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장화, 홍련>의 스포일러 포함
돌이킬 수 없는 일의 진실은 이렇다. 케이든스는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할아버지의 저택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케이든스의 실수로 다른 친구들은 불타는 저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친구들은 2년 전에 이미 죽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더 없이 인자하고 딸들과 손주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유산을 빌미로 딸들과 손주들에게서 사랑과 복종을 강요하고 있었다. 딸들은 겉보기에는 부족함 없어 보이지만, 남편과 이혼하고 나서 아버지의 재산에 의존해 왔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첨하고, 자기 자식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자매나 조카를 헐뜯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다. 오바마를 뽑았다고는 하지만 미국 원주민의 피가 흐르는 갯을 교묘하게 차별해 왔고, 큰손녀 케이든스와 갯이 사랑에 빠진 것을 눈치채고 갯을 협박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이러한 어른들의 거짓과 위선을 눈치채게 된다.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곁에 둘 것인지 다른 지방 대학의 기숙사로 보내버릴 것인지까지 정하려고 들자, 케이든스를 비롯한 '거짓말쟁이'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한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가진 권력의 상징인 저택에 불을 질러, 할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의 위선에 반항한 것이다.
두번째로 읽어보면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복선이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우선, 책 표지의 성냥갑 그림.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8/0520/pimg_7978711981911404.jpg)
성냥갑 자체가 아이들이 저택에 불을 지른 것이라는 진실을 상징한다. 그리고 타지 않은 성냥 세 개는 한쪽에 모여 있고, 다 타 버린 성냥 하나는 따로 떨어져 있다. 실제로는 불에 타 죽은 것은 친구 세 명이지만, 타 버린 재 속에서 다시 일어나 살아가야 하는 것은 케이든스다.
두 번째, 친구들은 자신들이나 케이든스 외에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는다.
친구들은 케이든스를 만나자마자 자신들은 쿠들다운 저택에서만 지낼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핑계를 만들어둔 것이다. 아무리 친구들끼리 그렇게 하자고 정했어도, 엄마나 이모들은 자기 자식이거나 조카인데 할아버지 댁으로 와 보라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 댁에 와서 식사를 하라는 이야기는 케이든스 혼자만 듣는다. 친구들은 케이든스가 아니면 자기들끼리만 시간을 보내고, 친동생들과도 대화 한 마디 하지 않는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세 번째, 친구들은 2년 전과 똑같은 모습이다.
2년 전 친구들은 열다섯 살이었고 지금은 열일곱 살이니 한창 자랄 나이다. 특히 남자아이들은. 그런데 남자아이인 갯도 자라지 않고 케이든스만 자라 둘의 키가 비슷해졌다. 친구들은 죽었으니 자랄 수 없었을 것이다.
네 번째, 케이든스가 사고를 당한 뒤로 2년 동안 친구들은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케이든스가 사고를 당한 뒤 친구들은 한 번도 케이든스를 보러 오지 않았고, 케이든스가 아무리 이메일을 보내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친구들은 죽었으니까. 미렌은 케이든스 앞에서 케이든스가 보낸 이메일들을 모두 읽으며 "미안하다는 소리도 못하겠다"고 말하는데, 미렌의 영혼이 케이든스를 위로하기 위해 한 행동이거나 케이든스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꿈꾼 망상일 것이다. "미안하다는 소리도 못하겠다"는 말은 사실 케이든스가 친구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다섯째, 케이든스를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가 이상하다.
엄마와 이모들은 케이든스를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과잉보호한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케이든스가 진실을 기억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모두가 의심하지만 겉으로 말하지 않는 진실. 케이든스가 불을 질러서 아이들이 죽고 저택이 불탔다는 것. 사촌동생들은 어른들이 입단속을 했기 때문에 사고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못하지만, 케이든스를 이상하게 보거나 케이든스에게 적의를 드러낸다. 할아버지는 케이든스를 보호하기 위해 집이 불탔다는 것을 철저히 숨기지만, 손주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정신이상이 생겨 종종 케이든스를 죽은 손녀 미렌으로 착각한다.
사건의 진상 부분을 읽고 떠오른 것은 영화 <장화, 홍련>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힌트도 <장화, 홍련>의 OST '돌이킬 수 없는 걸음'에서 떠올렸다.
케이든스도, <장화, 홍련>의 주인공 수미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잊어버린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했다는 진실을. 그들 앞에 나타난 이미 죽은 사람들의 정체는 그들의 망상이거나 죽은 사람들의 영혼일 것이다. 아니면 둘 다이거나. 둘 다일 수 있다는 단서는 두 작품 모두에서 나타난다. 죽은 친구들은 케이든스가 기억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 케이든스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준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렌의 영혼은 이승에 있는 것을 감당 못하고 괴로워한다. 수연도 수미가 기억하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동생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오직 수미나 수미의 또 다른 인격인 계모와만 소통한다. 그러나 실제 수연의 원혼이 다른 사람들 앞에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두 작품이 가장 닮은 것은 마지막에 느끼게 되는 감정들이다. <장화, 홍련>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뭔가 잊고 싶은 게 있는데, 도저히 잊지도 못하고 지워지지도 않는 거 있지. 근데 그게 평생 붙어다녀, 유령처럼."
케이든스도 수미도 지독하게 잊고 싶어하는 것이 있고 잠시 동안 잊어버리지만, 의식이 기억 못해도 무의식이 기억하기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다시 기억하고 그 기억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수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케이든스가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 수 있다. 그녀 스스로는 말한다. "나는 견디며 살아간다."
사실 근본적인 책임은 그녀들에게 잊지 않다. 어른들의 욕심과 위선이 그녀들을 비극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 비극은 일어났고 돌이킬 수 없다. 케이든스는 자기가 한 일을 직시하고 계속해서 견디며 살아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더 없이 슬픈 성장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