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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크 & 피클스 - 이균 셰프가 그리는 음식과 인생 이야기
에드워드 리 지음, 정연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월
평점 :
<흑백요리사>는 보지 않았지만 준우승자인 에드워드 리는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미담이었다. 그래서 호감이 가긴 했지만, 그에 대한 호감보다는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읽었다. 한국 전통 요리와 미국 남부 요리를 결합했다는 그의 요리 세계에서 내가 궁금한 쪽은 미국 남부 요리였으니까. 풍성한 재료로 만들어낸 푸짐하고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들. 그것이 내 머릿속 미국 남부 요리의 이미지였다. 거기에 한국 전통 요리를 어떻게 접목시키고 재해석했을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요리책을 읽는 일이 거의 없는데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에드워드 리는 <흑백요리> 준결승 경연 당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요리로 참치비빔밥을 내놓으며, 스스로가 '비빔 인간'이라고 했다고 한다.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뒤섞여 있는 인간. 그는 이 책에서도 미국의 가장 멋진 점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가지 정체성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고 좋은 부분들을 조립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런 그의 선택은 이 책에 실린 요리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책에 실린 요리들은 냄비밥, 사계절별 김치, 갈비구이 같은 몇 가지 음식을 제외하면, 미국 남부를 베이스로 하고 동남아시아의 풍미와 한국의 향수를 섞은 요리다. 양고기 프로슈토 하나를 만들겠다고 냉장고 하나를 고기 염지하는 데만 쓰라니! 그것도 66일이나! 거기에 레드불(그러면 박카스나 비타 500도 요리 재료로 쓸 수 있나)도 담배(정확히는 담뱃잎)도 재료로 쓴다니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방대한 스케일에 대담한 레시피다. 여기서 그의 정체성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미국인이라고 느꼈다. 당연하다. 핏줄은 한국인이라도 그는 한 살 이후로 쭉 미국에서 살아왔고, 아내도 미국 남부 출신이고 방황하던 시절에 그를 받아준 곳도 미국 남부였으니.
그래서 한국 독자들로서는 치명적인 이 책의 약점은 이 책에 실린 요리들의 재료를 구하기도, 따라 만들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인 독자로서 재료를 구하기도 만들기도 쉬운 것은 가장 처음 나온 요리인 냄비밥과 겨울 김치로 소개된 김장 김치, 그의 어머니에게서 전수받았다는 갈비구이뿐. 이 책에 실린 레시피들을 보고 나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제게는 버번 위스키로 가득 찬 부엌 찬장도, 육질 좋은 양고기와 신선한 버터밀크(우유에서 버터를 만들고 남은 액체)를 공급해 줄 이웃 농장도 없답니다, 셰프님. 다만 젓갈의 대안으로 제시하셨던 피시소스 말고 진짜 젓갈은 있어서 김장 김치에 넣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나는 이 책에 실린 요리들을 따라서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롭고 독특한 음식들을 만나고 싶어서 이 책을 읽은 것이니 내게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직접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레시피와 음식 사진을 보고 맛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 책에 실린 모든 디저트에는 버터밀크가 들어가는데 버터밀크를 넣으면 도대체 어떤 맛이 나는 걸까. 그가 버터밀크 못지않게 사랑하는 버번 위스키를 넣은 음식들에서는 어떤 풍미가 나는 걸까. 이런 상상들.
낯선 음식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리의 글을 읽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이 책은 재료별로 각 챕터가 나누어져 있는데, 각 챕터는 각 재료에 대한 그의 에세이로 시작된다. 그는 영문과(우리로 치면 국문과) 출신답게 각 재료에 얽힌 자신의 인생 여정과 신념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나간다. 그의 삶도, 요리, 가족, 한국과 미국 남부 두 곳에 대한 사랑도, 요리의 재료가 되어주는 동물들에 대한 존중도 그의 글들 속에 담겨 있다. 에세이뿐 아니라 레시피를 소개하는 짧은 글에서도, 때로는 레시피에서도 그의 요리를 향한 애정과 유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잘 쓴 여행 안내서는 한 지역의 지리지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잘 쓴 요리책은 그 책을 쓴 요리사의 자서전이 될 수 있다(미국 남부의 농장과 사냥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꽤 디테일하고 생생해 미국 남부의 지리지로 볼 수도 있다). 요리책으로서의 실용성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떨어질지 몰라도, 에드워드 리라는 사람과 그를 만들어낸 것들을 더 깊이 만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P. S. '전화를 바로 받는 여자는 섹시하지 않다'는 문장에서 나쁜 남자의 향기를 느꼈다. 그 문장을 읽고 생각했다. 짝남의 카톡에 실시간으로 대답하는 버릇을 고쳐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