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8세기, 왕의 귀환 - 조선 4 민음 한국사 4
김백철 외 지음, 강응천.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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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표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노년의 영조 어진이 아닌, 20대 초 연잉군 시절의 초상이다. 노년 시절의 어진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모습이다. 연잉군 시절의 초상처럼, 이 책은 영조와 정조, 그리고 그들이 이끌어갔던 18세기 조선의 낯선 모습을 보여준다. 사도세자, 탕평책, 개혁 군주 같은 몇 개의 단어로만 압축하기에는 영조와 정조, 그리고 그들의 시대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이었다. 이 책은 정치사와 경제사, 문화사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 복잡하고 모순적인 시대를 복원해 간다. 


 영조와 정조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사극 속 이미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인물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1, 2년도 견뎌낼 수 없는 정신적 압박감을 수십 년 동안 견디면서 조선을 통치했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부터 쉴새없이 변화하는 정국을 살펴보며 그 속에서 살아남았다. 즉위한 뒤에도 수십 년 동안 그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붕당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정국을 이끌어간다. 정조 또한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둘러싼 정쟁들을 지켜보며 그 속에서 살아남고 즉위하는 데 성공한다. 자신이 옳다고(義) 믿는 것일 뿐 아니라 하늘의 이치(天理)에도 부합하는 의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때로는 의리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는 공론 대결에 의한 합의를 중시했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모든 세력의 합의를 이끌어내려 했다. 이 책은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시각에서 벗어나 더욱 더 복합적이고 변화무쌍했던 당시의 정치사를 보여준다. 부록에 실린 선조 때부터 정조 때까지 붕당의 세력 변화를 정리한 그래프는 복잡했던 조선의 붕당사를 머릿속에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 책은 영조와 정조가 탕평을 통해 정치력을 모으려고 한 것이 단지 절대군주로서의 권력욕 때문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16세기 들어 안으로 시장이 발달하고 밖으로는 조선 경제가 은 본위 세계 경제 체제에 편입되면서 조세 제도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조세 제도의 해묵은 문제점들을 해결해야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조세 제도 개혁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정치력의 결집이 필요했다. 영조는 신료들뿐 아니라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도 자문을 구하는 순문(詢問)을 재위기간 동안 200번이 넘게 열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개혁안을 놓고 수많은 반대와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조세 개혁을 실시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조는 "백성을 위해 군주가 있는 것이지, 군주를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한다. 영조는 백성을 단순한 통치 대상이 아닌 국정의 동반자로 보았던 군주였다. 정조는 북학과 서학의 최신 성과까지 두루 활용해 새로운 유형의 성 화성을 쌓았고, 그곳에 각종 도시 시설과 상업 시설을 마련했다. 정조는 화성에서 각종 개혁을 실험하며, 그곳에서 입증된 성과를 전국으로 확산시켜 국가 개혁의 모범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그의 개혁을 향한 꿈은 좌절된다. 


 또한 이 책은 18세기는 두 왕뿐만 아니라 양반들도, 중인들도 백성들도 새로운 꿈을 꾸는 시대였다고 이야기한다. 북학파는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오랑캐로 여겨졌던 청의 문물도 받아들였다. 북학파 학자들은 청의 문물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대부들에게 의식의 전환을 촉구하면서 새로운 조선을 꿈꿨다. 서얼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벼슬길을 열어달라는 통청 운동을 꾸준히 진행했고, 중인들은 자신의 전문 능력을 활용해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양반 문화의 모방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자신들만의 문학 모임인 시사(詩社)를 결성해 자신들을 표현하기도 했다. 백성들도 자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정조가 재위 기간 동안 능행 때 접수한 상언은 3232건에 달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궁정의 공연 문화가 쇠퇴하자 광대들은 폐쇄적인 궁 안이 아닌 개방적인 장터로 나가게 되었다. 공연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광대들은 이 지역과 저 지역, 이 종목과 저 종목의 공연들을 섞으면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고, 제한 없이 욕망을 표출했다. 18세기는 이렇게 다양한 꿈과 욕망, 가능성이 뒤엉켜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시기 조선은 바로 앞 세기인 18세기가 화려하게 빛났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쇠락한다. 세도 정치로 정치 세력간의 균형은 깨졌고, 정치, 경제 개혁들은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해묵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20세기의 더 큰 몰락을 향해 걸어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선의 마지막 절정이었던 18세기가 품고 있었던 '잃어버린 가능성'을 찾고 싶어하지만, 이 책은 잘라 말한다. 18세기는 18세기일 뿐이라고. 18세기는 결코 이후의 시대에 종속되지 않은 그들만의 시대였고, 그들의 삶, 그들의 꿈을 현대의 꿈으로 굴절시키는 일 없이 되살려내려 한다고. 그 말처럼 이 책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18세기 조선을 다양한 측면에서 재구성한다. 하지만 그들이 꾸었던 꿈과 열망, 가능성은 지금의 우리가 꾸는 꿈과 열망, 가능성과도 통하는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들 중에는 그들이 남긴 것들도 분명 있으니까. 


 역사 서술의 객관성에 있어서나, 책의 편집과 구성에 있어서나 흠 잡을 데가 없다. 책의 크기상 자세히 보기 어려운 지도를 크게 확대해 별도의 첨부자료로 넣고, 다양한 도판과 도표를 활용해 직관적인 이해를 도운 세심함이 돋보인다. 도판의 화질도 선명해 세부까지 살펴보기 좋다. 18세기 당대의 한양과 파리를 비교해 보고 18세기 세계사 속 주요 사건과 주요 인물을 함께 살펴보며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18세기 조선을 보려는 폭넓은 시각도 돋보인다. 한국사 중 한 시대를 복합적으로 바라보기에 더 없이 좋은 통사서이다. 이 책은 각 세기를 통합적으로 살펴보는 민음 한국사 시리즈 중 한 권이라는데, 같은 시리즈의 앞으로 나올 책들도 기대하게 만든다. 이 시리즈가 지금의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며, 계획한 대로 고조선에서부터 20세기 현대까지의 한국사를 종합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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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8세기, 왕의 귀환 - 조선 4 민음 한국사 4
김백철 외 지음, 강응천.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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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적인 역사 해석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역사 서술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잇게 돕는 풍부한 도판, 당시의 세계사까지 살펴보는 폭넓은 시각까지 흠잡을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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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훔친 미술 -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이진숙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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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인간의 가장 진한 체취를 담아내게 된다. 특히 미술은 사진이 없던 시대에서부터 인간사를 기록해 왔고, 사진이 발명된 이후에도 사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사를 기록해 왔다. 그래서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미술 작품에 담긴 격변의 역사도 함께 만나게 된다. 이 책은 인간의 삶과 욕망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던 중세 후기부터 사람들이 인간성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1, 2차 세계대전까지의 역사를, 그 시대를 표현하는 미술 작품들과 함께 살펴보고 있다.



랭부르 형제, <베리 공작의 기도서> 중 5월. 귀족들이 사냥하러 떠나는 장면이다.


 이 책에서 처음 등장하는 작품은 중세 후기인 15세기의 네덜란드 출신 화가들인 랭부르 형제(Limbourg, Herman,PaulJohan)의 <베리 공작의 기도서>이다. 기도서는 달력과 함께 시간과 계절에 어울리는 기도문과 화려한 채색 삽화를 담은 책으로,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당대 사람들의 세시풍속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베리 공작의 기도서>는 종교의 영향 아래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던 중세 초기 미술과는 달리 세속적 취향, 세속적인 삶의 즐거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림 속 맛있는 음식과 세련되고 화려한 옷, 즐거운 파티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귀족들과 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만족하며 사는 농민들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꿈꾸던 삶의 모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눈을 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증표인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베누아의 성모>, 1478.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욕망을 치열하게 추구해 왔던 메디치 가문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해 문화적 발전을 이끌어냈다.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는 메디치 가의 후원을 기반으로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거대한 돔을 건축하는 데 성공한다. 돔을 건설하면서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을 발견해,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 자연을 재현한다는 미술의 과제에 시작점을 마련했다. 또 그의 후배인 파올로 토스카넬리는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돔에서 태양의 운동을 관측하는 실험을 했다. 인간이 자연을 호기심과 관찰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자연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는 이성과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성과 과학에 눈을 뜬 당대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베누아의 성모>를 든다. 그림 속 아기 예수는 자신이 들고 있는 꽃을 유심히 바라본다. 신인 예수가 자신의 피조물을 호기심을 품고 바라볼 리 없다. 그림 속 아기 예수는 자연을 관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세상 모든 것을 의문을 품고 바라보는 이성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사는 세상도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신이 내렸다는 절대적인 왕권에도, 몇몇 상류 계급만이 부를 독점하는 현실에도 서서히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런 의문을 품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고, 그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혁명 이후에는 더 큰 혼란이 일어났고, 혁명 세력 내부에는 분열이 생겼다. 혁명에 반대하는 보수 세력들이 다시 권력을 잡고 혁명이 바꾸어 놓은 것들을 원상복구했다, 다시 혁명으로 쫓겨나고, 다시 보수 세력이 집권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수없이 회의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민주주의이다. 19세기 독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자유와 평등을 열망하는 인간의 초상이다. 이 그림 속 남자는 1817년 자유주의적 이상을 품고 결성된 독일의 대학생 단체 '부르셴샤프트'의 단복을 입고 있다. 당시는 오스트리아의 수상 메테르니히를 비롯한 보수 세력의 억압으로 자유주의 운동이 전 유럽에서 후퇴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부르셴샤프트의 자유주의적 이상은 독일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자욱한 안개 바다 앞에 두려움 없이 홀로 서 있는 청년의 모습은 현실 질서에 저항하며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케테 콜비츠,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1938.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그를 통한 진보를 믿었던 사람들은 20세기에 들어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발달한 과학 문명을 통해 부강해진 나라들은 팽창하며 서로 충돌했다. 이성에 근거한 과학 문명은 처절한 전쟁을 불러오게 되었다. 전쟁이 사회의 모든 모순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열광했던 예술가들조차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인간의 이성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이성에 기반한 서구 문화 전반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간 자신과 전쟁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실제로 아들과 손자를 전쟁으로 잃었던 독일의 예술가 케테 콜비츠는 조각 작품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를 통해 한 인간 어머니, 아들의 죽음에 사회적, 역사적 책임을 느끼는 지상의 여인을 보여준다. 이런 예술가들이 있기에 인간은 역사와 과거의 잘못을 잊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중세부터 현대까지 그 시대가 낳은 미술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볼 수 있다.종교의 영향 아래에서 살다 자신의 욕망에 눈을 뜨고, 권력자들의 억압 아래에서 살다 스스로의 권리와 자유를 찾아가고, 때로는 인간이 저지른 잔혹한 행동에 회의를 느껴온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만들어냈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고,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면서 때로는 자신을 돌아보는 현대의 사람들을.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이 책은 그런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싸우고 피 흘리면서 지금 우리의 삶을 만들었다. 그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담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만들어온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것이 이 책의 의의가 아닐까.

 

*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판들의 화질이다. 미술사 책이라기에는 도판의 화질이 아주 좋지는 않아, 작품의 디테일이 뭉개져서 보일 때가 있다.(특히 베네치오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예배>의 경우가 심하다.) 작품을 더 자세히 살펴보려면 구글에서 다시 작품 이미지 검색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역사서인 <민음 한국사> 시리즈의 도판들이 오히려 더 화질이 좋다. 미술사 책이니만큼 도판의 화질에 대해 더 신경 써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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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5-10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판의 화질‘부분은 절대 공감이요.^^ 그래서 저는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 도판들을 참고하곤 해요.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바스티안 2018-05-10 17:44   좋아요 0 | URL
제가 미술사책에서 중요하게 보는 부분이 도판의 화질이에요. 저는 구글에서 화질 좋은 도판들을 검색해 봐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정말 도판들 화질이 좋더라고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대를 훔친 미술 -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이진숙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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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욕망에 눈을 뜨고 자신의 이성으로 세상을 보게 되며, 자신의 이성에 회의를 느끼고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 등, 미술 작품들을 통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현대가 만들어진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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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와 여우 - 우리는 톨스토이를 무엇이라 부르는가
이사야 벌린 지음, 강주헌 옮김 / 애플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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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P. S. 에 전쟁과 평화 결말 스포일러 있음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제목만 읽고 이 책이 톨스토이와 그의 작품 <전쟁과 평화>에 대한 책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톨스토이와 <전쟁과 평화>를 분석한 이 책에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유는, 저자 이사야 벌린이 톨스토이를 '고슴도치가 되고 싶어 했던 여우'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자가 말하는 고슴도치와 여우는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의 시인 아르킬로코스는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사야 벌린은 이 말을 사상가들을 나누는 기준으로 사용하는데고슴도치는 모든 것을 하나의 뚜렷하고 보편적인 원리, 궁극적인 진리로 환원하려는 사상가들을 말한다. 반면 여우는 서로 관계없고 모순되기까지 하는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며 생각의 범위를 넓혀가는 사상가들을 말한다. 

 이사야 벌린 이전의 해석들은 톨스토이를 고슴도치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전쟁과 평화>의 방대한 이야기들이 '그리스도적 사랑과 러시아 민중의 영적인 각성이 나폴레옹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야심에서 러시아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하나의 주제로 모인다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린은  전통적 해석이 톨스토이의 역사관에서 여우적인 측면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오히려 톨스토이가 러시아가 승리한 원인을 어떤 일원적 원리로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에 반발했다고 말한다. 그에게 역사적 사건은 아주 작은 원인들이 쌓여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같은 몇몇 영웅들이 역사를 이끌어나간 것으로 설명하는 낭만주의적 역사가들에게 톨스토이는 러시아 전쟁사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실을 찾아내면서 반박했다. <전쟁과 평화> 속 한 장면으로 예를 들자면, 니콜라이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사령관 중 한 명인 바그라티온 장군을 목격한다. 바그라티온 장군의 등장이 전투 자체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다만 장군의 의연한 모습과 존재 그 자체는 부하들에게 용기를 준다. 전투 이후 쓰여진 공문에서는 전투의 공을 바그라티온 장군에게 돌리지만, 그가 이름 없는 미천한 군인들보다 전투의 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름 없는 군인 한 명 한 명이 지금 전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으면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 그 한 명 한 명의 싸움이 전투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2016년 BBC 드라마 버전 전쟁과 평화의 한 장면. 니콜라이(잭 로던)는 전투에 참여하면서도 전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한다.


 또한 러시아 민중의 애국심이 나폴레옹에게서 러시아를 구했다는 통념과 달리,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1812년 전쟁 당시 개인적인 안위와 이익을 찾는 데 몰두하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살기 위해 정신 없이 피난 가고, 그 와중에 약탈을 하기도 하고, 전쟁 전에 해 오던 일을 계속 해 나가기도 한다. 러시아를 구하기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하겠다는 영웅적인 감정, 자신이 역사의 변화에서 주역이라는 생각도 없이 이렇게 평소대로 자신의 일에 충실하려는 사람들이 국가에 더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반면 역사적 사건의 전반적인 흐름을 주도하면서 역사의 변화에 동참하려 한 사람들, 영웅처럼 행동하면서 극적인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가장 무익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톨스토이는 역사학자들이 논리정연하고 깔끔하게 정리한 역사는 현실의 아주 작은 세부를 놓쳐버리고 만 가공의 삶이라면서, 개인과 공동체의 실제 삶을 그리기 위해 역사소설을 썼다. 그에게는 역사와 현실 속의 아주 작은 세부들, 개개인이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일상의 삶이 실제의 삶이었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소설 형식이기 때문에, 그는 논문이 아닌 역사소설로 자신의 역사관을 제시하려 한 것이다.


2016년 BBC 드라마 버전 전쟁과 평화의 한 장면. 모스크바 시민들은 프랑스군이 온다는 소식에 황급히 피난가고 있었다.


 역사와 삶 속에서 일어나는 아주 세밀한 일들도 놓치지 않는 뛰어난 관찰력과 묘사력 덕분에,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에서 귀족에서부터 황제, 군인들, 평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실제처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현실들이 역사를 이룬다고 보기 쉽지만, 톨스토이에게 삶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개인의 경험, 개인과 개인과의 사사로운 관계, 사랑, 질투, 증오, 열정 같은 개인의 감정, 일상의 나날들, 이런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인간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기록만으로는 역사를 움직이는 힘, 역사의 흐름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면서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독자들이 등장인물들의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 약간의 음모와 하찮은 대화까지 그럴듯하게 묘사하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고 마지못해 인정했다고 한다.(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 본인도 독자들이 전쟁 파트보다는 평화 파트, 그 중에서도 로맨스와 막장 드라마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나도 그래서 톨스토이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이런 이야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개인의 삶이 갖는 특징들만이 진실이라고 믿으면서도, 그런 특징들의 분석으로는 역사의 흐름을 설명할 수 없다는 원칙을 지니고 있는 것이 톨스토이의 모순이었다. 

 톨스토이는 역사와 인간사를 꿰뚫는, 역사와 인간사 속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원칙을 찾으려 애썼다. 그는 역사와 인간사 속 다양하고 구체적인 요소들을 찾아내 분석하고, 각 요소의 핵심까지 파고드는 데는 천재적이었다. 하지만 끝내 그 모든 것들을 연결시키는, 역사와 인간사의 모든 것을 꿰뚫는 궁극적인 원리가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를 고슴도치가 되려고 했지만 여우적인 성향의 한계에 갇혔던 여우로 보았다. 하나의 큰 지혜를 보는 고슴도치가 되려 했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다양한 것을 추구하는 성향 때문에 여우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처럼 이 책에서 분석하는 것은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 자체보다는 <전쟁과 평화> 속 톨스토이의 역사관이다. 이 책은 톨스토이가 그리스도적 사랑, 러시아 민중 특유의 강인함과 생명력 같은 뚜렷한 주제로 작품을 썼다는 통념을 깬다. 톨스토이는 하나의 뚜렷한 진리나 원칙을 가지고 살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많은 모순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역사관도 많은 모순을 지니고 있어, <전쟁과 평화>에서 드러나는 그의 역사관을 독자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들의 이론에 맞추어 역사 속 아주 일부의 요소만 취사선택한다고 역사학자들을 비판하면서 개인들 각자의 삶을 빠짐없이, 세부적으로 그려냈지만, 역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도 역사와 인간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도 역사와 인간사를 꿰뚫는 보편적인 원칙을 찾는 데는 실패한다. 

 그리스도적 사랑과 러시아 민중의 애국심이 러시아를 구원했다는 이전의 해석은 이해하기 쉽고 명쾌하다. 하지만 이 책은  <전쟁과 평화>를 만들어낸 톨스토이라는 인물의 더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내면과 역사관, 그리고 그런 내면에 영향을 준 다양한 사상적 배경을 소개한다.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기대하고 보았다가는 톨스토이의 복잡한 내면과 역사관, 그것에 영향을 준 다양한 사상들과 맞닥뜨리고 당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곱씹어 읽어보면 이전 해석에서는 볼 수 없었던 톨스토이와 <전쟁과 평화>의 더 복잡한 면모와, 그것을 만들어낸 기반이 어떤 것이었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 S. 하지만 <전쟁과 평화>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사소한 사실들도 군데군데서 만날 수 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가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의 시초인 것 같지만, 사실은 톨스토이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프랑스의 사상가 프루동의 저서 <전쟁과 평화>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한다.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의 진짜 시초는 프루동의 <전쟁과 평화>였지만, 지금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압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또 톨스토이는 인간의 행위나 성격을 개인적인 성장의 틀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했다는데, <전쟁과 평화>가 어떤 면에서는 피에르, 나타샤, 안드레이, 니콜라이, 마리아의 성장 드라마이기도 하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피에르가 프리메이슨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 톨스토이는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신비주의를 배격하는 철저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전쟁과 평화>에는 피에르가 외국의 프리메이슨 지부들을 여행하면서 연구한 개혁안을 프리메이슨 회원들이 거부하고, 피에르가 프리메이슨의 신비주의의 영향으로 자기 이름 철자로 자기 운명을 점쳐 보는 모습들이 나온다. 이런 묘사들이 톨스토이의 프리메이슨에 대한 회의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는 피에르가 젊은 시절과 달리 신비주의를 배격하게 됐다고 나오는 것을 보니, 피에르는 프리메이슨에서 탈퇴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초고에서 피에르는 데카브리스트가 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삶을 마치는 것으로 나왔다는 것. 지금 우리가 읽는 완성작 에필로그에서도 암시되기는 하지만 확인사살 당한 기분이었다. 그것을 보면 카라타예프의 소박한 신앙심도 피에르에게, 톨스토이에게 궁극적인 구원이 될 수는 없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카라타예프의 신앙심으로 피에르를 구원하게 두기에는 톨스토이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복잡한 인물이었다.(하지만 나는 카라타예프의 가르침 덕분에 피에르가 시베리아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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