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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 - 명왕성 킬러 마이크 브라운의 태양계 초유의 행성 퇴출기
마이크 브라운 지음, 지웅배 옮김 / 롤러코스터 / 2021년 4월
평점 :
* 실화가 스포일러지만 스포일러 포함
아무리 문과라 해도 작년에 과학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건 너무하다 싶었다. 안 그래도 과학 책 한 권은 읽어야겠다 싶었는데, 얼마 전에 재개봉한 <인터스텔라>를 보고 나서 과학 책, 특히 천문학 책이 더 읽고 싶어졌다(크리스토퍼 놀란은 문과도 과학 공부 하고 싶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영화관에서 10분쯤 걸어가면 나오는 도서관으로 가서, 천문학 책들이 모여 있는 서가 앞에 섰다. 너무 어렵지 않고 흥미로운 책 없나. 서가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쭉 훑어보다 제목부터 흥미로운 이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은 명왕성보다 더 큰 천체를 발견하면서, 명왕성이 행성 자리에서 쫓겨나는 데 공헌해 '명왕성 킬러'로 불리게 된 천문학자의 이야기다. 지구의 인간들이 자기를 행성으로 규정하든 말든 명왕성은 저 수십억 킬로미터 밖에서 수십억 년 동안 그래왔듯이 멀쩡하게 공전하고 있으니, '킬러'라는 말이 적절하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명왕성을 태양계의 행성으로 배운 세대고, 어느 날 갑자기 명왕성보다 큰 천체가 발견됐으니 그것도 행성으로 삼겠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야기가 뒤집혔다. 그 천체도 명왕성도 행성의 정의에 맞지 않으니 그 천체를 행성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명왕성도 이제 더 이상 행성이 아니라는 거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각 반의 이름이 행성 이름이었는데, 맨 끝 반인 우리 반은 '명왕성' 반이었다. 그걸 생각하니 좀 아쉽긴 했지만 오래 아쉬워했던 것 같지는 않다. 왜 그렇게 됐는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됐구나, 했고. 제목이 특이한 이 책을 보고 나서야 거의 20년 만에 명왕성 퇴출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됐다.
옮긴이의 말로는 21세기에는 새로운 천체를 찾는 천문학자들이 드물다고 한다. 이전 세기의 선배 천문학자들이 중요한 천체들을 다 찾아놓았고, 자동화된 첨단 컴퓨터와 거대 망원경이 하늘 전체의 방대한 지도를 이미 완성해 놓았다. 그러니 21세기의 천문학자들은 다른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에 집중할 수밖에. 그런 점에서 여전히 새로운 별을 찾는 저자 마이크 브라운은 특이한 천문학자라고 한다. 1930년 명왕성이 발견된 이후로 70년 넘게 새로운 태양계 행성을 찾으려고 시도한 사람이 없었는데, 브라운은 2002년부터 태양계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천체들을 발견해 냈다.
새로운 천체를 발견하기까지 그는 단순 반복에 가까운 관측과 분석 작업을 계속해야 했다. 3일 밤 동안 하늘의 같은 구역을 사진으로 찍고 사진 세 장을 비교해 변한 게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맨눈으로 사진을 확인해야 했던 선배 천문학자들과 달리 컴퓨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려면 본인이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컴퓨터는 작은 얼룩도 새로운 천체로 인식해 버리니 새로운 천체 수만 개가 있다는 결과를 도출해 버린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프로그램을 개선하거나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 책의 초반부는 그러한 기나긴 탐색을 그리고 있어 좀 지루하다. 하지만 그런 성실한 반복이 삶을 만들고 큰 일을 이룬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칼텍에서 교수로 일하는 석학도 지루한 노동은 피할 수 없구나 싶었는데, 천체의 진짜 발견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나면서 이야기는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브라운 팀이 '산타'라는 별명을 붙인 카이퍼 벨트의 천체 하나에 대한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에스파냐의 한 천문학 연구 팀이 그 천체를 발견했다고 발표해 버린 것이다. 브라운은 속이 쓰렸지만 천문학계에서는 먼저 발표한 사람을 발견자로 인정하니, 쓰린 마음을 감추고 에스파냐 연구 팀에게 축하 인사를 보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반전이 일어난다. 에스파냐 연구 팀이 천체를 발견했다고 발표하기 며칠 전에 브라운의 연구 팀이 천체를 발견할 때 사용한 망원경의 데이터에 접속한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때부터 브라운 팀과 에스파냐 팀의 미묘한 신경전이 시작되는데, 그 과정이 꽤 흥미진진해 책 전체 중 이 부분을 가장 빠른 속도로 읽었다. 학자로서의 명예를 놓고 피 말리는 신경전을 벌인 당사자들에게는 '흥미진진하다'는 말이 실례지만.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의 핵심이자 하이라이트는 '그는 어쩌다 명왕성을 행성에서 퇴출했나'이다. 브라운은 자신이 현재 생존해 있는 천문학자 중 유일한 행성 발견자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는데도, 그가 발견한 에리스가 행성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명왕성이 행성으로 남게 하기 위해 국제천문연맹이 온갖 궤변으로 행성의 정의를 수정하고 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과학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대중들이 더 정확하게 천문학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국제천문연맹의 회원이 아닐지라도 목소리를 낸다. 아마도 국제천문연맹은 명왕성을 아끼는 사람들(특히 미국인들, 명왕성만 유일하게 미국인이 발견한 행성이기 때문이다)의 눈치를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과학자로서의 양심이 있었기에 일은 순리대로 흘러가 에리스는 행성이 되지 않고 명왕성은 행성에서 카이퍼벨트의 천체 중 하나로 강등된다. 이 모든 과정은 물로 덮인 행성이나 블랙홀을 만나 구사일생하는 SF 영화 속 상황처럼 박진감 넘치지는 않지만, 천문학자들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고민하고 탐색하고 연구하고 논쟁하는지 엿보게 한다.
대중에게 과학을 널리 전하고 싶어 하는 과학자답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천문학의 원리들은 어렵지 않다. 난해한 수식 하나 없고, 그나마 조금 헷갈리는 부분이 카이퍼 벨트 천체들의 궤도를 그림으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비유를 들어 자신의 연구와 연관된 천문학의 원리가 어떤 것인지 설명해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연구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이야기한다. 그는 학문 연구뿐만 아니라 연구에서 알아낸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에도 열정을 쏟는 학자다.
태양계의 맨 끝에 있는 천체들을 연구하던 시간을 정리하면서 저자는 결혼, 출산, 육아까지 그동안 자신이 겪어온 개인사도 이야기한다. 이 부분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다. 나도 남의 가족사, 특히 남의 집 애 얘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책이 브라운의 자서전이라고 하니 이해는 된다. 아무리 관찰하고 값을 기록하고 분포도를 계산해 봐도 갓 태어난 딸의 수면 패턴은 파악할 수 없었다는 부분에서는, 과학자로서의 그와 아버지로서의 그가 분리되지 않는 것이 재미있었다. 에필로그마저 딸에 대한 사랑으로 마무리하는 그를 보면서 (실제 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꽤 좋은 아버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자로서의 삶과 일상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것이 내게는 나쁘지 않았다. 이게 영미권의 특징인지 서구 전체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문학과 문학을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것이 영미권(또는 서양) 저자들이 쓴 책의 매력이라고 느낀다.
이 책을 읽고 내 천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높아진 것은 아니지만, 우주에 대한 관심은 아주 조금은 커졌다. 그것이 저자가 바란 바가 아니었을까. 명왕성이 행성이든 아니든 명왕성은 오늘도 열심히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 영미권 사람들이 이제 행성 이름의 암기 방법(각 행성의 머리 글자와 같은 머리 글자의 단어들로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을 어떻게 수정할까 고민하지만, 나는 애니메이션 <세일러문>의 캐릭터들 이름으로 태양계 행성의 영어 이름들을 외웠으니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명왕성(pluto)'이 빠졌으니 문장 끝의 'p'를 빼고도 어떻게 말이 되는 문장이 되게 할지 영미권 사람들은 고민하겠지만, <세일러문> 속의 세일러 플루토는 어제와 변함없이 태양계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테니. 나는 여기서 지구를 지키면서 천문학과 다른 과학 분야에 조금씩 더 관심을 가져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