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 8.15에서 5.18까지
박태균 지음 / 창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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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새로운 관계 설정의 필요성에 관해.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흔히들 혈맹이라는 단어로 묘사된다. 혈맹. 피로써 우애를 맺은 관계를 뜻한다. 그러나 이 혈맹이라는 말은 사실이기도 하면서 신화이기도 하다. 과거에 우리가 같이 피를 흘린것은 사실이지만, 양국의 병사가 피를 흘린 목적이 동일하다고 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혈맹이라는 개념자체가 형이상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은 상황을 정리하고 명료하게 보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이 변하는데 과거에 형성된 개념으로 오늘날의 바뀐 현실을 바라보는 것은 개념이 현실인식을 방해하는 장애물의 역활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역사를 되돌아 볼때 혈맹이라는 말이 그렇게 타당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혈맹이란는 용어를 사용하는가를 주의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양국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이익을 보려는 집단.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 사실관계에 근거하지 않고 막연히 과거에 미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이 감격하는 사람들. 뭐니뭐니해도 현 상황에서는 미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상황인식... 이런 것들이 그런 개념을 만들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나라에는 미국에 관한 신화가 존재한다. 냉철한 계산에 의해서 미국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은 영원한 강국이고, 미국을 떠나서는 한국의 존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미국은 더 이상 우방이 아니라 제국의 이미지로 존재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긴박하게 변화하는 국제정세에서 가장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나는 지금의 단계에서 미국이 우리의 현실적인 우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실리주의적 이유에서의 요청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적인 반미나 비 논리적인 친미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또 미국을 대하는 시선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재의 일극체제에서 미국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주도하는 나라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미국이 없다고해서 이런 경향성이 바뀔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우리가 미국의 이미지에서 신화에서 벗겨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현실적인 미국의 모습을 파악하고,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미국을 대하는 것이 우리가 격동하는 오늘의 세계정세에서 몸을 일으키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100년전의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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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너는 자유다 -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난 낯선 땅에서 나를 다시 채우고 돌아오다, 개정판
손미나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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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오늘날의 삶은 점점 더 팍팍해져간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논하는 것이 무색하게 되기도 했다. 이제 술잔을 기울이며 "산다는 것의 깊고 깊은 의미를...."논하는 것은 친구들에게 기피의 대상이 되기 쉬운 일이다. 저마다가 힘든 삶을 살고 있기에, 가장 아픈 구석을 건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오늘날은 한 개인개인이 브랜드가 될 것을 요구한다. 그만큼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장 유명한 브랜드. 그것중의 하나가 아마 지상파 방송의 메이뉴스 앵크일 것이다. 그 자리를 스스로가 박차고 나간 사람이 있다. 그녀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이다. 방송사에 휴직계를 내고 뜬금없이 유학을 떠났다. 그것도 스페인으로!

스페인은 오늘날의 세상에서 주류국가가 아니다. 물론 우리나라와 비슷한 국력을 가지고 있고, EU의 중심국가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초강대국 미국의 주도하에서 중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오늘날의 세계 역학에서 별로 두드러진 나라가 되지는 못한다. 그런데 누구보다고 가장 명민한 지성으로 최고의 브랜드를 획득한 저자가 택한 곳이 왜 하필이면 스페인이었을까?

그것은 저자의 내면이 그 나라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강렬한 태양이 작열하는 곳, 매사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별로 상관하지 않고 그들만의 느긋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곳, 그러한 스페인의 분위기가 그와 대척점에 놓인 삶을 살아가던 저자에게 강렬한 매력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랬다. 스페인에는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 그러나 쉽게 얻을수 없는 것. 우리가 간절하게 원하지만 우리들 스스로가 금기시하고 있던 것. 자유. 그 그리운 숨결속에서 그녀는 숨쉬고 생활하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오랜동안 잊어버렸던 자유의 의미를 되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큰 소리로 외친다. "스페인. 너는 나에게 바로 자유의 의미로 다가오는구나!" 라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유명한 방송사의 앵커가 되는 길은 참으로 어려운 경쟁을 통과해야 하는 길이다. 저자는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무척 힘든 일을 이루어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가 희생해야 했던 것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 것일까. 우리는 늘 중얼거리지 않는가.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어..." 그러면서 우리의 억압된 자유를 정당화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녀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더욱 자유가 간절하게 그리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내면에서 그녀에게 소리치고 있는 그 어떤 비명을 외면하지 않았다. 자신의 내면에서 갈구하는 외침을 받아들였고, 그 요구가 이끄는대로 새로운 길을 떠났다. 그녀는 용감했었다. 그리고 그 용감한 도전이 그녀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어쩌면 자유는 스페인 그 자체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주류논리에서서 벗어나서 새로운 가치관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때, 그래서 살아간다는 것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닿게 될때, 그때 우리는 자유를 다시 되찾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저자에게 스페인은 그것을 깨닿게 해준 거울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자유를 가슴에 안고 다시 돌아온 그녀가 펼치는 자유에 대한 그리움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나 자신의 자유를 위한 길을 향해 어디쯤엔가 달려가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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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희망 유재현 온더로드 6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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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는 더 이상 체 게바라의 낭만으로만 이해 할수있는 나라가 아니다. 쿠바는 또한 '부에나 비스타 소시얼 클럽'의 구성진 열정을 통해서 들여다 볼만한 나라도 아니다. 그것들은 쿠바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하나 이지만, 쿠바는 무엇보다도 '현실'이다.

우리들의 하루 하루가 힘든 것처럼, 그들에게도 힘든 하루 하루가 있다. 우리의 내일이 꿈에 젖은 것처럼, 그들도 힘든 삶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발전을 향해 달음질 치는데 익숙하고, 그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의 꿈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가능한 선입견을 제거하고 쿠바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모든 전제를 없앤다는 것'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 저자는 사회주의 쿠바의 모습에 동의하고, 쿠바의 혁명의 순수성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저자는 자식이 속한 색깔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전혀 불손하게 비치지 않는다.

쿠바인들이 그러듯이 그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쿠바인의 실험이 성공하기를, 그리고 더 나은 삶을 획들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추구하던 보다 더 중여한 삶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기를 염원할 뿐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삶의 가치'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렇다. 이 책은 설교를 하는 책이 아니라,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과연 진정한 희망이란 무엇일까...

빈곤에서의 탈피? 환경농법의 창조? 국영농장의 부분적 해체? 그러나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끝까지 가슴에 안고 가는 화두는 '중단없는 혁명'이다. 저자는 말한다. '혁명은 박물관에 들어가는 순간 혁명이 아니다.' 쿠바에서 느낄수 있는 것은 혁명이란 피빛의 광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빈곤과 때로는 굴욕과 때로는 가난을 참으며, 보다 더 중요한 가치, 즉 사람의 사람됨. 사람의 진정한 자유. 인간성을 잃지 않는 사회제도의 유지... 그런 것들이 바로 희망일 것이라는 속삭임이다.

오늘날과 같은 속도감의 세계에서 쿠바를 바람직한 모델로 설정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가 오늘과 같은 환경착취적인 경제 발전을 언제까지나 계속 할수는 없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언젠가는 멈춰서게 될것이다. 미친듯한 발전의 역사는... 그리고 대안을 찾으려고 주변을 두리번 거릴때... 그곳에 쿠바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어쩌면 쿠바는 우리들 모두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삶의 희망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책의 곳곳에 가득히 담겨있는 아름다운 풍광과, 순수하고 편안해 보이는 삶들은 가난한 삶이라는 편견을 떼어내고 바라보면 아름다움의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쿠바에서 희망을, 느린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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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의 서
로버트 실버버그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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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이 있을까. 혹 그것이 만약 있다면...

책은 그렇게 시작한다. 앞길이 창창한 네 사람의 젊은 대학생들. 그들이 모였다. 영생이라는 뚱딴지 같은 것을 화두로 하여. 처음 영생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학문적인 호기심에서. 또 어떤 사람은 삶의 권태를 이기기 위해서. 그리고 어떤 이는 친구의 웃기는 모험을 비웃기 위해서... 그렇게 그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영생을 찾을 수 있다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책의 화법은 아주 독특하다. 줄거리는 번갈아 가며 등장하는 여행에 참여하는 네 사람의 내면적인 시각에 의해서만 쓰여진다. 전지적 외부자에 의한 스토리에 대한 개입은 전혀 없다. 오로지 여행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내면적 독백에 의해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런데 자칫 지루할 것 같은 이러한 화법이 놀랍도록 흥미진지하다.
 
영생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때문이 아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가의 놀랍도록 대단한 글재간때문이다. 그가 글을 이끌어가는 솜씨는 재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다. 놀랍도록 정확하고 세밀한 심리묘사의 능력이 고전에서 읽는 대가들의 그것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그래서 책은 SF라거나 판타지라는 장르문학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린다. 이 책이 다루는 소재의 특수성을 떠나서, 이 책이 가지는 주된 힘은 인간의 심리에 대한 묘사가 차지하기 때문이다. 정말 사람의 심리에 천착하는 저자의 인식수준과, 그 인식을 재료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솜씨는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이 진행되면서. 그리고 영생을 위해서 치루어야 하는 과정들이 진행되면서 내면적 진실에 대한 탐구는 점점 그 깊이를 더해 간다. 그리고 엄청난 반전이 따른다. 그 반전은 미스테리 소설에서 나오는 줄거리의 반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약할 수 있는지, 약하고 허약해 보이는 영혼이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판단은 유보된 채 소설이 끝난다. 영혼의 강약과 영혼의 순도의 질과의 상관성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남겨둔 채 책은 끝이난다. 그 여운... 그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가 아닐까. 책을 읽은 후에 남는 약간의 허전함. 그 카타르시스가 없는 허전함이야 말로 저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정한 감동의 반대가 아닐까...
 
독특한 형식의 책이 주는 메시지도 독특하다. 그토록 치열하게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를 하고도 마지막에 남기는 메시지가 없다는 점이.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 그것이 바로 저자가 남기는 선물이 아닐까. 영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가치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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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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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일련의 문화인류학적 저서들에서 많은 감동을 받고 있다. 금년 초부터 시작된 인류학적 주제에 관한 독서는 '문명과 야만' 이라는 책에서 시작되었다. 풍부한 사례를 들어가면서 인류가 큰 의미에서 차근히 문명의 발달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나의 믿음을 뒤흔든 그 책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그와 유사한 다른 좋은 책들이 없는가를 찾아나서기에 이른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역작 '총.균,쇠'를 마주칠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총.균.쇠'는 나의 좋은 벗이 몇년전 나에게 우정어린 권고로 읽어보기를 청한 책이었지만, 나의 지적인 게으름이 아직까지 그 책을 읽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문명과 야만'을 읽고 큰 감동을 받은 나는 곳바로 그 책에 관한 기억을 떠올렸고, 그 책은 나에게 엄청나게 큰 감동을 주었다.

'왜 아메리카 인디언은 백인들에게 무력하게 멸망해가야만 했던가?' 어린 시절 내가 서부극이나 '모히칸족의 최후'를 읽으면서 인디언들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느끼던 오래된 질문이었다. 사회적 정의의 부재나 부조리에 대한 나의 최초의 자각은 바로 '인디언들의 아픔'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주제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난, 내가 사는 그 시대가 바로 모순과 폭력의 시대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총.균.쇠'를 통해 엄청난 감동을 다시 한번 맛 본 나는 우연히 또 한번의 행운을 맡이하게 되었다. 얼마전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최신작인 이 책 '문명의 붕괴'가 따끈따끈한 신간으로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손에 쥐면 묵직하게 느껴지는 이 책의 무게는 부담이 아니라, 기쁨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책을 아끼기 위해 겉의 예쁜 종이커버를 벗겨내고, 안의 검은색 하드카버에 붉은 글씨로 소박하게 쓰여진 '문명의 붕괴'란 붉은 글씨를 읽으면서 내 마음이 얼마나 기뻣는지...

난 옛부터 정말 좋은 책은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 습관이 있다. 빨리 읽으면 몇일이 걸릴 이 책을 나는 한달을 넘게 걸려서 읽었다. 그만큼 한줄 한줄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었다는 뜻이다. 미국 몬태나주의 이야기를 지나서 이스트 섬의 이야기를 읽을때 즈음에 난 이미 이 책이 '총,균,쇠'에 못지 않은 또 하나의 필작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때쯤 이미 다음에 읽을 저자의 책 '제 3의 침팬치'를 주문하여 내 책상위에 쌓아두고 있었다.

'총.균.'쇠' '문명의 붕괴' '제 3의 침팬치' 이렇게 두께가 비슷한 세권의 책을 나란히 쌓아놓아 놓고 바라보는 나의 기쁨은 그야말로 독서의 즐거움 그 자체였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저녁은 나의 행복한 잔치의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만면에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독서에 푹빠져 지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도 행복해 하였다. 기쁨이란 그렇게 전염성이 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몰락에 관한' '문명의 붕괴에 관한'이야기가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인가라고 물을수는 있다. 맞다. 저자의 조심스러운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내 마음은 결코 낙관적이지는 않다. 난 저자보다 인생의 경험이 더 적어서인지, 저자보다 아픈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덜 경험해보아서인지, 지구적규모의 문명의 앞날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하다. 저자 스스로가 말하듯이 '문명의 몰락은 자연적인 조건도 문제이지만, 문제를 예견하고서도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책임이 더욱 큰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철저한 실리주의가 통용되는 듯한 국제사회의 질서는, 그러나 눈 앞의 근시안적인 이익만을 바라보는 철저하게 비이성적인 행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안다. 지금 세상을 구원할듯이 울려퍼지는 반 신자유주의 혹은 아래로 부터의 세계화를 외치는 움직임이 '시애틀 회담'을 무신시키고, 여세를 몰아 마침내 우루과이 라운드를 무산시킨데까지 이르렀지만, 세계는 우회하여 'FTA'라는 또 다른 이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관철시키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교토의정서는 표류하고, 세상에는 힘에 의한 폭력이 난무하고,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쓰레기로 채워지고 있다.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조심스러운 낙관주의'에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난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난 사실 책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저자도 진정한 낙관주의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에, 차마 비관적인 결론을 스스로가 내릴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악하여. 나의 지혜로는 세상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돌려 놓을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즐거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난 저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것 같기 때문이다. 저자는 스스로가 비관하는 세상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사과나무를 심는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선 나 또한 동일하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하는 것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오늘의 신문과 뉴스에 울분하고, 세상의 진실을 찾아 책이나 찾아다니는 문약한 일개 생활인일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그루의 나무가 베어질때에야 이스트 섬의 나무가 사라지듯이, 아주 작은 관목에 불과한 내가 서있어야 할 자리를 파악하고 제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작은 관목덤불 하나가 이스트 섬의 수명을 아주 짧은 한순간 더 연장할 수 있었듯이, 나와 내 후손들이 살아갈 이 세상을 작은 한 간이나마 더 지탱할 수 있게하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하루의 삶에 지친 내가 저녁시간을 독서로 마감하며 약간의 보람을 찾는 기쁨을 누리는 원천이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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