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 톨스토이와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인생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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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톨스토이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톨스토이를 무조건 찬양하지만 않고 때로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읽고 나서 되새겨볼 때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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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피카소의 전쟁 -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거장의 반전 메시지
레셀 마틴 지음, 이종인 옮김 / 무우수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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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국립 소피아 왕비 미술관, 마드리드.


저 오래된 비극을 묘사하는 흑백 캔버스 위에서 피카소는 인간의 암울한 운명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그 운명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예고한다우리는 그 운명에 맞서기 위해있는 힘을 다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모두 모아 영원의 아름다움을 창조해야 한다마치 숭고한 작별을 준비하는 심정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초현실주의 시인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는 <게르니카>에 대해 이렇게 썼다. <게르니카>가 그려진 지 8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로서는 시인이 느꼈던 절박함과 비통함을 느끼기 어렵다나치군이 스페인의 게르니카 마을을 공습했고피카소는 그에 분노해 게르니카를 그렸다이 단편적인 사실만으로는 이 그림에 대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이 책 게르니카피카소의 전쟁은 <게르니카한 작품에 집중하면서, <게르니카>가 그려지게 된 이야기와 <게르니카>라는 그림이 겪어온 이야기들을 풀어낸다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시인이 <게르니카>를 통해 느꼈던 비통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게르니카 사건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36년 2스페인 총선에서 인민전선은 승리를 거두고 공화 정부를 세웠다민주적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의 연합 세력인 인민전선은 스페인이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하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세력은 스페인을 인민전선의 손에서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프랑코는 스페인을 차지하기 위해 외세인 독일의 나치 세력과 협력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나치 군은 프랑코의 반군을 도와 스페인의 여러 지역을 인민전선의 공화국 정부에게서 빼앗았고게르니카가 있는 바스크 지역도 반군에게 포위되었다바스크 사람들은 포위되었지만 반군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고프랑코는 그런 바스크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게르니카에 공습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1937년 4월 26프랑코의 사주를 받은 나치 공군은 7천여 명이 사는 산골 마을 게르니카를 폭격했다


폐허가 된 게르니카와 주민들의 시신


  평화로웠던 마을은 불길에 휩싸였고사람들은 폭격이나 나치 공군이 난사하는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시신들이 폭발의 충격으로 지붕으로 날아가거나 벽에 달라붙었다대피소에 숨은 사람들은 숨죽여 이 모든 상황이 지나가길 기다렸고살아남은 사람들은 실종된 가족을 찾아다니며 울부짖었다며칠 되지 않아 피카소가 머물고 있는 파리의 언론들도 이 참혹한 사건을 보도했다그럼에도 프랑코 측은 범인은 자신들이 아니라 인민전선의 공산주의자들이라며 뻔뻔스럽게 발뺌했다마침 얼마 뒤 파리에서 개최되는 세계박람회의 스페인관에 들어갈 벽화를 제작하려 했던 피카소는 그 벽화 속에 게르니카의 비극을 담기로 했다피카소는 인민전선의 공화국을 지지하고 있었고스페인을 파시스트 국가로 만들기 위해 자국 국민의 생명도 가볍게 여기는 프랑코를 증오했다.

 

 <게르니카>에는 잔혹한 나치 군의 모습비행기폭탄폭격을 당하는 집들 대신 황소와 말전구 등 알 수 없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나치와 프랑코의 만행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도참상을 사실적으로 전하지도 않았다며 <게르니카>를 이해하지 못했다지금도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이 작품이 게르니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피카소가 그리려 한 것은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사람들이 겪은 폭력과 고통죽음 그 자체였다특히 투우장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인 황소와 말은 이 그림 속에서 투우장 안에 예정되어 있는 죽음처럼 스페인 내전 안에 예정된 끔찍한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그리고 <게르니카>가 주는 시각적 충격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잔인함으로 인해 죽어가는 존재들의 절망과 고통공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게르니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조차 그림을 볼 때 "자신이 푸줏간의 고기처럼 토막쳐지는 기분이 든다."고 말할 정도였다


  피카소는 <게르니카>로 얻은 수익을 스페인 구호 모금에 내는 등 공화국을 돕기 위해 애썼지만결국 스페인은 1939년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부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공화국 정부에 팔았기 때문에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으로 <게르니카>를 돌려보내는 것을 거부했다프랑코의 독재는 수십 년 동안 이어졌고, 1943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보내진 <게르니카>는 수십 년 동안 스페인에 돌아오지 못했다


당신은 예술가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합니까화가라면 눈만으로음악가라면 귀로시인이라면 마음의 모든 방의 운율로권투선수라면 근육으로만뭐 이런 것들을 가지고 벌어먹는 멍청이라고 생각합니까아닙니다그것은 아닙니다예술가라면 마땅히 정치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그가 속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가슴 아픈 일정열적인 일기쁘고 즐거운 일을 늘 의식하면서 그런 일들의 이미지에 따라 자신을 형성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다른 사람의 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니 그게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져다 준 저 풍성한 생활로부터 초연히 이탈해 구름 위의 존재처럼 노닐 수 있단 말입니까아닙니다그림은 그런 게 아닙니다아파트의 거실을 장식하기 위한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그림은 투쟁의 수단입니다."

 1945년 인터뷰에서 했던 이 말과 같이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통해 불의와 맞섰다피카소는 프랑코보다 2년 앞서 세상을 떠났고프랑코가 197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랑코의 독재 정부는 건재했다그러나 프랑코가 후계자로 지목했던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프랑코의 꼭두각시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프랑코의 뒤를 이어 철권 정치를 계속하려던 프랑코의 심복 블랑코 총리는 바스크 지하 단체 조직원에게 살해당했다드디어 프랑코의 독재 정치가 끝난 것이다그리고 6년 뒤, <게르니카>는 그려진 지 44년만에 처음으로 스페인에 돌아오게 되었다. <게르니카>는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했다하지만 독재 정권보다도 오래 살아 남아 독재 정권의 악행을 지금까지도 증언하고 있다. <게르니카>를 통해 피카소는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이다이것이 예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피카소와 게르니카가 겪어 온 이야기들을 읽으며독자들은 게르니카라는 그림 하나에 얼마나 많은 슬픔과 피눈물이 담겨 있는지 조금이나마 실감하게 될 것이다이 모든 일들을 지켜 본 사람들만큼 깊은 감정과 의미를 느끼지 못하더라도그것은 책 속의 한 스페인 사람의 말처럼 더 좋은 일일 수 있다.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나서 <게르니카>가 거대한 캔버스 위에 물감을 배열해 놓은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으니"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게르니카>를 통해 인간의 잔혹성을 기억하고 이런 일이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고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절대 사라질 것 같지 않는 불의는 언젠가 사라지고무력해 보이는 예술은 언제까지나 살아남아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것도.


P. S. 이 책은 <게르니카>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 제작 과정, 전시 당시의 비평과 대중들의 반응들까지 꼼꼼하게 전달하지만, 아쉽게도 <게르니카> 외의 다른 도판이나 사진 자료는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특히 <게르니카>를 위해 어떤 모습의 습작들을 그렸는지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그 습작들의 도판 하나 없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이었다. 그래서 책에서는 설명되었지만 도판이 실리지 않은 <게르니카>의 습작들의 도판 몇 점을 여기에 함께 올린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를 위한 습작, 1937년 5월 2일.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를 위한 습작, 이 습작 또한 1937년 5월 2일에 그려졌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를 위한 습작, 1937년 5월 8일


도판 출처:  Rachel Wischnitzer, "Picasso's "Guernica", A Matter of Metaphor", Artibus et Historiae, Vol. 6, No. 12 (1985), pp. 153-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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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피카소의 전쟁 -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거장의 반전 메시지
레셀 마틴 지음, 이종인 옮김 / 무우수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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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라는 한 작품에 집중하면서 작품의 탄생 배경, 제작 과정, 우여곡절을 거쳐 피카소의 모국 스페인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촘촘하게 그렸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게르니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를 담고 있는지 이해하게 도니다. 그러나 도판이 <게르니카>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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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펭귄클래식 12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새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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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2012년 영화, 전쟁과 평화 스포일러 있음

  어릴 때부터 '안나 카레니나'라는 제목은 익숙하게 들어왔지만, 그저 불륜 이야기라고 생각돼서 별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푹 빠지면서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전쟁과 평화에서 내가 가장 사랑한 인물인 피에르를 닮은 레빈이라는 인물이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커플인 피에르와 나타샤의 사랑과 결혼생활이 전쟁과 평화에서 아주 간략하게만 묘사된다는 점이 늘 아쉬웠던 나는, 레빈과 키티에게서 피에르와 나타샤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다. 이렇게 애초부터 내 관심은 안나와 브론스키보다는 레빈과 키티에게 있었다.

  역시 나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안나가 남편에게 권태를 느껴가는 과정은 생생하게 묘사되지만, 의외로 브론스키에게 빠지게 된 과정은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브론스키에게 철벽을 치던 안나가 어느 순간 갑자기 브론스키와 밀회를 갖고 있고, 브론스키의 아이를 가졌다는 고백을 하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생기발랄하고 매력적이던 한 여자가 식어가는 사랑 때문에 몰락하는 과정은 섬세하고 생생하게 그려져, 읽는 사람이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의외로 안나에게 공감했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차라리 솔직한 안나보다 더 위선적이면서 안나를 따돌리는 사교계 사람들의 모습에서 내게 쏟아졌던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다시 느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으면 그것을 뒤에서 쑥덕거리고 비웃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신들이 보기에 그 생각이 비정상은 아닌지 검증하려 들었다. 나는 그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사실 그 사람들에게 죄책감이나 부끄러움따위는 가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나는 안나의 사랑에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주는 압박감과 그럼에도 애써 의연해지려 하는 모습에는 충분히 공감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안나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 뒤에 가려진 카레닌의 사랑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2012년 영화 이전의 각색물들에서는 카레닌이 위선적이고 체면만 중시하는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원작을 읽으면서 나는 카레닌이 안나를 마음 깊이 사랑하면서도 자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느꼈다. 그 마음을 표현할 줄은 더더욱 모르는 사람이었고. 경마장에서 브론스키가 사고를 당하자 정신줄 놓고 흐느끼는 안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자신의 몸으로 가려주고, 안나를 브론스키에게 데려가 주겠다고 하는 모습, 불륜남과 아내의 핏줄인 아냐를 자기 딸처럼 예뻐하는 모습에서 카레닌의 사랑을 느꼈다. 

  그럼에도 카레닌은 배우자에게 배신당한 사람이 못난 거라는, 세상 사람들의 이상한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유일하게 자신을 위로해 주던 리디아 백작부인 때문에 카레닌은 광신도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이성적이고 냉철하던 카레닌이 영매에 홀린 사이비 광신자가 된 모습은 나를 슬프게 했다. 그 모습이 작품 속 카레닌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게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게다가 세료자는 아버지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부드럽고 약한 모습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아버지 같은 사람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12년 영화에서 카레닌의 마지막 모습을 세료자, 아냐 남매와 소풍을 나온 모습으로 바꿔준 것이 고마웠다. 적어도 영화 속 카레닌은 세료자와 아냐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었을 것이고, 광신에 빠지는 대신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으며 살아갔을 테니까.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바람둥이 남편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여주인공 테레사는 변함없이 충직한 애완견에게 '카레닌'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테레사도 나처럼 카레닌의 사랑이 마음에 밟혔던 것은 아닌가 싶다. 

  예상외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 카레닌이라면, 예상대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은 레빈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레빈과 피에르는 서로 닮은 점이 많은 캐릭터들이었다. 둘 다 작가인 톨스토이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니까. 하지만 레빈에게서는 피에르에게서 느꼈던 것만큼의 애정과 친밀함을 느끼지는 못한다. 우선 레빈은 남의 말을 죽어라 안 듣는다. 레빈과 형들, 친구들의 대화를 읽어보면 레빈과 반대 입장인 사람들의 의견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런데도 레빈은 끝까지 자기 말이 옳다고 우기기만 한다. 그리고 늘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자기와 띠동갑인 어린 키티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시아주버니를 같이 간호하러 가겠다는데도, 그저 자기와 같이 있고 싶어서 떼를 쓰는 거라도 멋대로 판단해 버린다.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대하다가도 작은 일로 심통이 나면 상대방에게 예의없이 행동한다. 피에르는 레빈처럼 자기 의견만 밀어붙이지 않았었다. 그리고 첫번째 아내 엘렌의 외도나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힘들 때도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배려했다.  톨스토이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들까지 작가 자신의 실제 모습을 피에르보다는 레빈에게 더 많이 반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레빈과 키티 부부의 사랑과 결혼은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전쟁과 평화에서 사랑 이야기는 양념에 불과했지만, 안나 카레니나에서 사랑과 결혼은 중심소재이다. 덕분에 1700여 페이지나 되는 전체 분량 중에서 수십 페이지도 안 되는 피에르-나타샤 부부의 이야기와 달리 키티-레빈 부부의 이야기는 아주 디테일하게 그려진다. 전쟁과 평화에서는 나타샤가 피에르를 다시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사흘 만에 서로 마음을 고백하고, 둘이 결혼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살았다, 라고 짧게 언급만 되고 바로 7년 뒤로 타임워프해 버린다. 반면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키티와 레빈의 고백 장면 이후 레빈이 어떻게 키티의 부모에게서 결혼 승낙을 받았는지, 양가에서 결혼 준비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결혼식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키티가 임신해 있는 동안 레빈과 친정식구들이 어떻게 키티를 돌봤는지, 키티의 출산 과정, 육아는 어땠는지까지 둘의 결혼 과정과 결혼 생활이 아주 디테일하게 나온다. 결혼식 장면을 통해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 결혼식 절차를 하나 하나 상세하게 알 수 있을 정도다. 전쟁과 평화에서 피에르-나타샤의 사랑 이야기가 간략하게 그려진 이유는 잘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디테일하게 쓸 수 있는 양반이 전쟁과 평화에서는 바로 7년 뒤로 타임워프해 버리다니, 하고 배신감까지 들었다.(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전쟁과 평화 속편(이라기보다는 팬픽에 가깝지만)에서는 키티와 레빈 부부의 이야기를 참고해서 그 7년 사이의 피에르와 나타샤의 결혼 과정과 결혼 생활을 채워넣고 있다.)

  레빈과 키티는 말하자면 서브주인공들이지만, 안나와 브론스키와 대비되면서 어떻게 살아가고 사랑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레빈의 농지 경영, 그리고 농지 경영과 러시아 사회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해 레빈이 형들과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는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인물들의 개성이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화가 계몽을 위해 억지로 끼워넣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인물들이 각각 내세우는 의견이 '그 인물이라면 당연히 이런 말을 하겠지'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인물들의 길고 긴 대화 속에 당시 러시아의 사회상과 러시아인들이 고민했던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내게는 레빈과 형들, 친구들의 다양한 사상과 고민들이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보다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레빈과 키티의 결혼 생활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처럼 극적이고 강렬하지는 않지만 강인하고 성장해 가는 사랑을 보여준다. 레빈과 키티는 사랑이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늘 완벽하고 이상적일 수는 없다는 것, 서로에게도 어느 정도의 거리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 그래서 서로에게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했기에 레빈과 키티는 사랑을 지키고 성장할 수 있었다. 반면 안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에 던지고, 브론스키가 자신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토록 매력적이고 완벽해 보이던 안나와 브론스키의 삶과 사랑은 점점 겉껍데기만 남은 공허한 것이 되어버리고, 그들에 비해 서툴고 어설픈 모습이었던 레빈과 키티의 삶과 사랑은 굳건해졌다. 안나가 죽은 뒤에도 레빈은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고 사랑할 것이다. 소설에 나온 것 이후의 삶에서도 여전히 아내와 싸우거나 유혹이나 권태감 때문에 넘어지는 일은 계속 일어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레빈은 다시 일어나 더 선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절망과 증오, 후회만 남긴 안나의 죽음을 보면서 씁쓸해지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레빈의 삶은 강인한 생명력과 희망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은 안나의 죽음이 아닌 레빈의 다짐이다.

실제 톨스토이는 이후 부인과 극심한 불화를 겪으면서 결혼을 완전히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는 안나만큼이나 결혼과 사랑에 절망과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사랑하는 카레닌과, 서로 부딪치고 갈등해도 함께 이겨내는 레빈과 키티 부부의 사랑을 보면서 사랑을 믿는다. 그리고 때로는 실수하고 때로는 비겁해지고 악해질지라도 선하게 살려고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다. 살아가다 보면 나도 톨스토이처럼 변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계속해서 살아가고 사랑할 것이다. 

P. S. 박형규 교수님의 번역본이 많이 추천되지만, 개인적으로는 윤새라 교수님의 번역본의 문장이 더 깔끔하다고 느껴져서 이 번역본으로 읽었다. 박형규 교수님은 러시아 문학 번역의 권위자이지만 80이 넘은 연세이기 때문에, 교수님의 번역문 문장은 지금 세대 사람들의 문장에 비하면 좀 오래된 느낌이 든다.(특히 젊은 캐릭터들 사이의 대화는 젊은 사람들의 말투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문장이 조금 장황하고 늘어지는 느낌도 든다. 새로운 세대에는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해서 러시아 문학은 꼭 박형규 교수님 번역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어법이 정확하고 깔끔하고 정돈된 문장을 썼다고 하니,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의 윤새라 교수님의 번역문으로 읽는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러시아계 미국인 학자들이 쓴 펭귄클래식 영문판의 주석들을 함께 실은 것도 펭귄클래식판의 장점이다.(본문은 영어판 중역이 아니라 러시아어 원문을 번역한 것이다.) 러시아 출신답게 러시아인들의 작명법부터 당시의 사소한 풍습, 시대상까지 꼼꼼하게 주석으로 달아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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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펭귄클래식 12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새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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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가 브론스키에게 빠지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략하게 그려지지만 그녀가 심리적으로 무너져 가는 과정은 무서울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된다. 안나와 브론스키, 카레닌의 관계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레빈과 키티의 성장과 사랑 이야기. 윤새라 교수의 번역이 깔끔하고 주석도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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