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바비즌 - 여성의 독립와 야망, 연대와 해방의 불꽃이 되다
폴리나 브렌 지음, 홍한별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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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중산층 백인 여성에게 치중해 있지만 그것은 호텔 바비즌 자체의 한계이고, 저자는 젊지 않거나 가난하거나 백인이 아닌 투숙객들의 삶과 역사 또한 짚고 넘어간다. 연대와 해방뿐만 아니라 경쟁하고 질투하고 결혼이라는 굴레에 다시 묶여버린 모습들까지 당시 여성들의 삶을 촘촘하게 복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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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영원의 시계방 초월 2
김희선 지음 / 허블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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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극작가 로드 설링은 “SF(Science Fiction)는 믿기 힘들지만 가능한 것을 그리며, 사이언스 판타지(Science Fantasy)는 믿기 힘들면서 불가능한 것을 그린다”고 정의했다. 그런 점에서 김희선의 SF 단편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사이언스 픽션보다는 사이언스 판타지에 가깝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미래에는 저런 일도 일어날 수 있겠지’라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불가능하면서도 믿기 힘든,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본문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고 답답하고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견고하기 때문에 우리가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견고하게만 보였던 현실에 난 균열을 발견한다. 그 균열을 추적하다 보면 발밑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현실 자체가 뒤집힌다. 비로소 알게 된 진실은 모르는 게 더 나았겠다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경악스럽다. 내가 단편 속 주인공들이라면 내가 잘못 본 거라고 무시해 버리거나 잊어버리고 현상 유지만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느 게 진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호기심에 손을 뻗어볼 것이다. 이런 공포와 매혹이 책 전반을 지배한다. 가가린이나 월명사처럼 유명한 실존 인물, 독재 정권 시절을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 같은 현실적인 요소들은, 이 기묘한 이야기들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뭐 어차피 다 지어낸 이야기인데’ 하고 안전한 현실로 돌아오려는 독자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러니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진실이 드러날지 두려우면서도 궁금해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소설을 읽게 된다. 그런데 책 속 단편들 중 대부분이 뭔가 더 일어날 것 같은 데서 끝난다. 누군가 ‘쌀 한 바가지를 쏟았는데 다 냉장고 밑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고 이 책을 평했는데, 그 표현이 딱 맞는다고 느꼈다. 진실의 전모를 밝히지 않아 더 많은 상상과 공포, 신비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뒤로 이야기를 더 풀어갔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장편으로 발전시키면 좋지 않을까 싶은 단편들도 있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롭게 전개되지만, 정작 발단 부분에서 멈춘 느낌이라 호불호는 갈릴 것 같다.


  이런 아쉬움 때문인지 각 단편들을 연결해 보게 된다. 각기 다른 곳에 실렸던 단편들을 다시 모은 단편집이라, 각 단편들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가 믿고 있는 것만큼이나 확고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작가의 태도는 모든 단편을 관통한다. 그런 데다 같은 등장인물(로 보이는 인물)이 화자로 등장하거나 소재가 겹치거나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는 단편들이 있으니, 책 속 단편들 모두가 작가가 만든 거대한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예 연작으로 만들거나 연결 고리를 조금만 더 넣었어도 흥미롭지 않았을까 한다. 몇몇 단편들의 공통된 화자인 ‘민간조사관(외국에서는 사립 탐정이라고 한다)’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작가가 그렇게 못다 푼 이야기를 마저 풀어주지 않는다 해도, 각 단편에서 미처 다 풀리지 않은 이야기들은 ‘공간 서점’ 밑바닥에 숨은 진실처럼 책 속 어딘가에 숨어 자기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P. S. 1. 「꿈의 귀환」에서 가가린과 몰로디노프가 서로의 이름에 부칭을 붙여서 부르는데, 러시아인들의 언어 습관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러시아인의 이름과 성 사이에는 누구의 아들/딸임을 나타내는 호칭인 ‘부칭(父稱)’이 붙는데, 아버지의 이름이 ‘알렉산드르’인 남자는 ‘알렉산드로비치’, 여자는 ‘알렉산드로브나’, 아버지의 이름이 ‘니콜라이’인 남자는 ‘니콜라예비치’, 여자는 ‘니콜라예브나’인 식이다. 서로 예의를 차려야 하는 사이인 사람이나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의 이름에 부칭을 붙여 상대방을 부른다(예: 유리 알렉세예비치, 소피아 세묘노브나). 가가린과 몰로디노프는 피실험자와 실험자로서 공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처럼 부칭을 붙여서 상대방을 부르는 것이 맞다. 예전에 한 미국 작가의 단편에서 소련 정보요원이 상관을 부를 때 부칭을 붙이지 않는 것을 보고 몰입이 깨졌으니, 이런 디테일을 신경 쓰는 편이 좋다.

그런데 「오리진」에서 『고백록』의 저자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라고 하는데, 『고백록』의 저자는 고대 로마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다. 저자가 혼동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명백히 틀린 정보를 적은 것인지 모르겠다.


P. S. 2. 뒤표지에 실린 각 단편의 한 줄 소개에 스포일러가 있다. 뒤표지는 본문을 읽은 다음에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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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영원의 시계방 초월 2
김희선 지음 / 허블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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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장은 깔끔하고, 대화는 문어체 느낌이 살짝 나지만 어색한 정도는 아니다. 묘사는 너무 빈약하지도 장황하지도 않고 상황과 감정과 분위기를 전달하기에 적절한 분량이다. 그 이후로도 더 많은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은 결말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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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여행 - 들뢰즈 철학으로 읽는 헬레니즘
김숙경 지음 / 그린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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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할 때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영국 화가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철학 이론을 접목해 과제를 작성했었다. 내 과제 발표를 보고 나서 교수님은 ‘너 이거 이해 못 했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교수님 말씀대로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짜깁기했을 뿐이었고, 결국 주제를 바꿔서 과제를 다시 작성해야 했다. 그 이후로는 들뢰즈라면 겁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들뢰즈의 이론으로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을 바라본다고 한다. 그래도 미술사는 내 전공이고 고대 문명도 내가 좋아하는 분야니, 그 둘을 당의정으로 삼는다면 들뢰즈라는 쓴 약도 소화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1부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로와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유입된 그리스 신들의 변신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1부의 내용을 들뢰즈 철학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다고 했다. 그럼 적어도 1부는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랬으니, 한 문단, 한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그래, 이건 이해했어’라고 마음속으로 확인한 뒤 다음 문단,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다행히 1부의 내용은 무난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려는 본론은 2부지만 사실 1부가 이 책의 3분의 2를 차지하니, 3분의 2는 일단 확보했다. 1부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을 시작할 때부터 한중일 3국에 불교가 전해질 때까지, 그리스 신들이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 둘에 영향을 받은 유라시아 각 나라의 미술 속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정리한 것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처럼 당시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설명하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스 신들의 원형과 헬레니즘, 실크로드, 유라시아 각 지역에서 변형된 모습을 나란히 배치했다(도판의 화질이 떨어지고 도판 설명도 글씨가 너무 작은 것은 아쉽지만). 그런 데다 그리스의 어떤 신은 부처를 호위하는 부하로 전락했고, 어떤 신은 날개가 있어 천산산맥 너머 동쪽으로 멀리 날아갔다는 식으로 의인화하니 설명하는 내용이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사실 중요한 건 2부인데 들뢰즈 이야기는 2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1부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 읽었다. 저자가 말하는 들뢰즈 철학의 개념과 용어 들은 낯설었다. 하지만 저자가 유목 민족과 정주 민족, 그리스 신들과 그들이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 유라시아 각 지역의 미술 속에서 변화한 모습을 예시로 들고, 비유를 들면서 반복해서 설명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찬찬히 읽어보니, 저자가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 속에서 변화해 간 그리스 신들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바는 단순하고 명쾌했다. 들뢰즈는 모든 존재를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것을 생성해 내는 존재로 보았다는 것. 그리스 신화의 신들도 불교라는 거대한 중심 뿌리의 위계질서에 붙잡혀서든, 타림 분지 내로 흘러들어 온 다양한 문화와 자유롭게 접속해서든, 겉모습도 본질도 부단히 변화했다는 것. 그러니 문화 또한 한 가지 원형으로 굳어버린 유산이 아니라 무한히 변화해 가는 생명이라는 것. 이렇게 2부도 무사히 내 나름대로 소화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들뢰즈의 개념들은 들뢰즈의 철학 이론 중 일부지만, 그래도 이 책 덕분에 그 일부는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헬레니즘 문명과 실크로드 문명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었지만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과 용어로 다시 보니 신선하게 느껴졌고. 들뢰즈 철학 쪽으로나 문명사, 미술사 쪽으로나 아주 깊이 들어가진 않지만, 에로스의 날개나 보레아스의 바람을 타고 그리스로부터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여행한 기분이다. 찬찬히 읽으며 책 전체를 소화하고 나니 그 여행을 무사히 마친 것 같아 안도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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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여행 - 들뢰즈 철학으로 읽는 헬레니즘
김숙경 지음 / 그린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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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의 틀이 들뢰즈의 이론이라고 해서 미리 겁을 먹었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와 헬레니즘 미술, 실크로드 미술을 예시로 들면서 반복해서 설명해 주니 이해하기 쉽다. 도판 화질이 떨어지고 도판 설명의 글씨가 너무 작은 것이 아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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