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 을유사상고전
이세동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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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지식인의 필독서라는 사서삼경을 다 읽고 싶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해왔다. 그중에서 『시경』은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민요들을 모아놓은 책이라 진입 장벽이 제일 낮았다. 『시경』은 어렵지 않게 읽었는데 나머지 책은 읽을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자금성의 물건들』을 읽으면서 『서경』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공자는 구전되어 오던 요순시대와 하나라, 상나라의 역사, 주나라 사관들의 기록들을 모아 요순시대부터 주나라까지의 역사를 정리했는데, 그 책이 『서경』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하면서 『서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들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유가 사상을 국시로 삼은 한나라가 들어서자, 유교 경전 복원이 추진되었다. 한 문제 때(재위 기원전 180년~기원전 157년)『서경』을 복원하려고 한나라 조정은 진나라 관리였던 복생을 불렀다. 그는 분서갱유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서경』의 일부를 집 안에 숨겨놓았고, 『서경』 전체를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문제가 불렀을 당시 복생은 이미 90세가 넘은 데다 방언이 심해 그의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딸뿐이었기에, 한나라 관리 조착은 복생의 딸과 함께 복생이 암송하는 『서경』을 받아 적어 복원해 냈다고 한다. 『자금성의 물건들』의 저자 주용은 복생이 평생 동안 숨 죽여 살면서 『서경』을 지켜내고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온 힘을 쏟아서 딸과 조착과 『서경』을 복원해 가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진실이라면 그들이 지켜낸 역사를 2천 년도 넘은 미래를 살고 있는 내가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래서 나는 『서경』을 읽게 되었다.

내가 읽은 『서경』은 중문학자 이세동 교수가 번역한 2020년 을유문화사판이다. 자비 출판으로 2024년에 번역 출간된 판본을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나온 한국어 번역판이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고 절충해 최대한 이해하기 쉽고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도록 번역한 것이 보인다. 각 편의 앞에는 해설이 있고 본문에도 각주를 풍부하게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번역의 원전이 된 것은 당나라의 유학자 공영달이 편찬한 『상서전의』로, 복생이 복원한 28편을 토대로 한 『금문상서』와 동진 때 매색이 찾아냈다고 하는 58편 중 『금문상서』와 일치하는 부분과 새롭게 찾아낸 부분을 합치고 정리한 것이다. 문제는 매색이 찾아낸 부분 중 『금문상서』에 없던 부분은 후대의 위작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금문상서』도 현대 학자들은 그 시대 당시에 쓰인 것이 아니라 전국 시대에 정리한 고대사 자료로 보고 있다. 『서경』에서 다루고 있는 시대 중 고고학적으로 그 존재가 입증된 것은 상나라와 주나라밖에 없다. 하지만 전국 시대에 쓰였다 해도 그때까지 남아 있던 사료와 전해 오던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고, 위작으로 밝혀진 부분들도 동진 시대에 발견되었으니 동진이 존속하던 시기(317년~420년)를 생각하면 적어도 1600년은 된 것이고, 당시 중국의 역사관과 정치관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문헌이나 유물로 입증된 정확한 역사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대 중국의 정치, 사회 체계와 정치 이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의 왕과 신료들에게는 이 책은 바른 정치를 위한 교과서였다. 과거 시험에서 『서경』은 시험 범위에 들었고, 왕과 신하의 강론 시간인 경연에서도 『서경』은 기본 교재였다. 하지만 현대인이고 정치인도 아닌 나는 그들처럼 『서경』으로 시험을 볼 필요도 없고 그것을 현실 정치에 적용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한결 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내가 보기에도 이 책 전체에서 반복하는 도덕 정치는 현실 정치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다. 선한 이는 복을 받고 악한 이는 벌을 받는다고 이 책은 끊임없이 말하지만,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리다 편안히 죽은 악인들은 바로 최근 우리 정치판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태해지지 말고 늘 근면할 것,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사나 다른 일을 처리하지 말 것, 책임은 아랫사람들이 아닌 자신이 질 것. 이런 원칙들은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당시에도 이런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군주나 지방관들은 있었고, 이런 도덕 정치를 외치던 위정자들도 정쟁과 음모, 반란에 시달렸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적이나 반란 세력에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는 등 나름대로 정치적 술수도 써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도덕 정치의 원칙을 이상으로 내세운 것은, 그러한 이상이 세워져 있어야 현실이 그 이상이 세운 목표치의 몇 분의 1이라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담은 역사서라고 하기는 어렵지만(애초에 요순시대는 역사보다는 고대 설화의 영역이고 하나라도 고고학적으로 존재가 입증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1600년 전까지 형성된 고대 중국의 정치관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행정 체계와 사법 체계도. 그 모든 것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 행정, 사법 체계에 영향을 미쳤다. 정교가 분리되고 점술은 비과학적인 것이 된 현대인이 보기에는 제사가 중요한 정치 행사이고 점술이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점술만으로 결정하지는 않았고 군주 자신과 신하들, 백성들의 의견을 모두 반영했다는 데서 과거의 제정일치 사회에서는 좀 더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라 때 왕들이 어디에서 어디로 물길을 냈다는 부분이 지명만 바뀌면서 반복될 때는, 성경에서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가 무한 반복되는 부분을 읽는 듯했다(이 부분이 이 책을 읽을 때의 고비였다). 사실 등장인물들이 신하나 백성이나 후손에게 남기는 권고도 비슷비슷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번역자가 각 장 앞의 해설과 각주로 보충 설명해 주거나, 본문에서 엿보이는 당시의 사회상이 흥미로워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현대인인 내게는 이 책이 정치 교과서라기보다는 고대 중국의 면면을 축소해서 모아놓은 상자 같았다. 2천 년 전 중국의 이야기가 현대 한국인인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2천 년 전 고대 중국인들이 현실 속에서 고민하고 분투해 온 원칙과 체계가 우리 조상들이 나라를 세우고 이끄는 데도 영향을 주었고, 우리의 역사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왔다. 나는 그 이야기들이 만든 결과물이다. 솔직히 읽으면서 지루하고 단조롭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출판 시장에서 5년만 지나도 절판되는 책들이 넘쳐나는 지금까지도 2천 년을 살아남은 이유와 의미는 분명히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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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을유사상고전
이세동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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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왕과 신료들은 이 책을 바른 정치를 위한 교과서로 삼았는데, 위정자의 자세에 있어서는 현대인들도 참고할 만하다. 고대인들이 어떻게 나라와 행정, 사법 체계를 세우고 그것을 운영해 갔는지, 정쟁과 반란은 어떻게 처리하고 백성들은 어떻게 다스려 왔는지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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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미각 - 돼지국밥부터 꼼장어까지, 살아 있는 의리의 맛
고운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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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큰집이 있었던 곳이지만 우리 집에서 워낙 먼 곳이라 거의 가지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와 친가 쪽 친척들이 경상도 사람들이고 친구, 지인, 선후배 중에도 경상도 출신이 많은데 부산은 경상권을 대표하는 도시니 속으로 친밀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9년부터 매해 부산국제영화제에 가게 되면서, 부산은 내게 좀 더 친숙한 공간이 되었다. 그해부터 여섯 번 부산에 가면서 찐 로컬 맛집은 아니지만 프랜차이즈에서 돼지국밥과 밀면을 먹고, 자갈치시장에서 지인들과 꼼장어구이를 먹었다. 그중 돼지국밥은 평소에도 종종 먹는다. 그래서 부산 음식을 다룬 『부산미각』이 출간된다고 했을 때 반가웠다. 『부산미각』과 같은 시리즈의 전작인 『중화미각』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기대감이 더했다.

우선 전작처럼 다루고 있는 지역색을 살린 표지가 독자를 반긴다. 표지의 옅은 푸른색 바탕색은 바다를 연상시키고, 부산을 상징하는 바다와 등대, 갈매기, 부산국제영화제를 연상시키는 필름과 슬레이트,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들이 그 위에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뒤표지를 메뉴판 모양으로 만들어 거기에 본문에서 소개되는 음식들을 적어놓은 것은 전작 『중화미각』과 같다. 전작처럼 단일한 배경색 위에 단순한 형태의 오브제들을 놓고 뒤표지에는 메뉴판을 실어 시리즈의 통일성을 만들면서도 부산만의 특징이 드러나게 디자인했다.

본문에는 열아홉 가지의 부산 음식과 부록 속 다섯 가지의 조미료가 소개되어 있다. 『중화미각』이 화려하고 다채롭다면 『부산미각』은 좀 더 담백하고 소박하다. 『중화미각』에서는 우리에게 다소 낯선 중국 음식들도 소개되고 그 음식들과 관련된 낯선 역사와 문화도 만날 수 있다. 반면 『부산미각』에는 우리도 몰랐던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곳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와 관련된 역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재일교포의 생존을 위한 분투가 담긴 낙곱새부터 6.25 전쟁 당시 피란민의 애환이 담긴 밀면까지, 한국인이라면 직접 겪지 않았어도 익히 알고 있고 그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역사를 담고 있다.

저자들이 대부분 부산에서 나고 자라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부산에서 살며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책에서는 부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서가 진하게 풍긴다. 중국이 연구의 대상인 반면 부산은 삶의 터전이니, 『중화미각』이 중국의 역사, 문학, 문화 등 인문학적인 지식이 차지하는 분량이 많은 반면, 『부산미각』은 부산 음식과 부산이라는 땅 자체에 대한 애정이 묻어 나오는 서정적인 부분이 많다. 비문학이라기보다 한 편의 에세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새벽 골목에서는 아낙네들이 재첩국을 한 동이씩 이고 아침을 아직 안 먹은 동네 사람들에게 팔고 다니고, 낙동강가 갈대숲에서는 사람들이 은백색 웅어를 잡는다. 이런 수십 년 전 부산의 풍경, 내가 겪어보지도 못한 그 시간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동래파전을 다룬 꼭지는 6페이지밖에 안 되고(그것도 사진들이 섞여 있고 마지막 페이지는 두 줄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꼭지들도 10페이지 안팎이니 생각보다 각 음식을 깊이 다루지 않는다. 좀 더 풍성한 지식과 읽을거리를 기대하면 아쉬울 수 있을 것이다. 부산 음식에 대한 지식도 조금 쌓고 경험하든 경험하지 못했든 부산 음식에 담긴 부산의 역사, 그 속의 희로애락을 살펴볼 수 있으니, 부산을 좀 더 생생하게 느끼고 싶다면 읽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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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미각 - 돼지국밥부터 꼼장어까지, 살아 있는 의리의 맛
고운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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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각 음식을 깊이 있게 다루지 않는 것은 아쉽지만, 부산 향토 음식들의 역사와 그에 얽힌 추억을 짚어보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미각 시리즈가 앞으로 더 이어져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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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 런던에서 아테네까지, 셰익스피어의 450년 자취를 찾아 클래식 클라우드 1
황광수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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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아하는 교양 인문서 시리즈로는 『난생처음 한번』, 일명 '난처한' 시리즈,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 그리고 이 책이 포함된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가 있다. 앞의 두 시리즈는 최근 나온 편까지 거의 다 읽었지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관심이 있는 인물 편만 골라 읽었다. 문득 이 시리즈도 전부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안 읽은 편들을 하나씩 읽어보기로 했다. 이 책은 1권이지만 내가 읽지 않은 책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햄릿』과  『맥베스』뿐이지만 셰익스피어에 대해 좀 더 알면 유익하면 유익하지 무익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으로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완전 정복'을 시작했다.


  읽기 전에 우려했던 것은 저자가 고령이고 영문학 전공자도 셰익스피어 연구자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목차만 봐도 굉장히 많은 곳을 여행하는데 체력이 부치지는 않았을까. 정치적 올바름에 있어 덜 민감하지 않을까. 저자 소개를 보면 영문학이나 셰익스피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력들만 보이는데 믿고 있을 수 있을까. 시리즈 안의 각 책들마다 편차는 있고 다소 아쉬운 편도 있었지만, 그래도 기본은 하는 시리즈니 일단 믿고 보기로 했다.


  이 세 가지 걱정은 기우였다. 이 책을 위해 셰익스피어 기행을 시작한 2014년에도 저자는 이미 70대였지만 책에서는 여정 때문에 지친 기색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여성 혐오와 성차별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여주인공 카테리나의 설교는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투철한 옹호이고, '길들이기'라는 관점 자체가 틀려먹었다고 단호히 말한다(이 작품의 문제점을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줬으면 했지만). 그 밖의 작품들에서 셰익스피어가 소수자들, 소외된 사람들을 어떻게 그렸는지도 이야기한다. 본인이 셰익스피어 연구자는 아니지만 셰익스피어 연구자들의 견해와 자신의 견해를 함께 말하면서, 독자들이 각 견해를 비교해 보고 자신 스스로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저자 자신도 셰익스피어 작품의 서사 구조와 등장인물의 성격과 심리, 대사의 탁월한 표현(그리고 원어로는 어떻게 이 표현이 중의적이거나 언어 유희를 하는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하나하나 짚어낸다. 논리의 비약이 없으면서 현학적이지도 않다. 수십 편의 작품을 다루고 있기에 한 작품을 아주 깊이 파고들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작품들의 해설을 모아 셰익스피어 입문서로 읽기 좋다. 해설의 특성상 각 작품의 스포일러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기행문으로서도 읽기 좋은 책이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각 편에 따라 기행과 인물 탐구의 비중이 달라지고, 기행문과 설명문의 질도 편차가 있다. 이 책은 둘 다 고르게 좋다. 1부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흔적을 찾아 그의 고향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과 그가 주로 활동한 런던, 『심벌린』 속 고대 로마 제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배스를 여행하고, 2부와 3부에서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배경이 되거나 셰익스피어를 언급한 외국 작가들과 관련된 곳을 여행한다. 1부에서는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과 런던, 배스 이 세 곳만 여행하지만, 2부와 3부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배경이 된 유럽 각 나라의 십여 곳을 다소 숨 가쁘게 이동한다. 사실 2부와 3부에서 저자가 여행한 곳은 모두 셰익스피어 본인은 살아생전 발 한 번 들여놓지 못한 곳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의 풍경과 사람들을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게 살려냈다. 2부와 3부에서는 거의 한 꼭지당 한 곳씩 여행할 정도로 일정이 빽빽한데도 저자는 여행자의 서정을 잃지 않는다. 짧은 여행에서도 그 장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과 감정을 만끽하면서 자신이 본 풍경을 스케치하듯 묘사한다. 이런 기행문이 생각보다 밀도 있는 설명에 지친 독자에게 휴식이 되어준다.


  왜 영문학 전공자나 셰익스피어 연구자에게 이 책을 맡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씻어낼 정도로 저자는 여행과 인물 탐구의 균형을 잘 잡으면서 셰익스피어 입문서로 좋은 책을 써냈다.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고 딱 적당한 크기의 판형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여행 사진들, 가독성이 좋으면서도 감각적인 편집 디자인에서도 이 시리즈가 여러모로 공들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은 처음 시작하는 시리즈에 대한 의문과 우려를 씻어내 준 시리즈의 산뜻한 시작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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