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화가 샤르댕의 그림 <카드로 만든 성> 속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카드로 성을 쌓는 데 열중하고 있는 소년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연극이든 그림이든 엄연히 관객들이 바라보는 대상이다. 마네는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관객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림 속 인물들을 통해, 관객의 존재와 그들의 시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림이 누군가가 바라보는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림이 누군가가 바라보는 가상의 장면이라는 것을 숨기려 했던 디드로 이후 회화의 전통을 깬 것이다. 


에두아르 마네, <늙은 악사>, 1862.


  한편 바타이유는 마네가 미술을 지식에서 해방시켜 미술의 본질을 회복시켰다고 보았다. 원시인들은 단지 즐거움을 위해 생계를 유지하는 데 전혀 필요 없는 동굴 벽화를 그렸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서양 미술은 성경이나 신화, 과거의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었고, 배경 지식이 있어야 그 그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나열되어 있는 <늙은 악사>처럼, 마네의 그림은 어떤 이야기도 교훈도 전달하지 않는다. 예술은 원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는데, 아무런 의미도 지식도 전달하지 않는 마네의 그림은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그로 인해 황홀함과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이 네 명의 학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다. 마네는 성경이나 신화, 역사 속 이야기를 재현하고 교훈을 전달해야 하는 목적에서 미술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실제처럼 어떤 공간과 장면을 재현한 그림이 단지 평면 위에 물감으로 그려진 허구, 하나의 사물이라는 것을 자신의 그림으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어떤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미술 그 자체를 위한 미술, 현대 미술이 시작된 것이다.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을 과대평가한 감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키요에를 접하기 이전 서양 회화들은 어두운 색뿐이었고, 우키요에가 밝고 순수한 색채를 일깨워 주었다고 했는데, 빛과 어두움의 대비를 강조시켰던 바로크 회화 이전, 사물의 색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이전의 서양 회화들은 화려한 색채로 채워졌었다. 우키요에가 서양 회화에 밝은 색채를 가져왔다기보다는 잊혀져 있던 밝은 색채를 다시 불러왔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키요에가 유행하던 시기 조선의 화가들은 중국의 산하와 풍속을 그렸고, 풍속화가 있어도 크기가 너무 작고 수적으로도 빈약하며 색채가 단조롭다고 말했다. 조선의 풍속화가 우키요에만큼 서민들에게 널리 퍼지지는 못했지만, 중국이 아닌 우리의 현실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림의 크기와 색채만으로 그 그림의 예술적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역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표상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 기억이 없다고 했는데,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는 당시 조선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김준근의 풍속화 1500여 점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 조선의 모습을 세계에 알렸다. 우키요에가 서양 현대 미술에 미친 영향은 잘 알지만, 우키요에와 우리 미술을 비교하다 보니 우리 미술을 다소 폄하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단점이 있지만 이 책은 마네의 일생, 마네의 작품으로 인해 일어난 스캔들 같은 단순한 배경지식을 넘어 마네의 그림이 어떻게 서양 미술사의 전통을 깨고 현대 미술의 기틀을 이루었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한다. 이 네 명의 마네론에 대한 저자 자신의 생각도 함께 썼다면 더 좋았겠지만, 대중 독자들에게는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론들을 쉽고 친절하게 설명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미술이 너무나 난해하게 느껴지는 지금, 마네를 통해 현대 미술이 이전의 미술과 어떤 면에서 다른 것인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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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조각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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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프리드, 바타이유, 그린버그. 마네 작품에 대한 이 네 사람의 이론이 잘 요약되어 있어 마네와 현대 미술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우키요에와 비교해 당시 한국 미술을 폄하하는 듯한 서술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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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생명 이야기 아우름 1
최재천 지음 / 샘터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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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과학자이자 세계적인 동물학자. 여러 학문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자는 통섭(統攝)이라는 개념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사람. 최재천 교수의 이런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책을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중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저자답게 그의 글은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따뜻했다. 존댓말로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듯한 문체도 따뜻하지만, 무엇보다 세상 모든 생명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는 제목처럼, 생물들은 경쟁과 적자생존뿐만 아니라 공생 관계를 통해서도 살아남는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현화식물(꽃을 피우는 식물)과 곤충은 꿀을 주고 꽃가루를 다른 개체의 꽃에 전달해주는 공생 관계를 통해 지금의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한 생물이 되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은 하나의 생명체, 하나의 DNA에서 나온 것이니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을 비롯해 6천여 종의 생물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침팬지와 유전적으로 99퍼센트 일치하는 존재, 다른 동물들과 같은 동물이며 생태계라는 네트워크 안에서 다른 생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다른 생명체들을 무참하게 없애고,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파괴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경쟁이 아닌 공생의 세상을 꿈꾼다. 

  공생의 세상은 다른 생물과 인간의 관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공생의 세상을 꿈꾼다. 그는 남보다 더 빨리 움켜쥐려 노력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젊은 세대들은 움켜쥐기 전에 나누어줄 줄 아는 '공감의 세대'라고 말한다. 자신이 꿈꾸는 공생의 세상을 젊은 세대들이 열어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경쟁사회 속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죽기살기로 노력하는 젊은이들에게 공생은 멀기만 한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다. 
'아름다운 방황 끝에는 아름다운 삶이 있습니다.', '방황은 청춘의 특권'이라는 그의 말이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만큼이나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다.  특히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붙잡느냐, 더 늦기 전에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다른 일을 해야 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나로서는 "이제껏 한 번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매일같이 하면서 굶어죽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에 과감하게 뛰어드십시오."라는 그의 말에 "정말 그럴까요?"라고 되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가 아름다운 말만 늘어놓고 젊은이들의 실질적인 고통은 외면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요즘 애들은 노력을 안 한다"고 말하지 않고, "요즘 애들은 남에게 나눌 줄 알고 함께 살아갈 줄 안다."고 말하는 어른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들을 지원하면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그 과정에서 참신하고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얻어내는 미시간 명예교우회에서 회원으로 활동했었다. 젊은 학자들이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그의 꿈이다. 학자가 아닌 젊은이라도 그는 뒤에서 든든하게 지지해 줄 것이다. 

  이제 최재천 교수의 책을 한 권 읽었지만 그가 많은 독자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먼저 모든 생명, 그 생명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많은 그가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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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생명 이야기 아우름 1
최재천 지음 / 샘터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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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자신의 삶의 모든 순간과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속 모든 것이 생물학, 동물행동학과 맞닿아 있었다. 세상 모든 생명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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