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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 바꾼다 - 집, 도시, 일자리에 관한 모든 쟁점
박인석 지음 / 마티 / 2017년 6월
평점 :
길을 걸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나라의 어느 도시 어느 길을 걸어도 학교, 관공서, 어린이집은 틀에서 찍어낸 듯 비슷비슷한 모습이다. 그 옆에는 겉보기에도 부실한 건물들이 가득하다. 주차공간은 턱없이 부족해 사람들이 다니는 골목까지 자동차들에게 점령당하고 있다. 우리 건축의 이러한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이『건축이 바꾼다』이다.
저자는 다양한 통계 수치들과 법 조항들, 사례들을 꼼꼼히 분석하며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찾아낸다. 저자가 찾아낸 근본적인 원인은, 잘못된 건축 정책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관행이다. 그는 건축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건축을 건설처럼 취급하는 제도와 행정이 문제라고 말한다. 건설은 다리, 항구, 도로 등 표준적인 성능을 갖춘 인프라를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건축은 건축물의 기능과 거기에서 살고 활동하는 사람들, 주변 장소와의 어울림을 고려해 매번 다른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현행 제도와 행정에서는 건축물이 건설처럼 표준적인 기능만 하면 되는 것처럼 취급하며, 건물의 설계 공모를 할 때도 더 좋은 설계보다는 더 싼 설계를 채택한다. 가장 싼 설계를 채택하고도 법 조항을 교묘히 이용해 설계 대가를 더 깎는다. 게다가 설계자는 현행 제도상으로 설계 의도에 맞게 공사가 진행되는지 감독하는 감리자가 될 수 없어, 설계한 대로 지어져야 한다는 상식마저 지켜지지 않는다. 그리고 별다른 고민 없이 이전에 건물을 만들 때의 관행을 따라 건물을 짓는다. 이렇다 보니 틀에서 찍어낸 듯 비슷비슷한 건물들만 양산되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건축물이 만들어지기 힘들다.
현재 건축 관련 행정, 관행의 문제점들을 뒤집으면 해결책이 보인다. 건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건설과는 다른 기준으로 건축 관련 제도와 행정을 시행하는 것이다. 설계 공모에서 가격이 아닌 능력으로 설계자를 선저하고, 설계에 대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한다. 그리고 설계자가 공사 과정을 감리할 수 있게 해 자신의 의도대로 공사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저자는 건축물에서 살아가는 주민들 개인의 삶과 공공의 삶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 주민들 스스로가 지역 도시 공간 재생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건축의 시대가 지향하는 가치이다.
건축가나 건축 관련 행정을 처리하는 공무원, 행정 관료가 아닌 일반 독자로서는, 표와 도표, 법 조항들로 가득한 이 책이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이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독자가 시민들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 책의 제목을『건축을 바꾼다』가 아닌『건축이 바꾼다』로 지은 것은, 정치 개혁, 경제민주화, 도시 재생, 복지 확대 등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한 과제들 모두를 관통하는 것이 건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건축이 동네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지만, 그 건축을 바꾸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힘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우리가 시민으로서의 힘을 키우면서, 건축을 바꾸고, 건축이 세상을 바꾸게 하는 데 주춧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