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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내가 기억하는 풀밭 위의 식사는.... 오붓한 가족 나들이에 딱 알맞은 따뜻한 날씨와 산들거리며 불어오는 바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커다란 나무 아래 보송보송한 잔디 위 자리를 잡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식사를 해야 할 그 때... 갑자기 돗자리 위로 송충이 한 마리가 떨어지고 아이와 내가 꺄악~ 소리지른 후 돌아보니 온통 풀밭 위가 송충이로 가득했던... 조금은 끔찍하고 코믹스럽기도 했던... 어느 오후의 추억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풀밭 위의 식사"라고 하면 로맨틱하고 느긋한, 여유로움과 낭만이 함께하는 분위기일텐데, 그렇게 기대하는 것이 커질수록 배신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기현과 누경의 조금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이야기가, 나이 든 사람들의 사랑을 잘 말해주는 것 같아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면... 조금씩 무언가 비밀을 안고 있는 누경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해해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는데, 그 이유는 어디까지나 누경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주인공에게는 조금씩의 애정을 갖게 되지 않나? 하지만 왜 누경의 비밀을 알게 되어도, 어쩌면 그 비밀로 인해 누경의 행동이 이해된다고 해도 "누경"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인지...
누경은 처음에는 세상 모든 이치를 깨닫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가, 중간에는 난 아무것도 몰라요~ 자세를 취하곤 해서 나를 당황스럽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기현"과의 만남 자체가 쌍방향 소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비쳐졌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나는 이 남자가 더 마음에 들지만서도...ㅋ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이 내게 불편했던 이유는, 사실 "바람"에 있다. 어떤 경우가 있어도... 나는 "바람"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가씨 입장에서는 "사랑"이 될지라도 언제나 내겐 "불륜"이고, "바람"이다. 서강주와 누경이 어떤 사랑을 했건, 누경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 서강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건간에 서강주의 아내가 겪었을 고통만이 내게 전해졌을 뿐이다. 그러니 주인공 누경에게 전혀 감정 몰입을 못할 수밖에...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나자 어쩌면 이것에 대한 문제는 구조상의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누경의 트라우마가 먼저, 그리고 서강주와의 만남, 그 후 현재의 이야기가 있었다면... 조금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깨어지지 않는 게 사랑이야. 어떤 균열이든 두 팔로 끌어안고 지속하는 그것이, 사랑의 일이야."..227p
사랑의 반짝임은 아주 짧다. 진정한 사랑이 지속되려면 그나 그녀와 함께 한 세월이, 추억이, 매일매일의 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의 죽고 못사는 감정이 아닌, 그 이후의 삶을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
" '세 노르말'. 이 표현은 극복하거나 피하기 어렵다는 점에 역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안고 일상적인 상황으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쓰인다고 했다. "...237p
"세상도, 삶도, 우리 마음도,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심연의 외줄 위에서 안간힘을 다해 현재를 제어하려는 아둔하고 흐릿하고 가냘픈 의식의 줄타기뿐이야."...243p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말을 기현을 통해서 전하다니... 정말... 너무했다. 아무리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해도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백만분의 하나의 기회가 있다면... 그 기회를 기다렸다 잡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간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