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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사원 ㅣ 풍요의 바다 3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어로 읽을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했던 『새벽의 사원』이 두 달 전 드디어 나왔다. 이 책이 속한 <풍요의 바다> 시리즈는 다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제 세 권을 읽었으니 4분의 3까지는 온 셈이다. 민음사가 언제 마지막 권을 낼지는 모르겠지만 4분의 1만 남았으니 급할 것은 없다.
『새벽의 사원』의 도입부를 읽을 때는 글만으로도 이 책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도입부의 방콕 묘사는 읽는 것만으로 눈부신 햇살과 그 속에서 오색으로 빛나는 사원의 탑들이 눈앞에 있는 듯했고, 온몸을 내리누르는 열기가 느껴졌다. 출장지인 태국에서 기요아키와 이사오의 환생이라고 주장하는 태국 공주 잉 찬을 만난 후, 혼다는 휴가 겸 인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인도 여행을 서사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자세하게 그려서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내게는 도입부의 방콕 묘사와 함께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었다. 콜카타 칼리 가트 사원의 피 냄새를 풍기는 성스러움,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의 혼돈, 그와 대비되는 아잔타 석굴의 더없이 맑은 고요를 나 또한 경험하는 것 같았다.
환생에 대한 고찰도 흥미로웠다. 친구가 두 번이나 환생했다고 믿는 혼다가 환생의 원리와 법칙을 알고 싶어 불교 교리를 더 자세하게 공부하게 되는데, 혼다가 찾아본 불교 교리 부분은 소설이라기보다 비문학에 가깝다. 불교 교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기는 했지만, 세상의 존재들은 자아나 주체가 아니라 '아뢰야식'이라는 의식을 통해서만 삶을 살아가고 세상을 체험하고 환생을 거듭한다는 대승불교의 유식론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신과 나라는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기독교 교리에 익숙한 나로서는 주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낯설고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톨스토이의 소설들을 읽을 때처럼 새로운 사상을 소설로 접하는 것도 나름대로 유익한 경험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전편인 『달리는 말』과 같은 지점과 다른 지점에서 마음을 불편했다. 하나는 미시마와 혼다가 매혹되는 순수한 이상, 순수한 일본에는 그 때문에 희생되는 사람들, 약자들에 대한 연민도 반성도 한 점 없다는 것. 혼다는 진주만 공습이 자기처럼 젊음을 지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눈부신 행위'라고 생각하고, 전쟁이 끝난 직후 군인병원 뜰에서 어슬렁거리는 미군 부상병들을 보면서, 게이샤들은 그들이 입은 부상이 죗값을 치른 것이라고 수군거린다. 모든 일본 문학 작품이 일본의 과오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혼다나 그의 머릿속 생각을 쓰는 미시마나 순수한 일본성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을 인식하고 분명히 그것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에 매혹되고 미시마는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그토록 많은 사색과 상념 속에 일본의 전쟁으로 피와 땀을 흘린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고, 인물들의 대화에서 '공산당과 함께 일본을 뒤엎으려는 위험한 자들'로 조선인이 두세 번 언급된다. 순수한 이상, 순수한 일본성이라는 허상을 향해 달려가면서 자신이 무엇을 짓밟는지는 의식도 못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혼다의 관음증이다. 앞의 두 책에서 건실하고 성실하고 이성적인 인간으로 묘사되던 혼다는 『새벽의 사원』에서 추악한 이면을 드러낸다. 사실 그는 공원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을 한밤중에 몰래 엿보는 습관이 있었고, 경찰 단속이 심해진 뒤에야 공원에서의 관음 행위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자기 별장의 손님 방에 구멍을 뚫어놓고 손님들을 훔쳐보는 짓은 은밀히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 열아홉 살로 성장한 잉 찬을 만나면서 그의 관음증적 욕망은 폭발한다. 혼다에게 잉 찬은 영원히 닿을 수 없어서 영원히 갈망하는 대상, 그래서 자신이 진정 살아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매개체다. 그러면서 자신의 온갖 환상을 그녀에게 투영한다. 후반부의 대부분은 혼다의 관음증적 욕망을 묘사하는 데 할애된다.
그러나 그런 그의 욕망이 어리석고 추악하다는 것을 작가는 직접 언급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보여주면서 찬물을 끼얹는다. 사실 작품 속에서 묘사된 상황만 보더라도 잉 찬은 혼다에게 관심이 없고, 혼다가 접근해 오는 것을 혐오하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 게이코는 혼다의 잉 찬을 향한 욕망을 채워주는 데 협조하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이제 그만두는 것이 좋다고 혼다에게 분명히 이야기한다. 그런데도 혼다는 욕망에 눈이 멀어 자기 발에 키스를 하면 잉 찬을 만나도록 도와주겠다는 게이코의 요구까지 들어준다. 그것이 게이코의 조롱이라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한 채. 그는 게이코가 연 파티에서 잉 찬의 젊음과 대비되는 노부인들의 노쇠한 모습에 혐오감을 느끼지만, 그 뒤에서 작가는 아내 리에의 시선으로 젊은이처럼 입은 그가 얼마나 볼품없고 우스꽝스러운지 그려낸다. 파시즘에서는 그저 도취되기만 했던 작가가 그래도 관음증에 있어서는 제동 장치를 걸어놓은 셈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 감정과 생각을 뚜렷이 드러내고 그에 따라 살아가고 죽었던 기요아키와 이사오와 달리, 잉 찬은 그저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일 뿐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잉 찬과 게이코의 동성애는 잉 찬을 향한 혼다의 환상과 욕망을 산산조각 내지만, 그들의 동성애 성관계 묘사를 비롯한 에로티시즘은 잉 찬이 그저 욕망되는 몸이라는 것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 잉 찬의 관능적인 육체는 집요할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하지만 그녀의 내면, 그녀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그래서 잉 찬의 시점에서 『새벽의 사원』을 다시 쓰는 것도 해볼 만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온갖 심오한 이론을 갖다 붙여도, 온갖 미사여구와 아름다운 환상을 씌워놔도 혼다가 미성년자에게 관음증적 욕망을 품는 인간이란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마지막 한 권 『천인오쇠』가 남았다. 그저 욕망의 대상이었던 잉 찬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까. 이 책에서는 어떤 이야기와 어떤 이론들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 책을 통해 미시마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이 마지막 책을 읽어보면 시리즈 전체에서 미시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 S. 번역본의 문장은 『달리는 말』보다 훨씬 정돈된 것 같다. 관계사로 죽죽 이어지는 영어 문장 같은 문장들은 보이지만(『봄눈』의 번역자들이 원문이 영어 번역체가 심한 편이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문장 성분들이 뒤엉킨 비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번역자가 이 시리즈에 적응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