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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
마리나 네이멧 지음, 박미경 옮김 / 예담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스포일러 포함
1970년대 이란을 다스리던 팔레비 왕조는 부패해 있었고, 비밀경찰을 이용해 국민들을 철저히 통제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이슬람 세력이 합세했다. 결국 1978년 반정부 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이듬해 국왕이 이집트로 도피했고, 팔레비 왕조는 무너졌다. 그러나 왕정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이슬람 세력은 이란을 더 민주적인 국가로 변혁시킬 것이라는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엄격한 종교 근본주의와 독재로 국민들을 통제했다. 이란 출신의 만화가 마르잔 사트라피는 이런 이란의 상황을 자신의 만화 '페르세폴리스'로 기록했다. 그리고 이 책 '마리나'도 이란 출신의 작가 마리나 네이멧이 겪은 1970, 80년대 이란의 독재 정권 시기에 대한 기록이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평범한 여고생 마리나가 독재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수업 진도는 안 나가고 이슬람 정부에 대한 찬양만 늘어놓는 수학 선생에게 수업 진도 좀 나가자고 이야기했던 것. 선생은 마리나를 교실에서 쫓아냈고, 다른 학생들도 마리나를 따라 나가 수업 거부를 했다. 수업 거부를 하는 학생들은 점점 늘어나 전교생의 90퍼센트에 이르렀고, 마리나는 교장이 뽑아 놓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정부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던 주변 친구들이 한두 명씩 끌려가더니, 얼마 안 있어 마리나도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 에빈에 끌려가게 된다.
마리나가 에빈으로 끌려가는 장면에서 시작된 이 소설에서는 비인간적이고 혹독한 감옥 생활과 에빈으로 끌려가기 전 행복했던 성장기가 교차된다.
그는 봄이 되면 신맛이 도는 자두를 팔았고, 여름이면 복숭아와 살구를, 가을이면 삶은 사탕무를 팔았으며 겨울에는 온갖 종류의 쿠키를 팔았다. 나는 삶은 사탕무를 무척 좋아했다. 휴대용 버너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사탕무를 뭉근하게 삶으면, 끈적끈적한 사탕무 즙이 거품을 내며 끓었다. 그럴 때면 사탕무 삶는 달콤한 냄새가 코 끝에 맴돌았다.(p. 79.)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마리나가 묘사하는 7,80년대 이란의 풍경은 이국적이면서도 감각적이다. 마리나의 어린 시절은 생리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여자 죄수들에게 생리를 억제하는 약재가 든 차를 먹이고, 언제 동료 죄수가 끌려나가 죽을지 모르는 공포스럽고 비인간적인 감옥 생활과 대비되어 더 따뜻하고 동화처럼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따뜻한 기억은 마리나에게 용기를 잃지 않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마리나는 원래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당할 운명이었지만, 자신에게 사랑을 느낀 간수 알리의 청원으로 종신형으로 감형된다. 그리고 그의 제안으로 어쩔 수 없이 그와 결혼한다. 그의 뜻을 따른 덕분에 마리나는 목숨을 건지고 당분간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리나가 다른 사람들보다 덜 상처를 받았다고 할 수없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살기 위해 타협했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부모님과 연인에게는 차마 알리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억지로 결혼해야 했고,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을 해야 했으며, 남편인 알리가 원할 때마다 억지로 성관계를 가져야 했으니. 결혼 생활은 또 다른 감옥이었지만 마리나는 집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알리와의 결혼과 개종 덕분에 종신형은 3년형으로 감형되었고, 집행유예 대상이 되어 마리나는 에빈에서 출소하게 되었다. 그리고 알리가 정적들에게 암살되면서 결혼이라는 또 다른 족쇄에서도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받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잊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잊으려고 할수록 상처는 곪아들어갔다. 그런데도 마치 그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도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았던 것은 마리나를 오히려 더 슬프게 했다. 마리나는 망각이 아닌 기억이야말로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깨닫고, 2년 동안 에빈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다. 그 고백이 이 책이다. 마리나가 에빈에 수감되어 있던 2년 동안 마리나를 기다려 주었고, 그 이후 평생을 함께 해 왔던 두번째 남편 안드레는 마리나의 고백을 읽고 그녀의 과거를 이해하고 감싸준다. 과거의 상처를 직면하고 고백한 마리나 자신의 용기와 그 상처를 감싸 안아준 사람의 사랑이 있었기에 진정한 치유는 이루어질 수 있었다.
'테헤란의 죄수'라는 원제에서 여주인공의 이름 마리나로 제목을 바꾼 것, 로맨스 소설 같은 예쁘장한 표지, 그리고 첫사랑, 남편과의 로맨스 때문에 로맨스 소설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로맨스가 이 책의 의미를 희석시키지는 않는다. 첫사랑은 왕정의 독재에 항의 시위를 하다 사살당하고, 두번째 사랑인 남편과는 이슬람 정부의 억압 때문에 헤어져 있어야 했다. 역사의 격랑 때문에 사랑을 잃었고, 새로운 사랑마저 잃을 위기에 놓였지만 마리나는 자신의 사랑을 지켜냈다.
"미국에게 죽음을!" "이스라엘에게 죽음을!" "공산주의자와 이슬람의 모든 적에게 죽음을!" "반혁명분자에게 죽음을!"
벽이면 벽마다 이런 거칠고 자극적인 낙서와 표어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목재로 된 육중한 출입문을 여는데 코끝에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눈이 내리고 나면 순백의 곡선을 이룬 테헤란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법의 도시처럼 보였다. 이슬람 정권은 아름다운 것을 대부분 금지시켰지만 내리는 눈까지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p.20-21.)
이슬람 정부는 아름다운 것들을 금지해도 내리는 눈까지 멈추게 하지 못했듯이, 인간적인 것과 자유를 억압해도 인간적인 것과 자유를 향한 열망은 막지 못했다. 그런 열망은 누구도 가두거나 길들이지 못한다. 이 책은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독재 정치는 늘 존재했지만, 거기에 맞서 살아가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늘 존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슬람 정권은 아름다운 것을 대부분 금지시켰지만 내리는 눈까지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p.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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